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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11월 28일 월요일[(자) 대림 제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2년 11월 28일 월요일[(자) 대림 제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예레 31,10; 이사 35,4 참조
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땅끝까지 전하여라. 보라, 우리 구세주 오시리니, 이제 두려워하지 마라.

본기도

주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비오니
그분께서 저희를 찾아와 문을 두드리실 때
깨어 기도하고 찬미하며 그분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생존자들에게 자랑이 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2-6
2 그날에 주님께서 돋게 하신 싹이 영화롭고 영광스럽게 되리라.
그리고 그 땅의 열매는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에게 자랑과 영예가 되리라.
3 또한 시온에 남은 이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이들
곧 예루살렘에 살도록 기록된 이들이 모두 거룩하다고 일컬어지리라.
4 주님께서는 심판의 영과 불의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오물을 씻어 내시고
예루살렘의 피를 닦아 내신 뒤에
5 시온산의 모든 지역과 그 회중 위에
낮에는 구름을, 밤에는 타오르는 불길로 연기와 광채를 만들어 주시리라.
정녕 주님의 영광이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지붕과 6 초막이 되어,
낮의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어 주고
폭우와 비를 피하는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대림 제1주간 월요일 65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2(121),1-2.3-4ㄱㄴ.(4ㄷㄹ-5.6-7.)8-9(◎ 1 참조)
◎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이 이미 서 있노라. ◎
○ 예루살렘은 튼튼한 도성, 견고하게 세워졌네. 그리로 지파들이 올라가네. 주님의 지파들이 올라가네. ◎
(○ 이스라엘의 법을 따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네. 그곳에 심판의 왕좌, 다윗 집안의 왕좌가 놓여 있네. ◎
○ 예루살렘의 평화를 빌어라. “너를 사랑하는 이들은 평안하리라. 너의 성안에 평화가 있으리라. 너의 궁 안에 평안이 있으리라.” ◎)
○ 나의 형제와 벗들을 위하여 비노라.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주 우리 하느님의 집을 위하여, 너의 행복을 나는 기원하리라. ◎

복음 환호송

시편 80(79),4 참조
◎ 알렐루야.
○ 주 하느님, 어서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 알렐루야.

복음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하늘 나라로 모여 올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5-11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에게 온갖 선물을 베풀어 주셨으니
그 가운데에서 저희가 모아 바치는 이 제물을 받아들이시고
현세에서 저희 믿음을 북돋아 주시어
후세에서 영원한 구원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대림 감사송 1 : 그리스도의 두 차례 오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106(105),4-5; 이사 38,3 참조
오소서, 주님. 저희를 찾아오시어, 평화를 베푸소서. 저희가 주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하늘 나라로 모여 올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 대림제1주간 월요일

 

요즘은 가전제품을 리모컨으로 작동합니다. 텔레비전, 선풍기, 에어컨, 전축의 작동을 리모컨으로 합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은 운전 중에는 음성으로 목적지를 말하면 알려주기도 합니다. 불르투스 기능이 있어서 선을 연결하지 않아도 음악을 듣고, 자료를 다운 받고, 메일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저도 지금은 리모컨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가전제품의 작동을 대부분 손으로 했습니다. 아련한 추억이지만 군대에서 텔레비전 채널의 선택권은 선임 병이 가지고 있습니다. 선임 병은 주로 말로 채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막 전입한 이등병들이 달려가서 채널을 돌리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 리모컨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리모컨과 불르투스 기능은 우리의 삶을 한층 편안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가상현실, 메타버스의 세상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심전심, 염화미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래는 이렇습니다. “그때 여래가 그 보좌에 앉아서 이 연꽃을 받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만 꽃을 들었을 뿐이었다. 법회에 참석했던 팔만 사천의 인간 세계와 천상 세계의 당시 대중이 모두 멈추고 침묵하였다. 이에 장로 가섭 존자가 부처님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는 불사(佛事)를 보고, 그 자리에서 확연해져 파안미소(破顔微笑)하였다.” 부처님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제자 가섭은 부처님의 의중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저와 같이 일하시는 주방 자매님도 이심전심의 마음, 염화미소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았어도 제가 즐겨먹는 음식을 알고 계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과일도 알고 계십니다. 가섭은 부처님과 함께 있으면서 부처님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보았기 때문에 부처님의 의중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방 자매님도 제가 즐겨 먹은 음식과 과일을 유심히 보았기 때문에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습니다.

 

리모컨과 불르투스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루어지지만 이심전심과 염화미소의 지혜는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관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다른 제자들은 침묵하고 있을 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의 관심과 믿음도 있었지만 그것을 하느님께서 알려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로마의 백인대장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의 종이 아팠을 때입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백인대장의 청을 들어주시기로 했습니다. 종을 사랑하는 백인대장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백인대장은 종을 치유하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우리는 어제부터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심전심과 염화미소의 마음으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으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려주었듯이,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청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2.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대림 제1주간 월요일

 

새 예루살렘

-참 겸손한 이들이 영원히 머무는 곳-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인간입니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 새 예루살렘 하늘나라 본향을 앞당겨 사는 참 겸손한 이들입니다. “행복하여라, 겸손한 이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예루살렘의 부흥에 대해, 즉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입니다. 주석에 나오는 설명입니다.

 

“이사4,2-6 대목은 귀양살이 다음에 쓰여진 것이다. 어둡고 재앙으로 가득한 지난날이 흘러간 다음에는 솟아날 희망이 엿보인다. 하느님이 선택하신 남은 자들에게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한 백성이 생겨날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탈출기의 기적을 다시 보여주실 것이다.”(탈출13,21이하 참조). 

 

이어지는 화답송 시편이 의미심장합니다. 어제와 똑같이 반복되는 화답송 시편122장입니다. 특히 최민순 신부님 번역의 화답송 시편 1절은 제가 8년전 2014년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 여정중 걸으면서 끊임없이 바쳤던 성구이기에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산티아고 순례 여정의 목적지는 바로 산티아고 대성전으로 그대로 예루살렘 대성전을 상징합니다. 주님의 집, 산티아고 대성전에 가까워질수록 빨라졌던 발걸음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적처럼 생각되는 것이 산티아고 대성전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기쁨에 샘솟는 힘이었다는 것입니다.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고 달려가듯 걸었던 당시 상황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매일 새벽 수도원 산책때 마다 산티아고 순례는 계속됨을 깨닫습니다. 순례여정중의 순례자 신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쁨의 샘, 활력의 샘, 주님의 집, 산티아고 대성전은 바로 예루살렘 대성전을 상징하는 듯 참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이어지는 후속 시편입니다.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은 이미 서 있노라.

 너 예루살렘은, 그 짜임새 멋지게 이룩된 도성,

 지파들이, 주님의 지파들이 저기 올라가도다.”

 

시편의 예언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확인되고 있습니다. 장차 종파를 초월하여 참으로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 활짝 열린 새 예루살렘 하늘 나라 잔칫상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참으로 종파를 초월하여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찾는 모든 겸손한 이들에게 활짝 열린 새 예루살렘 하늘 나라 잔칫상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의 전형적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이방인 백인대장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새 예루살렘 하늘 나라를 상징합니다. 다음 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백인대장의 면모가 잘 드러납니다. 종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또 주님께 대한 지극한 겸손입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 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마.”

“주님, 저는 주님을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사랑과 겸손의 믿음에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이런 지극한 사랑과 겸손으로 표현되는 믿음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킬 때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이어 곧장 주님은 “가거라, 네가 믿은대로 될 것이다.” 백인대장에게 응답하셨고 바로 그 시간에 백인대장의 종은 나았습니다. 치유의 기적에 앞서 백인대장의 지극하고 순수한 사랑과 겸손의 믿음이 있었고, 이어 주님의 말씀의 권능에 의한 치유입니다. 결코 주님만의 일방적 치유는 없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우리의 최선을 다하는 사랑과 겸손의 믿음과 더불어 주님의 은총이 합력하여 이뤄지는 치유의 기적입니다. 이 거룩한 하늘 나라 미사 잔치 시간, 백인대장처럼 겸손한 믿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우리에게 치유의 기적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아멘. 


3. 이영근 신부님 묵상

 

221127. 대림 제1주일.

 

“깨어 있어라.”(마태 24,42)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의 때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는 ‘깨어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깨어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두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37-41절)는 노아의 홍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는 하느님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집니다.
 
대체, 끔찍하고 잔인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를 말씀하시면서, 그때 그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심판을 받은 그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마구 먹고 마시는 사람들, 장가들고 시집가는 사람들, 들에 있는 사람들, 맷돌질하는 여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가 사람들의 타락 때문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안일한 삶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그들의 무관심과 타성에 젖은 평범한 일상의 굴레에 젖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죄를 피한다할지라도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 심판받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선과 정의로 진리 편에 서서 이를 행하고 투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곧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빛에로 나아가야 하고, 항상 빛 가운데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것이 ‘깨어있음’의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집주인과 언제 올지 모르는 도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알다시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 지 집 주인이 안다면, 깨어 있어서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4,43)

이는 어느 한 순간도 주의와 경계를 늦추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깨어 있으며, 하느님을 기다려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오실 것이니, 준비하고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전례>에서 ‘깨어있음’의 의미는 세 가지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지막 날에 오실 주님을 맞이 할 ‘준비로서의 깨어있음’이요, <둘째>는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이요, <셋째>는 ‘이미’ 와 ‘아직’ 사이에서, 주님과 동행하여 걷는 ‘기도로서의 깨어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첫 번째 분명한 사실은 주인님이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분명 오십니다. 만약 오시지 않는다면 굳이 고대하고 기다릴 필요도, 깨어있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깨어있음’은 ‘그분이 오신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러기에 진정 믿는 자만이 진정 깨어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언제 올지를 모릅니다. 그러기에 깨어 있음은 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요, 오실 님을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4)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잠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는 ‘이미’ 깨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깨어나라’고 하지 않으시고, ‘깨어 있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깨어난 까닭입니다. 그러니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잠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헛 군데 눈 돌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은 얼차려 입니다. 곧 정신차려있는 것 입니다. 마음의 경계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깨어있음’의 <둘째> 의미인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이 필요하게 됩니다. 곧 깨어있음은 한편으로는 빛을 향한 깨어있음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어둠에 대한 경계로 깨어있음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2-13)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서야 비로소 깨어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미’ 오신 주님과 다시 오실 주님 사이에서 살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 <셋째>의 의미인 주님과 동행하여 걷는 ‘기도로서의 깨어있음’이 있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깨어, 빚 속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이미 대림초를 밝혔으니, 깨어 그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을 걸어가자.”(이사 2,5).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깨어 있어라.”(마태 24,42)
 
주님!
깨어 있게 하소서, 깨어 기다리게 하소서.
고대하고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고 준비하게 하소서.
더 이상은 잠들지 않게 하시고, 졸지도 않게 하소서
헛 군데 눈 돌리지도 말게 하시고, 언제나 임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빛의 갑옷을 입고 빛 속을 걷게 하시고, 동행하시는 당신께 깨어 있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 대림 제1주일.

 

대림의 기쁨, 대림의 희망, 대림의 평화

-늘 깨어 있어라!-

 

 

참 기쁨은 대림의 기쁨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입니다. 참 희망은 대림의 희망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입니다. 참 평화는 대림의 평화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대리는 평화입니다. 이런 대림의 기쁨이, 이런 대림의 희망이, 대림의 평화가 맑은 정신으로 깨어 기도하며 준비하며 살게 합니다. 대림시기 새벽 성무일도 다음 초대송 후렴으로 기쁘게 하루를 시작한 우리 수도형제들입니다.

 

“오실 임금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이어지는 찬미가도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초와 함께 우리 마음을 기쁨과 희망의 빛으로 환히 밝혔습니다.

 

“맑고도 맑은 소리 메아리친다, 어두움 물러가라 울려퍼진다.

 깊은잠 깨어나라 밝혀주시듯, 예수님 하늘에서 비춰주신다.”

 

이어지는 아침기도 첫 후렴도 참 흥겨웠습니다. 해마다 대림시기 짧은 기도로 끊임없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 

 언덕들에서 꿀이 흐르리라, 알렐루야.”

 

그날이 오늘입니다. 주님이 오실 그날의 기쁨을 앞당겨 살아가는 대림시기 우리들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아름다운 전례가 대림의 기쁨을, 대림의 희망을, 대림의 평화를 한껏 고무합니다. 대림의 여정입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이요, 주님을 찾아 가는 우리의 순례 여정이요 이런 깨달음이 역동적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마중 나가는 우리들이요 주님과의 상봉시간도 날로 가까워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대림에 앞서 온통 깨어 살 것을 촉구합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러니 그날과 그 시간에 대비하여 늘 깨어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에 대비하여 집중적 깨어 살기 영적 훈련 기간이 오늘부터 시작한 대림시기입니다. 이어지는 노아때의 홍수의 비유도 실감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려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나 오늘이나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인간 무지의 현실입니다. 노아만이 깨어 살다가 이런 재앙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외적 환경에서 내적 삶도 참 판이함을 봅니다.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며, 맷돌질 하는 두 여자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 합니다. 바로 내적으로 깨어 살았던 자만이 구원 받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님이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복음의 결론 말씀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막연히 깨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전사’로 빛의 갑옷을 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로마서의 말씀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를 회심으로 이끌었던 말씀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대림시기에 잘 드러맞는 권고입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절박한, 절실한 심정으로 깨어 준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답게 빛의 갑옷을 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러 나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빛의 갑옷을 입혀 주시고, 당신을 입혀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학인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이듯,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주님의 학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환시가 우리의 삶이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배움의 여정’임을 일깨웁니다. 참으로 평생 주님을 공부하는 수행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주님께 대한 공부뿐입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주님께 배우고자 주님의 산, 불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주님의 집, 요셉 수도원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대림의 꿈은 평화의 꿈입니다. 오실 대림의 주님은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평화의 꿈이 바야흐로 오실 주님을 통해 실현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며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 않으리라.”

 

얼마나 많이 회자되고 있는, 얼마나 고무적인 평화의 주님인지요! 하느님의 염원이, 우리 인류의 궁극적 염원이 이런 평화의 꿈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평화의 전사로, 평화의 일꾼으로, 평화의 도구로 살라는 깨우침을 줍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대림시기만이라도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쟁이 멈췄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대림시기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대림의 기쁨, 대림의 희망, 대림의 평화를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영적 야곱 집안인 우리 모두를 격려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2,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