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11월 24일 목요일[(홍)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신부님 강론 5개
오늘 전례
입당송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 십자가의 말씀이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이다.
본기도
복된 안드레아와 동료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기까지 성자의 십자가를 충실히 따르게 하셨으니
그들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전하며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18,1-2.21-23; 19,1-3.9ㄱㄴ
나 요한은 1 큰 권한을 가진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의 광채로 땅이 환해졌습니다.
2 그가 힘찬 소리로 외쳤습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바빌론이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21 또 큰 능력을 지닌 한 천사가 맷돌처럼 큰 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며 말하였습니다.
“큰 도성 바빌론이 이처럼 세차게 던져질 터이니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22 수금 타는 이들과 노래 부르는 이들,
피리 부는 이들과 나팔 부는 이들의 소리가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고
어떠한 기술을 가진 장인도 다시는 네 안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맷돌 소리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23 등불의 빛도 다시는 네 안에서 비치지 않고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너의 상인들이 땅의 세력가였기 때문이며
모든 민족들이 너의 마술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19,1 그 뒤에 나는 하늘에 있는 많은 무리가 내는 큰 목소리 같은 것을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
2 과연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자기 불륜으로 땅을 파멸시킨 대탕녀를 심판하시고
그 손에 묻은 당신 종들의 피를 되갚아 주셨다.”
3 그들이 또 말하였습니다.
“할렐루야! 그 여자가 타는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
9 또 그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여라.
○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 ◎
○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
○ 감사하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하며 그분 앞뜰로 들어가라.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 찬미하여라. ◎
○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그분 자애는 영원하시며, 그분 진실은 대대에 이르신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20-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21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22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23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24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25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지혜 3,1-9)와 복음(마태 10,17-22)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거룩한 순교자들의 수난을 공경하며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언제나 주님께 충실하며
저희 자신을 주님께서 기꺼워하시는 제물로 바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거룩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하나의 빵을 함께 나누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한마음이 되고
끝까지 인내하여 영원한 상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2년 11월 24일 목요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루카 복음서에서 예루살렘 멸망 예고는 세 차례 등장하는데(19,43-44; 21,20-24; 23,28-31 참조), 오늘 복음은 그 가운데 두 번째 예고입니다.
마태오 복음(24,15-21 참조)과 마르코 복음(13,14-19 참조)의 병행 구절에서는 묵시 문학적 문체를 사용하며 종말의 대 환난을 집중적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루카 복음은 예루살렘 파괴를 역사적 사건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신학에 따르면, 이는 메시아 임금,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최종 심판의 예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예루살렘에만 한정되어 있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시작점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뻗어 나간다는 ‘보편적 구원’의 주제를 다룹니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라는 내용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 이제 유다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만백성에게 선포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집중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는 종말론적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우리는 ‘보편적 구원’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널리 선포되고 모든 이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복음화의 탁월한 도구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적들에게 둘러싸인 예루살렘엔 들어가지 마라.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기타를 처음 배울 때 부르던 노래 중에는 양희은 씨의 ‘아름다운 것들’이 있습니다. 멜로디가 감미롭고, 가사도 아름다웠습니다. 오늘은 노래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꽃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음 어디로 가야할까.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나무들만 남아있네 때가 되면 이들도 사라져 음 고요만이 남겠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꽃잎 끝의 이슬방울,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새, 텅 빈 숲에 남은 나무들은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꽃잎의 이슬방울은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곧 말라 없어지게 됩니다. 엄마도 없고, 다리도 없는 작은 새는 꽃잎 끝의 이슬방울과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진 사람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들, 갑자기 찾아온 병 때문에 놀란 사람들,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사람들은 어쩌면 텅 빈 숲속의 외로운 나무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바람아, 비야 알고 있니,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 속을 걷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겸손으로,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으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아버지의 자비로 그 꿈이 현실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성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한 삶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우리는 이성, 감성, 오성을 지닌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불안과 긴장을 평화와 일치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비록 멀고, 앞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하지만 힘과 힘의 충돌만으로는 평화와 일치를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서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21123.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담화, 곧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으켜줍니다.
먼저, 박해와 박해 가운데에 있을 증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그러나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루카 21,12-15)
박해가 오히려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깨우치십니다. 곧 박해를 당하게 되면,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눌변인 모세의 입과 함께 계셨듯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탈출 4,11-12.15-16). 그러니 박해를 통하여, 오히려 우리는 신앙이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기의 순간은 가장 좋은 기회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8)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보호해주고 지켜주실 것이니,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움 받거나 배척받게 되면 힘들어 합니다. 고난과 시련, 어려움이나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힘든 것은 피하고, 편하고 좋고 즐거운 것, 듣기 좋은 말에 더 맞들이고 쉽게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말합니다. 곧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19)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성 베네딕도 역시, ‘인내’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수도규칙 머리말 50)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다.”(필립 3,10;로마 8,17).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루카 21,17)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도 배척도 당신과 함께 받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5.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
-“인내의 승리, 찬미의 승리”-
어제 뒤늦게 읽은 영어 말마디 하나가 깊은 여운으로 남아 위로와 희망, 힘을 줍니다. 묵시록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모든 시간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All time is in God’s hand)”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한결같은 인내입니다. 결코 절망할수도 없고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믿음에서 저절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는 고백도 나옵니다. 세상 그 누구도 이런 믿음의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손(hand)’하니 거의 20년전 미국 미네소타주 성 요한 수도원에 머물 때 어느 노 수도사제와의 따뜻했던 우정이 생각납니다. 이름도 잊었지만 아마 지금쯤은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순수한 신부님의 모습에 호감을 느껴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더니, 손이 차다 웃으며 사양하기에 재차 다음 말을 건네며 악수에 성공했던 일화입니다.
“당신 손은 찹니다. 그러나 당신 마음은 따뜻합니다(Your hand is cold, but your heart is warm)”
말한마디 천량빚 갚는다 했습니다. 이 대화이후 신부님과 급속히 가까워져 짧은 동안이지만 깊은 우정을 나눴습니다. 하느님은 좋으신 분, 하느님 마음은 늘 따뜻할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 마음이 그대로 하느님 마음을 닮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God’s final victory)’입니다. 어제의 메시지, ‘모든 시간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와 더불어 역시 큰 위로와 희망, 힘을 줍니다. 역시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이들에게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항구한 인내도 이런 궁극의 승리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승리는 그리스도의 승리, 그리고 믿는 우리의 승리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를, 우리의 궁극적 승리를 믿기에 우리는 어떤 역경과 수난중에도 항구할 수 있습니다. 지난 11월13일 연중 제33주일 복음이 오늘과 같았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핵심 구절에 대한 교황님의 삼종기도후 강론도 잊지 못합니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By your perverance you will secure your lives)”에 대한 강론입니다. 좀 길다 싶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바로 이것이 인내다. 날마다 선을 건축하는 것! 인내는 특히 우리 주변의 현실이 다르게 행동하도록 부추길 때 항구히 선善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다. 인내는 선안에 머무는 것이다. 나의 인내는 어떠한가? 나는 항구한가 또는 매순간 믿음과 정의, 애덕을 살고 있는가? 즉 내가 좋을 때, 잘 나갈 때, 즐겨 원할 때, 나에게 적합하고 도움이 될 때 기도하는 반면 내가 불만족스럽고, 아무도 내게 감사하지 않을 때, 나는 기도하기를 멈추지는 않는가?
단적으로 내 기도는 주변 상황에 의존하는가? 혹은 주님께 항구한 마음에 의존하는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일깨우셨듯이, 우리가 인내한다면, 우리는 삶의 슬프거나 추한 사건들에도, 심지어 우리 주변에서 목격하는 악에도 우리는 두려움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항구히 하느님의 선안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토스트에프스키의 ‘카라마조포의 형제들’이란 소설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의 죄에 두려워하지 마라. 죄중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왜냐, 그것은 신적 사랑의 닮음이요, 지상에서 최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인내는 바로 세상에서 하느님 사랑의 반영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성실하기에, 그것은 항구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다. 기도에 항구했던 주님의 종, 우리 성모님(사도1,12-14), 우리의 인내를 강화해 주소서.’-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1코린13,4ㄱ). 바로 인내는 그대로 신적 사랑의 반영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갈수록 인내의 사람이 됩니다. 사랑의 인내, 믿음의 인내, 희망의 인내, 겸손의 인내입니다. 참으로 궁극의 승리자이신 하느님께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둘 때 한결같은 항구한 인내입니다. 이런 인내는 그대로 생명의 구원에로 직결됩니다.
바로 이런 인내를 북돋아 주는 결정적 수행이 하느님의 승리를 노래하는 찬미가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이런 하느님 찬미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승리를 앞당겨 살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은 승리한 이들이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바로 이 찬미가를 우리는 평생 매주 금요일 저녁기도 성무일도때 마다 바칩니다. 그대로 인용합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사오며,
만민의 왕이시여 당신의 길은 바르고 참된 길이니이다.
주여, 당신을 경외하지 않을 자 누구이오며,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자 누구오리까?
당신만이 홀로 거룩하시나이다.
당신의 심판이 공정하게 내려졌으니,
모든 민족이 당신 앞에 와 경배하리이다.”(묵시25,3-4)
얼마나 고마운 가톨릭 교회의 공동전례 찬미와 감사 기도인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 찬미의 생활화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의 인내를 붇돋아 주어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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