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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사람]스티븐 호킹과 임마누엘 칸트의 내적 탐구심(2015.3.5.목)/부천 원미산 진달래꽃 풍경 6장

 

 

여전히 갖고 있는 것(탈 벤 샤하르, ‘행복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중증 장애인의 몸으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업적을 이루었다. 호킹은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불치병에 걸린 사실을 알고 크게 절망했다. 의사는 앞으로 2년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런데 2년 뒤에도 병세는 크게 나빠지지 않았다. 그는 입원한 지 하루 만에 사망하는 환자를 보며 자신이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위로했다. 게다가 그는 열일곱 살 때 케임브리지 대학에 합격할 정도로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호킹은 사랑하는 가족과 꿈을 위해 ‘움직여 보기로’ 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불치병이 자신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다고 썼다. 매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고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일반인과 똑같이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또한 삶에 낙관적이고 유쾌한 태도를 취했다. 병에 걸리고 나서 여섯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지만 언제나 활기찼다.

하루는 연설을 마친 그에게 기자가 물었다.

“병마가 당신을 영원히 휠체어에 묶어 놓았는데 운명이란 녀석이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호킹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세 개의 손가락을 이용해 타자를 두드렸다. 화면으로 그의 말이 전해졌다.

“내 손가락은 여전히 움직일 수 있고, 두뇌로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꿈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습니다.”

대답을 마친 호킹은 힘겹게 다음 문장을 완성했다.

“아, 그리고 나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순간 현장엔 벅찬 감동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불평불만을 던지는 우리들의 모습을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입니다.

 

(요점)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중증 장애인의 몸으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업적을 이루었다. 호킹은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불치병에 걸린 사실을 알고 크게 절망했다. 의사는 앞으로 2년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했다....그는 열일곱 살 때 케임브리지 대학에 합격할 정도로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불치병이 자신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다고 썼다. 매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고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병에 걸리고 나서 여섯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지만 언제나 활기찼다.

“내 손가락은 여전히 움직일 수 있고, 두뇌로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꿈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습니다.”
대답을 마친 호킹은 힘겹게 다음 문장을 완성했다.
“아, 그리고 나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순간 현장엔 벅찬 감동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임마누엘 칸트 여담

 

평생 자기가 태어난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칼리닌그라드)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반경 30km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키가 작고(150cm 가량) 등이 굽어 꼽추처럼 보였다고 한다.[18] 용모가 추했지만 가보지도 않았던 다리의 어느 부분에 나사가 몇 개 박혀있는지를 맞출 정도로 박식하고 기억력이 좋았다. 매일 3시 30분이 되면 산책을 해서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시계를 맞추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딱 두 번, 한 번은 루소의 책 에밀을 읽다가, 그리고 또 한 번은 프랑스 혁명을 보도한 신문을 읽다가 산책을 빼먹은 적이 있다고 한다.

칸트는 마구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애초부터 귀족 출신이나 엘리트 출신은 아니라는 뜻. 칸트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아버지를 잃었다. 칸트는 경건주의에 충실했던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이 신학적 환경이 그의 철학에 알게모르게 영향을 많이 주었으라 여겨진다. 물론 다니던 학교에서는 머리 좋은 수재로 유명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가정교사 일을 하며 따로 틈틈이 논문을 발표하고 시간강사 자격으로 강단에도 섰다.

엄청나게 박학다식했다. 칸트는 실제로 지적 호기심이 왕성해서 온갖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고 한다. 실제로 시간강사 시절에도 철학 뿐만 아니라 별별 학문을 다 가르쳤다. 천문학, 물리학, 역사,수학, 화학, 지리,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강의를 했다. 화학 물질들로 불꽃을 만드는 기술도 가르쳤다고 한다. 재치 있게 말을 잘하고 쏙쏙 귀에 들어오게 요약을 잘해서 그의 강의실에는 항상 수강생들로 꽉 차 있었다고 한다. 다른 도시나 국가에서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들으러 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지만 다년간에 걸친 학문활동의 결과 대학에서 수많은 과목을 맡아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하며, 마음먹고 이빨을 까면 어디 가 보지도 못한 지역이나 본 적도 없는 동식물들에 대해 떠들어대는데도 학문적으로 하자가 없고 너무도 흥미로운 나머지 학생들은 눈과 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강좌 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끌었던 강좌는 세계지리. [19]

루소의 저서를 접하기 이전까진 철저한 엘리트주의를 자처했다. 칸트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고는 번개를 맞은듯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나는 천성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로 지식만이 인류의 영광을 이룬다고 믿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대중을 경멸했다. 루소를 읽고는 이런 맹목적 편견이 사라졌다. 나는 인간성에 대한 존경심으로 도덕적 평등주의자가 됐다"라 했다. 허나 당시의 시대상엔 급진적이었던 그 사상으로 평생 루소가 박해받았던 사실로 보건대, 이후에도 엘리트 주의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긴 어려웠을 것이다. 도 좀 배웠으면 좋았을텐데

<순수이성비판>은 세계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이지만, 막상 처음 출판되었을 당시에는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워낙 책이 장황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했던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순수이성비판>은 칸트가 10년 가까이 시간을 투자해서 완성한 책이였다. 그래서 칸트의 지인이 칸트에게 "칸트 씨. 아무래도 책 판매량이 별로인 거 보니 이번 책은 망한 것 같습니다." 라고 하소연하자 칸트 본인은 당당하게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이 책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고. 과연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순수이성비판>은 조금씩 철학사의 중요한 저서로 떠올랐고, 칸트가 늙그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는 그 책으로 인해 칸트의 이름이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된다.

이 사람의 깐깐함이 어느 정도인가 알 수 있는 이런 일화도 전해져 내려온다. 칸트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체구가 왜소하고 용모가 추했기에 나이를 많이 먹을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어떤 여인이 청혼을 하게 된다. 칸트는 그녀에게 '생각을 좀 해볼테니 기다려 달라'라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도서관에 가서 사랑과 관련된 책을 모두 읽은 후 결혼을 해야할 이유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모두 썼다. 결국 결혼을 해야할 이유가 4개 더 많아서 결혼을 승낙하려고 했는데...7년이 지나있었다. 물론 그 여인은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서 망했어요. 맙소사

…깐깐함이 인간으로 표현된다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생각보다 다정다감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밥을 혼자 먹는 건 불행한 일'이라고 말하며 사람들과 식사하기를 즐겨해서 매일 겨자소스를 만들었는데, 자기는 절대로 그 소스를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20] 또한 술을 너무 마시는 사람이나 술을 아예 안 먹는 사람 둘다 경멸했다고 한다. 칸트는 독일 사람이었지만 맥주를 싫어하고 와인 애호가였다. 오죽하면 칸트에게 식사초대를 받은 사람 한 명이 선물로 맥주를 꺼냈는데 칸트가 식탁에 놓인 맥주를 보자 정중하게 맥주를 마실거면 내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고(...)

니체는 이 사람을 저질이라고 말했다. 뭐 이해 안 되는 건 아닌게 저 깐깐한 성격 주제에 자기 욕망을 억누르거나 하지 않아서 70대였던 칸트의 소원이 "저 아랫마을 우물가 처녀 엉덩이를 보는 거."라고 농담이라지만 거리낌 없이 말하는 양반이었으니….

하지만 위의 일화들(사실과 다른 것도 꽤 있다고 한다)과는 달리 중년의 칸트는 매우 사교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학문 활동은 생활의 절반만을 차지하였고, 나머지 절반은 사회적 활동으로 채워졌다(오트프리트 회페, 임마누엘 칸트). 또 다른 전기에서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실제로 그 당시 칸트 선생은 여성들 사이에서 세상에서 가장 사교적인 인물로 통하였으며, ...모든 사교 모임에 참석하였다."(뵈티거, I 133)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흄빠(...)라서 흄의 인종차별적인 사상까지 신봉했다. 자신의 신체적인 장애나 고향을 떠나본적이 없는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대놓고 흄의 또라이같은 사상까지 추종한걸 보면 이사람의 인종관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가 죽을 때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술을 즐겨마시면서도 딱 정해진 양만 마셨는데 그의 마지막 순간. 이제 가망이 없자, 의사가 포도주를 따르면서 "마지막이니 실컷 드셔도 될 듯 싶군요." 라는 말을 하자 칸트는 "아니, 난 죽는 순간까지라도 그 정해진 양을 어기고 싶진 않소."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또는 취하는 건 싫소...라고 하던지. 하지만 죽기 직전 칸트는 집안인을 오랫동안 봐온 늙은 하인에게 와인 한잔을 청해 마시고는 "아, 좋다!(Et ist gut!)"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사망했는데 장례식날 고향인 콰니히스베르크 시 전체가 휴무에 들어가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았으며 수천명의 사람들이 운구행렬의 뒤를 따르고 시내의 모든 교회가 같은 시간에 조종을 울리는 등 위대한 철학자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칸트의 무덤
칸트는 자신이 평생을 보낸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묘지에 묻혔는데 칸트의 묘비명엔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실린 유명한 문구가 적혀 있다.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률(법칙)이다.'

근대 철학에 끼친 영향력이 워낙 커서 세계 이곳저곳에 칸트 학회(Kant Society)가 있다. 국내에도 한국 칸트 학회가 있으며 주기적으로 세미나와 학회지를 낸다.

 

[출처]엔하위키미러 

 

(요점)

평생 자기가 태어난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칼리닌그라드)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반경 30km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키가 작고(150cm 가량) 등이 굽어 꼽추처럼 보였다고 한다.[18] 용모가 추했지만 가보지도 않았던 다리의 어느 부분에 나사가 몇 개 박혀있는지를 맞출 정도로 박식하고 기억력이 좋았다. 매일 3시 30분이 되면 산책을 해서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시계를 맞추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딱 두 번, 한 번은 루소의 책 에밀을 읽다가, 그리고 또 한 번은 프랑스 혁명을 보도한 신문을 읽다가 산책을 빼먹은 적이 있다고 한다.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지만 다년간에 걸친 학문활동의 결과 대학에서 수많은 과목을 맡아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하며, 마음먹고 이빨을 까면 어디 가 보지도 못한 지역이나 본 적도 없는 동식물들에 대해 떠들어대는데도 학문적으로 하자가 없고 너무도 흥미로운 나머지 학생들은 눈과 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강좌 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끌었던 강좌는 세계지리. [19]

 

체구가 왜소하고 용모가 추했기에 나이를 많이 먹을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어떤 여인이 청혼을 하게 된다. 칸트는 그녀에게 '생각을 좀 해볼테니 기다려 달라'라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도서관에 가서 사랑과 관련된 책을 모두 읽은 후 결혼을 해야할 이유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모두 썼다. 결국 결혼을 해야할 이유가 4개 더 많아서 결혼을 승낙하려고 했는데...7년이 지나있었다. 물론 그 여인은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서 망했어요. 맙소사

 

죽기 직전 칸트는 집안인을 오랫동안 봐온 늙은 하인에게 와인 한잔을 청해 마시고는 "아, 좋다!(Et ist gut!)"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사망했는데 장례식날 고향인 콰니히스베르크 시 전체가 휴무에 들어가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았으며 수천명의 사람들이 운구행렬의 뒤를 따르고 시내의 모든 교회가 같은 시간에 조종을 울리는 등 위대한 철학자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임마누엘 칸트의 어록...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1][2]
모든 것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경험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3]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률(법칙)이다.[4]

 

 

 

[스티븐 호킹과 임마누엘 칸트의 내적 탐구심]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불치병에 걸린 스티븐호킹...의사는 앞으로 2년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선고했지만...

매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고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병에 걸리고 나서 여섯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지만 언제나 활기찼다.

“내 손가락은 여전히 움직일 수 있고, 두뇌로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꿈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습니다.”
“아, 그리고 나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임마누엘 칸트...

평생 자기가 태어난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칼리닌그라드)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반경 30km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키가 작고(150cm 가량) 등이 굽어 꼽추처럼 보였다고 한다.[18] 용모가 추했지만 가보지도 않았던 다리의 어느 부분에 나사가 몇 개 박혀있는지를 맞출 정도로 박식하고 기억력이 좋았다. 매일 3시 30분이 되면 산책을 해서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시계를 맞추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딱 두 번, 한 번은 루소의 책 에밀을 읽다가, 그리고 또 한 번은 프랑스 혁명을 보도한 신문을 읽다가 산책을 빼먹은 적이 있다고 한다.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지만 다년간에 걸친 학문활동의 결과 대학에서 수많은 과목을 맡아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하며, 어디 가 보지도 못한 지역이나 본 적도 없는 동식물들에 대해 떠들어대는데도 학문적으로 하자가 없고 너무도 흥미로운 나머지 학생들은 눈과 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강좌 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끌었던 강좌는 세계지리....

 

모든 것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경험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칸트)

 

스티븐호킹...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일반사람들이 겪는 체험이나 경험이 절대다수로 부족했지만 자기만의 내면세계에 빠짐으로 불후의 업적을 남기지 않았는가? 

 

임마누엘 칸트...평생 자기가 태어난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칼리닌그라드)를 떠나지 않았다. 반경 30km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박학다식하여

어디 가 보지도 못한 지역이나 본 적도 없는 동식물들에 대해 강의하는데도 학문적으로 하자가 없고 너무도 흥미로운 나머지 학생들은 눈과 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강좌 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끌었던 강좌는 세계지리....ㅋㅋㅋ...

 

경험도 중요하지만 경험을 내재화 하는 능력도 중요하리...ㅎㅎ...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았던 칸트이지만...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세계지리 강좌를 했다고 한다...ㅋㅋ...

책이나 대화에서 습득한 간접경험을 이용했었으리라...ㅎㅎ...

 

요즘 세태는 해외여행이 대세다...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정, 생활상, 인간군상, 우리나라와의 비교 등' 체험담을 들려주면... 체험기부 내지 체험나눔이 되어 듣는 사람도 득템이 될텐데...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이런 사람 꼭~ 있다...

"(당신) 그곳에 가보았어. 꼭 한번 가보아. 정말 좋아..." 하면서 가보았는지 확인사살(?)하면서 가보기를 종용한다...한번 혹은 두번의 종용은 그런대로 넘어간다...

3번째를 넘는 종용을 하면...나도 뚜껑이 열려 머리에서 김이 나기 시작한다...(♨물론 속으로만 열받아 김이 나는 것)...

요즘 아이들 4세대의 말처럼 "헐"소리가 난다.......(♥ 내가 해외여행을 가든말든 무슨 간섭이란 말인가 하면서 속으로만 '헐' 한다.)

 

(헐...어이없다 의미의 한숨소리)

 

그러면서 떠오르는 인물이 '임마누엘 칸트 / 스티븐호킹' 이지만...

해외여행을 해보라고 3번이상 종용하는 사람에게 그 말을 해본들...구차하게 내가 변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으므로...

너와 나의 생각의 차이...다름의 차이가 '틀림의 차이'는 분명 아닐 것이므로...그냥 말없음으로 넘어간다...ㅎㅎ... 

 

스티븐호킹의 자기세계로의 빠짐으로 인한 내적여행......

임마누엘 칸트의 책속으로 빠짐과 내면세계로의 여행.....

야생화 꽃 속에 있는 암술, 수술, 꽃가루, 씨방의 모습 등 그 내밀한 모습으로의 여행....

이 또한 해외여행 만큼 멋지지 않은가?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가 생각난다...ㅎㅎ...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ㅎㅎ...

 

- 2015년 3월5일 목요일...오후 2시30분...수산나 -

 

(사족 ※헐...어이없다 의미의 한숨소리)

 

 

 

 

부천 원미산 진달래꽃 풍경 1

 

부천 원미산 진달래꽃 풍경 2

 

부천 원미산 진달래꽃 풍경 3

 

부천 원미산 진달래꽃 풍경 4

 

부천 원미산 진달래꽃 풍경 5

 

부천 원미산 진달래꽃 풍경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