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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2015.1.11.일)/대학로 샘터빌딩 6장

 

파리 테러 희생자 추모 행진..150만명 "내가 샤를리다"(종합)

연합뉴스 | 입력 2015.01.12 05:00 | 수정 2015.01.12 06:37

(파리=연합뉴스) 박성진 특파원 = "내가 샤를리다"(Je suis Charlie), "두렵지 않다"


11일 오후(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파리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규탄하고 잡지사와 연대를 표하기 위한 집회가 열린 광장에는 이 구호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지난 7일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테러로 '샤를리 에브도' 기자 등 12명이 숨진 뒤 첫 일요일인 이날 프랑스 정부는 추모 행진을 마련했다.

오후 3시에 행사가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행사 시작 2∼3시간 전부터 몰려든 시민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으며 행사 한 시간 전에는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시민이 몰렸다.

↑ 프랑스 전역서 테러 규탄 시위 (AP=연합뉴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등이 벌어졌던 프랑스에서 10일(현지시간) 총 2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가한 테러 규탄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사진은 마르세유에서 시민들이 테러 규탄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는 모습. 앞쪽에 "민주주의와 평등과 자유를 위하여"라는 문구가 쓰인 플래카드가 보인다.

AFP통신은 이날 파리 반테러 행진 참가 인원을 150만 명이라고 보도했다. 프랑스 관리는 파리를 포함해 전국적으로는 역대 최대인 최소 370만 명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겨울 날씨에도 가족과 연인, 친구 등은 손을 잡고 삼삼오오 짝을 이뤄 광장을 향했다.

유치원생 딸 손을 잡고 나온 샤를로트 루아얄 씨는 "공화국의 이념인 자유와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참석했다"면서 "딸에게도 좋은 교육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의 손에는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뜻에서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적힌 '내가 샤를리다'라는 피켓이 들려 있었다.

또 행사장 곳곳에서는 이 구호가 적힌 스티커를 참가자 옷에 붙여 주었으며 광장 주변 상점에도 종이에 인쇄된 '샤를리' 구호가 내걸려 있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이번 테러로 이슬람을 적대시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이슬람교도를 테러리스트와 혼동하지 않겠다'는 피켓을 든 이들도 보였다.

극단주의자를 제외한 모두와 연대하겠다는 뜻에서 '나는 유대인이다. 나는 이슬람교도다, 나는 샤를리다'라는 팻말을 들고 행사장을 찾은 이들도 눈에 띄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뜻하는 연필을 옷에 꽂고 나온 이들도 많이 목격됐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물리노라는 이름의 한 여성은 1994년판 '샤를리 에브도' 주간지를 들고 나와 광장에서 높이 쳐들고 있었다.

그녀는 연합뉴스에 "20년 전부터 '샤를리 에브도'를 사 읽었다"면서 "이 표지 그림을 그린 만평가 카부도 7일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이번에 살해된 기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나왔다"면서 "우리는 겁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장 주변에는 희생자들을 애도하고자 프랑스 국기가 조기로 게양돼 있었다.

광장은 행진 시작 전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다.

누군가가 "내가 샤를리다"라고 외치면 구호는 파도처럼 옆으로 퍼져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광장 가운데 있는 동상에는 젊은이들이 올라가서 프랑스와 터키, 이집트 국기 등을 흔들었다.

이들이 "프랑스 만세", "샤를리", "두렵지 않다", "표현의 자유"라고 먼저 소리치면 광장을 꽉 채운 시민은 이를 따라 외쳤다.

광장 어디에선가 프랑스 국가 '라 마르셰예즈'가 시작되면 모두가 한목소리로 따라 부르는 장관도 끊임없이 연출됐다.

그리고 국가 합창이 끝난 뒤에는 언제나 우렁찬 박수를 보내면서 서로 격려했다.

참가자들은 스마트폰으로 연방 사진을 찍으면서 역사적 현장을 기록했다.

드니 쇼데(63)씨는 "30∼40년 전에 이렇게 집회에 많은 시민이 모인 적은 있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보지 못했다"면서 시민의 열의에 놀라워했다.

행사 시작 전 한 차례 비가 내렸으나 광장에 모인 시민은 자리를 뜨지 않았고 참가자는 오히려 불어나기만 했다.

집회 현장에서는 아랍계 프랑스인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알제리계 프랑스인은 "테러리스트들은 이슬람교를 대표하지 않는다"면서 "이들의 행동을 규탄하고 '샤를리 에브도'와 연대하기 위해 나왔다"고 말했다.

시민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해 세계 34개국 정상급 인사들이 레퓌블리크 광장에 도착한 후 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은 프랑스 국기와 언론의 상징인 펜을 흔들면서 3㎞가량을 행진해 목적지인 나시옹 광장에 도착했다.

온 국민이 단결해 테러와 맞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려는 듯 행진 도중 국가인 '라 마르셰예즈'를 끊임없이 불렀다.

'샤를리 에브도' 희생자 유족도 '샤를리'라고 적힌 흰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행진에 참가해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프랑스 여야 정치인과 유명 유대인 가수인 파트리크 브뤼엘 등 연예인도 시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반 이슬람성향의 극우정당인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대표는 파리 행사에 초청받지 못해 지방에서 열린 추모 행진에 참가했다.

sungjinpark@yna.co.kr

(끝)

 

 

 만물상

프랑스 풍자 전통

입력 : 2015.01.10 03:03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1970년 샤를 드골 전(前) 프랑스 대통령이 세상을 떴을 때 시사 풍자 주간지 '아라키리 에브도'는 부음 기사에 이런 제목을 달았다. '콜롱베에서 생긴 비극적 무도회, 사망자 한 명 발생.' 콜롱베는 드골이 말년에 살았던 마을 이름이다. 드골 별세 며칠 전 프랑스 어느 시골 마을 무도회에서 여러 사람이 죽는 참사가 있었다. 잡지는 이 비극에 빗대 콜롱베의 전직 대통령 죽음을 전한 것이다. 권력자 드골에 대한 야유였다. 이 보도 후 잡지는 다른 일이 빌미가 돼 발행 정지를 당했다. '아라키리 에브도' 멤버들이 나중에 다시 창간한 주간지가 '샤를리 에브도'다.

▶그보다 120년 앞서 잡지 풍자화로 국왕을 조롱한 사람이 있었다. '풍자만화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화가 오노레 도미에다. 그는 국왕을 백성이 바친 금화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바보로 그렸다. 도미에는 6개월 감옥 살고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탄압에 굴하지 않고 풍자화를 줄기차게 그렸다. 그가 죽고 2년 뒤인 1881년 프랑스는 세계에서 맨 처음 '표현의 자유에 관한 법'을 통과시켰다.

만물상 칼럼 일러스트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자유·평등·박애의 세상이 바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입헌군주제, 공화정, 제정(帝政)을 둘러싸고 일곱 번의 혁명과 반혁명이 되풀이됐다. 그 와중에 프랑스를 민주주의의 도도한 물결로 이끈 것이 표현의 자유였고, 그 한가운데 풍자가 있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는 풍자 전문 잡지들이 수백 종에 달했다. 사람들은 풍자 화가를 '집게 왕'이라고 불렀다. 절대권력이든 신(神)이든 풍자 화가에겐 금기(禁忌)가 없었다. 이들 덕에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 같은 지성의 위기를 넘을 수 있었고 전체주의로 가는 길을 피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선 풍자화 밑에 들어가는 짧은 문구를 레장드(légende)라고 한다. 단순한 그림 설명이 아니라 전설이며 신화 같은 것이라는 얘기다.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 풍자만화를 실어 12명이 테러로 희생당한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가 다음 주 정례 발행일에 예정대로 잡지를 내겠다고 했다. 프랑스 33개 신문·방송·잡지사 대표들도 좌파·우파 이념을 넘어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똘똘 뭉쳤다. 돈을 지원하고 사무실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고 했다. 감옥 가고 검열당하고 가판대에서 수거되고 하면서 이어온 프랑스 표현 자유와 풍자의 전통을 다시 본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특파원 리포트
위기의 프랑스 구할 언론 自由

 

입력 : 2015.01.10 03:03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로 12명이 숨진 7일, 파리를 비롯해 프랑스 전국에서 약 10만 명이 추모 집회를 열었다. 이처럼 짧은 시간에 대규모 인파가 모인 것은 이례적이다. 단순히 파리 도심 언론사가 타깃이 됐다는 상징성 때문만은 아니다. 난파선의 동물들이 먼저 움직이듯, 두 극단(極端)의 파도 속에 프랑스 사회가 생존(生存)의 위협감을 느꼈기 때문인 듯 보인다.

1970년 샤를리 에브도의 창간은 두 해 전 프랑스 '68혁명'의 산물이다. 1968년 3월 파리 근교 낭테르대학에서 대학 당국의 권위적 행정에 대한 반대로 시작한 학생 시위는 이후 기존 질서 해체를 주장하는 '문화 혁명'으로까지 발전했다. 이민 정책, 결혼 문화 등 현재 프랑스 사회의 근간이 여기에 뿌리 두고 있다.

이번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는 68혁명이 잉태한 프랑스식 톨레랑스(관용)에 대한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공격이다. 이번 테러로 숨진 편집장 스테판 샤르보니에는 1년여 전 일간지 르몽드 기고문에서 "우리는 모든 권위와 권력을 조롱한다"고 밝혔다. 그는 2012년 보도 내용에 반대하는 무슬림의 시위를 프랑스 정부가 금지하려 하자 "그들도 우리처럼 표현의 권리가 있다"며 오히려 시위 개최를 지지했다. 이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68혁명의 슬로건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종교에서 정치와 일상생활을 분리할 수 없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로선 이를 수용할 수 없다.

68혁명의 가치는 극우파로부터도 공격받고 있다. 이번 테러가 발생하자 우파 언론인 에릭 제무르(56)는 "내가 이미 경고하지 않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지난해 10월 출간한 책 '프랑스의 자살(Le Suicide Francais)'에서 현재 프랑스의 몰락이 68혁명 때문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민자 제한을 주장해 온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47) 대표는 오는 11일 추모 집회에 자신이 초청받지 못하자 "더 이상의 통합은 없다"며 극우 행보에 속도를 낼 뜻을 비쳤다.

이번 테러를 계기로 프랑스에서 좌·우파를 막론하고 중도세력의 입지는 더 좁아질 가능성이 크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8일 "이슬람 극단주의자와 혐오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며 위험한 연대를 하고 있다"며 "민주주의가 떠난 자리에 권위주의 체제가 퍼져 나갈 것"이라고 보도했다.

프랑스 국민은 위기의 프랑스를 구하기 위한 언론의 역할에 기대하고 있다. 추모 집회 참가자들이 '나도 샤를리다(Je Suis Charlie)'라고 쓴 팻말과 종이·펜을 들고 나선 것은 이번 테러의 대상이 비단 언론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프랑스 역사의 결정적 장면에서 언론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장 폴 마라가 발간한 '인민의 벗'이라는 신문이었다. 당시 신문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오스트리아산 암캐'로 비유하며 권력층의 타락을 고발했다. 그리고 '프랑스 인권선언'은 표현의 자유를 정치적 자유와 보편적 자유의 기본으로 규정하고 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 풍자만화를 실어 12명이 테러로 희생당한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가 다음 주 정례 발행일에 예정대로 잡지를 내겠다고 했다. 프랑스 33개 신문·방송·잡지사 대표들도 좌파·우파 이념을 넘어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똘똘 뭉쳤다. 돈을 지원하고 사무실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고 했다. 감옥 가고 검열당하고 가판대에서 수거되고 하면서 이어온 프랑스 표현 자유와 풍자의 전통을 다시 본다.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로 12명이 숨진 7일, 파리를 비롯해 프랑스 전국에서 약 10만 명이 추모 집회를 열었다. 이처럼 짧은 시간에 대규모 인파가 모인 것은 이례적이다. 단순히 파리 도심 언론사가 타깃이 됐다는 상징성 때문만은 아니다. 난파선의 동물들이 먼저 움직이듯, 두 극단(極端)의 파도 속에 프랑스 사회가 생존(生存)의 위협감을 느꼈기 때문인 듯 보인다.

1970년 샤를리 에브도의 창간은 두 해 전 프랑스 '68혁명'의 산물이다. 1968년 3월 파리 근교 낭테르대학에서 대학 당국의 권위적 행정에 대한 반대로 시작한 학생 시위는 이후 기존 질서 해체를 주장하는 '문화 혁명'으로까지 발전했다. 이민 정책, 결혼 문화 등 현재 프랑스 사회의 근간이 여기에 뿌리 두고 있다.

프랑스 국민은 위기의 프랑스를 구하기 위한 언론의 역할에 기대하고 있다. 추모 집회 참가자들이 '나도 샤를리다(Je Suis Charlie)'라고 쓴 팻말과 종이·펜을 들고 나선 것은 이번 테러의 대상이 비단 언론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프랑스 역사의 결정적 장면에서 언론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장 폴 마라가 발간한 '인민의 벗'이라는 신문이었다. 당시 신문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오스트리아산 암캐'로 비유하며 권력층의 타락을 고발했다. 그리고 '프랑스 인권선언'은 표현의 자유를 정치적 자유와 보편적 자유의 기본으로 규정하고 있다.

 

 

 

*****.....오늘과 어제를 비교해보십시오. 매일 똑같은 삶의 반복이라고 이야기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잘 따지고 보면 비슷해보여도 너무나도 다름을 깨닫게 됩니다. 날씨도 다르고, 만나는 사람도 틀립니다. 일어나고 잠자는 시간도 다르고, 그날 먹은 식사의 내용 역시 다릅니다.
이렇게 늘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 하느님의 일에 있어서 비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공감가는 글 이다...ㅎㅎ...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고 했다. 감옥 가고 검열당하고 가판대에서 수거되고 하면서 이어온 프랑스 표현 자유와 풍자의 전통을 다시 본다....ㅇㅇ...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 풍자만화를 실어 12명이 테러로 희생당한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7일, 파리를 비롯해 프랑스 전국에서 약 10만 명이 추모 집회를 열었다....ㅠㅠ...

 

- 2015년 1월11일 일요일...오후 9시20분...수산나 -

 

 

대학로 샘터빌딩 1

 

대학로 샘터빌딩 2,,,장리욱 박사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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