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12월 2일 금요일[(자) 대림 제1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3개
입당송
본기도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저희를 죄의 위험에서 지켜 주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구원하여 주소서.
주님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29,17-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7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18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19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20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21 이들은 소송 때 남을 지게 만들고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며
무죄한 이의 권리를 까닭 없이 왜곡하는 자들이다.
22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원하신
야곱 집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더 이상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이 없으리라.
23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거룩하게 하며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리라.
24 그리고 정신이 혼미한 자들은 슬기를 얻고
불평하는 자들은 교훈을 배우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
복음 환호송
○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27-31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비천한 저희가 드리는 기도와 제물을 굽어보시어
아무런 공덕이 없는 저희를 너그러이 보호하시며 도와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우리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네. 그분은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바꾸어 주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신비로운 제사에 참여한 저희를 생명의 양식으로 기르시니
저희가 지상 것을 슬기롭게 헤아리며
끊임없이 천상 것을 찾도록 가르쳐 주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능력을 발휘하는 법: 주님께서 우리를 응원하시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눈먼 이가 눈을 뜨는 경위는 이러합니다. 처음에 그가 원해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그 다음엔 자신이 청하는 대상, 곧 그리스도께서 그러할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 9,28)
눈먼 이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 다음 눈을 뜰 능력이 자신 안에 있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눈을 뜨게 해 주시지 않고 눈먼 이가 믿는 대로 되라고 하십니다. 만약 눈먼 이가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서는 주님의 역할은 우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를 믿게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것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논문 발표를 할 때였습니다. 10여 년에 이르는 노력이 열매를 맺어야 하는 날이 다음 날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발표하는 날 잘못되어 학위를 받지 못하는 일도 있기에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주님께 의탁했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기 위해 앉았습니다.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금방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밤새 성당에서 잤습니다. 기도를 드린 시간은 30분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세 시간은 성체조배하고 자려고 했으나 깨어보니 바로 준비해서 나가도 빠듯한 시간이었습니다. 황당했습니다.
그래도 주님과 함께 잠을 잤다는 뿌듯한 마음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막상 발표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전혀 떨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교수님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발표하는 자리에 앉아서 오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께 이것저것 공지 사항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발표는 엉망이었습니다. 질문하시는 교수님들의 말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했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논문 발표를 논문 방어라고도 불리는데 그런 질문들에 수긍하는 것은 박사 학위를 받으려는 사람에게는 부적절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몰랐습니다.
며칠 뒤 논문 점수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점수가 조금은 낮을 줄 알았는데 세 분 교수님 모두 상당히 높은 점수를 준 것입니다. 함께 공부하던 외국 수녀님들이 저의 점수를 보더니 “난 죽어도 저 점수는 못 받을 거야!”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정말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가 한 일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특별히 도와 주신 일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발표하는 중간에 주님께서 도와 주신다는 것을 느꼈어야 했습니다. 그냥 저는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조금 못하게 대답해서 실망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감’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 잘 될 것이라는, 왜냐하면 주님과 함께 잤으니까 주님은 그만큼 나에게 보상을 해 줄 것임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하지 못해도 믿어주는 분이 곁에 계신다는 느낌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능력으로도 충분했던 것입니다.
부모님이 아이가 걸음마를 하고 말을 하려고 옹알이하는 것을 바라볼 때 어떤 느낌일까요? “넌 능력이 없으니까 내가 도와 주어야만 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네 안에 이미 걸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엄마 아빠는 그것을 믿어!”일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믿는 대로 아이는 그것을 해 냅니다.
만약 부모가 믿어주지 않으면 어떨까요? 어떤 마을에서는 자녀들이 두 발로 걷지 못하고 네 발로 걷기도 합니다. 터키 한 가족 중 5남매가 네 발로 걷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걷게 된 것은 처음에는 근친상간으로 결혼한 부모의 탓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유전자 결함 때문에 소뇌에 손상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상 근친상간으로 자녀를 낳은 사람이 많지만 자녀들이 네 발로 걷게 되었다는 예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소뇌가 손상된 다른 형제들은 힘겹지만 두 발로 걷고 있었습니다.
결국 ‘습관’ 때문이라는 최종결론이 나왔습니다. 이들의 부모는 아이들이 네 발로 걷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네 발로 걸어도 교정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이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네 발로 걸었던 아이들에게 교정을 시켜주니 어느 정도 두 발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가 믿어주지 않은 것이고 자녀들은 그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교정 평행봉을 만들어주고 간 몇 년 뒤 이 아이들 중 몇 명은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부모처럼 믿어주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할 수 있음을 믿어주는 이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믿어줄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물 위를 걸어보지 못하고 우리에게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마케팅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조서환 회장이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장군이 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장교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수류탄 사고로 한쪽 팔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사랑한다는 아내를 만나 학생 나이에 결혼하였습니다. 하지만 국가유공자임에도 한쪽 팔이 없다는 것만으로 아이 둘까지 있는 사람을 취직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기차에서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때 생각났던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아내입니다. 자신을 믿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준 아내 때문에 그는 다시 면접장으로 찾아갔고 글을 쓸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한 손만 있으면 되는데 왜 자신을 뽑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그의 기백에 결국 합격하게 되었고 장점을 부각하는 방법으로 마케팅계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능력을 갖췄습니다. 하지만 이는 가능성입니다. 씨앗입니다. 그것을 틔워줄 믿어주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처럼 되려면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믿는 대로 되어라!” 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그분을 믿고 내가 그분처럼 할 수 있음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한인성당에 신문홍보를 가면서 가까이에 있는 포트워스 한국순교자 성당의 신부님도 만났습니다. 포트워스 신부님은 구역장 모임에 저를 초대하였고, 혹시나 해서 신문과 구독신청서를 가져갔습니다. 신부님은 구역장들에게 본인이 구독료를 내 줄 터이니 신문구독을 하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신부님 덕분에 달라스 성당뿐만 아니라 포트워스 성당에서도 신문홍보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따뜻한 마음으로 신자들과 함께하니 포트워스 한인성당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달라스 한인성당이 깔끔하고, 세련된 서양식당 같다면 포트워스 한인성당은 구수하고, 정감 있는 맛 집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설날에는 세배 온 신자들에게 세배 돈도 넉넉하게 주었고,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한 점심 밥값도 내 주었습니다. 땅에 재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 같았습니다.
달라스 성당의 신부님은 신자들을 공평무사하게 대하였습니다. 신자들이 많기에 어느 한쪽 편을 들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난의 향이 천리를 가듯이 신부님의 공평무사함은 공동체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팬데믹 전에는 12시 영어미사는 미국 신부님이 하였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손님 신부님이세요?’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영어미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의 눈에는 손님신부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팬데믹으로 미국신부님이 오지 못하면서 자연스럽게 신부님이 영어미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영어로 강론을 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지만 2년이 지나면서 이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신부님에게 다가왔다고 합니다. 팬데믹 때문에 힘든 일도 많았지만 팬데믹으로 주일학교 아이들과 소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듯이 신부님의 진중한 마음은 신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저는 그날이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기도 했고, 그래서 떠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날은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언제나 기뻐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늘 기도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불평하고, 지금 원망하고, 지금 비관하면 언제나 제가 머무르는 곳은 가시방석입니다. 그러나 지금 감사하고, 지금 기뻐하고, 지금 기도하면 제가 머무르는 곳은 언제나 꽃자리입니다. 넉넉한 마음과 진중한 마음으로 신자들과 함께하는 신부님들에게 그날은 늘 ‘꽃자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이 먼 소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입니다. 아픈 이를 치유해 주신다는 소문입니다. 죄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신다는 소문입니다. 그래서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눈이 먼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눈이 멀었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던 소경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감사할 수 있다면, 기뻐할 수 있다면, 기도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마음을 환하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21201. 대림 제1주일 목요일.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고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1)
우리는 외형의 집인 가정 혹은 수도원을 ‘육신이 거처하는 집’으로, 그리고 하느님을 ‘마음이 거처하는 집’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의 육신이 거주하는 “성읍”에 대한 이야기이고, <복음>은 마음의 “집”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과 집이 세워진 기초, 곧 “반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 26,1-4)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고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1)
<독서>에서는 “하느님이 영원한 반석”이라 하고, <복음>에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란 영원한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실행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의 뜻’을 받들어 그분으로부터 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그 실행방법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고,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8) 라고 말씀시고, 온몸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어떤 것이 ‘아버지의 뜻’인지 잘 모를 때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내어놓는 쪽, 곧 자신이 손해 보는 쪽을 택하면 될 일입니다. 곧 “십자가”가 있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택하는 일, 곧 이해되지 않아도 먼저 용서하고, 오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고, 부당함을 당하고도 그를 감싸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하루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마태 7,21)
주님!
제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말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해되지 않아도 인정하고, 어긋나도 침묵으로 감싸며, 먼저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알면서도 손해 볼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오해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그분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믿는 대로 되어라!” 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그분을 믿고 내가 그분처럼 할 수 있음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전삼용 신부)
2. 소경은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눈이 먼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눈이 멀었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던 소경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감사할 수 있다면, 기뻐할 수 있다면, 기도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마음을 환하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3.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이영근 신부)
[9.6~12.14일 100일기도 중 제88일(88/100) ]
주님!
눈이 먼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저도 저의 미천함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고백하게 하소서.
미천한 저를 사랑하시는 자비하신 하느님께 감사기도 봉헌합니다. 아멘.
- 2022년 12월2일(금) 7시5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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