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12월 1일 목요일[(자) 대림 제1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5개
입당송
주님, 당신은 가까이 계시나이다. 당신 계명은 모두 진리이옵니다. 당신이 영원하시기에, 일찍이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깨달았나이다.
본기도
주님의 권능을 떨치시고 그 크신 힘으로 저희를 도우시어
자비로운 은총으로 저희 죄를 없애시고 어서 저희를 구원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26,1-6
1 그날 유다 땅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불리리라.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2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3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4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5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6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사람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제후들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
○ 정의의 문을 열어라. 그리로 들어가 나는 주님을 찬송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문, 의인들이 들어가리라. 당신이 제게 응답하시고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
○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21.24-2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에게 온갖 선물을 베풀어 주셨으니
그 가운데에서 저희가 모아 바치는 이 제물을 받아들이시고
현세에서 저희 믿음을 북돋아 주시어
후세에서 영원한 구원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반석 위의 인생집
-주님의 말씀(뜻)을 실행하는 슬기로운 삶-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가끔 인용했던 예화가 생각납니다. 언젠가 수도원 피정중인 형제가 “신부님은 여기 수도원에서 무슨 맛으로 사느냐?”물었습니다. 저는 지체없이 대답했고 지금 물어도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찬미하는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삽니다. 기도 맛으로, 말씀 맛으로, 즉 주님 맛으로 삽니다.”
사실도 그러하지만 설상 그렇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과감하게 고백으로 던져 놓는 것입니다. 사랑도 믿음도 그렇습니다. ‘사랑한다’, ‘믿는다’ 역시 고백으로 던져 놓고 나면 언젠가 그대로 사랑하게 되고, 믿게 됩니다. 바로 주님의 은총이 하시는 일입니다.
도대체 수도자에게 이런 찬미의 맛, 기도 맛, 말씀 맛, 즉 주님 맛 아니곤 어디서 궁극의 맛을, 기쁨을 찾을 수 있을런지요. 이건 수도자만이 아니라 궁극의 진리를 찾는 이에게 공통적일 것입니다. 나중 남는 것은 진리 자체이신 주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먹는 맛으로, 먹는 재미로, 먹는 기쁨으로 산다는 말도 들은적이 있을 것입니다. 먹는 것뿐 아니라, 맛을 찾기로 하면 일맛, 사람 만나는 맛, 술맛, 성性맛, 도박맛, 인터넷 맛 등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래서 중독입니다. 뭔가 중독되지 않으면 무미건조한 광야 여정 살아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온갖 중독 환자는 얼마나 많겠는지요!
이래서 제가 자주 강조하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이요 괴물이다.”라는 말마디입니다. 사실 인생 광야 여정도 성인, 폐인, 괴물로 분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인생의 참맛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바로 주님 맛, 말씀 맛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이래서,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실천하고자 아버지의 뜻을, 아버지의 말씀을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이 배움은, 공부는 평생이요 죽어야 끝나는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래야 심판의 그날에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하고 선언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이 때는 이미 아무리 후회해도 늦습니다. 그날의 심판날은 죽음의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자기 좋을 대로, 자기 식대로 살아 온 일방적 짝사랑의 삶을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경청함으로 주님의 뜻을 찾는 공부에 소홀했음이 분명합니다.
이래서 사랑의 침묵이요 사랑의 겸손입니다. 늘 내적 침묵중에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 재차 강조하는 주님의 말씀이 너무 자명하여 새삼 설명이 필요없어 보입니다. 과연 우리 인생집은 반석 위인지, 모래 위인지 성찰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복음 5장부터 계속된 주님의 산상설교중 결론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계속된 산상설교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반석 위의 인생집은 단 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과정입니다. 주님 은총과 더불어 늘 깨어 노력해야 합니다. 방심으로 서서히 안으로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에 끝까지 리모델링은 물론 늘 새롭게 시작하는 분투의 노력이 필수입니다. 한결같이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평상시는 모릅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반석 위의 인생집입니다. 바로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서원중 으뜸 서원인 정주서원이 목표하는 바도 바로 주님 말씀을 실행하며 주님 반석 위의 인생집을 짓는데 있습니다. 주님 반석 위에 세워진 정주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이요 수도자들입니다. ‘베네딕도의 평화(pax benedictina)’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은 정주의 수도자는 물론 정주의 신자들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주님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26,3-4)
어제 고백성사를 본 자매님에게 이 말씀을 보속 처방전으로 써드렸을 때 말씀의 위로와 격려에 눈물 글썽이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새삼 주님의 뜻을, 말씀을 실천하는 데, 즉 말씀 실천의 생활화, 일상화, 습관화에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신뢰와 사랑, 그리고 훈련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모래 위의 인생집, 사상누각에 대한 설명이 너무 실감이 납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여지 없이 무너져 내리는 참 어리석은 모래 위의 인생집들입니다. 과연 우리 나라는, 우리 사회는, 우리 가정 공동체는, 내 삶은 모래 위의 집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 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내적으로 무너져 내리면 아무도 도와 주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외적의 침입으로 망하기 보다는 내부의 부패와 타락, 분열로 망했으니 그대로 모래 위의 나라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사회나 가정 내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이태원 참사로 158명의 꽃다은 젊은이들이 죽은 사건도 우리 사회가 흡사 모래 위의 집처럼 참 허술하게 보여집니다. 극단의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는 이 나라도 흡사 모래 위의 집처럼 허술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우선 내 자신부터,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부터 냉철히 성찰하는 것입니다. 바로 은총의 대림시기, 주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주님 반석 위에 우리 인생집을 건축하는 보수(리모델링) 하는 절호의 시기입니다. 주님의 매일 미사은총이 반석 위의 인생집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시편118,25-27ㄱㄴ). 아멘.
2. 2022년 12월 01일 목요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산상 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7장 13-27절 가운데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스승으로서 부르심에 응답하여 당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파견될 것입니다(10장 참조).
파견된 이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배움은 필수입니다.
오늘 복음은 집 짓는 사람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 반대의 뜻을 지닌 두 개의 형용사 ‘슬기로운’과 ‘어리석은’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집을 짓는 두 사람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 집은 강물과 바람의 위협에도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집은 강물과 바람으로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수사학적 방식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의 심판을 경고하시며,
또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에서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결정을 내리도록 호소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복을 얻기 위한 조건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결심한 우리에게 용기 있는 결단을 요청하십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 상을 받거나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신앙이 쉽게 무너지는 사람의 특징
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저의 성격을 생각하면 강한 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편입니다 논리적이거나 직관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성적이고 상황에 따라서 결정하는 편입니다 그런 성격이기에 큰 결정을 해야 할 때면 당황하곤 합니다. 음식점에서 메뉴를 정할 때도 ‘아무거나’라고 하거나 남들이 시키는 걸 따라합니다 그래서 주관적이고 논리적이고 직관적인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더러는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포트워스에 갔을 때입니다 신부님이 선물로 카키색 모자를 사주었습니다. 저는 별 생각 없이 고맙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은 모자의 색이 마음에 안 든다고 다른 걸로 사주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현지에서 유명한 클럽을 가자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별 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자를 원했던 신부님은 입장료를 내면서 갈 필요가 있냐고 자기 의견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클럽에서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재미있게 즐겼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을 못 했습니다. 어떤 성격의 사람이 험난한 세상에서 더 현명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거인들의 발자취라는 책에서 각기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역사에 함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드럽고 약간은 우유부단했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정든 고향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도 하느님께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였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동생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였습니다. 섬세하고 욱하는 성격이었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모세는 욱하는 성격에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부르셨지만 소심한 성격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겁이 많아서 예수님을 3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그런 베드로가 복음을 선포하니 세례를 받은 사람이 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논리적이고, 직관적이었던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였지만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은 바오로 사도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타고난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삶의 환경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성격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성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하고, 세상의 어두운 곳, 소외된 곳, 가난한 이, 병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타고난 성격이 내 신앙의 반석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 내 신앙의 반석입니다.
오늘의 영성체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
5. 이영근 신부 강론
221130. 성 안드레아사도 축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는 공관복음에 따르면,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마태 4,19)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인 베드로와 함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특히 <마르코복음>에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는 장면에서 등장하며(마르 1,29-30), 예수님께서 성전파괴를 예언하셨을 때에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느냐며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마르 13,3-4).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번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요한 1,35-40). 그리고 형인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개하고,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요한 1,40-42). 또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는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드렸고(요한 6,8-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예수님을 만나 뵈러 온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도 합니다(요한 12,20-22).
한편, 초기의 동방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는 “맨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프로포클레토스’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흑해 주변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리스의 아카이아 지역인 ‘파트라이’에서 순교하였는데,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안드레아의 성화나 성상에는 X자 형의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새겨진 X자는 그 나라의 수호성인인 안드레아를 상징합니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져 오다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서 그리스 정교와의 화해의 표시로 그의 순교지인 ‘파트라이’에 모셔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라고 말씀하시고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태 4,20).
그런데 고기를 낚는 어부와 사람을 낚는 어부는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고기를 낚는 어부는 살아있는 고기를 죽이기 위해 잡아들인다면,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죄로 죽은 영혼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잡아들이는 것이니다. 또 고기를 낚는 어부는 고기를 골라서 낚아 올리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고기가 좋든 나쁘던, 곧 전교대상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낚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를 낚는 어부는 자신의 그물을 치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성령의 그물을 칩니다. 곧 자신의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가라는 데로 가며 그물을 던지라는 쪽으로 던지며 그분이 명령하는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해타산의 머뭇거림이 전혀 없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온전한 응답이 요구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께서 머무르는 곳에서 밤을 묵어가며 양성 받았듯이, 먼저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 안에서 양성을 받는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주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그물이 아니라 성령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깊은 곳, 당신이 원하신 곳에 그물을 치게 하소서.
자신의 먹이로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제 입맛에 맞는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모두를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아멘.
[12/1(목)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이래서,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실천하고자 아버지의 뜻을, 아버지의 말씀을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이 배움은, 공부는 평생이요 죽어야 끝나는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래야 심판의 그날에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하고 선언할 것이다.”(이수철 신부)
2.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복을 얻기 위한 조건입니다.(정진만 신부)
3. 성체성사를 믿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를 둔 한 형제들이 됩니다. 말로만 형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진짜 형제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창조자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 또한 나의 형제들이 됩니다. 그분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신부)
4.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삶의 환경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성격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성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는 것입니다.... 타고난 성격이 내 신앙의 반석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 내 신앙의 반석입니다.(조재형 신부)
5. 우리도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께서 머무르는 곳에서 밤을 묵어가며 양성 받았듯이, 먼저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 안에서 양성을 받는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9.6~12.14일 100일기도 중 제87일(87/100)
주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게 하소서
주님과 함께 머물며 주님의 양성을 받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타고난 성격에 감사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신앙의 반석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2년 12월1일(목) 9시3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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