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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감사일기

공자님은 말년을 상가 집 개처럼 살아 성인이 되었다(박영식 야고보 신부님의 강론) (2015.6.13.토)

 

공자님은 말년을 상가 집 개처럼 살아 성인이 되었다(박영식 야고보 신부님의 강론)
작성자    김영완(mok9514)  쪽지 조회수 64 번  호   97398
작성일   2015-06-13 오전 9:50:10 추천수 3 반대수 0

공자님은 말년을 상가 집 개처럼 살아 성인이 되었다

(연중 제11주일)

 

마르코복음 4,26-34

 

공자는 인물이 잘 생기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여자가 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이빨이 톡 튀어나온 게 칠일 동안 굶은 상인데, 귀가 얼굴색보다 흰 걸 보니 문장만은 천하에 알려질 만 하겠군.” 성현으로 알려진 공자가 모든 면에서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인물은 우리보다 더 못 생겼을 지도 모르겠다. 또한 공자는 40대 후반부터 주역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날 자기의 여생을 점치는 괘를 뽑아보았는데, ‘화산려火山旅라는 괘가 나왔다고 한다. ‘는 나그네 신세를 뜻한다. 세상사의 이치에 통달한 성인으로 여겨지는 공자도 50대 중반부터 60대 후반까지 14년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신세였을 뿐만 아니라 상갓집 개喪家之狗로도 살았다. 이 기간 죽을 고비를 네 번이나 넘기고, 날마다 먹고 잘 곳을 걱정해야 하고, 강도들에게 포위되어 열흘 이상이나 굶주리기도 했다. 상갓집 개라는 말은 중국 역사의 아버지로 곱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온다. 이 말은 공자가 밥을 줄 주인이 없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어야 하는 개처럼 비참한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직장도 잃어버리고, 돈도 떨어지고, 길바닥에 나앉아야 하는 노숙인 처지였던 것이다. 이처럼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받는 공자도 인생 후반부에는 완전히 실패하여 불운한 삶을 살았던 서글픈 팔자였다. 중국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마천司馬遷(기원전 145? - 기원전 86?)이 공자의 말년에 대해 기록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공자가 파란만장하게 살다 갔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 기록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성인 공자만 알았지 상갓집 개 같은 삶을 살았던 공자의 생활에 대해서는 몰랐을 것이다. 공자는 69세에 상갓집 개 같은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73세에 죽었다. 고작 4년 동안 말년의 여유를 가지고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그 훌륭한 저술들을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왕권이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것을 겨자씨 비유로 묘사하셨다. 씨 크기가 0,95밀리미터 내지 1,6밀리미터밖에 되지 않는 겨자씨가 다 자라면 1미터 50센티미터에서 3미터 정도나 되기도 했다. 그래서 하늘의 새들이 겨자 나무 그늘 밑에 깃들일 수 있다. 이처럼 큰 나무가 되기까지 겨자씨는 일단 땅 속에서 썩어야 한다. 이처럼 썩는 가운데서 새 생명이 잉태되어 나온다. 그 다음 수분결여, 잡초와 싸움, 모든 식물을 태워버릴 것 같이 작열하는 햇빛, 병충해, 새들의 침입 들, 온갖 난관을 이겨내야 한다. 이러한 겨자씨처럼 예수께서 처음 선포하신 하느님의 왕국도 작고 미약하게만 보였다. 더구나 예수님은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되셨기 때문에 이 겨자씨가 완전히 죽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예수님의 구원활동이 그분의 죽음으로 완전히 실패한 것 같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여 인류의 최대 원수인 죽음과 모든 불행을 없애주신 주님으로 임하셨다. 겨자씨만큼 작은 하느님의 왕권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모든 민족이 구원받으러 모여오는 큰 나무처럼 된 것이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 밑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 32). 하늘의 새들은 모든 민족들을 가리키고, 겨자 나무의 큰 가지가 만든 그늘 밑에 깃들인다는 말은 그들이 지속적 보호를 찾았다는 것을 상징한다.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 왕국의 복음을 믿고 따라 구원과 영생을 누린다는 뜻이다.

 

초기 교회도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이와 비슷하게 체험했다. 하느님의 왕권에 속하는 신앙생활도 약하고 왜소하게 보이고 박해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교회가 하느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한 결과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척박하고 가난한 땅, 로마제국의 식민지인 유다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의 입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 하느님 왕국의 복음을 오늘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족들이 믿고 따르고 있다.

 

공자는 못 난 얼굴에 오랜 세월 상가 집 개처럼 비참하게 살아 어질게 사는 이가 훌륭한 사람임을 가르치는 인류의 스승이 되었다. 석가모니는 자신을 다 비워 부처가 되고 인류에게 자비를 가르치고 있다. 공자와 석가모니는 인류를 위해 제 목숨을 바치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피조물인 이 두 성인과는 달리, 만물의 창조주요 당신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쳐 하느님의 왕국을 만들고 인류를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신 주님이시다. 인류를 이 왕국으로 불러 하느님 같은 존재가 되게 하셨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이들인 훌륭한 인격자들 안에 당신의 왕권을 행사하신다. 우리 가정의 성패는 말씀의 씨앗을 키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열매를 맺는 데 달려 있다. 우리 자신이 말씀의 화신이 되도록 자기희생의 고통을 겪어야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부부 각자가 자녀들과 함께 사랑, 믿음, 희망의 씨앗을 키워 얼마나 큰 나무가 되는지에 따라 행복과 불행, 영생과 파멸이 정해진다.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원수에게까지 관심과 도움을 베풀어야 집단이기주의에서 자유롭고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면 우리는 공자와 석가모니의 수준을 능가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날마다 성당에 나오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지옥은 사랑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천국은 사랑이 있는 곳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며, 하느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춤을 추어라.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노래를 불러라. 마치 지상이 천국인 것처럼 살아라.”

 

 

 

공자(孔子) 또는 공부자(孔夫子: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정치가 · 사상가 · 교육자이고[1], 주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흔히 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유사히 취급될 수 없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호칭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정치적으로는 요순우 삼황 오제의 이상적 정치와 조카를 왕으로서 성실하게 보필한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지향했다. 뜻을 펴려고 전국을 주유를 하였으나 그의 논설에 귀를 기울이는 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생을 마쳤다. 춘추시대 말기에 서주의 제후국인 노나라(魯)의 무관인 숙량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孔子)" 또는 "공부자(孔夫子)"로 불린다. "공자(孔子)"의 호칭에서 "자(子)"는 성인(聖人)인 공자를 높여 부르는 존칭이다.[1] 그 뒤 여러 번 추증되어 대성지성문선왕(大聖至聖文宣王)에 추봉되었다.

 

 

생애 초반[편집]

탄생과 가계[편집]

산둥 성의 공자 묘

공자는 기원전 551년 9월 28일 노나라 곡부(曲阜)에서 떨어진 시골인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에서 부친 숙량흘이 그의 노년에 모친 안씨(이름은 징재)를 맞아 공자를 낳았으나, 부친인 숙량흘(叔梁紇)과 모친인 안징재(顔徵在, 옌쩡짜이)는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다.

안징재는 숙량흘의 동료 무사이자 친구였던 안양(顔襄)의 셋째 딸이었다. 숙량흘이 안징재를 만났을 당시 숙량흘은 60대 후반이였고 안징재는 13세의 소녀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후세에 호사가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공자의 조상은 주나라의 이전 왕조인 은나라에서 봉토를 하사 받은 송나라의 공족(소국의 왕에 해당)이었으며 공자의 3대 전에 노나라로 옮겨 왔다. 그의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한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부친 숙량흘은 시골 무사였다. 부친과 그의 본처 시씨(施氏) 사이에는 딸만 아홉이었고 아들은 하나 뿐이었다.

공자의 자(字)가 중니(仲尼)가 된 이유는 집안의 장남인 맹피에 이은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소개되는 공자의 가계는 보통 그의 부친 숙량흘과 증조부 공방숙까지 언급되나, 후대에는 보통 공자를 시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소년 시절[편집]

《사기》의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키가 9척6촌에 달하여 '장인(꺽다리)'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자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공씨 집안에서 숙량흘의 자손으로 인정받지 못 했다. 3살 때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 안징재가 궐리로 이사하여 홀로 공자를 키웠다. 부친 [숙량흘]의 재산은 이복 누이들과 이복 조카에게 상속되었다. 그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모친마저 눈이 멀어 버려 생활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이 결과 공자는 어려서부터 거칠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 곤궁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기원전 536년]에 혼인하였으며, [기원전 535년] 공자 24세에 모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공자는 3년 상을 마친 뒤 부친 묘소 옆에 안장하였다. [기원전 533년] 19세에 송 (춘추 전국)(宋)나라의 병관(幷官)씨의 딸과 결혼하여 20세에 아들 리(鯉)를 얻었다.[2]

사생아였던 공자에게는 자신이 대부였던 숙량흘의 자손, 즉 귀족임을 인정받는 것이 필생의 목표였다. 무사였던 아버지와 달리, 공자는 글과 지식으로서 인정받으려 했다. 어릴 적부터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기를 좋아했다고 하며, 고실(故實), 즉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종교 의례·제도·관습 등에 밝았다. 공자에게는 특별한 선생은 없었다. 그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웠다. 그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주나라의 주하사였던 노자이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서 배웠던 것은 여러 문헌에 나온다. 이런 사정을 만년에 공자는 "15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살에 섰다"고 술회한다. 서른 살에 학문의 기초가 섰으며, 생활의 토대가 섰으며, 한 인간으로서 우뚝 선 것이다. 30대가 되자 공자는 노나라에서 가장 박식한 사람이 된다. 그는 학원을 열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학교를 창설한 것이다. 노나라의 유력한 대부의 자손에서 평민의 자제까지 '묶은 고기'(束脩) 이상을 가져온 사람은 누구나 가르쳤다. 공자는 <시경> <서경> <주역> 등의 경전을 가르쳤다.

공자는 노나라에 살았다. 따라서 노나라를 건국했던 주공(周公)을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받들었다. 주공은 어린 성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면서 주나라의 봉건제를 수립했다. 봉건제는 종법제라 한다. 천자가 형제 친척을 제후로 임명한다. 제후는 다시 자손을 대부로 임명한다. 그 결과 국가의 주요 기관장은 종친들이 된다. 이래서 종법이라 한다. 공자 당시는 종법과 봉건제가 무너지고 극심하게 혼란했다. 노나라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공자는 주공의 종법제를 회복해서, 노나라를, 나아가 천하를 평화롭게 하고자 했다.

관료 생활과 교육 활동[편집]

관료 생활[편집]

회계 출납직인 위리(委吏)를 거쳐 목장 경영직인 사직(司直) 등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공자는 30세에 이르러 관리로서의 지위도 얻고, 학문적으로도 많은 진전을 보였다.

공자의 정치관은 법보다 덕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고, 세상사를 처리함에 있어 사람을 가장 중시하는 인본주의를 주창하였다. 주공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처럼 올바르고 평화로운 인간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공자의 이상이었다.

본국인 주나라(周)의 낙읍(洛邑)을 돌아보고 귀국한 후 그의 명망은 차츰 천하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에 따라 그에게 배움을 청하는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그 수가 훗날 3천명을 넘어섰다. 이에 공자를 눈여겨 본 노(魯)나라의 왕 소공(昭公)은 그를 가까이 두려 하였다.

주유천하[편집]

36세 때 소공(昭公) 25년 노나라에 '삼환(三桓, 맹손(孟孫)·숙손(叔孫)·계손(季孫) 등 당시 노나라의 권세가)의 난'이 일어나 노왕 소공이 신하인 계씨에게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공자도 그의 뒤를 따라 피난, 기원전 517년에 제(齊)나라에 갔다.

공자는 제나라의 왕 경공(景公)과 신하들에게 여러 모로 진리를 가르쳤다. 그는 그 곳에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에 입각한 정치 이상을 말하였다. 공자의 박학다식함과 고매한 인품에 매료돼 그를 흠모하게 된 경공은 그를 자신의 정치적 고문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공자의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인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꺼린 제나라 재상 안영(晏嬰)의 적극적인 반대로 좌절되었다.

춘추 시대 (기원전 770~403)의 중국

이로 인해 2년 만에 귀국한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46세 무렵 노나라 왕의 측근 배신(陪臣)인 양호(楊虎)가 세력을 잃고 물러나게 되면서 중도재(中道宰[3])가 되었다. 52세 무렵에는 대사구(大司寇)로 지위가 올랐다. 그 이듬해 노나라의 정공을 따라가 참석한 제나라와의 강화 회의에서 예전에 제나라에 빼앗긴 노나라의 땅을 돌려 주도록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으며, 난신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축출하는 데 참여하였다고도 한다(기원전 496년.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일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 때 제나라에서는 밀자(密者)를 파견하여 노나라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으나 공자가 이를 꿰뚫어 보고 회의 장소에 들어가려는 의심쩍은 사내를 붙잡아 화를 미리 막고 노나라에 유리하게 강화를 맺었다. 삼환씨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대부(大夫)인 계환자가 제나라의 흉계에 속아 쾌락에 빠진 것을 만류하다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크게 낙담한 공자는 그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벼슬을 버린 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위·송·조·정·진·태 등 여러 나라를 주유하였다.

정치 활동[편집]

공자상 송나라 때 마원(馬遠)작

공자의 인망은 해를 더할수록 거듭 높아져 기원전 499년에는 대사구(현재의 법무부 장관) 벼슬에 기용되었고 최고 재판관 및 외교관직도 겸하게 되었다.

당시 공자는 순장될 뻔한 아이를 구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 때까지 이어져 오던 순장의 악습을 왕에게 간하여 끝내 폐하였다. 또 제나라 경공과의 회동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기로 전쟁 한 번 치르지 않고 단지 협상만으로 노나라가 잃었던 옛 땅을 되찾는가 하면, 당시 권세가였던 삼환씨의 횡포를 꺽기 위해 그들의 요새인 삼성(三城)을 허무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계손사의 저항으로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계손사는 노나라 삼환 계손, 맹손, 숙손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이 무렵, 공산불뉴는 삼환과 계손사의 전횡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공자 역시 삼환 등의 무리를 몰아내 어지럽혀진 노나라를 바로 잡으려고 이미 일을 꾀했던 데다 도덕 정치 구현에 대한 열망 때문에 반역자 공산불뉴가 하극상을 벌인 처지임에도 그가 초빙했을 때 이에 응하는 문제를 놓고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노나라 출신 제자였던 맹의자, 남궁도등의 만류와 때마침 벌어진 상황 여건의 괴이한 변화로 인해 결국 단념하였다.

공자는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방자하게 권세를 휘두르는 계손사를 타도하려고 여러 모로 계책을 꾸몄으나 일이 성사 단계에 가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계손사의 미움을 받은 공자는 기원전 496년에 노나라를 떠나 수십 명의 수행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켜 줄 어질고 현명한 군주를 찾아 기약 없는 여정에 나섰다.

무려 10여년이 넘게 걸린 이 주유열국(周遊列國)의 기간은 성인(聖人)인 공자로서도 참기 어려운 고달픈 세월이었다. 이 무렵 공자는 생명에 위협이 가해지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그 같은 봉변으로 인해 여행 도중 만난 은자(隱者)들에게 수모와 조롱을 당하기도 하였다.

공자의 도덕정치는 어느 나라에서도 외면 당했다. 당시의 왕들은 더디더라도 올바른 길을 택하기보다 손쉽게 국력을 팽창시켜 천하를 제패할 부국강병의 방법만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마침내 자신의 학문적 이상이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제후와 군주들을 설득하는 일을 단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 후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미래 세대에 남은 희망을 모두 걸게 되었다. 이로써 공자의 정치적 삶은 마감되었고 이후에는 교육자로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생애 후반[편집]

교육 활동[편집]

인(仁)에 기반한 도덕 정치를 실현하고자 전국을 주유하며 군주들을 설득하였으나, 오직 부국강병책으로 천하통일만을 노리는 당시의 세태에서는 공자의 이상을 받아 주는 제왕이 아무도 없었다.

공자는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의 오래된 전통적 경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또 노나라에 전해 내려오던 역사서를 다시금 새로 엮어 《춘추》를 편찬했다.

공자의 만년에 아들인 백어([4])가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또 특히 아끼던 제자 안연자로마저 잇따라 죽었다. 이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5])

아들 백어가 사망하자 공자가 어린 손자를 키웠다. 그의 손자인 자사는 훗날 공자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증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문하에서 배워 조부인 공자의 사상과 학맥을 훌륭히 이어 나갔다.

제자들[편집]

공자의 문하(門下)에서는 걸출한 대학자가 무수히 배출되었는데, 육경(六經)에 통달한 이만 해도 무려 7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을 가리켜 '칠십자(七十子)'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학식이나 덕망, 재능이 출중하여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열 사람의 제자를 가리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한다. 이들은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자로(子路), 자유(子有), 자하(子夏) 등이었다.

공문의 많은 제자들 중 안회(顔回)의 학문과 덕이 가장 뛰어났다. 이는 스승인 공자와 동문 선후배 등이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안회는 스승인 공자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나 그를 크게 상심시켰다. 그의 학통을 후대에 전한 인물은 증자와 자궁(子弓)이었다.

덕행(德行)으로는 안회(顔回), 민손(閔損), 재백우(再伯牛), 중궁(仲弓)이며, 언행은 재예(宰豫), 자공(子貢)이며, 정사(政事)에는 재구(再求, 자유(子有)의 본명), 중전(仲田, 자로(子路)의 본명)이고,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자하(子夏)이다. 그 외에도 증자(曾子), 자장(子張), 자궁(子弓), 유자(有子)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증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가르쳤고, 훗날 맹자(孟子)가 자사에게서 배웠으니, 맹자학파는 증자가 배출한 셈이다. 자궁의 손제자들 중에 한 분파는 순자한비자로 이어졌고 이는 법가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만년[편집]

아들과 아끼던 제자들을 잇따라 잃고 상심에 빠진 공자는 고향인 곡부로 돌아와 후학 양성으로 만년을 보냈다.

공자는 만년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말하기를, "나이 열다섯에 학문의 길로 가기를 마음 먹었고, 서른에 이르러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렸으며, 마흔에는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었고, 쉰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모두 알았으며, 예순에는 모든 일에 대해 순리를 알 수 있었고,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하였다.

공자는 73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말씀들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에도 수 천 년 동안이나 이어지며 중국을 비롯하여 이른바 '중화(中華)'의 국제 질서에 속한 동아시아 대부분 국가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종범(宗範)이 되었다. 또 공자는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 각국에서 인류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되고 있다.

사후[편집]

공자의 승하 후 노성 북쪽(魯城北 曲阜 洙上, 현재의 산동성 곡비현 북쪽)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그의 제자들은 증자를 상주로 하고, 부모의 장례에 준하는 예로써 상복을 입고 그의 묘소 앞에서 3년상을 마친 뒤, 각자 고향에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후 증자의 문인들과 증자의 제자이자 친손자인 자사의 문인들, 자사학파에서 갈려 나온 맹자의 학파, 자궁의 학파, 자궁의 학파에서 분파된 순자의 학파가 크게 융성하였다. 이후 유학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므로 교육을 통해 선한 본성을 보존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맹자의 성선설과, 인간의 본성은 악하므로 예로써 악한 본성을 억제하여야 한다는 순자의 성악설로 나뉘어 발전하게 된다.

베트남에서 발행된 공자 우표

738년 당나라 현종은 공자를 왕으로 추봉하여 '문선왕'(文宣王)의 시호를 내렸다. 1008년 송나라 진종은 시호 지성(至聖)을 추시하여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 되었다. 원나라에와서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 되었다.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지성선사'(至聖先師)라는 다른 별칭도 수여되었다. 1645년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한편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후 중화인민공화국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공자와 그의 사상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악의 표상'으로 규정되었고, 이에 따라 공자묘와 비석 등이 파괴되었다. 유학서 및 다량의 공자 관련 유물 등도 무더기로 불에 타 사라지는 참화를 겪었다.

 

[출처]위키백과

 

[공자]

 

작년에, 그러니까, 2014년 11월, 성남시청 1층 온누리홀에서 진행되었던 성남행복아카데미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박재희 강사의 <2,500여년전 슈퍼스타에게서 배우는 삶의 지혜>라는 강연이었다...

 

2,500여년전 슈퍼스타는 '공자 / 노자 /손자' 였었고...

"공자는 궁즉통... 노자는 허즉통... 손자는 변즉통의 지혜를 가르쳐준다는 강연이었다...

 

이때, 공자의 출생이 이야기 되었는데,...

사마천이 기록하기를 공자의 출생은 부적절한 '야합이생'이라고 했다....들판에서의 야합으로 공자는 태어났다......

70세(?) 부친과 17세(?) 여인(세번째 부인) 안징재 사이에서 태어났다...공자가 3살 때 부친은 죽었다...

 

홀어머니 안에서 공자는 어렵게, 처절하게...인생의 바닥에서 역경을 딛고 우뚝 선 존재 이다...

그리하여 '궁즉통'...'역경이 닥치면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온다' 는 지혜를 펼칠 수 있었다고 한다...

 

성현으로 알려진 공자가 모든 면에서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인물은 우리보다 더 못 생겼을 지도 모르겠다. 공자는 50대 중반부터 60대 후반까지 14년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신세였을 뿐만 아니라 상갓집 개喪家之狗로도 살았다. 이 기간 죽을 고비를 네 번이나 넘기고, 날마다 먹고 잘 곳을 걱정해야 하고, 강도들에게 포위되어 열흘 이상이나 굶주리기도 했다. 상갓집 개라는 말은 중국 역사의 아버지로 곱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온다

 

이처럼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받는 공자도 인생 후반부에는 완전히 실패하여 불운한 삶을 살았던 서글픈 팔자였다. 중국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마천司馬遷(기원전 145? - 기원전 86?)이 공자의 말년에 대해 기록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공자가 파란만장하게 살다 갔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 기록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성인 공자만 알았지 상갓집 개 같은 삶을 살았던 공자의 생활에 대해서는 몰랐을 것이다. 공자는 69세에 상갓집 개 같은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73세에 죽었다.

 

공자는 73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말씀들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에도 수 천 년 동안이나 이어지며 중국을 비롯하여 이른바 '중화(中華)'의 국제 질서에 속한 동아시아 대부분 국가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종범(宗範)이 되었다. 또 공자는 세계 4대 성인(공자,석가모니,소크라테스,예수) 중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 각국에서 인류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되고 있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9월 28일 노나라 곡부(曲阜)에서 떨어진 시골인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에서 부친 숙량흘이 그의 노년에 모친 안씨(이름은 징재)를 맞아 공자를 낳았으나, 부친인 숙량흘(叔梁紇)과 모친인 안징재(顔徵在, 옌쩡짜이)는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다.

안징재는 숙량흘의 동료 무사이자 친구였던 안양(顔襄)의 셋째 딸이었다. 숙량흘이 안징재를 만났을 당시 숙량흘은 60대 후반이였고 안징재는 13세의 소녀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후세에 호사가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공자의 조상은 주나라의 이전 왕조인 은나라에서 봉토를 하사 받은 송나라의 공족(소국의 왕에 해당)이었으며 공자의 3대 전에 노나라로 옮겨 왔다. 그의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한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부친 숙량흘은 시골 무사였다. 부친과 그의 본처 시씨(施氏) 사이에는 딸만 아홉이었고 아들은 하나 뿐이었다.

공자의 자(字)가 중니(仲尼)가 된 이유는 집안의 장남인 맹피에 이은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소개되는 공자의 가계는 보통 그의 부친 숙량흘과 증조부 공방숙까지 언급되나, 후대에는 보통 공자를 시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소년 시절[편집]

《사기》의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키가 9척6촌에 달하여 '장인(꺽다리)'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자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공씨 집안에서 숙량흘의 자손으로 인정받지 못 했다. 3살 때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 안징재가 궐리로 이사하여 홀로 공자를 키웠다. 부친 [숙량흘]의 재산은 이복 누이들과 이복 조카에게 상속되었다. 그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모친마저 눈이 멀어 버려 생활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이 결과 공자는 어려서부터 거칠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 곤궁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기원전 536년]에 혼인하였으며, [기원전 535년] 공자 24세에 모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공자는 3년 상을 마친 뒤 부친 묘소 옆에 안장하였다. [기원전 533년] 19세에 송 (춘추 전국)(宋)나라의 병관(幷官)씨의 딸과 결혼하여 20세에 아들 리(鯉)를 얻었다.[2]

사생아였던 공자에게는 자신이 대부였던 숙량흘의 자손, 즉 귀족임을 인정받는 것이 필생의 목표였다. 무사였던 아버지와 달리, 공자는 글과 지식으로서 인정받으려 했다. 어릴 적부터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기를 좋아했다고 하며, 고실(故實), 즉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종교 의례·제도·관습 등에 밝았다. 공자에게는 특별한 선생은 없었다. 그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웠다. 그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주나라의 주하사였던 노자이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서 배웠던 것은 여러 문헌에 나온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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