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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4년 1월 11일 토요일 [(백) 주님 공현 후 토요일] 복음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2014년 1월 11일 토요일 [(백) 주님 공현 후 토요일]   

 

말슴의 초대

요한의 첫째 서간의 마지막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참하느님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셨음을 상기시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다. 우리는 그분 안에 있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고 계신다고 말하자, 요한은 자신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하며 예수님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고 말한다(복음).

제1독서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14-21

복음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23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24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25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26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27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3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영원한 생명이시며 참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있는 이해력은 분명 하늘에서 온 지혜를 말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자랑하는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우는 이들에게 따뜻한 빛처럼 다가오는 깨달음일 것입니다.
중세의 신비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그의 책 『신적 위로의 책』에서 사물을 비움으로써 하느님에 관한 참된 인식을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가득 차려면 비워라. 도달하기 위해서는 뒤로 물러나라. 영혼이 더욱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더욱 벗어나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더욱 적게 사물을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하느님이 아닌 모든 사물이 비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순수하게 하느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앞서, 그리고 더욱 잘 알아본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마침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오셨음에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게 된 지혜가 어디서 왔는지를 그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자신을 철저하게 비움으로써 비로소 주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종교와 신학에 대한, 우주의 이치와 기원에 대한 지적인 욕구에 넘친 학자와 현인은 지난날도 오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러한 지식욕으로 밝혀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을 비우고 그 안에 주님을 채우고자 하는 겸손한 신앙인에게 당신을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판교 성 프란치스코 성당 정면

 


 

2014-01-11 오전 8:13:21추천수9반대수1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1월 11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The one who has the bride is the bridegroom;
the best man, who stands and listens for him,
rejoices greatly at the bridegroom’s voice.
So this joy of mine has been made complete.
He must increase; I must decrease
(Jn.3,29-30)
 
 
제1독서 1요한 5,14-21
복음 요한 3,22-30
 

저는 고등학교 때 아주 우연한 기회에 기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니 기타를 쳐야만 하는 상황이었지요. 당시 성탄 예술제 때에 성당의 고등부 학생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Sing-Out”이었습니다.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크게 부르고 동시에 정확하게 동작을 맞추면서 춤을 추는 공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가장 큰 문제가 몸치라는 것이지요. 동작을 제대로 따라하지를 못하니 항상 틀리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노래와 동작을 배우면서 계속해서 혼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저한테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무엇인가를 선택을 해야만 했지요. 첫째는 ‘Sing-Out’ 공연에서 아예 빠지는 것, 둘째는 기타를 배워서 이 공연의 기타 반주를 맡는 것이었습니다.

남들 다 하는 공연에서 빠질 수는 없어서, 정말로 열심히 기타를 배우고 연습했습니다. 그때가 방학 때였는데,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는 기타만 쳤습니다. 그리고 기타를 전혀 알지 못했던 제가 드디어 기타 반주를 할 수 있게 되었지요.

벌써 거의 30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연습했던 곡들을 지금도 그냥 저절로 연주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저의 손이 기타 줄을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 수백 번을 연습했던 곡이라서 그런지 지금은 눈으로 악보를 읽거나 머리로 악보를 떠올리지 않아도 그 곡이 저절로 제 손을 통해 재생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는 손이 굳어서 종종 이상한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30년 전에 배우고 연습했던 곡들을 지금도 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만 합니다.

그만큼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것은 또 다른 기억을 내 몸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 역시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러한 노력은 전혀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욕심만을 또 자신만이 중심이 되려는 이기심만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을 준비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세례자 요한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의 몸으로 보여주었던 금욕적인 생활과 힘이 있는 말씀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혹시 이 분이 우리가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스스로를 높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알고 있었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는 겸손 가득한 말씀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나 묵상 중에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일상의 삶 안에서는 내 자신이 스스로 주인 행사를 하려고 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은 작아지고, 자신은 커져야만 한다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것을 몸 스스로가 기억할 수 있도록 더욱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 대부분이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프랑수아 를로르).

 
세례자 요한이 갇혀있던 감옥이 있었고 순교하셨던 마케루스 요새입니다.

 

 
양보다 질일까?(‘행복한 동행’ 중에서)

예전에 보았던 어떤 잡지에 나온 기사 내용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이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봅니다.

한 도예 수업 첫날, 강사가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교실을 반으로 나눠 왼편에 앉은 학생은 ‘작품의 수’로, 오른편에 앉은 학생은 ‘작품의 질’로 점수를 매기겠다고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첫 번째 그룹의 경우 수업 마지막 날 저울을 가지고 와서 완성한 작품의 총 무게가 20Kg을 넘으면 A, 18Kg이 넘으면 B... 이런 식으로 점수를 매긴다. 두 번째 그룹의 경우 단 하나의 작품만 완성하면 그것으로 점수를 매긴다.

채점 당일, 흥미로운 결과가 나타났다. 가장 완성도가 높고 훌륭한 작품은 모두 양으로 점수를 매긴 첫 번째 그룹에서 나온 것이다. 이들이 실수에서 교훈을 얻으며 점점 나은 작품을 만드는 동안, 두 번째 그룹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계획만 세웠다. 그 결과 그들은 평범한 작품 이상의 결실을 얻지 못했다.

이는 양과 질이 함께 올 때가 많다는 사실을 상기해 준다. 양을 위해 질을, 질을 위해 양을 포기하지 마라. 두 가지는 똑같이 중요하며,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양이라는 것은 바로 노력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양을 채우기 위해 그만큼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노력이 질의 향상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노력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주님을 아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저절로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친구를 사귈 때, ‘오늘부터 사귀자’라고 말을 하자마자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고 만남을 가져야 가까운 사이,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계속해서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수많은 노력을 통해 주님과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에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양과 질은 함께 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종교와 신학에 대한, 우주의 이치와 기원에 대한 지적인 욕구에 넘친 학자와 현인은 지난날도 오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러한 지식욕으로 밝혀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을 비우고 그 안에 주님을 채우고자 하는 겸손한 신앙인에게 당신을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출처]매일미사  

 

 

아프리카 여러 국가 중에서도 가장 낙후된 국가로 파견된 지 어언 사반세기가 넘은 수녀님이 한분 계십니다. ‘선교 정신’ ‘선교 영성’이 얼마나 제대로인지 제가 참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선교가 무엇인가?’ 생각했을 때, 물론 선교지 백성들이 처한 열악한 현세적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물질적 투자도 아주 중요한 측면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측면은 영적인 것이며, 신앙적인 것이며, 그들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인간 세상에 육화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한 선교사는 선교지에 육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저하게 그곳 백성들과 동화되고 그 문화에 토착화하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수녀님에게 물질적 투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들 곁에 묵묵히 계셔주는 것으로 만족하셨습니다. 그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함께 나누며 동고동락하는 것, 그들의 일원이 되고 그들이 가족이 되어 주는 것만이 수녀님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선교지의 비참한 실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일언반구 한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꼭 좀 도와달라고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들을 끝까지 떠나지 않고 한결 같이 함께 계셨습니다.

 

    수도자로서 한국에서 수도공동체의 한 회원으로서 열심히 사셨듯이 그곳에 설립된 수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들과 보조를 맞춰가며 청빈하게, 그리고 그곳 장상에게 순명하며 그렇게 아름다운 선교사로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처음에는 5~6년에 한번, 최근에야 3~4년에 한번 본국휴가차 한국에 들르실 때도 참 선교사로서의 태도는 한결같았습니다.

 

    모금활동에 열을 올리지도 않았습니다. 여기 저기 여행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지난 선교지에서의 생활이 소홀함은 없었는지, 수도자로서의 삶이 뒤틀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며 피정에 전념하셨습니다. 침묵 속에 재충전하시며 선교지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맑은 눈망울의 형제자매들을 한명 한 명 떠올리며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선교지의 구체적인 현실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이고도 물질적 공세만을 최고로 여기는 선교방식을 깊이 돌아보게 하는 선교사 수녀님입니다.[출처]양치기신부님의 말씀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