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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11월 30일 수요일[(홍)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5개

[매묵]2022년 11월 30일 수요일[(홍)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5개

 

오늘 전례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베드로 사도의 동생이다. 갈릴래아의 벳사이다에서 태어난 그는 형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였다(마태 4,18 참조). 안드레아 사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이끌었다(요한 1,40-42 참조). 그리스 북부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입당송

마태 4,18-19 참조
주님이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를 보시고 부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리라.<대영광송>

본기도

주님,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간절히 비오니
일찍이 복된 안드레아 사도가 주님의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렸듯이
이제는 주님 곁에서 저희를 위하여 영원한 전구자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10,9-18
형제 여러분,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9(18),2-3.4-5ㄱㄴ(◎ 5ㄱ)
◎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복음 환호송

마태 4,19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리라.
◎ 알렐루야.

복음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안드레아 축일에 바치는 이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어
저희가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도 감사송 1 : 하느님 백성의 목자인 사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또는>
<사도 감사송 2 : 교회의 기초이며 증거자인 사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도들을 기초로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어
지상에서 주님의 거룩하고 영원한 표지가 되게 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와 영원히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41-42 참조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는 그리스도라 불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그를 예수님께 데려갔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성사로 저희에게 힘을 주시어
저희가 복된 안드레아 사도를 본받아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살다가
그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성 안드레아 사도.

오늘의 묵상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나를 따라 오너라”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따르는 삶-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사내다움’ 또는 ‘용기’를 뜻합니다. 형 베드로와는 달리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부활해 승천한 뒤에는 그리스 지방으로 전교 여행을 갔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서 제자인 사도 스타키스를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안드레아를 초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보고 있습니다.

 

성 안드레아는 어부, 생선장수, 밧줄 만드는 사람, 그리스, 스코틀랜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수호성인이며 러시아 최고 훈장 이름이 사도 성 안드레아 훈장입니다. 스코틀랜드의 국기도 파란 바탕에 흰색의 X자형 십자가를 사용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가 순교한 곳은 그리스 아카이아 지역의 파트라라고 하며, X자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기에 X자 십자가를 ‘성 안드레아 십자가’로 부릅니다. 

 

안드레아가 X자형 십자가를 선택한 까닭은 그리스어로 X는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글자였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아가 형장에 끌려갔을 때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쳐들면서,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올려 주님의 곁으로 가게 해다오.”하며 기쁨에 넘치는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인을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상에는 십자가를 든 모습이 많습니다.

 

참 인상적인 성 안드레아 사도입니다. 스승 예수님의 감화가 얼마나 컸으며 또 얼마나 주님을 일편단심 사랑하고 따랐는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새삼 성소는 순전히 주님 주도하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어부인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 던지는 것을 보시자 즉시 이들을 제자로 부르시니 첫눈에 반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이들의 성실함과 내적 갈망을 한눈에 알아 채신 것 같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어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데오와 함께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시자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는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떠날 정도이니 이들의 내적 갈망이 얼마나 컸던지 짐작이 갑니다.

 

이제 이들 삶에는 획기적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따를 주님이 이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인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해, 목표없이, 방향없이, 중심없이, 의미없이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이런 성소는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의 갈망에 응답해 주님께서 이들을 부르신 것이니 섭리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우연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총으로 불러주신 섭리의 결과입니다. 만약 부름받지 않았다면? 가정법의 질문은 부질없는 질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의 삶이 중요합니다. 끝까지 부르심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두 번의 부르심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주님을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지금까지 잘 살았어도 앞으로 잘 못 산다면 헛일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보시는 주님이 아니라 현재를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내외적으로 불편하고 불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말그대로 순교적 삶입니다. 제 좌우명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시도 이런 삶에 대한 다짐을 표현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34년동안 요셉수도원에 정주하다 보니 참 감동적이 사례도 많이 목격합니다. 자기 뜻과는 무관한 질병도 많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병고중에도 믿음으로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들이 참 눈물겹습니다. 어느 암투병중인 자매는 날마다 오후 2-4시 사이 수도원 성당에 와서 조배를 드리곤 하며, 또 한 분 자매 역시 암투병에 믿음으로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건강하게 활동했던 분들인데 참 예측 불가능한 삶같습니다. 또 한 자매역시 한결같은 믿음으로 사셨던 분인데 수술후 어제 보낸 메시지입니다.

 

“수술은 잘 받았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토,일 빼고 30번 받습니다. 이상없이 잘 받을 수 있도록 기도부탁드립니다. 듣고 걷고 말하고 볼 수 있음에 성모님 통하여 예수성심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저를 보살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평상시 한결같이 믿음생활을 충실히 하였기에 이런 곤궁한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참 장하고 아름답습니다. 제1독서 로마서 바오로의 말씀입니다.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원망, 절망, 실망은 금물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소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심기일전 어떤 상황이든 주님을 받들어 부르며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이에 맞갖는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치유의 구원도 뒤따를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해도 제 삶의 자리에서 삶자체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 역시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한결같이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축복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십자가의 길'을 시종여일 기쁘게 항구히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2.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창조자만이 사랑할 수 있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는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지만 형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일과 사람을 잡는 일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물고기를 잡으며 그냥 살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의 존엄성, 혹은 나의 가치를 증명합니다. 우리에게 사람이 물고기가 아닌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다 존중 받고 싶습니다. 귀하게 여겨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정말 인간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존엄할까요? 당연히 그렇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누가 보장해줄 수 있을까요? 적어도 나라는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역사상 어느 나라가 국민을 존엄하게 보았을까요?

 

    2022년 10월 28일 금요일 밤 10시에 방송된 KBS1 TV ‘시사 직격’이란 프로에서 ‘3천 달러의 삶 – 해외 입양 잔혹사’라는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입양은 우리나라에서 부모를 찾을 수 없고 우리나라에서 입양되지 않는 아이들을 외국에서 찾아와서 아이들을 살펴보고 데려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난 60년간 약 25만 명의 아동이 마치 물건처럼 외국으로 팔려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냥 70~80년대는 특별히 더 나라에서 달러가 필요했고 입양기관도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경찰서에 길을 잃어 맡겨지는 아이들은 부모를 찾을 기회도 주지 않고 거의 해외로 입양을 보냈다고 합니다. 마치 현재 인터넷 쇼핑하듯 외국인들은 서류상으로 아이들을 입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팔려 간 아이들의 존엄성은 이미 포기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에 최근 어린 시절 해외로 입양된 한인 입양인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모여들었습니다. 덴마크를 주축으로 미국, 벨기에 등 여러 국가에서 모인 이들은 자신의 해외 입양 과정에서 강압, 뇌물, 문서 위조 등의 불법 입양 양상이 나타났다고 주장하며, 인권침해와 국가개입 여부의 진실을 밝혀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고아가 아닌 데도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명목으로 문서를 위조하여 3천 불을 받고 보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인신매매이고 그 이상의 범죄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른바 ‘우편 배송 아기’라 불리는 이 대리입양 시스템이 한국의 해외 입양률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양부모의 입양 적격성 심사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입양아동을 폭력, 학대 등의 위험에 노출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전 세계 아동 수출국 최상위 국가입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의 인권을 가장 무시하는 나라입니다. 

 

    물론 입양을 가서 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지만 사진만 보고 서류 한 장으로 물건처럼 아이를 사 온 부모가 아이의 인권을 존중해줄까요? 방송에서 1984년 초등학교 6학년 때 프랑스로 입양된 김유리 씨가 나왔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성폭력의 노예로 성장해야 했습니다. 

    부모를 고발하고 올해 초 입양서류를 확인하던 중, 자신이 호적상 ‘고아’로 기재되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친부모의 이름과 한국에서의 삶을 모두 기억하기 충분한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유리 씨가 받은 입양서류 속 친부모의 이름은 모두 ‘무명’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부모의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잠시 보육원에 아이들을 맡겼던 것인데 보육원은 그런 아이들까지도 다 고아로 서류를 위조해서 팔아버린 것입니다. 해외 입양률이 정점을 찍은 1980년대에는 출생아 중 1%가 넘는 아동이 해외로 입양되었고, 이는 일종의 민간외교 정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 돈 때문이었습니다. 

 

    김유리 씨는 아예 성적 욕구를 풀려고 자신을 입양하려고 한 양부와 이를 묵인한 양모에게 자신을 성적 노예로 넘겨버린 나라와 입양기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건 아동 인신매매라고 봅니다. 그 사람이 입양 수수료를 낸 목적은 아이를 물건처럼 사서 자기 성적인 욕구를 푸는, 아이가 그런 물건이 되는 것을 바랐다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다시 생각해봅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합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존엄성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자기를 존엄하게 여겨주는 대상 안에 속해 있어야 존엄합니다. 만약 돈을 좋아하는 나라나 성적인 욕구에 빠진 양부에게 맡겨지면 그 존엄성은 짓밟힙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엄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을 존엄하게 보아주는 대상은 그 창조자 뿐입니다. 인간에게는 부모입니다. 왜냐하면 자녀에게 자신의 살과 피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기에 자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부모는 자녀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종교도 우리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물고기로 볼 수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어렸을 때 길을 잃어 남의 집살이를 하던 10년간 학교도 가지 못하고 종처럼 일하면서 존엄성을 잃었습니다. 일하며 매도 수없이 맞았고 일한 값도 한 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존엄성을 짓밟은 그 집이 아주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습니다. 천주교를 믿는다고 사람을 존엄하게 대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도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냥 어쩌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물고기 대신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만이 우리 존엄성을 보장해주실 수 있는 분이란 뜻입니다. 세상 누구에게 의존해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만든 사람만이 그 만든 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압니다. 그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좀처럼 이런 인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화론을 믿을수록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할 수 없는 나라가 됩니다. 생존, 곧 돈에만 집중하며 인간이 죽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자기 이익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우리는 우리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나를 만든 분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려는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창조자이심을 눈치채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생존을 위해 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이웃을 살게 하는 창조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창조자가 되라고 하신다면 우리도 창조자의 자녀란 뜻입니다.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여 하느님 자녀로 만드는 일은 우리가 하느님께 속하였다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내가 존엄한 존재라는 인식은 내가 창조자의 일을 할 때 더욱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여자들을 사랑할 때는 ‘한 여자도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는 존재’라는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창조자의 협력자’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스스로도 이렇게 큰 자존감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느끼는 자존감이고 그 사람이 갖는 존엄성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자기를 피조물이라 여기는 한 우리를 존엄하게 보아주지 않습니다. 나도 하느님과 같은 창조자가 되었음을 믿지 않는 한 모든 인간을 물고기로 봅니다. 자신을 창조자의 자녀라 믿는 이들만 창조자의 존엄성에 참여하고 창조자 답게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니 자신이 창조자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창조자로서 창조자와 함께 사랑할 뿐입니다.


 

 3. 2022년 11월 30일 수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아 믿음과 선포라는 주제를 묵상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장면이 소개되는데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어부였습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베드로에게 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전합니다(1,40-41 참조).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믿음 선포로 예수님을 만난 뒤 그분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베드로에게 믿음을 전하며 주님을 믿도록 초대합니다.

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믿으려면 먼저 믿음의 내용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무엇인지 모르는 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이처럼 듣지 않고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데,

선포의 내용은 늘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복음을 선포하고 믿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사명이 주어집니다.

사사로운 내 생각이나 견해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 공동체의 공적인 믿음의 내용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을 전해 준 신앙의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우리도 후손들에게 믿음을 전하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탁월한 복음화의 방법은 삶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신문 홍보를 위해서 동창신부님이 있는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의 사제관에 머물면서 조금 놀랐습니다. 2층에 방이 있는데 거실에서 지냈습니다. 거실에 책상과 매트리스를 놓고 지냈습니다.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단순한 것을 좋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옷도, 살림살이도 거의 없었습니다. 동양화에 있는 여백처럼 신부님의 사제관은 여백이 많았습니다. 저도 단순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신부님을 보니 저는 가진 것이 참 많았습니다. 아프리카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내전과 분쟁 그리고 갈등과 분열이 있습니다. 서구 열강이 인위적으로 식민제국주의 시대에 국경을 정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같은 나라에 서로 다른 부족들이 살고 있기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낮은 민도와 독재정치가 내전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우라늄, , 다이아몬드와 같은 광물과 천연가스와 원유의 매장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강대국들이 개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지역의 반군과 테러리스트들은 이권을 노리면서 폭력을 행사합니다. 광산개발을 하면서 환경이 오염되고, 생명이 죽어갑니다. 차라리 지하자원과 천연가스와 원유가 없었다면 분쟁과 갈등은 적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부자청년이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부자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하지 말고, 거짓증언하지 말고, 남의 재산을 탐내지 마라.’ 그러자 부자청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청년을 기특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하였다. 네가 한 가지 더 할 것이 있다.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라라.’ 그러자 부자청년은 몹시 슬퍼하면서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부자청년은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아와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안드레아와 베드로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에게 그물과 배는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삶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동생인 안드레아는 요한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형인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아와 베드로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름이 반석이라면 안드레아 사도의 이름은 남자다움, 용기입니다.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들 또한 용기를 가지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가진 것이 많다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주님의 제자가 못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진 것이 없는 것도 만족할 줄 알면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5. 이영근 신부 복음 강론

 

221129. 대림 제1주일 화요일.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20,21)
 
 
“대림시기”을 시작하면서 <복음>는 예수님의 감사와 기쁨을 노래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지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하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20,21)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드리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대림시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뜻 안에서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그렇습니다. 오로지 아드님이신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아시며,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이들이 알게 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내주시기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모두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뜻”의 이루어짐이 제자들에 대한 행복선언으로 드러납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시를 받은 복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보고자 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그들에게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