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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성지·순교자·성인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탐방] 충북 음성 - 한국의 에덴동산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 임 가밀로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충북 음성 하면 '꽃동네'를 떠올릴만큼 복지관련 지역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수도권과 비교적 가까운 중부의 그 지역적인 넓이만큼 기업들도 많이 들어와 살기 좋은 자족도시로 손색이 없다. '꽃동네 사랑의 연수원'은 사랑의 결핍으로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설립되었다고 한다.

ⓒ자료사진 '매괴'라고도 불리는 '해당화'
음성 지역의 '무극, 생극, 금왕' 등등의 지명은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지명같아 지역을 지날 때면 군웅할거 시대에 고수의 검객이 하늘을 날고 장풍을 쓸 것 같아 바짝 긴장감이 들었다. 요괴도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았다.ㅎㅎ 헌데 지명 못지않게 지역민들에게 상징적인 말이 있으니 바로 '매괴(玫瑰)'라는 것. 그들에게 매괴라는 것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가슴 속 유토피아같은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이상'이다.

지명과 종합해 본다면 동양적 '에덴동산'의 탄생을 예고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천주교와 깊은 연관을 맺은 지역으로 돼 있었다. 그렇다면 이미 4년전 '서울포스트'가 고건 전 총리의 실용정책연대와 함께 연구해 본 중부권에 국가적인 프로젝트 '한국판 디즈니랜드'를 유치한다면 바로 이 지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가능해지리라.

※ 매괴(玫瑰)(보통명사) : 묵주(默珠) 또는 로사리오는 라틴어로 장미 화관을 뜻하는 '로사리우스'(Rosarius)에서 유래한 말로 가장 보편적이며 전통적인 가톨릭 신심이다. (또는 1. 중국 남방에서 나는 붉은빛의 돌, 2. 해당화의 뿌리와 껍질에서 빼낸 물감, 3. 식물)

꽃으로는 (장미, 찔레에 가까운) 해당화(海棠花, Rugosa rose, 해당나무, 해당과, 필두화, 수화, 매괴화, 때찔레, 매괴, 월계, 해당)와 관련돼 있다. 해당화는 장미과에 딸린 낙엽 관목으로 키는 1~1.5m 가량이고, 갈색 가시가 많이 나 있다. 잎은 깃 모양의 겹잎으로,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5~7월에 향기가 짙은 붉은색 또는 흰색 꽃이 피며 꽃에 방향성 정유(예를 들면 페닐에틸알코올·벤질알코올·제라니올·벤조산)가 많아 향수 원료로 쓰고 열매는 약용하거나 식용한다.


▶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감곡성당, 매괴성당, 감곡매괴성당, 매괴의 성모 감곡 천주교회(구 장호원성당)

(자료는 웹상 글과 매괴성당 www.maegoe.com 사진 등을 참고했습니다. - 편집자)

▲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양기용 서울포스트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忠北 陰城郡 甘谷面 旺場里)에 있는 감곡성당은 충북에 최초로 설립된 성당으로, 본래 1894년 봄에 소신학교가 자리잡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소재 부엉골(부흥골)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전교하던 '임 가밀로'(Bouillon Camillus, 부이용, 한국명: 임가미任加彌, 1869.12.19-1947.10.25) 신부가 본당 위치로 적당치 않음을 알고 장소를 물색하던 중, 1896년 5월 매산 언덕 밑의 109칸 짜리 기와집과 터를 매입하여 그해 9월 17일 부엉골을 떠나 감곡으로 본당을 이전하고 본당설정 초대 신부로 부임하였다.

그 집은 임오군란때 명성황후가 일시 피신해 있던 명성황후 6촌 오빠인 충주 목사인 민응식(閔應植, 귀양살이 중 행불)의 집으로써 처음 10만냥을 호가하다가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의 시해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감곡도 의병들이 민응식의 집을 본부로 삼아 의병을 일으키자 일본군이 급습하여 대저택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임 신부는 8백 60냥으로 집터와 일대의 토지를 구입하였다.

처음 '매괴의 동산'으로 부르고 성당과 학교를 지어 성당이름을 장호원성당, 매괴소학교(장호원제일공민학교가 있었음으로)로 이름지었으나 이후 일제가 경기 장호원에 성당을 지어 장호원성당이라고 하자, 충북 장호원(감곡)에 있는 이 '장호원성당'을 '감곡성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러한 사연을 알고있는 고향사람들은 '감곡성당'을 '매괴성당'으로 부르고 있으며 현재는 순교성지로 지정받아 순례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명동성당의 축소판과 같은 인상을 주는 성당은 1928년 착공, 1930년 준공됨.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시자레(Chizallet)신부가 설계하고 공사는 중국인들이 하였다. 길이 40m, 넓이 15m, 종탑높이 36.5m가 넘는 현재의 고딕식 붉은 벽돌조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1943년 7월 임 신부가 연합국인 프랑스인이라는 이유로 서울 용산신학교에 연금하고 기도장소에 신사터를 닦으려다 실패했다고 한다. 광복 후 임 신부는 다시 부임 전교 활동을 하다가 1947년 10월 25일 51년간 한국에서 봉사하다 선종했다.

1953년 메리놀 외방전교회에서 관할하는 충북에 감목(監牧) 대리 구가 설정됨으로써 파지(James v, Pardy, 巴)신부가 9월 메리놀회 신부로는 처음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1958년 청주대목구설정이 있은 후 본당 주임이시던 파 야고버 신부가 주교로 성성되어 제1대 청주 교구장이 되었다.

그 후 메리놀회 소속 미국 신부들이 전교 및 사목 활동을 하다 1970년 정진석(鄭鎭奭)니꼴라오 주교가 2대 청주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성성식을 가짐으로써 교구사목권이 명실공히 한국인 주교가 활동하는 자치교구가 되어 1970년대부터 한국인 신부들이 전교와 사목 활동을 하게 되었다.

'임 가밀로' 신부의 3번 째 성당으로 성당이 산 중턱에 자리하여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릴뿐만 아니라 건축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건물이라 충청북도에서는 서양식 건물로는 최초로 1996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88호로 지정하였다. 이 성당은 남양성모성지에 이어서 우리나라 두 번째의 성모순례지.

 

감곡본당은 1896년 설립되어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초대 본당 임가밀로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93년 서품후 받은후 바로 입국하여
그다음해인1894년 첫 본당으로 유서 깊은 교우촌,신학당이 있었던 여주 부엉골에 부임하게 된다.


하지만 본당 사목지가 북쪽끝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산지부락 이어서 본당 이전을 생각 하던중 사목 방문차
여주를 지나 장호원에 이르러 산밑에 대궐같은 집을 보고 이곳이 본당 사목지로서 가장 적합 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그즉시 임가밀로 신부는 "성모님 만일 저 대궐같은 집과 산을 저의 소유로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주보가 매괴 성모님이 되실 것입니다."
라고 기도 하였으며,부엉골로 돌아가서
매괴 성모님께 끊임없이 청하였다.
당시 대궐같은 집은 명성황후의 육촌 오빠인 민응식의 집이었고1882년임오군란때 명성황후가 피신왔던
곳이기도 하다. 1896년 5월 성모성월에 그 모든 집터와 산을 매입,매괴성월인 10월7일 본당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결국 임가밀로 신부가 처음에 기도한대로 감곡본당을 성모님께 봉헌하여
이곳이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이 된 것이다.

 

 

 

 

 

그 외

1 개요

한국 천주교의 순례지 중 한 곳으로, 충청북도 감곡에 위치했으며 본당은 감곡성당. 남양성모성지와 더불어 성모성지로 이름이 높다. 다만 이곳은 엄밀히 말해 공식적으로는 아직 순례지이며 한 등급 위인 성지는 아니다. 하지만 인지도 자체는 성지 급. 매괴(玫瑰)는 로사리오중국식 표현이다.

2 유래

감곡본당은 1896년 설립되어 100년이 넘는 의외로 꽤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초대 본당 주임 신부프랑스 출신의 임 가밀로 신부로, 초기 한국 천주교회와 관련이 깊은 파리외방전교회[1] 소속. 1893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바로 입국하여 그 다음해인 1894년 첫 본당으로 유서 깊은 교우촌, 신학당이 있었던 여주 부엉골에 부임하게 된다.

하지만 성당이 사목지의 북쪽 끝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산지 부락이어서 본당 이전을 생각하던 중, 사목 방문차 여주를 지나 장호원에 이르러 산 밑에 대궐 같은 집을 보게 되었다. 임 가밀로 신부는 이곳이 성당을 세우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리고 임 가밀로 신부는 "성모님, 만일 저 대궐 같은 집과 산을 저의 소유로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주보가 매괴 성모님이 되실 것입니다."라고 기도하였으며, 부엉골로 돌아가서 매괴 성모님께 끊임없이 청하였다.

문제는 그 대궐 같은 집은 명성황후 민씨육촌 오빠인 민응식의 집이었다는 것. 1882년 임오군란명성황후가 피신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1896년 5월 성모성월에 그 모든 집터와 산을 매입, 묵주기도 성월인 10월 7일 본당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3 임 가밀로 신부

초대 본당 주임이었으며 51년 동안 한국 땅에서 생활하며 어머니가 선종했을 때도 고향으로 가지 않고 열정적으로 사목했던 임 가밀로 신부는, 루르드에서 조금 떨어진 타브르 교구 출신의 신부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루르드를 자주 방문하며 독실한 성모신심으로 신앙을 키웠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다음 해에 바로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발령이 나기 전 오지[2]로 가는 자신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가르멜 봉쇄 수녀원으로 가서 기도했는데, 그 때 소화(小花)[3] 데레사 수녀와 만나 영적 남매 결연을 맺었다고 한다. 이는 꾸준히 이어져, 소화 데레사 수녀가 24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하고 성녀로 시성된 후, 소화 데레사 성녀의 성상을 감곡 성당 내에 모시기도 했으며 그 성상은 지금도 감곡성당 내에 있다.

먼 이국 땅으로 가는 아들을 위해, 임 가밀로 신부의 어머니는 선물로 기적의 패[4]를 한 보따리 안겨주며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임 가밀로 신부는 프랑스에서 직접 제작한 루르드의 성모상과 기적의 패를 한 보따리 들고 조선으로 입국했다.

부임하고 신자들에게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라는 명언을 했다.

전술한 것처럼 여주 부엉골에 부임한 임 가밀로 신부는 민응식의 집을 보고 성당을 세울 결심을 하지만, 당시 권력과 부를 손아귀에 쥔 민응식은 상상도 못할 가격을 불렀다.[5] 이에 돈이 없는(…) 임 가밀로 신부는 "저 땅에 성당을 세우게 해서 당신께 봉헌하게 해 주십시오!!"라며 성모님에게 청하면서 밤에 몰래 민응식의 집 주변에 기적의 패를 묻었다고 한다(…). 기적의 지뢰 결국 여러 사건이 일어나며 민응식은 임 가밀로 신부에게 땅을 팔게 되었고, 이것은 거래문서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땅을 얻어 신이 난(…) 임 가밀로 신부는 즉시 성당을 지었다. 이 감곡성당 대성전은 명동성당과 똑같이 지으려고 했으나, 중간에 일본인들이 자재를 빼돌려서 훨씬 작은 모습이 되었다. 마치 명동성당의 자식 같은 느낌으로, 외양은 똑같지만 크기는 아담하다.

임 가밀로 신부의 독문무공이자 절세신공(…)인 기적의 패 땅에 심기는 이후 일제가 성당 뒷동산에 강제로 신사를 세우려고 하던 때에도 발휘되는데, 일제의 만행을 본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자 임 가밀로 신부는 "당신께서 주셔서 성당을 지어 봉헌한 거룩한 땅이니, 당신께서 지켜 주십시오!!"라고 하며 징징거리고 또 밤에 몰래 신사 주변에 기적의 패를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후 신사 공사만 하려 하면 야생동물들이 떼거지로 나타나 방해하거나, 억수같은 비가 내리거나, 인부의 팔ㆍ다리ㆍ손가락(…) 등이 부러지는 안전사고들까지 겹쳐 공사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신사 공사는 철회된다.

복지부동의 표본을 보여주던 일제강점기천주교에서도 임 가밀로 신부는 핍박받는 조선인들을 위해 여러모로 애를 썼고, 이에 서대문형무소에도 3번이나 수감되는(그리고 임 가밀로 신부 본인은 자랑스러워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명목상 프랑스일본이 동맹이었기에 그 이상의 처분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더 이상 프랑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일제는, 눈엣가시 같은 임 가밀로 신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죽어라 요놈!!! 사형 선고를 받은 임 가밀로 신부는 마지막으로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를 드리고 죽게 해 주시오."고 말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져 임 가밀로 신부는 칼을 찬 일본 순사들과 함께 감곡 성당으로 돌아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다. 미사가 끝나고 엉엉 우는 신자들 앞에서 일본 순사들이 칼을 빼들었는데… 돌연 성당 문이 벌컥 열리며 동네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신부님!! 사셨습니다!! 조선이 해방되었어요!!!
 
성모 승천 대축일이 포인트. 임 가밀로 신부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게 해 달라고 한 날이 바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이자 성모승천대축일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영화가 따로 없다. 흠좀무 그런데 미사 끝나고 성당 문 열고 들어왔다던 청년들아, 너희들은 미사 참례 안 하고 어디 갔었냐(…) 어디긴 어디야 강제징용이나 감옥이었겠지

목숨을 건진 임 가밀로 신부는 그 뒤 2년간 더 사목하다가 1947년 10월 25일, "성모님, 저를 구하소서!!"라는 유언과 함께 선종했다.

4 해방 후

4.1 칠고의 성모상

8.15 해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일어나고, 터가 좋은(…) 감곡성당의 위치는 남하한 북한군의 진지가 되었다. 이 때 성당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북한군에게 여러가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도깨비불 같은 것이 나타나 날아다니거나, 잘 서있던 성수대가 갑자기 굉음을 내며 쓰러지는 등등. 두려움에 떨던 북한군은, 성당 안 제대 위에 위치한 성모상이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 하면 그런 논리와 결론이 나오는 거냐

이에 성가대석에 올라가 성모상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분명히 석고로 되었기에 총알 한 방 맞으면 산산조각 나야 할 성모상금강불괴를 시전했는지(…) 멀쩡히 서 있었다고 한다. 물론 가슴에 총알 구멍은 난 상태. 이에 빡친 북한군은 6발을 더 쐈고 성모상은 몸에 총 7군데의 총상이 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래도 부서지지 않자 더 빡친 북한군성모상을 직접 부수기 위해서 사다리를 놓고 망치를 들고 올라갔는데, 성모상이 눈물을 흘리며 엄청나게 환한 빛을 비추어서 북한군이 놀라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태양권!!! 이에 질려버린 북한군"성당 내에 우는 여자(…)가 있어서 못 살겠다!!"성당을 뛰쳐나갔다고 한다.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후퇴할 때 감곡의 사람들을 납북하려 했던 북한군이었으나, 그 이전에 동네 사람들은 죄다 성당으로 피신했다. 성당 내 우는 여자(…)에게 겁을 먹은 북한군은, 성당 안으로 들어와 주민들을 끌고 가지 못하고 그냥 후퇴했다고 한다.

이후 이 성모상수난받은 성모상, 성모 칠고(七苦)를 상징하는 성모상 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4.2 부흥기

사실 이런 것은 가톨릭 내에서도 꽤나 신심이 열정적인 사람들이나 알던 사실이었으나, 2000년대 중반 무렵, 감곡성당이 30억이 넘는 엄청난 을 지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감곡 성당은 납골당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지역의 어떤 곳과 트러블이 일어났다. 결국 그것을 해결하지 못해서 무리한 사업추진과 더불어 30억이 넘는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다. 이런 초유의 사태에 천주교 청주교구는 교구 내의 유명한 엑소시스트 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를 그곳으로 급히 부임시켰고, 김웅렬 신부는 갑작스럽게 진천 성당에서 감곡성당으로 발령을 받아 부임하게 된다. 김웅렬 신부에게 1년에 발생하는 이자만 좀 막아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부임하는 날부터 사채업자들이 들들 달달 볶아대고 사무장을 폭행, 또 납골당 문제로 신자들도 분열된 상태에 엄청난 빚을 해결할 방도도 보이지 않고, 지인들은 김웅렬 신부가 돈 달라고 할까봐 전화도 받지 않는(…) 난감한 상황에서, 체중이 1달 사이에 10kg가 빠져버린(강제 다이어트) 김웅렬 신부는 모종의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야밤에 보따리 싸고 튀자!!"

…비범한 결단을 내렸으나 일과 기도를 하던 중에 "너마저 나를 버릴 셈이냐! 이 망할 자식아"라는 말씀을 듣고는, 마음을 돌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열정적으로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평소 성모신심이 깊었던 김웅렬 신부는 감곡성당의 유래와 그 신심, 루르드와의 관련 등을 연구하고 공부, 또 본인이 활발하게 강연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감곡성당과 수난 받으신 성모님의 이야기, 임 가밀로 신부의 영화같은 이야기들을 전국을 돌면서 사람들에게 알렸고 이에 눈물 콧물을 질질 짠(…) 신자들의 엄청난 방문이 이어지게 되며 삼삼오오 모은 그 신자들의 코묻은 헌금으로 30억이 넘는 빚을 1년 반만에 모조리 갚았다고 한다. 흠좀무.

그리고 빚 다 갚았다는 증서를 자랑스럽게 교구청에 보내자, 빚 갚을 방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교구장 주교님은 어리둥절하며 이게 뭐냐고 김웅렬 신부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 김웅렬 신부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울먹이며 "볼 것도 없이 그곳은 성모님이 계신 곳"이라며 이례적으로 빠르게 성모 순례지로 선포했다.

이에 신이 난(…) 김웅렬 신부는 평화방송에 장기출연하며 이런 사실들을 더 홍보했고, 더 많은 사람들, 게다가 개신교 신자들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적자 30억이었던 감곡성당은 김웅렬 신부가 배티로 발령이 나서 가게 되었을 때는 흑자 7억…… 대단하다.

5 전대사

루르드의 성모 발현 150주년 기념으로 조사가 진행되었을 때, 감곡성당은 루르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공식 인증되었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루르드의 성모 발현 150주년 기념 전대사 성당으로 감곡성당을 지목해서, 1년 동안 하루에 1번씩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특전을 누리게 되었다.

로마 성모 대성전의 대사제 버나드 프랜시스로 추기경은 감곡 성모 순례지를 로마 대성전과 영적 유대로 결합된 성전과 성모 순례지로 인증, 지정했고 2009년에는 사도좌 내사원장 스탠포드 추기경이 전대사 특전을 부여했다.

아래 목록은 1안으로 영원히 유효한 전대사. 단체순례시, 혹은 신자 1명이 1년에 하루 날을 잡아 순례할 때, 아래의 조건들 하에서는 이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영원히 유효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면 알겠지만 이런 전대사 특전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또한 7년간 유효한 전대사, 즉 2015년 6월 8일까지 추가로 유효한 전대사 조건은 이러하다. 전대사를 받기 위한 기본 조건을 만족시키고 아래와 결합할 경우 해당 신자에게는 전대사의 특전이 주어진다.

  • 매괴 성모상 앞에서 전례에 참여했을 시
  • 매월 첫 토요일 신심미사와 기도에 참여했을 때

6 그 외

김웅렬 신부라는 네임드급 주임 신부는 배티로 발령이 나서 현재는 없지만 아직도 꾸준히 신자들의 사랑을 받는 성모순례지로, 한적한 뒷산과 조용한 시골 분위기로 인해서 신자가 아니더라도 방문하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성당 부지뿐만 아니라 산 자체도 성당 재산이다. 물론 울타리 쳐 놓고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동네 주민들이 가볍게 마실나오는 경우도 많으나, 기본적으로 성당의 땅이며 기도하고 묵상, 산책하라고 개방한 것이니 방문자가 놀고 먹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성당 뒷산 정상에는 무려 15m짜리 십자고상이 감곡 전체를 내려다보는 형태로 세워져 있고, 옆에는 임 가밀로 신부가 성체강복을 하는 동상이 서 있다.

성당 아래에는 매괴여중ㆍ고가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유서 깊은 학교다. 점심시간 같은 쉬는 시간 때에 학생들이 뒷문을 통해 성당에 와서 쉬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동서울터미널에서 감곡까지 직통으로 가는 버스 노선이 있어서 의외로 편하게 갈 수 있다는 점이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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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프랑스 파리에 본부가 있으며 성모 발현 중의 한 곳인 '기적의 패 성당'과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의 지하 경당에 가면 한국어로 한국의 103위 순교 성인의 이름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 [2] 당시를 생각하면 조선오지였긴 했으니.
  • [3] 소화기 할 때 소화가 아니라(…) 작은(小) (花)이라는 뜻의 소화. 그래서 소화 데레사 성녀작은 꽃 데레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 [4] 파리의 성모 발현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가, 성녀 가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만들어 착용하라고 지시한 패.
  • [5] 쉽게 말해 안 팔겠다는 소리다.
[출처]엔하위키 미러

 

감곡성당(甘谷聖堂) 또는 감곡천주교회는 1896년 프랑스인 임가밀로 신부가 건립한 가톨릭 성당이다. 전국에서 18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며 충북 도내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성당이다.

임가밀로 신부는 1914년 최초로 성체거동행사를 개최하였고 문맹퇴치를 위하여 학교를 설립하여 일본 식민지하에서 억압받는 청년과 아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한글을 가르쳐 민족의 뿌리가 마르지 않게 하였다.

1930년 지금의 고딕식 성당을 건립하고 1934년 지금의 화강석으로 된 사제관을 2층으로 지었다.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이 성당을 침입하여 감곡성당에 모셔진 성모상에 총을 7발 쐈다. 그런데도 성모상은 깨지지 않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때 성모상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출처]위키백과

 

 


 

감곡천주교회는 1896년 프랑스 신부인 임가밀로 신부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전국에서 18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며 충북도내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성당이다. 임가밀로 신부는 1914년 최초로 성체거동행사를 개최하였고 문맹퇴치를 위하여 매괴학교를 설립하여 일본 식민지 하에서 억압받는 청년과 아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우리말을 가르쳐 민족의 뿌리가 마르지 않게 하였다. 임가밀로 신부는 79세의 나이인 1947년 10월25일 선종하였다. [출처]다음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