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12월 23일 금요일[(자) 12월 23일]/신부님 강론 5개
입당송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나 용맹한 하느님이라 불리리니,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으리라.
본기도
성자께서 강생하실 날이 가까웠으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사람이 되신 말씀
저희와 함께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부당한 종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4.23-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
○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
○ 주님의 계약과 법규를 지키는 이들에게, 주님의 모든 길은 자애와 진실이라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와 사귀시고, 당신의 계약 그들에게 알려 주신다. ◎
복음 환호송
○ 민족들의 임금님, 교회의 모퉁잇돌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흙으로 빚으신 사람을 구원하소서.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거룩한 예배로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이
주님과 완전한 화해를 이루는 제사가 되게 하시어
저희가 깨끗한 마음으로 구세주의 성탄을 경축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주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자께서 오실 때에
등불을 밝혀 들고 마중 나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세례자 요한의 출생
-“우연은 없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 은총이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시편4-5ㄱㄴ)
12월17일부터 시작된 대림 2부의 매일미사 말씀 배치가 참 절묘합니다.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이 모두 12월25일 탄생하실 구원자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마침내 예수님의 절친이자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전합니다. 새삼 나오는 인물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 오심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현재의 우리들 모두에게도 오시는 우리 주님은 새삼 우리 삶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임을, 즉 우리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오 임마누엘 우리 임금이시요, 입법자이시며 만민이 갈망하는 이요, 구속자이시니,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주 하느님!”
대림2부 마지막 날 7일째 12월23일 M후렴 “오! 임마누엘(O Emmanuel)”, 애절한 가사와 곡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신비스런 출생에 앞서 잠시 수도원내의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요즘 근래 보기 드문 겨울 강추위가 더불어 참 많은 흰눈이 내렸습니다. 2000년대 들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예전 어렸을 때의 많은 눈과 강추위를 연상케 합니다. 어제 오후부터 수도관도 꽁꽁 얼어붙어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끝기도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려고 방에 들어가던차 마르코 수사님이 완전 군장한 듯 차림새로 나가기에 어디 가느냐 물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순대를 만들고 들어 온 수사님입니다.
“얼어붙은 수도관 물을 나오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밤 12:30분에 기상하여 수도꼭지를 틀으니 지하수 물이 콸콸 나오고 있었고 순간 감동했습니다. 끝기도후 잠자리에 들었을 때, 수사님은 얼어붙은 수돗물이 나오도록 고쳐놨던 것입니다. 새삼 “신의 한 수” 같은 하느님이 부르신 수도성소임을 깨닫습니다.
마르코 수사님만 아니라 공동체 12명 수도가족형제들 모두가 "신의 한수" 같은 보물寶物, 하느님의 귀한 선물膳物같은 수도자들입니다. 마침 어제부터는 수도생활을 해보고자 젊은 성소자 한 형제가 함께 했기에 밖의 강추위와는 달리 공동체 분위기도 화기애애했습니다.
살아갈수록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도저히 하느님의 섭리 은총 아니곤 해명할 길이 없는 하느님의 선물, 보물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니 수도가족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제 60대 성모님을 닮은 피정온 어머니들을 위해 미사중 강론시 ‘아침이슬’을 함께 불렀습니다. 웬지 이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납니다. 완전히 20대 젊은이들같은 모습으로 열창했습니다. 역시 70-80년대 민주화 운동당시 애국가와 같은 노래임을 새삼 깨닫고 감동했습니다. 이어 “아침바다 갈매기는”으로 시작되는 바다 동요도 힘차게 불렀습니다.
아마 자매들에게 이 두 노래를 부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넉넉하고 푸근한 모성애 향기 가득한 50-60대의 어머니들을 보면 마리아 성모님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절로 마음 끌리는 모성애 가득한 어머니들 덕분에 나라도 가정도 건재함을 깨닫습니다.
요즘 또 산책중 즐겨 부르는 노래가 70년대 후반부터 널리 불려졌던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입니다. 몇 번 소개했지만 1절의 가사와 곡을 부르며 주님의 평생 전사로서의 신원을 확인하는 참 감동적인 노래입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수도원)’에 ‘군인이(수도자)’ 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30년(4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꽃다운 내청춘, 푸른옷(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꽃다운 이 내 청춘”
‘꽃다운 이 내 청춘’ 말마디는 반복하곤 합니다. 흡사 군가같아 주님의 전사, 수도자로서 영적전의(靈的戰意)를 새롭게 하는 참 제가 뒤늦게 사랑하게 된 노래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통해 두루두루 우리의 성소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제게 다시 살라해도 이렇게 뿐이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성소에 불림받지 않았다면 가정법의 질문도 참 부지없는 질문처럼 생각됩니다. 이렇게뿐이 살 수 없는 수도성소이기 때문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분들 역시 잘 깊이 들여다보면 최상, 최선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섭리 은총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통해 하느님의 절대적 섭리 은총에 참 신기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불림 받은 이름을 쓰는 순간,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요한 이름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입니다.
새삼 아무도 하느님의 섭리 은총을 막지 못함을 봅니다. 막혔던 둑이 터지듯 저절로 흘러나오는 즈카르야의 하느님 찬미는 내일 나올 것입니다. 즈카르야에게 생긴 기적같은 사건으로 모두가 두려움에 휩싸였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말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물음은 대림시기 우리 자신에 대한 물음이 됩니다. “나는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끊임없이 물으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보살필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시고 한결같으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제1독서 말라기 예언서 말씀대로 엘리야의 재림같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통해 그 약속을 지켜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그는 제련사의 불같고, 염색공의 잿물같으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 세례자 요한과 함께 주님의 길을 닦으며, 회개의 삶으로 주님께 돌아와 본연의 참나를 살게 하십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21,28). 아멘.
2.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의 이름이 누구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 것인지 결정한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마리아처럼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집안에서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이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요한의 집안에서는 요한을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즈카르야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 이름은 자신에게서 오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준 대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제 요한은 즈카르야가 아닌 주님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 66)
이름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이름이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것인지 결정하는 그릇이 되기 때문입니다. 개밥 그릇을 가져온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 사람 먹을 음식을 주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사람 밥그릇을 가져와야 합니다. 밥만이 아니라 밥그릇도 자기 부모님이 주는 것입니다.
노력하면 될까요? 노력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이가 노력하면 어른이 될까요? 노력이 아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의 모든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일까요?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을 받게 만드는 것이 자녀에게 해로운 일이 아닐까요?
'금쪽같은 내새끼' 97회에 ‘분노 조절 불가 금쪽이’가 등장했습니다. 하도 불안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데 이 아이의 화풀이 대상, 혹은 자기 마음을 안정 시켜주는 대상은 엄마입니다. 학교 갔다 와서 엄마가 없으면 아이는 분노를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욕은 물론이요, 폭력까지 쓰기도 합니다. 사람 많은 곳에서 남이 스치기만 해도 나이 불문 화를 냅니다. 화가 통제가 안 되는 아이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자기 자신일까요?
자기 자신은 자기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그래서 도움을 찾습니다. 그게 엄마입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처방을 내립니다. 그리고 마치 그 처방이 잘 된 것처럼 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프로그램에서 하는 처방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진짜 문제는 도움을 부모에게서 찾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속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끊임없이 엄마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엄마에게 좋은 아이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엄마는 아이 마음을 알고는 자기가 더 열심히 해주지 못한 것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열심히 아이에게 도움을 주려 했을 때 아이가 변했나요? 아이가 불안한 이유는 자기 안전을 부모에게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기 안전을 온전히 책임져줄 수 없다는 것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아이의 불안은 자기 생명을 책임져줄 수 없는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그것을 책임질 창조자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지 않았고 다시 줄 수도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는데도 책임지려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망칩니다.
그렇다면 자녀에게 새로운 도움을 줄 수 있는 창조자가 있음을 알려주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창조자가 주는 이름을 받는 것입니다.
이번 월드컵 우승은 아르헨티나였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프랑스가 이긴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시는 아르헨티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메시는 나이가 많음에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포르투갈의 호날두가 비슷한 연령대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것과 대조됩니다. 메시는 ‘메갓’이란 이름으로 불립니다. ‘축구의 신’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메시를 응원하는 이들은 거의 그를 신처럼 떠받듭니다.
물론 메시는 골의 영광을 무조건 하느님께 돌립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축구의 신으로 부르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인정한 것이 호날두와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서명은 ‘전 요셉’을 휘갈겨 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십자가 모양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삼용’은 죽고 ‘요셉’의 새 이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으로 저의 육체적 부모로부터의 도움을 끊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그분의 도움을 받는 사람임을 되새기려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 이유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분명 자신의 이름이 왜 요한인지 생각하였을 것이고 그 이후부터는 인간의 도움이 아닌 하느님의 보살핌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정말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고 인간 중에 세례자 요한만큼 큰 인물은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으로 불러줍시다. 그러면 인간의 도움이 아닌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누구나 자기가 이름을 지어준 이를 책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신 이름을 나의 이름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나의 자녀가 누구의 손길 밑에서 자라게 할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대림특강이 있어서 필라델피아 한인성당에 갔었습니다. 같은 서울교구라서 하루 전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저녁 7시 30분에 강의를 시작하는데 1시간 전에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봉사자들이 왔습니다. 음향을 점검하는 분도 있었고, 제단의 꽃에 물을 주는 분도 있었습니다. 성령기도회 봉사자들이 와서 찬양으로 교우들을 맞이했습니다. 대림특강은 제가 하지만 대림특강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리 와서 봉사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특강이 끝난 뒤에는 여성구역에서 따뜻한 차와 간식을 준비하였습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교우들은 차와 간식을 드시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매주 미사를 가는 부르클린 한인성당에도 많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10시 30분에 미사를 하는데 9시면 성가대에서 와서 연습을 합니다. 비슷한 시간에 성모회는 그날의 친교 음식을 준비합니다. 형제님들은 탁자와 의자를 준비합니다. 전례 봉사자들은 미사 준비를 합니다. 복사들도 미리 와서 연습합니다. 재정 봉사자들은 미사예물을 받고, 교무금도 받습니다. 미사는 제가 주례하지만 미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리 와서 봉사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곧 주님의 성탄을 맞이합니다. 성서를 보면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500년 전에 이미 임마누엘의 탄생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주님이 오시기 전에 길을 닦을 사람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사자는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보라 나의 뒤에 나보다 더 크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 질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사막에 샘이 넘쳐날 것입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거닐 것입니다.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골짜기는 메우고, 언덕은 평평해 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평등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있습니다. 가브리엘은 즈카리야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즈카리야의 아내 엘리사벳이 늙은 나이에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이가 주님의 길을 닦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마리아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마리아에게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저는 아직 남자를 모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성령의 힘으로 그리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의 꿈에도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리아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은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있었고, 천사 가브리엘의 예고가 있었고,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순명의 구유 위에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오십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은 이웃과 형제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며, 이런 이들은 형제의 고통과 절망, 괴로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그런 자신의 행동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임을 깨닫게 되며, 이런 사람들에게 “임마누엘”주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성탄이 임박해지면서 우리는 엘리사벳의 축복과 마리아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엘리사벳처럼, 마리아처럼 우리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합시다.
4. 2022년 12월 23일 금요일
[대림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 이야기(루카 1,5-25 참조)에 이어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루카 복음 1장 57-58절이 전하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사건은
천사를 통한 탄생 예고와 잉태 보도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뒤 아홉 달이 지났음을 알 수 있는 증거들은(1,24.26.36.56 참조)
아기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보도는 짧습니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둘러싼 논쟁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관습이었습니다(1,61; 1마카 2,1-2 참조).
그러나 아기 어머니 엘리사벳과 아버지 즈카르야는 ‘요한’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요한’은 천사가 알려 준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과 사회 규범 사이의 충돌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풀립니다.
즈카르야는 주님의 천사에게서 아기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못하였고,
이러한 의심으로 즈카르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1,18-20 참조).
즈카르야는 의심과 불순종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고,
뒤늦게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그분을 찬양합니다(12월 24일 아침 미사 복음 참조).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하느님을 마주하는 두 가지 태도를 보여 줍니다.
이 상반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저마다 과거에서 현재로 변화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모습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시다.
5.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21222. 2022년 12월 22일.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노나니.”(루카 1,47)
오늘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은 자식에 대한 감사의 예배노래요, <화답송>은 그때 드린 한나의 기도요, <복음>은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크게 드러내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찬미의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노나니.”(루카 1,47)
이는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8)는 하바꾹 예언자의 희망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희망이 지금 마리아에게서 실현된 것입니다. 또한 이는 “내 마음은 주님 안에서 강해지고, 내 뿔은 주님 안에서 높여지고~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나이다.”(1사무 2,1-2)라는 한나의 기도요, “내 영혼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찾을 것이고 그분의 구원으로 즐거워 할 것이다.”(시 35,9)라는 시편작가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토록, 마리아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그 자비를 찬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위업을 찬미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아기가 다윗의 “왕좌”에 들어 높여 앉게 되고, 당신께서는 ‘모후’의 “왕좌”에 올려졌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욥처럽,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이루신 “측량할 수 없이 큰 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욥 5,9)을 찬미합니다.
이는 막연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을 이루신 주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이러한 구체적인 찬미를 말합니다. 그는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는 것을 하느님의 거룩한 장막 안에 머무는 길로 제시합니다(<수도규칙> 머리말 30).
결국, 이는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그분을 찾아 맞아들이고, 그분을 찬미하는 일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만약 오늘 우리가 주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요, 우리가 자비롭지도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성모님은 당신의 노래를 통해, 진정 우리가 자비를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영광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우리도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분께서 제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시고,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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