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8월 29일 월요일[(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이수철-정용진-조재형-이영근 신부 강론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임금들 앞에서 당신 법을 말하며, 저는 부끄러워하지 않으오리다. 당신 계명을 되새기며 끝없이 사랑하나이다.
본기도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복된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성자의 탄생과 죽음을 미리 알려 주셨으니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를 본받아
저희도 끝까지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1,17-19
그 무렵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17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18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19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 의로움으로 저를 건져 구하소서. 제게 귀를 기울이소서, 저를 구원하소서. ◎
○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할 산성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보루시옵니다. 저의 하느님, 악인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
○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 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 ◎
○ 당신 의로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저의 입은 온종일 이야기하리이다. 하느님, 당신은 저를 어릴 때부터 가르치셨고, 저는 이제껏 당신의 기적을 전하여 왔나이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7-29
그때에 17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광야에서 외치는 복된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고 가르치며 용감하게 피를 흘렸으니
이 제물을 받으시고
저희도 그 길을 올바로 걸어가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으니
그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며 끝없이 외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이 대답하였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복된 세례자 요한의 천상 탄일을 기리며
저희가 모신 구원의 성체를 믿고 공경하오니
그 구원의 열매를 미리 맛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어떻게 살 것인가?”
-좌우명座右銘, 묘비명墓碑銘-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매일이 성인 축일이다싶어 참 고맙고 좋습니다. 가톨릭만의 자랑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 ‘삶의 등불’과도 같은 성인을 통해 파스카 예수님을 만납니다. 엊그제는 성녀 모니카, 어제 주일은 성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이자 천상 탄일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인 천상탄일입니다. 영성체후 기도가 이를 분명히 합니다.
“주님, 복된 세례자 요한의 천상탄일을 기리며, 저희가 모신 구원의 성체를 믿고 공경하오니, 그 구원의 열매를 미리 맛보게 하소서.”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을 맞이하니 지난 8월17일, 올해 9주기 기일을 지낸 정요한 수사가 생각이 납니다. 요셉 수도원에 정주중 떠난 첫 번째가 정요한 수사요, 두 번째가 올해 2주기 기일을 지낸 이바오로 수사입니다. 마치 공동체 수도형제들이 죽음을 향해 일열로 줄서있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정요한 수사의 죽음을 겪었을 때, 저절로 터져나온 세 마디 탄식이 생각납니다.
“아, 아깝다, 아프다, 불쌍하다!”
마침 정요한 수사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아마 선종 전해인 2012년쯤, 수도원 정문에 쇠기둥 십자가를 세워 놓았습니다. 제 졸저 2011년에 출간된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역시 정 요한 수사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쓴 글의 마지막 부분도 생각납니다.
“정요한 수사는 하느님께 참 많은 선물을 받았다. 이런 선물은 질투의 대상이 아닌 감사의 대상이다. 하느님께서 공동체에 주신 공동자산같은 선물이다. 많은 선물을 받은 수사들은 예외없이 자기 자랑을 할 줄 모르는 겸손한 사람들이며, 동료 수사들 역시 이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질투보다는 사랑을 보내며 자랑스러워한다.
어느 선배는 가끔 혼자말을 하곤 한다. ‘정 요한 수사같은 사람 하나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것은 욕심이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지나친 선물은 주지 않으신다. 우리 요셉 수도원은 이미 너무나 부요하고 아름다운 선물을 주셨으니까.”
이후 2년만에 정요한 수사가 선종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참 알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는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경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누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세례자 요한의 순교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었겠는 지요?
마치 죽음의 잔치를 연상케 하는 마르코 복음의 장면입니다. 삶의 중심이 없는 악인들의 집합소 같습니다. 헤로데는 의롭고 거룩한 성 요한의 진가를 알았지만 우유부단하고 경솔했기에 헤로디아의 사주에 의한 그의 딸 살로메의 유혹에 빠져 참으로 어처구니 없이 성 요한을 죽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이 또한 우연이 아닌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우리 역시 성 요한의 순교의 죽음에서 크게 배웁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의롭고 참되고 올곧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복음의 배치도 은혜롭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케 하는 성 요한의 죽음이지만, 예수님은 심기일전, 성 요한의 뒤를 이어 성 요한의 몫까지 사시려는 듯 주어진 사명에 몰두하십니다. 오늘 복음이 ‘죽음의 잔치’를 상징한다면 뒤이어 전개되는 복음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의 ‘생명의 잔치’가 펼쳐집니다.
오늘 미사중 감사송이 성 요한의 삶과 죽음의 깊은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얼마나 파스카 예수님과 깊은 결속관계에 있는 성 요한인지, 새삼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살펴보게합니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새삼 성 요한의 순교를 통해, ‘순교는 주님의 성체와의 결합이다’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성 요한에게 붙는 칭호도 많습니다. 금욕가, 순교자, 은수자들의 아버지, 마지막 예언자, 그리스도의 선구자등입니다. 무엇보다 성요한은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영성체송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는 고백처럼 한평생을 사셨습니다.
이렇게 성요한이 한결같이 항구히 살다가 거룩한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기도가 답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성 요한 역시 기도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와 주님과의 깊은 친교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모든 이들에게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뿐만 아니라 성요한은 물론 무수한 성인성녀들이 이처럼 기도를 통해 주님과 깊은 친교 관계를 누렸습니다. 살아 있는 성인이라 칭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다음 진솔한 고백을 통해 기도의 사람임이 환히 드러납니다.
“저는 아침마다 성무일도를 합니다. 저는 시편기도를 좋아합니다. 그러고 나서 미사를 거행합니다. 또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그런데 저녁 성체조배 시간이 참 좋습니다. 이때 분심도 들고 딴 생각도 하고 사실 기도하면서 졸기도 합니다. 이처럼 저녁7시부터 8시까지 한 시간 동안 성체 앞에 머물며 성체조배를 합니다. 저는 또한 치과에서 기다릴 때나 하루의 어느 때든 속으로 기도합니다. 저에게 기도는 언제나 기억과 추억이 가득한 ‘기억의 기도’입니다. 나는 주님을 잊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한시도, 단 한순간도 나를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얼마전 영정사진에 이어 게시판에 붙어있는 “본인의 선종 상본에 남기고 싶은 성구를 기재해 달라는 알림”이 참 이채로웠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것인가?”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그대로 좌우명이자 묘비명으로 여겨 영정사진과 함께 늘 지니고 살면 저절로 파스카의 삶을 살게 될 것이며 이보다 좋은 죽음 준비도 없겠습니다. 기재되어 있는 몇분의 성구도 참 좋았습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그대로 선종 상본에 성구뿐 아니라 좌우명으로, 묘비명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 기막힌 성구들입니다. 아마 이용할 수 있는 시편 화답송 후렴들도 무수할 것입니다. 문득 “주님의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시편 성구도 생각납니다.
평생준비가 죽음준비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참 좋은 파스카의 삶에, 참 좋은 선종을 위해 날마다의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게 하십니다. 아멘.
2. 2022년 08월 29일 월요일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 매일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인 요한은
부당한 죽음을 변호할 어떤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증언의 삶을 살아온 요한의 사명의 끝은 순교였습니다.
순교는 가장 완전한 증언입니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증언하다’는 곧 ‘순교하다’입니다.
어제 주일 복음 말씀은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끝자리에 가서 앉고,
또 우리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려거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과 같이
우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루카 14,7-14 참조).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공교롭게도 첫자리에 앉으려는 이들이 벌이는 잔치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 잔치는 임금인 헤로데가 베푼 잔치였고, 여기에 초대된 이들은 저마다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궁궐에서 벌어진 헤로데 임금의 잔치 이야기 다음에
곧바로 광야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잔치를 소개합니다(6,30-44 참조).
이렇게 하여 두 잔치를 대비시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세례자 요한의 잘린 머리로 끝나는 죽음의 식사라면,
이어지는 이야기는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배불리 먹은 예수님과 군중의 생명의 잔치입니다.
이는 삶의 기준에 따라 그 결과가 정반대로 나올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곧 우리의 본보기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우리가 누구를 본받아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헤로데의 궁전에는 부와 권력, 교만과 허영, 음모와 계략, 증오와 원한, 불의 그리고 쟁반 위의 잘린 머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광야에는 동정과 연민, 사랑과 친교 그리고 배불리 먹고 남은 빵과 물고기로 가득 찬 열두 광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머물러 살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
3. 조재형 신부 강론
영화 ‘한산’이 미국에서 개봉되었습니다. 저는 전편인 ‘명량’은 한국에서 보았습니다. 명량과 같이 한산은 이순신 장군이 일본의 수군과 전투에서 승리한 영화입니다. 명량은 적은 수의 배로 많은 수의 일본 수군을 이긴다는 내용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 바다의 지형을 잘 이용하였습니다. 회오리 물살이 이는 곳으로 일본 수군을 유인하였고 일본 수군은 회오리 물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조선의 수군에게 공격당하였습니다.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승리하였고, 우리의 바다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한산은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어 내는 이야기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바다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학익진’을 사용하였습니다. 마치 그물로 고기를 잡듯이 일본 수군의 배를 포위해서 공격하였고, 압도적인 승리를 하였습니다. 조선의 수군은 일본의 보급로를 차단하였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임진왜란은 끝이 났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영적인 전투에 임하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그리스도의 깃발과 사탄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는 무기는 ‘재물, 권력, 성공’입니다. 사탄의 무기는 그 힘이 강력해서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우리의 양심을 무너지게 합니다. 우리의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싸우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공격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우리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사탄은 또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다음에 하지, 남들도 그러는데, 나는 안 돼’와 같은 생각입니다. 다음에 하지라는 생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남들도 그러는 데라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합리와 하고 있습니다. 나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명량과 한산에서 이순신 장군이 승리할 수 있도록 공헌을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북선’입니다. 일본의 수군은 거북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거북선은 갑판에 철갑을 둘렀습니다. 그래서 백병전에 강한 일본 순군은 거북선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거북선은 두꺼운 용머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배와 충돌하면 일본의 배들은 충격에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거북선과 같은 것은 무엇일까요? 사탄의 세력이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떠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기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따로 한 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다가와도 기도하는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희망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줍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를 본받아 저희도 끝까지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하게 하소서.”
4. 이영근 신부님 복음묵상
220828. 연중 제22주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가을의 길목입니다. 햇살과 바람이 벌판을 휩쓸면, 벌판의 벼들이 익어갈수록 고개를 깊이 떨구어가는 계절입니다. 가을 햇살과 바람에 벼가 익어가듯, 우리가 말씀의 빛과 영의 바람으로 익어가고 익어갈수록 고개를 푹 숙이고 낮출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우리를 ‘겸손’에로 초대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말합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집회 3,18)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 가시어 때, 초대받은 이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8-11)
이 비유 속에서 초대받은 사람의 첫째 관심은 ‘윗자리’ 입니다. 그 자리가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자리이고 사람들의 관심과 주의를 모으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가 섬김 받고 대우 받는 자리이고, 자신이 드러나는 자리, 곧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초대받은 이의 관심의 초점이 초대해준 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대한 대우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초대한 사람은 혼인잔치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하건만, 정작 초대받은 사람은 혼인잔치의 기쁨보다 자신에 대한 대접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잔치에서 중요한 것은 자리가 아니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며, 초대해 주신 분의 호의에 감사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혼인잔치의 기쁨(초대한 분의 기쁨)은 어느 자리에나 다 차고 넘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리가 기쁨이 되고 있으니, 분명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을 채우는 것이 기쁨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높고 낮음’은 자신의 욕심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초대하신 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의 종결어미는 ‘낮아지고’ 혹은 ‘높아질 것이다’라는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곧 높낮이는 자신이 정하거나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배정되는 것이며, 주어지는 것이고, 부여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이란 어느 자리를 차지하느냐?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대하신 분 앞에 초대받은 자로서 있느냐? 하는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하느님 앞에 선 자기 실존에 대한 깨달음과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초대받은 사람들’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여전히 자신이나 형제들의 자리와 역할,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형제들의 대우에 시선이 머물고 있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초대해주신 분을 중요시 여기기보다 자신을 중요시하고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첫째 미덕은 겸손이요, 둘째 미덕도 겸손이요, 셋째 미덕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의 겸손한 사부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올리베따노 연합회 창설자)께서는 <편지 1>에서 말합니다.
“성인들의 가르침 전부가 가르치는 것이 바로 겸손이며, 갖은 말로 설득하고 요청하는 것도 바로 겸손입니다. 우리가 들은 이 겸손에서 모든 선이 나오고, 그 반대편에서는 모든 악이 나옵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를 초대한 이 혼인잔치에는 말씀과 성찬의 밥상이 너끈하게 차려져 있습니다. 이 밥상은 하느님이신 분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명하시어 차려놓으신 밥상입니다. 그리고 이 밥상은 윗자리에나 맨 끝자리에나 어느 자리에나 모두 풍성합니다. 그래서 자리 밑에서 부스러기만 주어먹을 수 있어도 행복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토록 잔치에 초대받은 것만도 이미 행복입니다.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고 함께 기뻐하는 이들이 있기에 더 큰 행복이요 기쁨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 자신을 내놓으시어 당신의 몸으로 밥상을 차리시고 섬기시면서 아버지 앞에서 높여지셨듯이, 우리 역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놓아 온 몸을 낮추어 형제들의 밥이 되는 본연의 자리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초대하는 이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베풀 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13)
초대하는 이에게도 역시 겸손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이 먼저 가닿아야 하는 것이 당연히 사랑이 필요한 이들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베푸는 것 역시 단순히 시혜를 베풀거나 기대와 계산, 혹은 자신의 필요와 만족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랑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결국,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을 베푸는 것도 겸손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13)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이 사랑하는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소서.
저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되새김 구절]
1.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매일이 성인 축일이다싶어 참 고맙고 좋습니다. 가톨릭만의 자랑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 ‘삶의 등불’과도 같은 성인을 통해 파스카 예수님을 만납니다. 엊그제는 성녀 모니카(8월27일), 어제 주일은 성 아우구스티노(8월28일), 그리고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이자 천상 탄일(8월29일)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인 천상탄일입니다. 영성체후 기도가 이를 분명히 합니다.(이수철 신부님 강론)
2. 우리의 본보기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우리가 누구를 본받아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헤로데의 궁전에는 부와 권력, 교만과 허영, 음모와 계략, 증오와 원한, 불의 그리고 쟁반 위의 잘린 머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광야에는 동정과 연민, 사랑과 친교 그리고 배불리 먹고 남은 빵과 물고기로 가득 찬 열두 광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머물러 살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정용진 신부 강론)
3. 예수님께서는 늘 따로 한 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다가와도 기도하는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희망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줍니다.(조재형 신부 강론)
4.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첫째 미덕은 겸손이요, 둘째 미덕도 겸손이요, 셋째 미덕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의 겸손한 사부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올리베따노 연합회 창설자)께서는 <편지 1>에서 말합니다.
“성인들의 가르침 전부가 가르치는 것이 바로 겸손이며, 갖은 말로 설득하고 요청하는 것도 바로 겸손입니다. 우리가 들은 이 겸손에서 모든 선이 나오고, 그 반대편에서는 모든 악이 나옵니다.”(이영근 신부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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