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5 ㅣ No.130863
연중 14주일. 2019년 7월 7일.
루가 10, 1-9.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는 사실은「마태오」,「마르코」및「루가복음서」들 안에 모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들은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루가복음서」에만 있습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파견하셨다(9,1-6)고 말한 다음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심부름꾼들을 앞세워 보내셨다.”(9, 51-52)고 말합니다. 이「복음서」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제자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예수님이 앞장서서 예루살렘의 십자가를 향하여 먼 길을 가면서 여러 가지를 가르치신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루가복음서」저자는 초기교회의 발전이 열두 사도들의 수고만으로 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복음서」는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이 별도로 일흔 두 사람을 더 파견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 외에 일흔두 제자도 파견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십자가를 통해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루가복음서」를 집필한 사람이 그「복음서」의 후편으로「사도행전」도 집필하였습니다.「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떠나신 후, 그분이 파견한 제자들이 활동하여 그리스도 신앙이 예루살렘에서 온 세상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알립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 시대 그 지역 사람들의 예의범절(禮儀凡節)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시대 중동(中東) 사람들은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온갖 안부를 묻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한동안 지체하는 것이 관례(慣例)였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니는 사람은 그런 통속적 관례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의범절보다 선포할 복음이 더 우선(優先)한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인사도 하지 않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우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환자에게 성체를 모시고 가는 사람의 모습과 같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가는 사람은 귀에 라디오 이어폰 꽂고, 목에 무선 전화기 걸고, 사람들과 수다를 떨면서 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오로지 복음말씀만을 소중히 모시고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은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복음선포라는 말입니다. 기원후 85년경,「루가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배신자(背信者) 취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기원후 66년에 유대인들 중 과격파가 로마정권을 거슬려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역사가 유대전쟁이라 일컫는 독립전쟁이었습니다. 로마에서 팔레스티나까지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전세(戰勢)는 유대인들에게 유리하였습니다. 그러자 과격파가 아닌 유대인들도 그 전쟁에 대거 가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그 전쟁을 외면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이 파견한 병력이 도착하자 전세는 역전되어, 유대인들의 참혹한 패배로 전쟁은 끝났습니다. 수도(首都)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그야말로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기원 후 70년의 일입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민족을 배반한 자라고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본산(本山)인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것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기 때문이라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기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그런 해석은 유대인들을 더욱 자극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떼부터 유대민족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 한편 로마제국은 식민지 주민들에게 로마황제를 숭배하라고 강요하였고, 그것에 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 역사적 악조건에서 오늘 복음은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위험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선교는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나라의 선포는 그들이 말로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에게 병은 육체적 고통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종교적 절망이기도 하였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불행이 닥치면, 하느님이 벌하셨다고 쉽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벌을 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하느님은 자비하신 아버지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상치 못하였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불행을 당한 사람이 그것을 하느님이 주신 벌(罰)이라고 착각하며 절망하는 데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우리도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친 것은 하느님은 사람을 단죄하고, 벌을 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를 살리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은혜로운 분이라고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열두 사도의 파견과 별도로 일흔두 제자의 파견을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신앙인들의 노력으로 이룩한 교회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의 자유로운 참여와 기여가 있어, 발생하고 유지되는 유연한 조직체입니다. 유럽이 중세 봉건사회를 거치면서 교회는 성직자 위주의 경직된 조직체가 되었습니다. 극소수의 배운 사람들이 대부분의 무식한 사람들을 선도해야 했던 유럽중세 사회였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교계제도(敎階制度)에 몸담은 사람들은 교회의 모든 일을 결정하였습니다. 신분 따라 복장도 달리하던 시대였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아직도 유럽중세의 그런 유물(遺物)들이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신분을 탐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다스리고 억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섬김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몸가짐입니다. 경직된 과거의 유산을 털어버리고 섬김을 실천하는 유연한 교회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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