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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해외풍경·서양역사

"테러리스트가 기독교인이었다면"(2015.1.20.화)/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부천식물원 5장

 

[글로벌 아이] "테러리스트가 기독교인이었다면"

[중앙일보] 입력 2015.01.17 00:30 / 수정 2015.01.17 00:31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서의 테러 후 한 무슬림 지인이 던진 질문입니다. “모두 몇 명이 숨졌나.”

 어렵지 않았습니다. 샤를리 에브도에서 10명, 경찰 3명, 유대인 식료품점에서 4명이 희생된 걸 기억하고 있었으니까요. “17명”이라고 했더니 그가 또 물었습니다. 범인들은 어떻게 됐느냐고. 몰라서 물은 게 아니었습니다. “다들 20명이 숨졌는데 17명이라고만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곤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기묘한 건 “20명이다”란 말에 마음이 아렸다는 겁니다. 그저 ‘가해자도 사람이긴 하지’라고 넘기기엔요. 동남아시아계 무슬림인 그는 노모를 부양하는 성실한 가장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괴물’이 되어버렸지만 좌절과 증오 속에 자라났을 가해자의 처지를 연민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종교를 조롱한 이들이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다 숨진 희생자로 추앙받는 현실이 못마땅했는지, 또 자신과 같은 종교를 믿는 이들이 경원시된다는 분노 때문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테러 희생자의 절대다수는 무슬림이란 현실의 통렬함에서였는지도요. 어쩌면 그 모든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떠오른 인물들이 있습니다. 테러 당일 파리에서 만난 택시 기사입니다. “종교는 다 사랑을 말한다. 이슬람교만 예외다. 코란은 사람을 죽이라고 한다. 무슬림은 자기 종교를 강권한다. 불교 신자들은 안 그러더라. 기독교 신자에게 ‘노’라고 말한다고 나를 죽이진 않는다.”

 사실이 아닌 얘기를 어찌나 확신에 차서 주장하던지, 서구의 이슬람 반감이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오래전의 책 구절이 절로 이해될 정도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든 신의 이름으로 살인을 해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건 예상 가능한 발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지금 벌어진 일에 누구나 놀란다. 그러나 우리 교회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종교전쟁이 있었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을 생각하라. 우리 또한 죄인이다.” 1572년 8월 가톨릭 추종자에 의해 개신교 신자 수만 명이 학살당한, 가톨릭으로선 부끄러운 사건을 입에 올린 겁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폭력을 이슬람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주문으로 이해했습니다.

 한 영국의 칼럼니스트가 “만일 테러리스트가 기독교인이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란 질문을 던졌습니다. 고심 중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실제로 테러리스트가 기독교인이었다면 이런 유의 질문을 하진 않았을 것이란 점입니다. 또 기독교 대표들이 “기독교인 전체를 비난하는 건 부당하다”고 항의하는 일도요. 우리는 인정하든 안 하든 부지불식 간에 어느덧 어느 정도 ‘택시 기사’와 같은 상태가 됐는지도 모릅니다.

고정애 런던특파원

 

(요점)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든 신의 이름으로 살인을 해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건 예상 가능한 발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지금 벌어진 일에 누구나 놀란다. 그러나 우리 교회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종교전쟁이 있었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을 생각하라. 우리 또한 죄인이다.” 1572년 8월 가톨릭 추종자에 의해 개신교 신자 수만 명이 학살당한, 가톨릭으로선 부끄러운 사건을 입에 올린 겁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폭력을 이슬람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주문으로 이해했습니다.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나는 아메드다"

[중앙일보] 입력 2015.01.13 00:05 / 수정 2015.01.13 00:25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나는 숨진 경찰관 아메드다. 샤를리는 나의 신앙과 문화를 조롱했다. 하지만 나는 샤를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 시사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로 숨진 무슬림 경찰관에 대한 한 무슬림의 트윗이다. 끝 문장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함을 말한다. 하지만 첫 문장은 자신의 신앙을 조롱하는 행위에는 동의하지 않음을 말한다.

 샤를리 에브도는 예언자 마호메트가 카메라 앞에 벌거벗고 엎드려 “내 엉덩이 마음에 들어?”라고 묻는 만평을 게재했다. 이들은 모든 권위에 도전함을 모토로 교황도, 자국 대통령도 이런 식으로 풍자했다. 이들의 표현의 자유는 옹호해야 한다. 타인의 의사 표현을 이유로 테러를 가하는 것은 문명세계에서 정당화할 수 없는 행위다. 하지만 이들의 표현방법이 현명했는지에 관해 합리적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들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무슬림의 반대시위 권리를 옹호했다.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인권 침해, 성차별에 대한 책임을 마호메트에게 묻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까? 그렇다면 가톨릭의 중세 마녀사냥에 대한 책임은 야훼 또는 성모 마리아에게 물어야 하나? 고대 중근동 사회를 배경으로 성립한 종교들이 전근대적 요소를 품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버드대 스티븐 핑커 교수는 구약엔 폭력적·차별적 요소가 많지만 근대 계몽적 인도주의에 적응한 현대 기독교는 이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 예를 들며 종교는 인간사의 지적·사회적 흐름에 반응한다고 분석한다. 7세기에 쓰인 코란의 문제라기보다 이런 근대적 변용이 지체되고 있는 후진성의 문제 아닐까. 그렇다면 비판의 타깃은 시대착오적인 근본주의 종교지도자와 권력자들일 것이다. 타깃을 정밀하게 좁혀 이들을 고립시켜야 하는데, 반대로 20억 무슬림 일반을 자극해 위 트위터리안 같은 온건한 이슬람 세력을 고립시키는 것이 현명한 전술일까.

 버지니아대 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인간은 합리적 추론보다 도덕적 직관에 의존하는데, 미국 진보세력은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발달시킨 도덕성 중 자유·배려에만 치중하고 정당한 권위·고결함·소속 집단에 대한 충성심은 무시해 지지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상대의 도덕감정을 모욕하는 것보다 상대도 공감할 만한 부분을 넓혀가는 것이 현명하다. 샤를리 에브도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68혁명의 후예다. 그들은 저항의 목적인 휴머니즘보다 저항 그 자체를 더 신성시하는 근본주의에 빠진 것은 아닐까.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요점)

샤를리 에브도는 예언자 마호메트가 카메라 앞에 벌거벗고 엎드려 “내 엉덩이 마음에 들어?”라고 묻는 만평을 게재했다. 이들은 모든 권위에 도전함을 모토로 교황도, 자국 대통령도 이런 식으로 풍자했다. 이들의 표현의 자유는 옹호해야 한다. 타인의 의사 표현을 이유로 테러를 가하는 것은 문명세계에서 정당화할 수 없는 행위다. 하지만 이들의 표현방법이 현명했는지에 관해 합리적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들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무슬림의 반대시위 권리를 옹호했다.

샤를리 에브도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68혁명의 후예다. 그들은 저항의 목적인 휴머니즘보다 저항 그 자체를 더 신성시하는 근본주의에 빠진 것은 아닐까.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프랑스의 가톨릭 귀족과 시민들이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음모에 따라 파리에서 위그노(프로테스탄트)들을 학살한 사건(1572. 8. 24/25).

 

이 사건은 16세기말 프랑스 전역을 시끄럽게 했던 가톨릭과 위그노사이에 벌어진 종교전쟁 가운데 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뒤에는 프랑스 궁정 내의 정치적·종교적 알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위그노의 지도자인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 장군은 스페인에 대항해 저지대지방(지금의 베네룩스 3국)에서 일어난 전쟁을 지원했다. 이는 내란의 재발을 막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으며 또한 프랑스의 국왕 샤를 9세가 1572년 여름에 승인하려 했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샤를 9세의 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국왕에 대한 콜리니 장군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해서 당시 가톨릭교도인 기즈 가문 사람들이 콜리니 장군을 암살하려고 짜놓은 계획을 승인해주었다. 기즈가 사람들은 콜리니 장군이 프랑수아 드 기즈의 살해사건(1563)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1572년 8월 18일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 프랑스의 마르그리트(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위그노였던 나바라의 엔리케(훗날 프랑스의 앙리 4세)와 결혼하게 되어 많은 위그노 귀족들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왔다. 그로부터 4일 후 콜리니 장군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콜리니 장군은 상처만 입는 데 그쳤다. 흥분한 위그노들을 달래기 위해 정부측은 암살음모를 조사하기로 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자신이 연루된 사실이 탄로날 것을 우려해 튈르리 궁에서 일단의 귀족들과 은밀히 만나, 당시 결혼식 축하행사를 위해 파리에 머물고 있던 위그노 지도자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샤를 9세를 설득해 이 계획의 승인을 얻어냈다. 8월 23일 밤 파리 자치지역 요원들이 루브르에 소집되고 각자에게 명령이 내려졌다. 24일 동트기 직전 생제르맹로세루아의 종이 울리자 학살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콜리니 장군이었는데 그는 앙리 드 기즈가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살해당했다. 나바라에서 온 참석자들도 살해되었으며 나바라의 엔리케와 콩데 공 2세인 부르봉의 앙리 1세는 간신히 살아 남았다. 위그노들의 집과 상점들이 약탈당하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참히 살해당했으며 수많은 시체들이 센 강에 내던져졌다. 25일 살육행위를 중단하라는 국왕의 명령이 내려진 후에도 파리에서 유혈사태가 계속되었으며 지방까지 확산되어 루앙·리옹·부르주·오를레앙·보르도에서도 위그노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해 10월까지 지속된 소요사태에서 희생된 사람의 숫자는 가톨릭 측에 따르면 2,000명에 이르고, 당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위그노 쉴리 공작은 7만 명이나 된다고 주장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당시 희생자 수를 파리에서만 3,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살사건에 관한 소식을 듣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환영하는 입장을 나타냈으며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 사건을 기념해 메달을 주조하도록 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국가의 수장으로서 사건에 책임을 지고 있던 샤를 9세는 왕권에 대항한 위그노의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사건 경위를 설명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기대했던 대로 위그노는 무기력해지지 않고 오히려 학살사건을 계기로 가톨릭교도와 위그노 사이에 증오가 되살아났으며 새로이 적대감정이 싹텄다. 그때 이후로 위그노는 왕권에 복종하라는 장 칼뱅의 원칙을 버렸으며 특정한 상황에서는 반란세력과 폭군을 살해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 [출처]브리태니커

 

 

["테러리스트가 기독교인이었다면"]

 

종교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폭력과 살인 등이 이루어지면 안된다...ㅠㅠ...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누구든 신의 이름으로 살인을 해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ㅜ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1572년 8월 가톨릭 추종자에 의해 개신교 신자 수만 명이 학살...ㅠㅠ...

카톨릭의 종교전쟁...미국 청교도들의 인디언 학살...ㅠㅠ...노예제도 등...ㅠㅠ...

 

조선시대 양반과 상민, 천민 등의 신분제...ㅠㅠ...다시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ㅠㅠ...

내가 양반일 수도 있겠지만...천민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ㅠㅠ...

 

현재 한국에서. 여성인 내가 누리고 있는 권리,,,

남녀평등...1인1투표권 등이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인한  '쟁취'의 결과로...실현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ㅠㅠ...

 

역사의 도도한 물결에 의해,

노예제도도 폐지되고, 신분제도도 폐지되었으므로...

인간에 의한 폭력과 살인 등도 분명히 없어지리라고 본다...ㅎㅎ...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이 살아있기 때문이다...ㅎㅎ...

 

- 2015년 1월19일 연중제2주간 월요일...오전 10시4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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