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8월 25일 목요일[(녹)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오늘 전례
[백] 성 요셉 데 갈라산즈 사제
입당송
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 종을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본기도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시작입니다.1,1-9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와 소스테네스 형제가 2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4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 나날이 당신을 찬미하고,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 그분의 위대하심 헤아릴 길 없어라. ◎
○ 세대가 세대를 이어 당신 업적을 기리고, 당신 위업을 널리 전하리이다. 당신의 위엄 그 찬란한 영광을 이야기하고, 당신의 기적을 노래하리이다. ◎
○ 경외로운 당신 업적 그 위력을 말하고, 당신의 크나큰 위업을 선포하리이다. 넘치는 당신 은혜를 기억하고 알리며, 당신 의로움에 환호하리이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42-5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2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45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46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8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49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50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51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단 한 번의 제사로 저희를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주님의 교회에 일치와 평화의 선물을 내려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땅은 당신이 내신 열매로 가득하옵니다. 당신은 땅에서 양식을 거두게 하시고, 인간의 마음 흥겹게 하는 술을 주시나이다.
<또는>
요한 6,5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주님의 자비로 치유를 받고 힘을 얻어
모든 일에서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불교에서는 ‘죽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비의 뜻은 대나무로 만든 길쭉한 매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사용하는 이유는 작은 충격에도 큰 소리가 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스님들이 참선할 때 잡념이 생기지 않도록, 피곤해서 졸음이 올 때 죽비를 치면 소리가 나기 때문에 잡념과 졸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죽비로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참선하는 스님의 몸을 죽비로 치기도 합니다. 죽비를 맞거나, 죽비 소리를 들으면 참선하는 스님들은 좀 더 맑은 정신으로 참선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죽비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도구입니다. 며칠 전에 수녀님으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아들에게 어머니가 축하인사를 하면서 뺨을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렸다고 합니다. 놀란 아들이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 사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늘 이렇게 깨어서 지내도록 하세요.” 아들은 그 의미를 알고 어머니께 그렇게 살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시간에는 3가지의 차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집니다. 마치 햇살이 온 땅을 골고루 비추듯이 하루 24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부자라고 해서 시간을 더 많이 얻을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도 하루 24시간은 주어집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8월 23일은 제게는 의미 있는 날입니다. 서품기념일이기 때문입니다. 생일, 결혼기념일, 축일, 기일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날에 사람들은 선물을 주기도 하고, 피정을 가기도 하고,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물리적인 시간, 의미의 시간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님들이 참선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듯이, 가치의 시간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물리적인 시간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가치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가치의 시간은 무엇일까요? 예전에 교리문답은 가치의 시간을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받는 것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원리와 기초에서 보다 상세하게 가치의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부귀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함보다 병약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치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이 바로 가치의 시간입니다. 진복팔단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가치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치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던 이방인 여인, 백인대장, 하혈하는 여인은 가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는 가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가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마치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나이다./ 당신이 앗아가면 그들은 한바탕 꿈/ 아침에 돋아나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피었다가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사람을 진흙으로 돌아가게 하시며 인간의 종락들아 먼지로 돌아가라./ 주여 당신만은 영원히 계시나이다. /주여 당신만은 영원히 계시나이다.” 나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에 의미라는 디딤돌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에 가치라는 계단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의미라는 디딤돌을 건너 천국의 계단으로 올라 갈 수 있습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은 전능하시면서 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가?
‘금쪽같은 내 새끼’에 아이들이 엄마를 극도로 미워하고 반항하고 때리고 심지어는 발에 오줌까지 싸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48화에 보면 10살 아이가 10개월째 등교를 거부하며 어머니 속을 썩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혼자 있을 때 공부를 집에서 합니다. 공부하기는 하는 데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 싫은 것입니다.
전에 나왔던 이지현 씨의 아이도 그랬습니다. 두 가정의 공통점은 이혼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없어서 엄마는 아빠 없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지 않으려고 잔소리를 많이 합니다. 아이는 잔소리 듣고 무언가를 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하고 싶은데 하고 나면 다 엄마가 하래서 한 것이 됩니다. 그러니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엄마처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주인이 하인들에게 제때 양식을 주라는 소명을 주고 떠났다면 주인이 돌아왔을 때 양식을 주고 있는 이들은 깨어있는 종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종들입니다. 종은 명령받고 파견받습니다. 우리도 명령받았습니다. 파견받았다면 소명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일어나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명령을 되새기지 않는다면 나를 주님의 종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분명 이웃에게 양식을 주라고 파견받았습니다. 양식은 은총과 진리를 말합니다. 은총은 살과 피를 내어주는 희생이고 진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두 일을 할 기회를 분명 주실 것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이 소명을 수행해야 언제 죽더라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깨어있는 사람이 됩니다.
문제는 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니까 당신이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고 시험하시는 것일까요? 그래야 우리가 하느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봉사하면서 자녀임을 완전히 믿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에게 지시하며 자신 때문에 자녀가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자녀는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봉사하게 해야 합니다.
2010년 한 여성이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당시 임신 4개월 때였습니다. 다행히 태아는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제왕절개 시술이 가능해질 때까지 5개월간 집에서 남편의 보살핌 속에 누워 있었고, 9개월이 되자 병원으로 옮겨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산모는 상태가 더 안 좋아졌습니다. 의사들은 산모는 회복하기 어려우니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지키던 가족들도 다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녀를 지키는 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시간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서툰 말투로 대화도 건네며 단 한 번도 칭얼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이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아기가 엄마의 병원 음식을 씹어 자기 입으로 엄마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주는 것처럼 행동하던 2013년 5월, 아기가 작은 소리로 엄마를 부를 때 엄마가 눈을 떴습니다.
중국 장롱샹 씨의 기적 같은 이야기는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에 기사화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에서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야 3년의 세월이 지났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제 머리맡에서 미소 짓는 아기가 제 아들이라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됐고요.”
의사들은 의아해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는 음식을 겨우 삼킬 수만 있었고 씹지 않은 것들은 소화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이것을 알고 음식을 씹어 엄마의 입속에 넣어주었을까요?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부모를 넘어서려는 욕구를 느낍니다. 태어난 아기도 엄마를 돌보는 것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니 부모는 더 낮아져서 자녀가 자신에게 봉사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도 부모처럼 온전한 인간임을 믿고 성장하게 됩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당신 자녀로 만들기 위해 당신에게 봉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혜인 씨는 지적 장애인입니다. 그런데 아기가 생겼습니다. 부모도 반대했고 주위 시선도 나빴습니다. 그래도 이혜인 씨는 예쁜 딸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딸아이가 복덩이입니다. 엄마를 자신이 돌봅니다. 지켜줍니다. 아침 일어날 때부터 씻고 옷을 입고 출근하기 위해 도시락을 싸는 것까지 모두 자신이 관여합니다. 엄마가 학교에서 청소하는 일로 적은 돈을 벌어올 때까지, 연서는 집에서 혼자 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까지 다 해 놓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퇴근하는 오후 2시쯤 되면 밖에 나가 엄마를 기다립니다. 마치 오래 못 본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엄마에게 안깁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다고 합니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왜 자신이 그런 부모를 만나서 이런 아이답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지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연서는 자기가 엄마를 돌보아 줄 수 있다는 것에 너무 기뻐합니다. 자신이 인간으로서 충분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 준 사람이 엄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 해 주는 게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약해지고 낮아져서 자녀가 부모를 위해 일하고 봉사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그렇게 진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당신 자녀가 되도록 하느님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선교를 위해 생명의 양식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 소명을 통해 우리는 주님 자녀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께서 어떤 소명으로 우리를 파견하셨는지 묻고 우리가 하느님을 도울 수 있는 존재임에 크게 기뻐합시다.
3.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깨어 있어라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
“깨어 있어라-충실하고 슬기로운 삶-”,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어제 배운 명상기도등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역시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 주님 안에 머무는 삶,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음의 은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깨어 있을 때 참으로 영적 부요의 삶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생명입니다.
깨어 있음은 관상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개방입니다.
깨어 있음은 경청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입니다.
깨어 있음은 지혜입니다.
깨어 있음은 평화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건강입니다.
깨어 있음은 자유입니다.
깨어 있음은 부요입니다.
깨어 있을 때 텅 빈 충만입니다.
깨어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깨어 있을 때 존엄한 인간 품위도 빛납니다.
깨어 있을 때 일체의 유혹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흡사 “깨어 있음” 예찬같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은 영성생활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요 깨달음입니다. 모두 “깨”자 돌림입니다. 순수한 우리 말이 고맙습니다. 저절로 깨어 있음이 아니라 부단한 영적훈련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나 미사 공동전례는 물론 일상의 모든 영적수행에, 영적훈련에 충실할 때 비로소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깨어 있는 삶입니다.
초대교회 신도들은 그들이 살아 있던 당대에 예수님의 재림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재림이 지체되면서 종말론적 의식도 쇠퇴해가면서 이완되는 모습이 보이자 다시 깨어 있음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변합니다. 교회는 주님을 대신하여 언제나 종말론적 자세로 간절히, 절박하게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살 것을 강조했습니다.
궁극의 희망이 있을 때, 인내도, 기다림도 가능합니다. 언젠가 오실 주님이 아니라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기에 끝까지 깨어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님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은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님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님이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입니다. 막연히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깨어, 한결같이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준비하며 기다림을 뜻합니다. 특히 공동체에서 중요한 책임이 맡겨진 형제들은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한결같이 깨어 사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주님 종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그러나 만일 불충不忠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님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괴롭히며 나태하게 살다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난감하겠는지요! 주님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방탕과 방종의 삶을 살다가 뜻밖의 사고나 병, 또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인생 얼마나 낭패스러울까요!
이래서 오늘 지금 여기서 늘 깨어 준비하며 책임을 다하는 삶이 정말 중요하고 본질적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특히 강조하는 바 우리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여, 또 일년사계, 일년 사철로 압축하여 어느 지점,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확인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래야 환상이나 거품을 거둬내고 오늘 지금 여기서 종말론적,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쏜살같이, 강물같이 흐르는 시간입니다. 젊음도 잠시입니다. 피정 시작한 날이 어제 같은 데 내일 모레면 끝납니다. 그러니 깨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 하루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나 코린토 교회 신도들은 참으로 깨어 있는, 유비무환의 사람들같습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그대로 깨어 충실히 살고자 하는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들립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 은혜롭고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깨어 살고자 힘쓰는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마지막 말씀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날로 깊게 해 주시는 미사은총이 우리를 더욱 깨어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이 은혜로운 미사를 통해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내리기를 빕니다. 아멘.
[되새김 구절]
1. 나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에 의미라는 디딤돌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에 가치라는 계단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의미라는 디딤돌을 건너 천국의 계단으로 올라 갈 수 있습니다. (조재형 신부 강론)
2. 다 해 주는 게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약해지고 낮아져서 자녀가 부모를 위해 일하고 봉사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그렇게 진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당신 자녀가 되도록 하느님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전삼용 신부 강론)
3.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님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이수철 신부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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