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8월 28일 주일[(녹) 연중 제22주일]/이수철-정용진-전삼용-조재형-이영근 신부 강론
오늘 전례
입당송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대영광송>
본기도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말씀의 초대
제1독서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3,17-18.20.28-29
17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으리라.
18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20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28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29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
주의 깊은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하느님, 당신은 가련한 이를 위하여 은혜로이 집을 마련하셨나이다.
○ 의인들은 기뻐하며 춤을 추리라.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너희는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주님이시다. ◎
○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 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네. ◎
○ 하느님, 당신은 넉넉한 비를 뿌리시어, 메말랐던 상속의 땅을 일구셨나이다. 당신 백성이 그곳에 살고 있나이다. 하느님, 당신은 가련한 이를 위하여, 은혜로이 마련하셨나이다. ◎
제2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2,18-19.22-24ㄱ
형제 여러분, 18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짙은 어둠과 폭풍이 일며
19 또 나팔이 울리고 말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이들은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이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22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23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24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7-14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 공동의 집인 지구에서 살아가는 교회를 지켜 주시고, 정치와 과학과 경제에 관여하는 이들과 함께 힘을 모아 육지와 바다와 공기를 보호하게 하소서.
2.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통치자이신 주님, 정치인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영을 부어 주시어, 우리나라의 평화로운 통일에 앞장서며 사랑으로 국민을 섬기는 일에 마음과 힘을 모으게 하소서.
3. 노동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공정하신 주님,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을 보살펴 주시어 마땅한 대가로 보람을 느끼게 하시며, 불안정한 일자리로 고통받는 이들은 주님의 위로와 사회 구성원들의 관심으로 새 희망을 얻게 하소서.
4. 지역 사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일치의 주님, 이념이나 종교 차이로 서로 갈등을 겪는 이들을 굽어살피시어, 그들이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물기도
저희가 드리는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이 제사로 거행하는 구원의 신비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더없이 사랑하시어
그리스도를 저희에게 구세주로 보내 주시고
죄 말고는 저희와 똑같은 처지에서 살게 하셨나이다.
그리하여 성자를 사랑하셨듯이 저희를 사랑하시고
저희가 순종하지 않아 죄를 지어 깨뜨린 계약을
성자의 순종으로써 다시 맺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또는>
마태 5,9-10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입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 위하여 감춰 두신
그 인자하심이 얼마나 크오니까
당신께 의탁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베푸시나이다.”(시편31,20)
이제 처서處暑(8.23)도 지나니 서늘 하기가 완연한 가을입니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희미하게 보이던 별들도 초롱초롱해졌습니다. 어제 8월27일은 참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입니다”, 고백이 나올 정도로 행복한 날이었고 그대로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수도사제인 저는 참 주님의 섭리 은총으로 같은 수도명으로 시작된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피정 지도를 마쳤습니다.
피정 참가자들 18명중 14명이 선교수도사제이며 4명도 언젠가는 사제가 될분들입니다. 한국13명, 잠비아5명, 인도2명 으로 구성된 모두가 순수와 열정이 넘친 다국적 수도회라 할 정도로 참 다채로웠습니다. 호칭은 모두가 “형제”였습니다. 8월22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시작하여 어제 8월27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로 끝난 일정이 우연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오늘 8월28일은 아쉽게도 연중 제22주일이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354-430) 기념 미사를 못 드리지만, 두 모자母子 성인을 생각할 때 늘 애틋한 마음이 들며 동시에 저와 제 어머니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생각할 때는 늘 다음 고백이 떠오릅니다.
“늦게서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여기 근거한 저녁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도 비록 오늘 부르지는 못하지만 참 아름답고 깊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깁니다.
“옛것이나 항상 새로운 주님의 아름다움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주님은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셨나이다.”
피정지도를 마친 후 귀원하자 총원장 형제의 단아端雅한 감사 답신도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안으로 성베네딕도
밖으로 성프란치스코
라는 말씀이 기도와 활동안에서 수도여정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이 길에서 만나는 모든이에게 주님의 기쁜소식을 전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탁마琢磨하며
그 길을 형제들과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멋진 겸심, 거룩한 결심에 진심으로 찬사와 격려와 더불어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그대로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레오 형제님!”
참고로 피정지도 주제는 “선교에 앞서, 선교와 더불어, 수도공동체에서의 기본적 수행들”이었습니다. 내 그리던 사랑, 수도원에 귀원했을 때 “난 수도승이다” 라는 자각과 더불어 흡사 야전사령부의 제자리에 온 듯 “주님의 전사戰士로 살다가 전사戰死하여 내 뼈를 묻을 곳”이란 순간의 결심도 새로웠습니다.
놀라운 기적은 제 침방에서 목격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이 또한 깊이 보면 하느님 사랑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사전에 사랑하는 수도형제와 주고 받은 메시지들 전 과정을 공개합니다.
“수사님, 침방 여기저기 바닥에 세워져 있는 앨범, 액자등을 벽의 적당한 곳에 붙여 드릴까요”
“적당한 때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질서의 질서’,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는 제 취향인가 봅니다.”
“지금 마르코 수사님이 수사님 침방을 아름답게 꾸미고 계십니다. 와보시면 놀라실 겁니다.”
정말 피정 끝낸후 침방에 들어서는 순간 놀랐고 오늘 한 밤중에 일어났을 때 또 두 번 놀랐습니다. 아,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입니다”, 즉시 강론 제목을 택하게 한 계기가 됐습니다. 어제 마지막으로 발송했던 메시지입니다.
“침방의 조화와 균형의 배치가 기막히게 절묘하고 아름답기가 가히 혁명적입니다. 형제애兄弟愛에 감동합니다. 놀라운 아이디어의 기적입니다! 감사합니다!!!”
요즘 일기쓰듯 강론도 자유로워졌습니다. 수도원의 환경은, 수도자의 방은 참 깊고 중요합니다. 수도자의 방에 대한 결론과도 같은 아름다운 대목을 강의록에서 인용합니다.
“수도자의 방은 숱한 투쟁, 패배, 승리, 기쁨, 눈물로 점철된 장이 될 수 있다. 방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아 수도자는 더 성숙되고 세련洗練된 자아로 태어나 그날의 도전에 다시 잘 직면할 수 있게 된다. 아마 아플 때도 방은 병실이 될 수 있고 죽을 때는 부활의 생명이 나오는 무덤이 될 수 있다. 방안에서 항구함은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잘 살 수 있는 비결이다.”
수도자의 방뿐 아니라, 이상적인 수도원 역시 어머니의 자궁과 같습니다.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 수도원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의 자궁같은 편안한 쉼터이자 지상에서의 천국인 수도원이라 어머님이 계신 고향을 찾듯이 끊임없이 형제자매들이 찾는 영혼의 고향, 하느님 집인 수도원입니다.
오늘 수도원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은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체험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살 수 있겠는지요? 바로 오늘 두개의 독서와 하나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첫째, 겸손입니다.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겸손은 덕행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가 겸손하기로 작정을 하면 등신等神이 되기 십상입니다. 본인은 절대 모르고 남만이 아는 겸손입니다. 겸손할 때 아름답고 교만할 때 추합니다. 누가 인품이 아름답다 느껴지면 그는 분명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을 연습하다보면 속없는 사람이 되기 일쑤입니다.
답은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진정 사랑할수록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겸손해 집니다. 우리 수사님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겸손의 어원은 흙이고 흙에 어원을 둔 인간입니다. 흙humus같이 겸손humilitas해서 사람homo임을 깨닫습니다. 흙을 닮은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집회서의 겸손에 대한 설명이 참 아름답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날로 가까워질수록 겸손이지만 하느님을 떠나 날리 멀리할수록 거만倨慢입니다. 겸손은 아름답지만 거만은 참 추합니다. 집회서의 말씀이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겸손하고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 주의 깊은 겸손한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
둘째, 환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초대”로 무려 아홉 번 나옵니다. 성경 원어는 ‘칼레오’ 곧 ‘부르다’라는 뜻입니다. 겸손으로 불린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초대의 마음, 초대의 사랑은 그대로 환대의 마음, 환대의 사랑과 통합니다. 초대와 환대의 사람 역시 겸손한 사람입니다.
초대의 자리, 환대의 자리에 갔을 때는 겸손히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 하십니다. 사실 겸손한 이들은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며 감춰지기를 바라고 끝자리를 좋아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높이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거만으로 높아지면 낮아지고 겸손으로 낮아지면 올라가는 것이 역설적 영적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의 진수, 환대의 진수를 보여 주십니다. 참으로 겸손한 환대의 사람은 가난한 이들을 우선합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바로 이게 진짜, 초대의 축복, 환대의 축복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불우한 이들을 형제애로 초대하고 환대할 때 마지막 날, 주님 친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실 깊이 들여다 보면 정도의 차이일뿐 모두가 장애인들입니다. 아니 이런 환대의 사랑 자체가 보답이 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의 행복을 살게 합니다.
셋째, 천국입니다.
참으로 겸손의 사랑, 환대의 사랑을 살 때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늘 나라, 천국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날로 가까워질수록 겸손에 환대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시나이 산으로 대변되는 옛계약과 시온산으로 대변되는 새계약의 대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 환대의 사람은 새계약의 사람이 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 천국을 삽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미리 맛보는 다음 새계약의 현실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를 두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감사하십시오. 이 거룩하고 은혜로운 미사가 아니곤 어디서 이런 새계약의 천상의 세계의 아름다운 현실을, 하늘 나라 천국의 행복을 미리 맛볼 수 있겠는지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살게 합니다. 겸손한 사람, 환대의 사람, 의인義人이 되어 천국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의인들아 기뻐하며 춤을 추라.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너희는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주님이시다. 그분 앞에서 기뻐 춤추라.”(시편68.4-5). 아멘.
2. 2022년 08월 28일 일요일
[연중 제22주일] 매일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기원후 2세기 무렵의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태양계 모델을 제시합니다.
이른바 천동설입니다.
그리고 약 1400년 뒤에 또 다른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을 뒤집습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반대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지동설입니다.
코페르니쿠스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관념을 뒤집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당신 삶의 중심이 누구인가? 당신인가 아니면 하느님인가?’
또는 ‘당신은 다른 이들을 다스리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당신이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에 살고 싶은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따르는 이들은 “내가 우주의 중심이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자 합니다.
자신은 선하고 자신의 판단은 올바르다고 여기며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합니다.
반면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따르는 이들은 이와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주의 중심’이시고, ‘예수님께서 나의 중심’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삶의 식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모시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의 자리는 끝자리입니다.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곳에서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만나며 하느님과 같은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살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은 “초대(招待)”라는 단어입니다.
무려 아홉 번이나 되풀이됩니다. 이 단어의 성경 원어는 ‘칼레오’, 곧 ‘부르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부름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첫자리가 아니라 끝자리로 부르셨음을 기억합시다.
3. 조재형 신부 강론
계란이 보통 계란보다 조금 커서 열어보니 쌍 란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10개의 계란이 모두 쌍 란이었습니다. 아침마다 쌍 란을 먹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8월 14일 지면에 좋은 글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희망과 열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희망에는 닮은 듯 다른 이란성 쌍둥이가 있습니다. 바로 열망입니다. 희망과 열망은 다르지만 늘 함께 다닙니다. 열망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희망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도움에 의탁하는 마음입니다. 열망은 새로운 일을 기획할 때 기대감이 솟구쳐 오릅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아침기도를 하면서 살짝 설레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룻밤을 자고 난 후, 이러한 수많은 열망은 하나둘 무너집니다. 이것도 저것도 원하는 대로 잘되지 않습니다. 바라고 또 바라지만 결국 현실은 이를 허용해 주지 않았다는 원망과 분노가 올라오기도 합니다. 열망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시들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사라진 열망으로 인해 마음 속 작은 틈 사이에서 실망과 좌절, 분노의 기운이 올라옵니다.
열망은 온전히 나의 것입니다. 내 능력과 힘으로 뭔가를 이루려는 갈망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고요함이 무너지고 불안해 집니다.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자신을 질책하기도 합니다. 열망은 온전히 내가 주인이기에 잘 안되면 내 탓이라는 자책과 네 탓이라는 원망 사이를 오가면서 우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다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박해의 칼날이 서슬 퍼런 가운데서도 용감하게 수천, 수만 리를 걷고 또 걸어서 목적한 바를 이루었습니다.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닌데 수많은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며 헤쳐 나갔습니다.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누군가의 도움을 신뢰하는 것이며, 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의 터널에서도 희망은 유효합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희망의 너머에는 늘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비록 당장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평온 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들을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열망이 없는 희망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열망 없이 희망만 하려는 사람은 겁쟁이고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희망 없이 열망하는 사람은 성급하고 무례하며 교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에 기대는 열망은 행동의 에너지이며 활력입니다. 그러므로 열망이 없는 희망은 가다가 지치면 현실을 잊고 책임을 회피하게 됩니다. 반면에 희망이 없는 열망은 뜻대로 안 될 때 쉽게 분노와 울분의 나락에 빠지기도 합니다. 열망이 있어야 자신을 믿고 행동하며, 희망을 할 때 이웃과 세상을 만나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기대게 됩니다. 희망은 열망 때문에 용감하게 바라고, 열망은 희망에 의하여 겸손한 바람으로 변화됩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은 희망과 같습니다.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알려줍니다. 자동차의 기름은 열망과 같습니다. 아무리 내비게이션이 좋아도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마치 새는 좌와 우의 날개를 펴서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희망과 열망이 손을 잡는다면 우리 삶은 많은 결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겸손을 이야기합니다. 높아질수록 더 욱 낮추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 사랑을 받으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더불어 나눔을 이야기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나누라고 하십니다. 비록 그들은 되갚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겸손, 희망, 열망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 희망은 자동차의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열망은 자동차의 기름과 같습니다. 겸손은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바퀴와 같습니다. 어느덧 8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을 기다리며 겸손, 희망, 열망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좋겠습니다.
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 사람 때문에 나를 잊어버리니 겸손하다 하더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식사를 초대받았는데 그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며 겸손에 대해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문제는 자기가 자신을 낮추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겸손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교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이 곧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해지는 방법으로 가난한 이들을 식사에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자신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늙은 마귀가 자기 조카 젊은 마귀에게 사람을 유혹하는 방법을 편지로 쓴 내용입니다. 이 중에서 겸손과 교만에 관한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겸손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곧 교만의 유혹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웜우드에게-
<지난번 네 보고를 받고 제일 걱정되는 건, 환자가 처음 회심했을 때처럼 자신만만한 결심들을 남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듣자 하니 앞으로는 계속 선한 일만 하겠다는 약속도 펑펑 하지 않았더구나. 심지어 한 번 받은 은혜가 평생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매일 매시간 닥치는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매일 매순간에 해당되는 은혜만 바란다니! 상황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야, 네 환자는 겸손해졌다. 미덕이란 인간 스스로 그것을 가졌다고 의식하는 순간에 위력이 떨어지는 법인데, 겸손의 경우는 특히 더 그렇지. 환자의 심령이 진짜 가난해진 순간을 잘 포착해서 ‘세상에, 내가 이렇게 겸손해지다니!’ 하는 식의 만족감을 슬쩍 밀어 넣거라. 그러면 거의 그 즉시 교만-자신이 겸손해졌다는 교만-이 고개를 들 게야.
혹시라도 환자가 위험을 눈치채고 이 새로운 형태의 교만을 다잡으려 들거든, 이번엔 그런 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게 만들어라. 이런 식으로 하면 네가 원하는 많은 단계들로 나아갈 수가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써먹지는 마라. 혹시라도 환자의 유머감각과 균형감각이 깨어날 시에는, 너를 간단히 비웃고 잠자리에 들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너는 환자가 겸손의 진정한 목적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단다. 겸손이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성격에 대해 특정한 형태의 의견(즉, 낮은 평가)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라고. ‘겸손이란 내 재능의 가치를 내가 실제로 믿고 있는 수준보다 낮게 보려고 애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꼭꼭 박아주거라.
실제로도 인간의 재능은 저들의 생각만큼 가치 있는 게 못 되지만, 그것은 중요한 점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어떤 자질에 대한 진실보다 평가를 더 중요시하게 함으로써, 미덕의 싹이 나타나는 족족 거짓과 가식의 요소를 그 중심에 주입하는 것이지. 이 방법을 통해 수천 명에 이르는 인간들이 ‘겸손이란 아름다운 여자가 스스로 못난이라고 믿으려고 애쓰며, 명석한 남자가 스스로 멍청이라고 믿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단다.>
겸손은 낮은 위치에서 나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KBS에서 2000년 9월 5일에 방영된 ‘내 남편은 두 살 – 정신연령 2세 남편과 결혼하여 살게 된 김영숙 씨 사랑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김영숙 씨(42)는 30대 중반의 요셉이라는 남편과 함께 반지하 월세방에서 삽니다. 그런데 남편의 정신연령이 2세 수준이기에 텔레토비 인형을 좋아하고 밥을 제일 좋아합니다. 한 시도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요셉 씨는 몸은 성인이지만 말 그대로 아기이기 때문입니다.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김영숙 씨는 공부 잘하는 오빠만 챙기는 집안 분위기에서 항상 소외되고 매 맞는 아이였습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오셔서 아랫목을 차지해 윗목 추운 곳에서 쭈그리고 잠을 자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입이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그런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남자아이들은 괴롭힘 감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영숙 씨는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부모님께 선언합니다. 아버지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아 중풍이 왔습니다. 몸 한쪽이 마비된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허락해 주어서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녀원에서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수녀님을 보고 얼굴이 이상하다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김영숙 씨는 수녀원을 나와서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소외되고 매 맞아 항상 얼굴에 상처가 있는 요셉에게 관심을 둡니다. 자기 처지와 같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요셉을 때리는 원장 때문에 김영숙 씨는 그냥 요셉 씨를 데리고 나와버립니다.
하지만 갈 데가 없었습니다. 직장을 얻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지만 두 살 어른을 데리고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이 배고프다며 발작을 일으켰고 도움을 청하러 간 사이에 요셉은 사라졌습니다. 김영숙 씨는 사방팔방으로 요셉을 찾아다녔고 한 시설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되돌아 나오는데 요셉이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매달립니다. 마음이 약해진 김영숙 씨는 요셉 씨를 데리고 다시 나옵니다.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조금이라도 얻으려면 혼인신고를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혼인신고를 하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또 쓰러지셨습니다. 하지만 김영숙 씨는 굳건히 요셉 씨와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요셉 씨는 얼굴이 많이 밝아졌고 이젠 장인어른을 업고 병원에 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김영숙 씨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겸손하여지려고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가장 가난한 사람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잊게 되어 겸손해진 것입니다. 아무리 겸손해지려고 노력한다고 두 살 지능밖에 안 되는 사람과 혼인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주위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합시다. 그들이 나에게 보답을 할 수 없기에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신데도 인간을 당신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란 생각을 잊으셨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담가버려야 합니다. 내가 죽고 사라질 때,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릅니다.
5. 이영근 신부님 강론
22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3)
오늘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는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탈렌트를 맡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탈렌트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종들에 대한 주인의 ‘믿음의 표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믿음의 표시’인 이 달란트는 주인의 선물이요,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에 따르는 소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선물은 잘 보관하라고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잘 쓰라고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선물은 이미 맺혀진 열매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자돈과 같이 씨앗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돌아와 셈을 할 때에 선물에 따라서 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어떻게 썼는지, 곧 그 소명을 얼마나 이루었는가에 따라 대가를 지불합니다. 결국, 선물에 따른 응답이 바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경기의 규칙인 셈입니다.
주인은 첫째와 둘째 종에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그리고 셋째 종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6)
사실, 은총의 선물은 항상 충만히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은총을 주는 대로 다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만큼만 받습니다. 곧 비워진 만큼만 받게 됩니다. 그런데 베풀고 나누어야 비워지기에, 결국 나누는 만큼 받게 됩니다. 반면에 선물을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쥔 것마저도 잃게 됩니다. 사실, 그 선물은 애시 당초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선물을 받은 이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충실하게 열매 맺는 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은총’ 곧 하느님의 사랑, 먼저 주신 사랑이요, 둘째는 은총에 따른 ‘소명에 응답하여 충성을 바치는 일’ 곧 은총을 열매 맺기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은총의 열매를 맺을 힘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은총’과 ‘십자가’야말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이 지상에서 벌어지는 경기의 규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은총 그 자체보다도, 은총을 실현하는데 따르는 십자가 그 자체보다도) 먼저 그것을 주신 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기 위한 주님의 사랑임을 아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5)
주님!
당신은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제게 탈란트를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 크신 당신의 사랑을 제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선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되새김 구절]
1. 참으로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불우한 이들을 형제애로 초대하고 환대할 때 마지막 날, 주님 친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실 깊이 들여다 보면 정도의 차이일뿐 모두가 장애인들입니다. 아니 이런 환대의 사랑 자체가 보답이 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의 행복을 살게 합니다.(이수철 신부님 강론)
2.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은 “초대(招待)”라는 단어입니다.
무려 아홉 번이나 되풀이됩니다. 이 단어의 성경 원어는 ‘칼레오’, 곧 ‘부르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부름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첫자리가 아니라 끝자리로 부르셨음을 기억합시다.(정용진 신부 강론)
3. 열망이 없는 희망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열망 없이 희망만 하려는 사람은 겁쟁이고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희망 없이 열망하는 사람은 성급하고 무례하며 교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에 기대는 열망은 행동의 에너지이며 활력입니다. 그러므로 열망이 없는 희망은 가다가 지치면 현실을 잊고 책임을 회피하게 됩니다. 반면에 희망이 없는 열망은 뜻대로 안 될 때 쉽게 분노와 울분의 나락에 빠지기도 합니다. 열망이 있어야 자신을 믿고 행동하며, 희망을 할 때 이웃과 세상을 만나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기대게 됩니다. 희망은 열망 때문에 용감하게 바라고, 열망은 희망에 의하여 겸손한 바람으로 변화됩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은 희망과 같습니다.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알려줍니다. 자동차의 기름은 열망과 같습니다. 아무리 내비게이션이 좋아도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마치 새는 좌와 우의 날개를 펴서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희망과 열망이 손을 잡는다면 우리 삶은 많은 결실이 드러날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강론)
4. 내 주위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합시다. 그들이 나에게 보답을 할 수 없기에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신데도 인간을 당신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란 생각을 잊으셨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담가버려야 합니다. 내가 죽고 사라질 때,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릅니다.(전삼용 신부 강론)
5. 은총의 선물은 항상 충만히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은총을 주는 대로 다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만큼만 받습니다. 곧 비워진 만큼만 받게 됩니다. 그런데 베풀고 나누어야 비워지기에, 결국 나누는 만큼 받게 됩니다. 반면에 선물을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쥔 것마저도 잃게 됩니다. 사실, 그 선물은 애시 당초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이영근 신부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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