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9월12일 수요일 복음묵상
“너희는 행복하다!” (루카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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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루카가 구분한 두 부류의 사람들을 열거해봅니다.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미움 받는 사람들, 쫓겨나고 모욕당하는 사람들이 한 부류이고,
배부른 사람들, 웃는 사람들, 칭찬받는 사람들이 또 다른 부류입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행복하다 했고, 후자의 사람들은 불행하다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미움 받는 사람들은 모두 선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배부르고 웃고 칭찬받는 사람들이 모두 악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구분의 기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가난하다는 것과 부유하다는 것이 행복과 불행의 기준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기준은 “무엇 때문에 가난하고 무엇 때문에 배부르냐”에 있습니다.
선한 마음 때문에, 옳은 마음 때문에,
신념에 대한 양심 때문에 얻어진 배고픔과 고통의 당사자들이라면 그들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고, 구조악(構造惡)에 편승하고,
권력으로 얻어진 부유함과 위세의 수혜자라면 그들은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쫓겨나고 모욕당하고 비방을 듣는 이들은 행복하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즉, ‘옳음 때문’이라는 것이 행복의 전제조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회적 경제적 소외된 이들을 생각해봅니다.
소외되었다는 그 자체가 천상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들 사이에도 악은 존재하고 죄도 존재합니다.
결국 선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살아야만 행복한 주인공들이 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음은 이 세상에서 여러 면으로 부유한 혜택을 누리는 이들을 생각해봅니다.
정당하게 일해서 그 결과로 정당하게 부를 벌어들였다고 합시다.
(불의하게 벌어서 배부른 자들은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옳지 않은 짓을 하지 않았기에 행복한 부류에 들 수 있을까요?
복음적 해석은 그렇지 않습니다.
최소한 어딘가에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이상
그 아픔을 분담해야 하는 것이 가진 자들에게 주어진 행복으로의 유일한 기회입니다.
이런 의미로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진정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구조적인 악과 모순이 없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의 생리 자체가 그것을 허락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각자가 서있는 곳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희망하며 구체인 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신 길이고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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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말: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이해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오로지 원하시는 것은 당신이 믿는 것입니다.”
이세사키 가톨릭 천주교회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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