[주간조선] “아버지는 북극성 같은 존재였다”?화가 박수근 탄생 100년, 딸이 말하는 내 아버지
문화/조성관 편집위원
입력 : 2014.01.09 11:00 | 수정 : 2014.01.09 11:09
- 미8군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왼쪽에서 두 번째). /박수근미술관 제공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는 데 짧은 생애를 바친 화가 박수근(朴壽根·1914~ 1965). 오는 2월 21일은 박수근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1월 17일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에서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열린다.
박수근의 그림을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강변’ ‘빨래터’ ‘우물가’ ‘절구질하는 여인’ ‘애기 업은 소녀’ 등. 박수근의 그림을 볼 때마다 한국인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러나 기억 속에 애잔하게 남아있는 장면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1950~1960년대 도시와 농촌에서 흔히 보아온 풍경들. 그림의 주인공들은 모두 가난하지만 어딘가 눈물이 나도록 정겹다. 한국인이 박수근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다.
박수근은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4년 2월 21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에서 생(生)을 받았다. 지금에야 양구 가까이까지 고속도로가 뚫려 2시간이면 가지만 불과 1980년대에도 양구는 첩첩산중이었다. 비포장도로를 꼬불꼬불 멀미가 날 정도로 5~6시간 버스를 타야만 했다. 하물며 일제강점기 시절이야 더 말해 무엇할까.
2013년 마지막 날이던 지난 12월 31일, 기자는 양구면 정림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을 찾아갔다. 양구면에 들어서자 담벼락 여기저기에 박수근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양구는 시인 이해인도 태(胎)를 묻었지만 시각적으로 박수근의 고향이라는 사실이 먼저 다가왔다.
강원도 산간의 미술관인데도 관람객들이 쉼 없이 찾아왔다. 현재 박수근미술관에서는 지난 10월 25일부터 소장품특별전 ‘소박한, 진실한, 선한, 일상, 마음, 시선’을 열고 있다. 특별전은 오는 2월 9일까지 계속된다. 특별전을 천천히 감상하노라면 화가의 내면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미술관 학예연구사 엄선미씨는 “탄생일에는 간단한 기념식을 하고 본행사는 작고 주기인 5월 3일 시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엄선미씨는 “박수근 화백이 살거나 흔적을 남겼던 창신동, 전농동, 신세계백화점, 용산 미8군 등 6곳에 플라크를 설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수근은 부인 김복순과의 슬하에 6남매를 두었으나 유년기를 넘긴 자녀는 2남2녀였다. 현재는 큰딸 인숙과 막내아들 성남이 생존해 있다. 인숙씨는 박수근미술관 명예관장이다.
인숙씨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다. 미술교사를 거쳐 현재 인천에 살며 서양화가로 활동 중이다. 미술관에서 인숙씨와 통화를 했다. 그는 “마침 약속이 있어 서울에 올라와 있는데, 명동에서 잠깐 시간이 된다”고 했다. 기자는 양구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오후 7시 명동성당 앞에서 인숙씨를 만났다. 인숙씨가 건넨 명함에는 그림 한 점이 인쇄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박수근 화풍에 영향을 받은 그림이다. 성당 앞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 박수근 화백 탄생 100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따님의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아버지 탄생 100년을 맞이하니까 아버지와 생활했던 시절의 그리움이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고생만 했잖아요. 어머니도 아버지 내조를 하느라 고생만 하셨고요. 가난 속에서도 우리 가족은 심적으로 행복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가족을 모델로 그림도 그리고요. 비록 쌀밥은 못 먹었지만. 저는 지금도 누가 칼국수 사준다고 하면 안 먹어요.”
- 그게 무슨 말인가요.
“우리들은 그걸 ‘뚜더기국’이라고 했어요. 밀가루 반죽을 뜯어서 소금물에 넣어 끓여 먹는 거지요. 저는 어렸을 때 하도 뚜더기국을 많이 먹어서 지금도 누가 칼국수 사준다고 하면 안 먹어요. 그때 생각이 나서요.”
- 참 가슴 아픈 추억이군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살던 시간이 포근하고 정겨웠어요. 아버지는 자가용 한번 타보지 못하셨어요. 수세식 변소도 써본 일이 없어요. 옷도 남들이 입던 구호물자 같은 옷만 입으셨어요. 아버지께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싶은데, 그런 걸 못해 마음이 저려와요. 저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거든요.”
알려진 대로 가난한 박수근은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붓과 팔레트가 재산의 전부인 박수근이 이웃집 처녀 김복순과 결혼한 것은 1940년. 박수근이 1939년 김복순에 보낸 청혼 편지는 지금 읽어도 감동이다. 가난한 부부는 38도 이북에 있는 강원도 금성에서 신접 생활을 시작했다. 딸 인숙은 1944년 강원도 금성에서 났다. 인숙이 수도여사대(현 세종대) 미술과 2학년 시절인 1965년에 아버지가 사망했다.
- 아버지와 보낸 시간 중 가장 잊지 못하는 장면은 어떤 건가요.
“6·25전쟁이 났을 때 아버지가 금성에서 미술교사를 했어요. 아버지가 (인민군에) 잡히면 죽는다고 생각해 먼저 이남으로 내려가셨어요. 어머니는 38선 근처에서 기회를 엿보다 가족과 함께 극적으로 월남했어요. 수원의 수용소에서 지냈는데 어머니가 트럭에 몰래 숨어서 서울로 들어가 아버지를 만났어요. 그때 군 장교로 있는 외삼촌이 지프를 보내줘 우리 가족 모두가 창신동 집으로 가 아버지와 재회를 했어요. 아버지와 저녁에 집에서 자는데, 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꼭 껴안고 잤는지 숨을 못 쉴 정도였어요. 그땐 숨을 못 쉬어 답답하다고만 느꼈는데 내가 커보니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보고 싶어했으면 그랬을까 생각이 돼요.”
- 금성 시절 기억 남는 게 뭐가 있나요.
“오빠하고 냇가에 갔었는데 냇가의 바위를 돌로 내리치면 바위 밑에서 메기 같은 물고기들이 막 뛰쳐나왔어요. 오빠와 그걸 잡으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오빠가 뇌염에 걸려 마루에서 쓰러졌던 장면도 기억 나요. 전쟁 중에는 방공호에서 숨어지내는 일이 많았어요. 남쪽에서 북한을 폭격할 때 논두렁 밑에 납작 엎드려서 피했던 기억이 납니다.”
- 창신동 집과 전농동 집 중에서 어느 곳에 많은 추억이 있나요.
“그야 창신동 집이죠. 아버지와 우리 가족이 재회했는데 집이 없잖아요. 어떤 분이 창신동 집 한 칸을 지켜달라며 공짜로 내줬어요. 그 집에 살면서 아버지가 미군 PX에 다니며 초상화를 그려 돈을 버셨어요. 초상화를 그려 번 돈으로 집을 사셨고요. 옛날 동대문스케이트장 근처였어요. 아버지는 집만 봐도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행복하셨대요. 아버지는 하모니카를 참 잘 부셨어요.”
전쟁은 끝났지만 대한민국은 황폐했다. 화가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재 신세계백화점 자리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박수근의 호구지책이었다. 이 시절 가난한 화가를 한 처녀가 지켜보았다. 이 처녀는 작가가 되어 소설 ‘나목’에서 그를 부활시켰다. 처녀는 박완서. 박수근은 작품 ‘나목’에서 ‘옥희도’로 등장한다.
- ‘나목’을 읽고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아버지가 체격은 좋으셨지만 말수가 없어셨어요. 하루에 세 마디만 하시는 경우도 있었대요. 그렇게 부끄러움을 타는 분이었대요. 박완서 선생님 소개로 거기서 일하셨대요. 책에 보면 두 분이 함께 산보도 하셨던 것 같아요. 박완서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저와 인터뷰도 했어요. ‘나목’에 보면 아버지에게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셨던 것 같아요. 두 분은 인간적인 교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박완서씨를 만났을 때 소감이 어땠나요.
“참 대단하신 분인데 굉장히 소박하세요. 그때 아버지의 인간적인 매력과 능력을 꿰뚫어보신 거잖아요. 말도 유창하진 않지만 참 소박하게 정감 있게 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 서양화가로 활동하지만 여전히 ‘박수근의 딸’로 불리는 점이 부담스럽지 않나요.
“아버지의 그늘이 크다는 점은 인정하죠.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훌륭한 화가잖아요. 제 그림도 더 발전하고 아버지만큼 훌륭하게 살아야 하는데 하는 점에서는 부담이 되기도 해요. 아버지의 심성도 닮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서 안타깝지요. 그림도 아버지에게 물려받았어요. 정겨운 흙 같은, 고향의 노래 같은 점을 닮았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껴요. 아버지는 제게 북극성 같은 존재였어요. 힘들 때마다 아버지가 그리울 때가 많아요.”
박수근의 작품 중에는 ‘나무와 두 여인’이 있다. 박수근미술관에는 이 작품 옆에 소설 ‘나목’의 한 대목을 옮겨놓았다.
‘…옥희도, 나는 홀연히 옥희도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 오늘 박수근미술관을 처음 가봤는데 지나치게 크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아, 그런가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데. 군수님이 양구의 자랑인 아버지의 삶과 예술을 보여주기 위해 굉장한 열정을 갖고 아버지 마을을 조성한 것이죠. 저는 너무 좋거든요. 아버지의 품속이 넓은 것처럼 아버지의 삶을 통해 소박함과 사랑과 꿋꿋함을 보고 배우는 장소라고 생각했어요. 체험학습장도 있어야 하고 명상도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잖아요. 양구에서 박수근의 냄새가 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군수님이 정말 많이 노력하고 계세요.”
2005년과 2008년 박수근의 대표작 ‘빨래터’가 진위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다. 감정평가원의 진품 판정으로 논란은 수그러들었지만 이 논란은 그림이 재테크의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빚어진 슬픈 초상화였다.
- 수년 전 대표작 ‘빨래터’의 위작 시비에 휘말렸을 때 참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SBS에서 그렇게 몰아갔잖아요? 막내동생 성남 소유의 그림인데. 참 가슴이 아팠어요. 그때 연예인들이 우울증 걸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심정을 이해했어요. 감정협회가 감정하는 것이어서 저는 일부러 끼어들려 하지 않았어요.”
- 이런 때는 ‘박수근의 자녀’라는 게 좋은 것만도 아니네요.
“저한테 그림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제가 보면 다 가짜였어요. 6~8년 전이에요. 아버지 친구분이라면서 아버지한테 직접 선물받았다고 가져왔어요. 그런데 제가 보니까 가짜예요. 하지만 가짜라는 말은 못하고 느낌이 안 온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난감해 하더라고요. 그런 일이 많았어요. 몇 번 보아줬는데 상대가 낙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싫었어요. 그 후론 감정을 안 해요. 저한테 가져오는 거 다 가짜거든요.”
- 화가가 감정 전문가는 아닌데, 어떻게 진위를 알 수 있나요.
“안목이라기보단 느낌이지요. 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오잖아요. 제가 창신동 집에서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던 것을 다 봤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보면 알죠. 총각 시절 그렸던 그림은 잘 모르지만.”
- 유명화가의 딸이라는 게 이런 면도 있군요.
“그럼요. 너무너무 괴로운 거예요. 지금 한 장당 몇억원씩 팔리잖아요. 그렇게 팔려도 유가족에게 좋은 건 하나도 없거든요.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더 불쌍해 보여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유가족 도와주겠다고 해서 유작전을 열어 다 팔렸지요.”
- 개인적으로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나요.
“‘애기 업은 소녀’예요. 저를 모델로 했으니까요. 제가 업은 애기는 인애 아니면 성민일 거예요. 두 동생은 전부 저세상 사람이 되었어요. 옛날엔 다 누나들이 그렇게 동생들을 키웠잖아요.”
- 그 다음으로는 어떤 작품인가요.
“그건 ‘절구질하는 여인’이지요. 그게 어머니를 모델로 한 겁니다. 홍라희 여사가 소장하고 있는데, 보면 어마어마해요. 직접 보면 ‘어머’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와요.”
- 아버지의 그림을 몇 점이나 갖고 있나요.
“제가 결혼할 때는 그림을 한 점도 못 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나중에 어머니한테 그림 한 점을 받았지요. 아주 오래전에 그 그림을 팔아 우리 식구가 일어서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지금은 한 점도 없어요.”
- 인사아트센터에서 100년 특별전을 하는데요. 유족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시나요.
“그림을 봐달라고 해서 한번 연구사님과 갔었습니다. 이호재 대표님이 큰 역할을 했다는 걸 느꼈어요. 외국에까지 가서 작품을 가져온다는 게 쉽지 않거든요. 그동안 보지 못한 작품들이 나와 가슴이 떨리고 설렙니다. 인사아트센터에서는 다양한 그림을 감상할 수 있을 겁니다.”
- 가짜들이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진위를 확인했나요.
“제가 확실한 거는 점을 찍어줬어요. 느낌이 오는 거는 제가 표시를 해줬지요. 몇 개는 이상한 것도 있었지만 제가 뭐라고 할 순 없었지요. 그림이 다 오지 않아 나머지는 6일에 다시 보기로 했어요.”
가난한 천재 화가의 전형은 박수근과 이중섭이다. 두 사람은 부부 금실이 좋기로 유명하다.
- 어머니와 아버지가 금실이 좋았다는 얘기가 많은데 딸이 보기에는 어땠나요.
“저는 어머니가 정말 훌륭하셨다고 봐요. 요즘 젊은 화가 부부들 사는 모습 보면 어머니처럼 내조하는 분이 드물어요. 그림 하나 팔리면 쌀을 몇 가마 사서 다락에 얹어 놓고 알뜰하게 살림을 했어요. 바가지를 긁는다든가 정신적으로 괴롭히면 그림이 안 되잖아요. 동덕여중 다닐 때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자 아버지가 화집을 들고 팔러 나가셨는데, 그 뒷모습이 지금도 가슴에 찡해요. 그래서 등록금을 마련했지요. 가끔 말다툼하신 적도 있는데 등록금이 없을 때 그러셨지요. 크리스마스 날 과자와 사탕을 사다놓으셨어요. 창신교회 성가대가 문 앞에 와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곤 했는데 우리 가족은 과자와 사탕을 나눠주며 행복해 했지요.”
박수근은 화강암 같은 재질에 그림을 그렸다. 박수근 그림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일반인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박수근은 이렇게 썼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석불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며 조형화에 도입하고자 애쓰고 있다.’
박수근미술관의 전시관 외벽이 바로 화강암 석재를 사용했다. 멀리서 보면 미술관이 곧 박수근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박수근의 작품세계(1) 1940년 - 1950년대
[ 국내 경매 최고가 경신 - 시장의 여인들 1961년 ]
가로 62.4㎝, 세로 24.9㎝(변형 15호)의 가로로 긴 화폭에 여인 12명이 시장에 서거나 앉아 있는
이 작품은 박수근 특유의 거칠거칠한 화강암 질감이 잘 살아 있는 작품으로 평가돼 왔고 박수근
그림 중 인물이 가장 많이 등장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나물캐는 여인들 (1940년대) ]
[ 맷돌질하는 여인 (1940년대 후반) ]
[ 감 (1957) ]
[ 감자 (1952) ]
[ 강변 (1950년대) ]
[ 강변 (1950년대) ]
[ 굴비 (1950년대) ]
[ 굴비 (1956년) ]
[ 귀로 (1953) ]
[ 금강역사 (1954) ]
[ 기름장수 (1953) ]
[ 나무 (1959) ]
[ 나무와 두 여인 (1956) ]
[ 나물캐는 소녀들 (1950후반) ]
[ 노상 (1955) ]
[ 노상 (1950년대) ]
[ 노상 (1950년대) ]
[ 노상의 여인들 (1950) ]
스크랩] 한국근대회화 10인전 (박수근-작품세계) 그림 감상
2012/12/15 16:27
http://blog.naver.com/sdkim0125/120175798249
서민 화가 박수근의 '빨래터 여인'
서민의 화가 박수근의 작품 세계 / 수채화 모음
박수근(1914-1965)의 삶과 예술은 '서민의 화가'라고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는 곤궁한
진위공방 '빨래터' 갖고 있었던 존 릭스 美 현지 인터뷰 "54~56년 한국 근무때 교분 물감·캔버스 구해준 답례로 받아 형편 기울어 경매에 내놨지만 위작시비 가슴 아파 직접 나서" 새해 벽두부터 진위 공방에 휩싸였다가 감정위원회로부터 진품 판정을 받은 박수근(1914~1965)의 유화 '빨래터'는 원래 미국에 있었다. 원소장자였던 미국인 존 릭스(John Ricks·81)씨가 경매 관례를 깨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29일 그는 미국 켄터키주 모처에 있는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박수근의 장남 성남(61)씨, 서울옥션 관계자, 본지 기자를 함께 만났다. 하지만 "기자들이 나를 찾아내서 우리 집으로 오는 게 겁난다"며 인터뷰 지역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표지가 너덜너덜해진 낡은 여권 두 개를 꺼내 천천히 한 장씩 넘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1954년 1월부터 56년 12월까지 한국에 머물 때 쓰던 여권이에요. 평생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브라질, 유럽, 세계 곳곳을 다니며 살았는데, 나이가 들면 기억이 희미해져요. 그래서 여권을 들여다보면서 옛날 생각을 해요." 릭스씨는 당시 '헤닝슨 컴퍼니'라는 무역회사의 한국 지사장으로 근무하면서 박수근을 알게 됐다. 박수근이 1960년대에 미국인 컬렉터였던 마가렛 밀러 여사에게 쓴 편지 중에도 "존 릭스씨는 홍콩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 언급돼 있다. 50년대와 60년대에 박수근 그림을 샀던 사람은 대부분 미군이거나 전후 복구사업으로 한국에 머물던 외국인들이다. "우리 회사가 서울 반도호텔에 있었는데, 우리 사무실에서 일하던 조군실이라는 한국 군인이 어느 날 박수근을 데려와 소개해 줬어요. 저는 당시 일본과 한국 지사를 담당하고 있었고, 아내와 세 아이들은 일본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일본에 갔지요. 박수근은 제가 일본에 갈 때면 물감과 캔버스를 사다 달라고 부탁하곤 했어요." 박수근은 답례로 자신이 그린 그림을 선물로 주곤 했다. '빨래터'도 그 중 하나였다. "그가 사무실로 직접 들고 왔지요. 한국 근무 이후 홍콩, 싱가포르, 호주, 유럽 등 세계 곳곳에 근무하면서 늘 내 사무실에 박수근의 그림들을 걸어 두었어요. 보는 사람들마다 좋아했어요." 50년 동안 간직하고 있었지만 박수근의 그림이 비쌀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2004년 릭스씨의 아내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사위가 죽은 것을 계기로 모든 게 달라졌다. "그해는 우리 가족에게 매우 힘들었어요. 이듬해에 딸아이가 집안 살림 일부를 정리하기 위해 한 경매회사에 갔는데, 그곳의 도록(圖錄)에서 박수근의 작품이 84만2000달러에 팔린 것을 본 거예요. 딸아이가 제게 물었지요. "아빠, 우리 집에 이런 비슷한 그림들 있지 않아요?" 도록을 보고 저도 깜짝 놀랐어요. 우리 집보다 비싼 그림들이 우리 집 지하실에 있다니, 어떻게 해야 하나, 보험을 들어야 하나, 은행에 갖다 맡겨야 하나, 그러다가 변호사를 찾았습니다." 당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릭스씨는 변호사에게 '빨래터'를 포함해 5점의 작품을 판매해 달라고 맡겼다. 그 중 '빨래터'는 서울옥션에 출품됐고 낙찰가 45억2000만원으로 국내 경매 최고 기록을 세웠다. 릭스씨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내와 딸이 너무 어려워서 그의 그림들을 모두 팔았어요. 예전에 내가 박수근을 도왔는데, 지금 박수근이 나를 도왔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 미국과 유럽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얼마나 값진 것을 가졌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꽤 되리라 확신해요. 당시 반도호텔 안에 외국 회사가 많았기 때문에 박수근 그림을 산 외국인이 많았어요. 박수근은 말이 없는 젠틀맨이었어요. 늘 허름한 옷차림에 안경을 쓰고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지요." 존 릭스씨는 "빨래터" 위작 공방을 계기로 신분을 드러내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한국에서 위작 시비가 있었다는 것을 변호사를 통해 들었고, 제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터넷으로 한국의 뉴스를 보고 슬펐어요. 제가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아서요." "빨래터"가 위작이라고 주장한 측에서는 액자가 흰색인 것에도 의혹을 제기했다. 릭스씨는 이에 대해 "우리 딸이 1970년대에 "흰 벽에는 흰 액자가 어울린다"며 원래 액자에 흰 칠을 덧칠했다. 나는 깜짝 놀랐는데, 그림에는 손을 안 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내가 예전에 며느리한테 박수근 그림을 줬는데 며느리가 싫다고 안 가져갔다.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다"며 소리 내서 웃었다. 그는 반세기 뒤 한국 최고의 화가가 될 박수근을 어떻게 일찍 알아볼 수 있었을까? "전 그냥 박수근 그림이 소박하면서도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어서 좋았어요. 전 미술에 소질은 없지만 감동 받을 줄은 압니다. 그런데 많은 나라를 가봤지만, 미술관에 걸린 대가들의 그림을 보고 박수근 그림에서만큼 감동을 받지 못했어요. 전 박수근 그림의 독특한 표면이 특히 좋아요." 그는 "한국인들이 박수근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를 내가 안다. 전쟁 이후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했다. 눈에서 눈물이라도 떨어질 듯한 표정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지붕이 없는 집에 살고, 굶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이미 전쟁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지요. 박수근의 그림은 그런 모든 것을 담고 있어요." 박수근(1914~1965) 화백의 1950년대 후반 유화 '빨래터'(37×72㎝)가 22일 열린 제106회 근현대 및 고미술품 경매(서울옥션)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됐다. 불과 두 달 전 자신의 기록 25억원을 훌쩍 넘기며 한국 경매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근년 들어 박수근 작품들은 한국 미술시장의 활성화를 선도하면서 최고가 릴레이를 벌여왔다. '빨래'는 강가에서 나란히 빨래하는 여인 6명을 캔버스에 담은 작품이다. 이날 33억원에 경매가 시작돼 2000만~5000만원씩 높여 호가되다가 가볍게 45억원을 넘기며 전화 응찰자에게 낙찰됐다. 이 작품을 내놓은 사람은 80대의 미국인으로 1950~1960년대에 군수품 사업을 하며 한국을 드나들다 박수근을 알게 됐던 그의 후원자였다고 서울옥션측은 밝혔다. 산 사람은 국내 개인 컬렉터로 알려졌다. 종전 경매의 최고기록도 지난 3월 K옥션에서 25억원에 낙찰된 박수근의'시장의 사람들'(24.9×62.4㎝)이다. 박수근 경매가는 2001년 4억6000만원에 낙찰돼 관심을 끈 이후 5억원(2002), 9억원(2005), 10억4000만원(2006), 25억원(2007)으로 기록을 경신했다. 전문가들은 박수근의 그림이 1950~1960년대의 전형적인 우리 생활을 담아 현재 고가 미술품 구매자 세대의 정서에 잘 맞고, 동시대 다른 화가들이 서양미술사조 영향을 받은 것과 달리 독특한 마티에르(두꺼운 질감) 화풍을 추구한 것을 인기 비결로 설명한다. 시장에서 수급이 꾸준히 이뤄져 가격형성이 가능한 점도 박수근 불패의 비결이다. 김순응 K옥션 대표는“박수근은 가짜를 만들기도 어렵고 가짜는 표가 쉽게 나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안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부산공간화랑 신옥진 사장은 “그의 작품은 국제시장에서 거래가 되지 않지만 우리 정서에 너무나 잘 맞아 국내시장만으로도 충분한 화가다”라고 말했다. |
[출처] [스크랩] 한국근대회화 10인전 (박수근-작품세계) |작성자 강물
박수근 작품감상 자유로운계시판
박수근 연보
1914년 2월 21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의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
1932년 독학으로 선전입선
1932년 - 44년 평안남도청 근무, 평양에서 <주호회> 창립
1945년 금성여중 미술 교사
1952년 6.25 전쟁 중 월남
1953년 - 64년 <국전>에 출품하여 수회 특선
<국전> 추천 작가 및 심사위원 역임
195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서 미술전> 초대 출품
1958년 <한국회화전>(미국 뉴욕 월드 하우스 화랑) 초대 출품
1959년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작가전> 초대 출품
1965년 5월 6일 별세
1980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추서
1985년 20주기 기념전(현대화랑)
청년시절의 박수근(1930년대 후반)
우리에게 친숙하고 한국의 밀레라 불리우는 박수근님의 작품들중 우선 대표적인것만 요번기회에
올리고 그외 다수의 작품들은 연이어서,가능한 작품 시기별로 분류하여올릴 계획입니다.
그러면 작가의 예술적 성숙과정이 한눈에 들어와서 보는 재미를 더 할것 같습니다.
박수근님은 1914년 강원도 양구(楊口) 에서 태어나셔서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여
화강암 마티에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완성 하였습니다.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우면서 한국적 주제를 서민적 감각으로 다룬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겠죠.
그는 살아생전에는 전쟁 통에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을 하고
부두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겨우 꾸리는등 많은 고생을 했지만,천재적 예술가의 생애에서 흔히
보여지듯 사후인 현재 그의 작품들은 한국 화단을 대표하며 최고가에 거래 되고 있으며
외국에서도 대단한 호평을 받고있답니다.
노상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
박수근의 12세 무렵 소망이라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2>이란 책을 보면 화가.
박수근을 '선한 이웃을 그린 한국의 밀레'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참으로 그럴 듯한 말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부족한 말이다.
노상의 사람들
그 이유는 화풍이 그와 달라서만이 아니라 '박수근' 그 자신 역시
몹시도 선한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박수근은 12세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도 커서 저렇게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골목안
그래서인지 박수근의 그림들을 보면 어딘가에서 할아버지의 넓고 아득한 품에 안겨
잠든 채 집까지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인생이 너무나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던
적도 여러번이었음에도 그의 그림에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품격과 함께 천진난만한
손주의 목소리가 듬뿍듬뿍 묻어나는 느낌을 주체할 수가 없다.
春日
그의 젊은 시절 생활상 과 평소 가족 과의 인간적 관계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편지 한통을 먼저 소개하면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 편지를 보내오니 용서하시고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부농가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고운 옷에 갓신
만 신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내가 일곱살 되던 해 아버지의 광산 사업이 실패하고 물에
전답이 떠내려가서 우리집은 그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나무와 두 여인
5세 때 서당에 다녔고 7세 때 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나는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유방암으로 오래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셔서 동생들과 아버지를 어머니 대신
돌봐야 했기에 고학이라도 해서 미술학교를 다니려 하던 꿈은 그만 깨져 버렸습니다.
나무와 여인
나는 춘천과 서울로 다니면서 그림공부를 독학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섯번 선전에 입선을 했습니다. 선전(鮮展)에 처음 처녀 입선한 것은
내가 18세 때였습니다.
아기업은 소녀
지금까지 춘천에서 그림공부를 하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오니 부모님께서 윗집
처녀에게 장가들라고 권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번 거절했습니다.
내가 더 성공해서 결혼할 생각이었으나 부모님께서 하도 권하셔서 나는 당신에
대해 내동생 원근(元根)이와 동네 사람들에게 알아보았습니다.
소녀
일전에 당신이 우리 어머니와 빨래하러 같이 갔을 때
어머니 점심을 가져간다는 핑계로 빨래터에 가서 당신을
자세히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려고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일하는 여인
나는 그림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론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굴비
귀여운 당신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복숭아
나는 나혼자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나의 이 숨김없는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도 당신의 심정을 솔직히
적어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귀로
이 연애편지는 1939년 겨울 춘천에서 고향 양구로 돌아온 그가 자신의 아내가 된
김복순(金福順) 여사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연애편지는 처녀의 아버지에게
발각되고 처녀는 춘천의 의사집과 급하게 혼례를 추진하게 된다.
이에 낙담한 그는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고,
이에 놀란 박수근의 부친은 그 처녀의 집에 가서 담판을 짓게 된다.
김복순 여사의 부친은 혼례를 승낙하며 소리내어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 화가 박수근은 김복순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녀는 박수근의 처음이며 마지막인 유일한 모델이었고,
사랑이었고 생애의 모든 것이었다.
귀로
박수근의 그림은 거의 독학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앞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의 부친은 광산사업을 실패하고 잇따라 전답마저 잃어 그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도록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만큼은 보통학교 시절부터 이미 인정을
받아 일본인 교장 선생은 소년 박수근의 집까지 찾아와서 그에게 그림 연필과
도화지를 사주며 열심히 그림을 그리라고 당부할 정도였다고 한다.
마을풍경
그의 16세 때 일본인 교장 선생은 격려와 함께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해 볼 것을 그에게 권유하였고, 그는 1932년 11회 선전에서 <봄이 오다>로
입선의 영광을 안게 된다. 그러나 그무렵 그의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몸져눕게
되고 결국 그의 나이 21세 때(1935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나물캐는여인
박수근은 이에 크게 낙담하여 실의에 빠지지만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도
미술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간신히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할 무렵
그는 위아랫집으로 살던 김복순 여사와 결혼한다. 신혼초에 직장 생활을 위해
본의아니게 별거생활을 하게 된 두 사람은 매일같이 편지를 써서 보냈다.
맷돌질 하는 여인
이 두 사람의 편지 왕래는 우체부가 투덜댈 정도였다. 남편 박수근은 평양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편지에 그곳이 몹시 춥다고 쓰자 아내는 자신의 털실 목도리를
풀어 남편의 텔 스웨터를 짜려고 했으나 실이 모자라 조끼를 짜보냈고 남편은
그에 감격하여 다시 편지를 보냈다.
모란
화가 박수근의 생애를 살펴보면 문득문득 이 분의 살아온 행적들이 나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그도 아니면 가까운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선한 이웃
어른의 모습들과 중첩됨을 느낄 수 있다. 가족을 건사하고, 가난 속에서도
아이들이 구김살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신경 써주는 자상한 아버지.
안으로는 세상의 모든 풍상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막아주면서 정작 당신 자신은
바깥 세상의 온갖 풍상들을 몸으로 겪어내는 아버지의 모습.
풍경
박수근 세대는 세 차례의 전쟁을 겪은 세대이다.
어려서는 식민치하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궁핍을, 해방 이후에는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해야 했고, 나중에 나이 들어서는 그들의 자식이
베트남 전쟁이란 외국의 전쟁에 파병되는 경험을 했다.
초가마을
실제로 박수근의 자식이 월남전에 파병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연배 세대가 경험한
세 차례의 전쟁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겪어내야 했을 무수한
상처들 중 가장 두드러진 체험이였을 것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박수근은 동생 동근을 병으로 잃고, 전쟁이 격화되면서 미군의 폭격이 평양에
이르자 1944년엔 자신을 제외한 아내와 어린 남매를 금성의 본가로 내려보낸다.
그들 가족이 전쟁으로 인해 맞이하는 첫 번째 이산이었다. 해방된 후인
1948년엔 맏아들인 '성소'를 '뇌염'으로 잃고 만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전쟁이 일어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수근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월남하던 중 다시 가족과 뿔뿔이 헤어지는 이산의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혼란 속에 그의 셋째 아들 '성인'이 죽는다.
박수근의 많은 작품에서 여성은 일하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지고 있는데
반해서 남성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있고, 웅크린 듯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상처받은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추측된다.
강변
☆박수근의 독특한 마티에르 기법에 대하여
화가는 화강암의 질감과 색조를 무척 좋아 했던것 같다.그래서 의도적으로 재현하려고
노력했는데 그의 돌에 대한 관심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탑, 석불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며 이것을 조형화에 도입코자 애쓰고 있다"고 했다.
귀가
그리하여 그는 오래된 이끼낀 듯한 화강암의 질감을 연상케 하는 마티에르를 창안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상의 평면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하게 된 것이다.
(「박수근」열화당)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화가의 아호는 미석(美石)으로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돌이다. 조선미전 도록에 한 번 실린 적이 있을 뿐 별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돌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림 그리는 소녀들
※박수근의 화강암 질감표현 과정
이러한 화강석의 질감을 내기 위해 화가는 여러 번의 힘든 과정을 거쳤는데,
윤범모 씨가 이러한 과정을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씨의 증언을 기초로 분석하였다.
<박수근의 예술세계와 민족미의 구현>이라는 논문에서 이러한 제작과정을 분석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화
첫째, 캔버스의 바닥 면에 기름을 섞지 않고 뻑뻑한 체로 물감을 칠한다.
둘째, 캔버스의 결을 따라 가로 세로를 번갈아 가며 제소를 바르지 않은
마대로된 캔버스에 올의 우둘투둘한 요철에 의해 질감이
나타날 때까지 전체적으로 칠한다.
이 때 어두운 색깔로 10~15회 바탕칠을 반복한다.
셋째, 반복적으로 칠해진 물감은 큰 덩어리를 이루면서 마티에르(질감)을
형성하는데 마른 후에 나이프로 크게 뭉쳐진 부분을 긁어냄으로써
본래의 고유색이 마모된 상태로 남는다.
넷째, 화강암의 깊이 있고 묵직함을 표현하기 위해 암갈색으로 반복적으로
붓질을 하여 바탕 처리를 한다.
다섯째, 그렇게 된 바탕 위에 선으로 소재를 그리고 색을 칠한다.
여섯째, 마티엘 간의 부조화 부분은 十자 모양의 붓질을 다시 하면서 마무리한다.
들길
시장
그는 실제로 화강석을 옆에다 두고 그 질감을 관찰해 가며 작품 속에 이를 재현해
보고자 노력했는데 그가 이처럼 화강암에 애정을 가진 것은 한국의 야산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띄는 돌이며 수많은 조각이나 암각화의 재료로써 민족적정서
를 담고있는 소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귀한 대리석도 아닌 화강암이라는 흔한
돌멩이는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소박한 모습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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