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12월 3일 토요일[(백)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1506년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하비에르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다가 만난 이냐시오 성인의 영향으로 수도 서원을 하였다. 1537년에 사제가 된 그는 예수회의 첫 번째 회원으로 자선 사업에 헌신하였고, 인도와 일본에서 열정적인 선교로 많은 이를 교회로 이끌었다. 선교를 위하여 중국으로 향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52년 12월 중국 본토가 바라보이는 상촨섬에서 선종하였다.
1662년에 시성된 그는 바오로 사도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다.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먼 거리를 다니며 선교에 헌신하였기 때문이다.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아기 예수의 데레사(소화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입당송
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
본기도
모든 신자들이 그 선교 열정으로 불타올라
거룩한 교회가 세상 어디서나 새로운 자녀들을 많이 얻어 기뻐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30,19-21.23-26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9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20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21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23 그분께서 너희가 밭에 뿌린 씨앗을 위하여 비를 내리시니
밭에서 나는 곡식이 여물고 기름지리라.
그날에 너희의 가축은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24 밭일을 하는 소와 나귀는 삽과 거름대로 까불러 간을 맞춘 사료를 먹으리라.
25 큰 살육이 일어나는 날, 탑들이 무너질 때
높은 산 위마다, 솟아오른 언덕 위마다, 물이 흐르는 도랑들이 생기리라.
26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을 기다리는 이는 모두 행복하여라!
○ 우리 하느님을 찬송하니 좋기도 하여라. 마땅한 찬양을 드리니 즐겁기도 하여라. 주님은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시네. ◎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 지어 주시네. ◎
○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은 우리의 통치자,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임금님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5─10,1.6-8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9,16-19.22-23)와 복음(마르 16,15-20ㄴ)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온 인류를 구원하려는 열망으로 머나먼 땅에 찾아온
복된 프란치스코를 기리며 드리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저희도 복음을 전하고 증언하여
많은 형제들과 함께 주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또는>
<성인 감사송 1 : 성인들의 영광>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성인들 가운데서 찬미를 받으시며
그들의 공로를 갚아 주시어 주님의 은총을 빛내시나이다.
또 성인들의 삶을 저희에게 모범으로 주시고
저희가 성인들과 하나 되게 하시며 그 기도의 도움을 받게 하시나이다.
저희는 이 위대한 증인에게서 힘을 얻고
악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고 나아갈 길을 끝까지 달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과 함께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의 월계관을 받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성인들의 무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복된 프란치스코의 불타는 사랑을 본받아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고 복음에 충실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상급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2년 12월 03일 토요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열두 사도의 선발과 파견, 그리고 그들을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소개하기에 앞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을 요약하면서 스승이자 치유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부르시어 그들에게 권한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권한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아픈 이를 고쳐 주며 죽은 이를 다시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권한을 받고 파견되어 ‘사도’로서 수행해야 하는 복음 선포 활동은
마태오 복음 9장 35절에 묘사된 예수님의 활동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사도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파견된 이’, 곧 예수님에게서 권한을 받아 그분을 대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도가 수행하는 권한은 ‘파견한 이’와 ‘파견된 이’의 정체성을 밝히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파견된 이의 존재 이유와 역할은 파견한 이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 줄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제자들의 파견은 복음 선포로 하늘나라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고
하느님의 신적 현존을 확장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사도로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무엇을,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 답은 분명하고도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것을 그대로 하면 됩니다.
우리의 사도적 활동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신문 홍보를 다니면서 사제관에 머물 때가 있습니다. 같은 서울대교구 신부님들이 있는 곳에서는 며칠씩 더 머물 때가 있습니다. 비행기로 이동하는 거리가 많기도 하고, 동창 신부님인 경우에는 부담 없이 며칠 더 지내곤 합니다. 어떤 신부님은 제가 심심하지 않도록 등산을 가기도 하고, 운동을 하기도 하고, 교우들과 저녁 약속을 잡기도 합니다. 저는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편이기에 그렇게 미리 약속을 해 놓으면 편합니다. 그러나 거절도 잘 못하는 편이기에 너무 약속이 많으면 피곤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편히 쉬라고 하면서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제가 어디 가자고 하면 그때는 기꺼이 같이 가줍니다. 저도 편하게 책을 읽기도 하고, 강론 준비도 하고 모처럼 푹 쉬는 시간을 가지니 좋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일정을 잡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약간 심심하기도 합니다. 저도 신문사에 손님 신부님들이 오면 숙소는 마련해 주지만 제가 일정을 잡아서 안내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식당은 아는 곳이 많으니 같이 가지만 다른 것들은 뉴욕에 살아도 잘 모릅니다. 그래도 젊은 신부님들은 뉴욕에 처음 왔어도 저보다 더 잘 알아서 다니기에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주님의 날이 오면 우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날이 오면 우리의 아픔은 치유될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날이 오면 불의는 정의로 바뀔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날이 오면 원망과 불평은 감사와 행복으로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난 후에 선포했던 기도가 생각납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날이 오면 어떤 일들이 생길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날이 오면 참된 자유와 참된 평화가 시작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주님의 날은 시간이 아닙니다. 주님의 날은 나의 삶에서, 나의 행동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면서 주님의 날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주님의 날’입니다. 마리아가 노래했던 ‘주님의 날’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다시 갈망이 생기는 만족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빼앗아 갈까 걱정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비싼 대가를 지불해서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얻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 받을 수 있고, 용서하기에 용서받을 수 있고, 사랑하기에 사랑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에게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앓는 이들은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3.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21202. 대림 제1주일 금요일.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오늘도 우리는 눈을 뜨며 깨어나고, 눈을 감으며 잠에 듭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것이 있고, 눈을 뜨고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이가 있고, 눈을 감고도 보는 이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말합니다.
“그날에는~ 눈 먼 이들의 눈도 암흑과 어둠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7)
<복음 환호송>에서는 노래합니다.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주시리라”
그리고 <복음>은 ‘눈 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려 보게 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따라와서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어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비록 눈은 멀었어도 믿음으로 이미 눈 뜬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볼 수는 없었어도 그분에 대해서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보지 못하면서도 들은 바를 믿었으니, 진정 복된 이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데, 보지 못하면서도 믿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미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믿음의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눈 먼 이가 보게 된 이야기가 아니라, 믿는 이가 보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치유해 주실 것을 믿었고, 그래서 그 믿음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불신이요, 그분을 보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믿음입니다. 그분의 이 믿음에 우리의 믿음이 하나가 된 것이니다. 그러자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손을 대시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말씀하시고, 그들은 말씀을 믿고 눈을 떴습니다.
그렇습니다. 눈 먼 이들은 건강하게 되어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건강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었기에 눈이 열린 것이지, 눈이 열렸기에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했던 것입니다,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서 참된 빛이 오고, 믿음에서 참된 관상이 옵니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동안에는 보지 못한 채, 믿음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가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믿음으로 걸어가지만, 그날이 오면 그분의 집안에서 참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시편 27,1, 오늘 화답송 후렴).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 9,27)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보지 못하게 하는 불신의 암흑을 벗어나 보게 하소서.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하게 하소서.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하고,
보게 되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나를 먼저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보게 하소서.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개안開眼의 여정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이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27;1.14)
무지의 인간, 바로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무지로 인한 온갖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불가에서의 탐진치(貪瞋癡; 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三毒)도 바로 무지의 인간임을 말해줍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눈먼 두 사람은 바로 우리의 모습으로 무지의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고 답은 주님께 있습니다.
참 많이도 강론 주제로 등장한 무지입니다. 동방영성에서 제가 배운 귀한 가르침이 마음의 병이라 칭하는 무지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병은 마음의 무지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원죄原罪나 불가에서 말하는 무명無明도 바로 무지한 인간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지식이나 정보의 결핍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마음의 무지입니다. 언젠가 소개한 마음의 병인 무지에 대해 다시 나눕니다.
첫째 망각입니다. 마음이 하느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늘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에 영적 훈련의 수행들입니다.
둘째, 마음의 딱딱함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갈망해도 도저히 마음을 뚫을 수 없습니다. 즉 세상사에 빠지는 것, 육체적 쾌락에 집중하는 것, 부에 사로잡히는 것, 셋이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세 욕망들입니다.
셋째, 눈멈입니다. 마음이 완고함으로 고통받을 때,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고 하느님의 현존을 인정할 수도 없는데 이것이 눈멈입니다. 눈떳다고 하나 탐진치貪瞋癡에 눈먼 영적 소경은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두 눈먼 사람이 우리 무지한 인간을 상징합니다.
넷째, 무분별입니다. 마음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모든 마음의 병들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병들이 솟아나는 우선적인 병은 무지와 하느님의 망각입니다. 사람이 내적 자아를 만나 안에 있는 신적 실재를 발견할 때, 이들은 저절로 마음의 병들로부터 치유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참나를 발견할 때 무지의 치유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아의 치유입니다.
이래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예수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이래서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두 소경은 우리 눈먼 무지의 인간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고 싶은 갈망의 믿음은 근본적 영적 욕구입니다. 우리가 하는 공부도 결국은 무지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기 위한 공부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의 예언이 오늘 복음의 두 눈먼 소경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얼마나 가슴 벅찬 기쁜 소식, 복음인지요!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이사29,17-19)
그날이 바로 예수님과 만나는 오늘입니다. 바로 대림시기 오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장면을 상징합니다. 두 눈먼 소경은 눈은 멀었지만, 내적 눈은 주님께 대한 갈망의 믿음으로 열려 있음을 봅니다. 바로 이런 내적 갈망의 믿음이 있어 주님을 만났고 마침내 무지의 눈은 열립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대로 우리가 미사 시작하면서 바친 자비송입니다. 참으로 집요하게 자비를 청하는 두 눈먼 소경에게 주님은 묻습니다. 소원이 간절하면 문답도 짧고 순수합니다. 예수님과 두 눈먼 소경의 대화가 바로 그러합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혼자가 아닌 도반처럼 함께 한 두 눈먼 소경들이 상징하는 바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예, 주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간절한 믿음의 갈망에 주님을 만나 은총으로 무지의 눈이 열린, 두 소경입니다. 사람들의 불건전한 호기심을 경계한 주님은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라고 단단히 이르셨지만, 눈이 열린 두 소경은 기쁨에 벅차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리니 복음 선포자로 돌변합니다.
두 눈먼 소경의 무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의 믿음이 있어 주님을 만났고 마침내 믿음과 은총이 만남으로 눈이 열린, 개안한 두 소경입니다. 한 두 번 주님과의 만남으로 무지의 병의 치유가 아닙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만나 눈이 열려가야 비로소 무지의 치유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날로 눈이 열려가는 ‘개안開眼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복음을 만나 강론할 때 제목은 무조건 ‘개안의 여정’으로 정합니다. 불가의 용어이지만 개안이란 뜻도 좋고 무지에서 벗어나는 개안은 평생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육안의 시력은 날로 떨어져 어두워지더라도 영혼의 영안의 시력은 날로 좋아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답은 단 하나, 하느님의 지혜이자 진리 자체이신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만남과 더불어 회개와 겸손, 자기를 아는 지혜에 날로 무지의 병은 치유되어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날마다 정성을 다해 믿음으로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개안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12/3(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것을 그대로 하면 됩니다.
우리의 사도적 활동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정진만 신부)
2.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이사야서, 조재형 신부)
3.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나를 먼저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보게 하소서.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신부)
4. 육신의 육안의 시력은 날로 떨어져 어두워지더라도 영혼의 영안의 시력은 날로 좋아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수철 신부)
[9.6~12.14일 100일기도 중 제89일(89/100)]
주님!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영혼의 영안의 시력은 날로 좋아 밝아지게 하소서. 아멘.
- 2022년 12월3일(토) 7시...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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