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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8월 26일 금요일[(녹)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매묵]2022년 8월 26일 금요일[(녹)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입당송

시편 86(85),1-3 참조
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 종을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본기도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유하시며,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17-25
형제 여러분,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18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9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
20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3(32),1-2.4-5.10-11(◎ 5ㄴ 참조)
◎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주님은 민족들의 의지를 꺾으시고, 백성들의 계획을 흩으신다. 주님의 뜻은 영원히 이어지고, 그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 ◎

복음 환호송

루카 21,36 참조
◎ 알렐루야.
○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단 한 번의 제사로 저희를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주님의 교회에 일치와 평화의 선물을 내려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04(103),13-15 참조
주님, 땅은 당신이 내신 열매로 가득하옵니다. 당신은 땅에서 양식을 거두게 하시고, 인간의 마음 흥겹게 하는 술을 주시나이다.

<또는>

요한 6,5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찬례로 충만한 구원을 이루시니
저희가 주님의 자비로 치유를 받고 힘을 얻어
모든 일에서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오늘의 묵상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깨어 있어라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정과 순수의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수녀회 피정지도는 많이 했지만 이렇게 ‘프란치스코’ 수도사제가 남자수도회, 특히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피정은 난생 처음입니다. 이 또한 주님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강론은 참 각별한 성격을 띌 것입니다. 제 은총의 발자취, 수도여정의 렉시오 디비나이자 고백이 될 것이며 또 새로운 시작의 다짐이 될 것입니다. 총원장 형제님과 나눈 카톡의 청담淸談의 대화가 이 강론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열정과 순수의 수도공동체 형제님들의 젊고 힘차고 아름다운 시편공동전례기도에 힘과 감동을 받습니다. 피정분위기도 진지하고 열심하여 좋습니다! 공동체 힘껏 섬기시노라 수고많습니다.”

 

“벌써 내일 모레 피정이 끝나네요. 내일, 혹은 토요일 강론때 신부님 수도여정안에서 묻어나는 복음삼덕에 관련하여 살아오신 얘기도 듣고 싶습니다. 젊은 수도자들에게 소중한 시간이 될 듯 싶습니다.”

 

“아, 그것들은 이미 제1부, 체험적 고백의 강의에서 다 피력됐다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기도시, 내 수도생활관, 명상기도, 희망의 여정, 행복기도에 제 삶 모두가 담겨 있지요!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살고 있으며,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 유일한 소망이랍니다. 이에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편히 쉬세요.”

 

“네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이렇게 정다운 청담을 나눈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만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밤중 잠을 깨는 순간, 형제님의 청에 순종順從하여 제 수도여정을 나눠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것은 순전히 성령聖靈께서 제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도저히 나누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 못 견딜 것 같았습니다.

 

제 성소聖召는 참 각별한 느낌입니다. 천주교를 몰랐던 시골 어린 시절부터 결혼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늘 자리했습니다. 이때는 집근처의 감리교회에 다녔지만 그리 열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본격적인 성소의 계기는 교대시절 뇌종양 수술로 RNTC 훈련을 못받자 군에 1970년 징집되어 34개월 군복무를 시작하면서 였습니다. 

 

입대시 소지품은 절박한 마음에 지녔던 성경 한권뿐이었습니다. 군복무중 개신교 신자로 주일 예배는 꼭 참석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은총의 섭리안에 순탄한 군복무후 제대해 마지막 한 학기를 마치고, 1974년부터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만8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1981년까지 재직하다 1982년 왜관 수도회에 만 33세로 입회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치열하고 간절했던 초등학교 8년의 교편시절이었고 수도 성소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교직을 돈벌이 직업職業이 아닌 성직聖職으로 생각하여 오로지 교육에, 아이들 사랑에 헌신하고자 했고, 결혼에 대한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유일한 바람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이었기에 8년간 학부모가 건네주는 일체의 촌지寸志도 겸손히 사양했고, 온전히 날마다 하루 전부를 아이들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았습니다. 지금은 하느님 사랑이 전부이지만 당시는 아이들이 제 사랑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향해 몸바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도 마음의 허기는, 공허는,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개신교에 다녔고 처음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을 알았고 성인의 삶에 매료되었습니다. 때로 목사님이 되라는 조언도 있었지만 직업으로의 목사님 하기보다는 교사 직업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떳떳할 것이라 생각하고 거절했습니다. 정말 내 가정을 가지고 성직을 수행한다는 생각은 염두에도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서서히 가톨릭에 끌리기 시작했고, 때로 미사에 슬며시 참석하기도 했는데 마음이 고향집에 온 듯 편안했습니다. 마음이 갈증도 허기도 해소되는 느낌이었고, 동료 가톨릭 교사들도 적극 수도사제의 길을 권했습니다. 당시 만 33세에 안정된 교직을 그만두고 수도회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모험이었습니다. 참으로 무모無謀하기에 일부는 권했지만 대부분 말렸습니다.

 

하느님의 성소에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다시 산다해도 이길뿐이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1980년 성탄절에 세례를 받고, 1981년 성탄절에 견진을 받고, 1982년초 사직辭職후 수도회의 각별한 배려의 은총으로 입회가 가능했습니다. 이때 역시 본당신부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사무장님이 잘 아시는 수도회 성소 담당 신부님을 연결해 줬기에 막차를 탄 기분으로 고령의 나이로 입회가 가능했으니 참 아슬아슬했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도 어제와 동일하게 “깨어 있어라”인데 이때부터 하루하루, 참으로 치열히, 절실히 깨어 살도록 노력했습니다. 보통 자연스런 입회자들보다 12년은 늦었기에 배로 열심히 산다는 각오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가톨릭 신학대 입학은 어려워 마침 수도자 신학교를 계획한 서강대 종교학과에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기막힌 섭리였습니다. 제가 입학한 후 더 이상 수도 신학생의 입학은 없었습니다. 마치 저를 위해 개설한 학과였던 듯 싶습니다.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신학, 철학, 종교학을 마치고 졸업하자 즉시 수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련기때는 토마스 머튼에 심취되어 수도원 도서관에 소장된 영문판 서적은 거의 읽었고, 나중 대학원 논문도 토마스 머튼의 관상에 대해 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련을 마치자 특별한 배려로 대구가대 신학대학원 제1회에 맞춰 제일 많은 나이에 자연스럽게 편입이 이루어졌습니다. 

 

대학원 2년간 교구 학생들과 함께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신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학부과목도 12과목을 수강하여 시험을 봤습니다. 참으로 치열히, 열심히 공부하여 만학晩學의 오로도 첫 번째인 저를 의아해하던 주위의 시선이 첫학기 1등하자 깨끗이 사라졌고 보는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대구가톨릭신학대학원에 자연스런 편입도 은총의 기적이었지만 종신서원을 앞두기 한해전 1987년 성 요셉수도원의 설립도 저에게 기막힌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서강대를 마련해 주신 주님은, 자연스럽게 대구가대로 이끄셨고, 신학교 공부가 끝나자 마자 때에 맞춰 평소 갈망해왔던 관상적 성격의 요셉수도원을 마련하여 이끄셨던 것입니다. 제 일정표엔 없었지만 하느님 일정표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일편단심一片丹心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신학교 공부를 끝내고 유기서원 3년차 만39세, 1988년 7월 11일 성 베네딕도 대축일에 요셉수도원에 부임했으니 올해로 요셉수도원에 정주하기 34년째요, 수도회 입회 만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요셉 수도원 초창기 역시 참으로 생존生存을 위한 참 치열했던 삶이었습니다. 1992년부터 2014년 자치수도원으로 승격하기까지 무려 22년동안 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우여곡절에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의 은총으로 무사히, 성공적으로 통과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선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1988년 7월11일 요셉수도원 부임전날 밤, 왜관 수도원 대성전에서 밤9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3천배 기도를 바쳤던 기억입니다. 성철 큰 스님의 좌우명 종신불퇴終身不退의 정신으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살아 온 그동안의 삶이었습니다. 값싼 은총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치열하고 항구한 깨어있는 삶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유명한 제 모토가 생각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참으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수도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날로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2014년 자치수도원으로 승격되면서 저는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가지면서, 제 수도여정을 렉시오 디비나 하였고, 이어 훌륭한 원장 후임자를 마련해 주신 ‘신神의 한 수手’ 같은 하느님의 섭리에 정말 감격, 감탄하였습니다. 저절로 모두가 은총이란 고백과 더불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도 날로 깊어지게 됩니다.

 

2014년 원장직에서 내려온후 오늘까지 평범한 수도승으로서 수도형제들과 34년째 정주중입니다. 우리 나이로 40세 부임하여 34년이 지나니 현재 74세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4시,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면 초겨울쯤 될 것입니다. 이런 자각이 환상이나 거품을 거둬내고 깨어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날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해가면서 저절로 깨어 살게 되며 주님을 알게 되고 나를 알게 됩니다. 결코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처녀처럼 문을 두드렸을 때 주님의 다음 말씀은 듣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과 신뢰를 받았더라면,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처럼 섬김과 사랑, 겸손을 위한 분투의 노력을 다해 평상시 영혼의 등잔에 신망애信望愛와 진선미眞善美의 영적 기름을 충분히 예비하여 늘 환한 등불 환히 켜들고 깨어 주님을 기다렸다면, 하늘 나라 잔치에 입장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깨어 영혼의 등불을 환히 켜들고 주님을 기다리다가 주님을 맞이하여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 잔치를 앞당겨 체험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고백기도시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깨어,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아멘.

 

생화 카네이션...^^


2. 2022년 08월 26일 금요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매일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신랑은 그리스도이시고열 처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입니다.

이들은 저마다 그리스도의 신부고 교회입니다(에페 5,22-32 참조).

슬기로운 처녀들은 모범적인 신앙인들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언뜻 보기에 착하기는커녕약고 야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슬기로운 처녀들의 지인이고 친구였을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에 기름이 떨어지자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그것을 좀 나누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 요청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왜 그랬을까요사실 이 기름은 다른 이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뜻합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의 깨어 있음을 대신해 줄 수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한 결 같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등잔의 불은 어두운 밤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충실히 사는 삶을 상징합니다.

등불의 기름은 행실이 동반되는 지속적인 믿음의 삶입니다.

이 기름은 뒤늦게 급히 마련될 수 없습니다.

날마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가난한 형제들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3.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3개월 시한부 선고받고 바뀐 인생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티는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안효정 간호사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러 경우를 보았다고 합니다. 한 어르신은 폐렴으로 오랜 병상 생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분에게 다녀가시는 분이 없었다고 합니다. 젊으셨을 때 가족에게 그렇게 못되게 해서입니다. 상태는 돌아가실 수밖에 없는데 버티고 계시는 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안 간호사는 청력은 살아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귀에 대고 크게 “할아버지, 부인이 보고 싶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눈을 뜨시더니 두 번 깜빡이더라는 것입니다. 안 간호사는 수소문하여 부인과 자녀들을 찾아 다녀가게 하였습니다. 부인이 그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내가 다 용서할 테니 편안히 가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고는 바로 임종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분은 90세가 넘은 할아버지셨습니다. 가끔 친지들과 지인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거의 산 송장처럼 30년을 병원에서 지내고 계셨다고 합니다. 간호사들은 자녀들이 다녀가지 않은 것을 알고는 연락이 끊긴 미국에 사는 아들에게 연락해 다녀가게 하였습니다. 2주 만에 아들이 다녀갔고 한 시간도 채 안 되어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죽음 직전에야 무엇이 부족한지 알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리 준비되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끝까지 그런 준비가 필요 없다고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불교 신자였던 이지은 씨는 말기암으로 투병하는 남편을 보살피며 병원에서 함께 입원하였던 다른 암환자들의 임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언가를 목격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남편과 함께 입원하고 있던 그 환자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내의 이름은 정자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눈의 실핏줄이 다 터져서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고 있었고 몸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있어서 천만 하나 덮어놓은 상태였으며 온몸의 땀구멍에서 소변이 빠져나와 주위에서 소변 냄새가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분의 아내와 밖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도 못 하던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불렀다는 것입니다. 

    “정자야, 정자야! 무서워, 정자야!”

그리고 그 아내의 목을 팔로 두르더니 “나 무서워서 혼자 못 가, 함께 가자!”라고 하며 놓아주지 않더랍니다.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이지은 씨는 갖은 방법을 써서 아내를 그 남편으로부터 떼어놓았습니다. 계속 그런 두려움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자기 남편의 귀를 막아주어야 했습니다. 보통 심박수가 30이하로 떨어지면 사망하는데 그분은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사흘이나 버텼다고 합니다. 

 

    이것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지은 씨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그 사람처럼 죽지 않으려는 마음만 있었습니다. 남편은 도박과 외도 등으로 빚을 잔뜩 지고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환자처럼 남편도 아내를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위에 무서운 사람들이 둘러섰다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남편의 눈은 처음 보는 공포에 질린 눈이었습니다. 이지은 씨는 불교 신자였음에도 ‘이 사람 지옥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병원이기에 무조건 사람들을 불러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언니에게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가시기 2주 전에 그분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반을 굶어 뼈만 남았고 온몸이 돌처럼 굳어있었는데도 맥박 30이 되었을 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셨습니다. 

 

[출처: ‘말기암 임종 환자들의 죽음을 보며 겪은 충격적인 사실’, 유튜브 채널, ‘아빠품안에’]

 

    오늘 복음에는 현명한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이 나옵니다.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무언가를 준비했다면 현명한 처녀들이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미련한 처녀들입니다. 누구에게나 오는 이 죽음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죽음 앞에 가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저는 할머니의 죽음으로 지금까지 죽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묵상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본 장례미사 중 가장 많은 신자가 참석한 미사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유학하며 한 동네에서 행해진 장례식입니다. 마체라타라는 곳의 500년 된 커다란 성당에서 행해진 장례미사였습니다. 보통 주일 교중미사보다 그 장례미사에 다섯 배 정도의 하객이 들어찼습니다. 당시 한여름이었고 기온이 40도 정도였습니다. 성당에는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시장님부터 시작하여 동네 사람들이 모두 이 미사에 참례한 느낌이었습니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성당에 빼곡히 사람들이 서 있었고 문을 열어 밖의 뙤약볕 아래도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공동묘지까지 행렬을 하는데 그 더운 날씨에도 아무도 떠나지 않고 마을을 가로질러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날 장례를 치르는 분은 성직자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여자 신자였습니다. 3년 전에 암으로 시한부 3개월을 선고받은 자매였습니다. 그 자매도 평소에 하.사.시.를 읽었다고 합니다. 시한부를 선고받고는 자신의 집에 신자들을 초대하여 성경을 읽고 생활 나누기를 하였고 늘 하던 대로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 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자매는 길을 지나가다 마주치면 언제나 먼저 달려와 인사하였고 신앙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저도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찾아가 인사를 드렸는데, 저는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그분은 저를 알아보고 찾아와주어서 고맙다며 천사의 미소를 보내셨습니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아내가 돌아가시기 2~3일을 제외하곤 3년 동안 기적적으로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렇게 3년 동안 가진 것을 다 주며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 은인이 되었기에 마을 사람들이 다 그 장례미사에 참례하여 그분이 가는 길에 함께 한 것입니다. 

   

    자매님은 특별한 삶을 산 것도 아닌데 시한부를 선고받고는 더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 안에서 탐욕과 무절제와 같은 안 좋은 욕망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며 방탕한 삶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 앞에 나아가는 데 기름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자매는 기름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일 수 있고 죽고 나면 그리스도를 심판관으로 만나야 함을 되새긴다면 내 마음 안의 기름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아쉬움 없이 행복하게 살았노라 말할 수 있습니까? 미소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기름이 가득 찬 등잔을 들고 계신 것입니다.


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하루사이에 부고를 두 번 들었습니다. 여행사를 하시는 형제님의 아들이 밤사이 심장마비로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젊은이가 꿈을 다 펴지 못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부모님의 상실은 어찌 말로 표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젊은 청년이 주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세상을 떠난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부모가 슬픔을 딛고 힘을 내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내년에 부제품을 받는 형제님의 장모님이 가슴이 답답하여 병원엘 갔지만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일주일에 3번씩 투석을 하였던 어르신입니다. 자식들에게는 큰 슬픔이지만 어르신께서는 이제 투석이 없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리라 믿습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Hodie mihi, Cras tibi)”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의 문을 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0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0처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모두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등잔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름은 그 시간과 공간에 채워야 하는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빌려올 수도 없고, 나의 것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 주어라. 누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까지 내 주어라.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이런 삶은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은 타인에게 빌려 올 수 없습니다. 공기가 있어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 그냥 우리가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삶 또한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빌릴 수 없습니다. 물이 있어서 마시는 것처럼 우리가 행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참된 신앙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불빛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되새김 구절]

 

1. 서강대를 마련해 주신 주님은, 자연스럽게 대구가대로 이끄셨고, 신학교 공부가 끝나자 마자 때에 맞춰 평소 갈망해왔던 관상적 성격의 요셉수도원을 마련하여 이끄셨던 것입니다. 제 일정표엔 없었지만 하느님 일정표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일편단심一片丹心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이수철 신부님 강론)

 

2. 슬기로운 처녀들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한 결 같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등잔의 불은 어두운 밤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충실히 사는 삶을 상징합니다.

(정용진 신부님 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