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12월 22일 목요일[(자) 12월 22일]/신부님 강론 3개
입당송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본기도
죽음에 떨어진 인간을 굽어살피시고
저희를 구원하시려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구세주의 강생을 경축하며
마침내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24-28
그 무렵 사무엘이 24 젖을 떼자 한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올라갔다.
그는 삼 년 된 황소 한 마리에
밀가루 한 에파와 포도주를 채운 가죽 부대 하나를 싣고,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25 사람들은 황소를 잡은 뒤 아이를 엘리에게 데리고 갔다.
26 한나가 엘리에게 말하였다.
“나리! 나리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 틀림없듯이,
제가 여기 나리 앞에 서서 주님께 기도하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
27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곳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 주님 안에서 제 마음이 기뻐 뛰고, 주님 안에서 제 얼굴을 높이 드나이다.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에, 제 입은 원수들을 비웃나이다. ◎
○ 힘센 용사들의 활은 부러지고, 비틀거리던 이들은 힘차게 일어선다. 배부른 자들은 양식을 얻으려 품을 팔고, 배고픈 이들은 더는 굶주리지 않는다. 아이 못낳던 여자는 일곱을 낳고, 아들 많은 여자는 홀로 시들어 간다. ◎
○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며, 저승으로 내리기도 저승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
○ 주님은 비천한 이를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가난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높이시어, 존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
복음 환호송
○ 민족들의 임금님, 교회의 모퉁잇돌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흙으로 빚으신 사람을 구원하소서.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6-56
그때에 46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사랑을 믿으며 거룩한 제대에 제물을 바치오니
주님의 은총으로 저희를 씻으시어
저희가 주님께 드리는 이 성찬의 제사로 더욱 깨끗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1,49.46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으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에게 힘을 주시어
저희가 믿음을 증언하는 삶으로 구세주를 기쁘게 맞이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빈자(貧者;아나뷤anawim)의 영성
-시의 힘, 노래의 힘-
“오 만민의 임금이시여, 모든 이가 갈망하는 이여,
두벽을 맞붙이는 모퉁이돌 이시니,
오시어 흙으로 만드신 인간을 구원하소서.”
대림2부 여섯째 날 “오! 만민의 임금이시여(O gentium)”로 시작되는 M후렴이자 복음 환호송이 은혜롭습니다. 어제 ‘명상의 힘’이란 좋은 글을 보았습니다. 오늘 강론 “빈자(貧者;아나뷤anawim)의 영성-시의 힘, 노래의 힘-”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입니다. 내적 마음의 치유와 위로의 구원에 명상의 힘, 시의 힘, 노래의 힘은 큰 역할을 합니다. ‘자신을 느끼세요, 판단하지 마세요!’라는 제하의 끝부분입니다.
“자신에 대해 판단하지 마세요. 뭘하든 ‘나’라는 존재는 다 옳습니다. 명상을 통해 순간순간 존재하는 자신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명상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제가 호흡에 맞춰 “마라나타-오소서, 주 예수님!” 성구를 되뇌이며 바치도록 권유하는 명상기도가 바로 이런 명상의 진리를 그대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명상의 힘과 더불어 시의 힘, 노래의 힘 역시 내적 상처의 치유에 아주 효과적이니,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이어 계속되는 행복기도문은 고백성사 보속으로 소리내어 읽게 하고 자주 기도로 바치도록 기도문도 꼭 나눠주곤 합니다. 또 보속으로 가끔 가톨릭 성가를 고백하는 마음으로 소리내어 부르게도 합니다. 내적 상처를 치유하는 시의 힘, 노래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아침 산책때 마다 자주 부르는 ‘바다’와 ‘푸른잔디’ 동요외에 70년 민주화 운동당시 젊은이들의 애국가와 같았던 ‘아침이슬’을 때 늦은 나이지만 너무 좋아해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배밭 사이 산책시 아무도 없을 때 부끄러운줄 모르고 열창熱昌하곤 합니다.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광야 수도승들의 정서에도 잘 드러맞는 시임을 늦게서야 깨닫습니다. 가난한 민초(民草;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을 지닌 백성을 일컫는 말)들이 즐겨 부른 노래가 숱한 민요와 가요들입니다. 바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아나뷤anawim’ 빈자貧者들이 즐겨부른 노래가 바로 오늘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아나뷤을 대표한다 하겠습니다. 믿을 것이라곤 하느님뿐이 없는 가난한 사람인 마리아가 부른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시작되는 마리아의 노래는 정말 혁명적 성격의 노래입니다. 하느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셔서 가난한 이들을 들어 높으시고 교만한 권력자들을 뒤엎으시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하느님을 고백하며 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불편한 시요 노래입니다. 아마 독재자들이 들으면 금지시켰을 성격의 노래입니다.
감사시편의 전통적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시편의 찬미가는 예수님 어머니의 개인적 감사의 마음을(46-50절), 그리고 계약의 약속을 이행하신 데 대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집단적인 감사의 마음을 노래(51-55절)합니다.
아나뷤의 역사는 자못 깊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이나 우리의 민중신학은 바로 여기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삶에 기초하며 민초로도 표현합니다. 민초들에게 민요가 있었듯이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들에겐 찬미와 감사의 시편이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무엘의 어머니 또한 전형적인 아나뷤의 민초입니다. 엘리에게 사무엘을 위탁하는 어머니 한나의 믿음도 감동적입니다.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그런다음 그들은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고, 이어 즉시 아나뵘인 한나의 입에서 터져나온 감동적 찬미가(사무엘 상2,1-10)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들이 한나가 노래한 감사와 찬양의 시편이요, 마리아의 노래 역시 여기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한나, 엘리사벳, 마리아 모두가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나뷤 어머니들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이요 이는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을 봐도 담박 드러납니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들은 강합니다. 남자는 아무리 나이 먹어도 어머니의 철부지 아이들같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천하무적의 아나뷤 어머니들입니다. 자녀들 역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이 절대적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분은 하느님이기에 이들 어머니의 시편 노래는 간절할 수 뿐이 없습니다.
시의 힘, 노래의 힘은 우리가 매일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기도의 교과서와도 같은 성서의 시편은 아나뷤의 노래집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런면에서 가톨릭 교회의 수도자들이나 신자들은 아나뷤의 후예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영적 아나뷤이 되어 시편을 노래합니다.
한맺힌 민요나 가요가 아니라 빛과 생명, 희망이 넘치는 치유와 위로의 구원을 선사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노래가 시의 힘, 노래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바로 시편의 시의 힘, 노래의 힘은 하느님의 힘으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편을 노래기도로 바침으로 살아 계신 주님께 치유와 위로의 구원을 받고 기쁨과 평화를 선물로 받습니다.
이래서 가톨릭 교회나 수도원은 명실공히 힐링 센터가 되곤 합니다. 세상에 빛과 생명, 희망이 넘치는 아나뷤의 노래인 찬미와 감사의 시편보다 더 좋은 시나 노래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아나뷤 성모 마리아 어머니가 부른 ‘마리아의 노래’는 우리 가톨릭 교회 수도자들과 신자들이 날마다 저녁기도때 마다 성모 마리아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영적 아나뷤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는 저녁 시편 성무일도 시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영적 아나뷤인 우리를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가난한 아나뷤인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미사잔치입니다. 세상에 영육의 전인적 힐링에 미사은총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아멘.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관행(慣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어도, 더러 잘못된 점이 있어도 예전부터 해오던 일이니 그냥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병환자,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중풍병자, 세리, 창녀, 이방인은 그렇게 태어났으니 불평하지 말고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서 그리 된 것이라고 체념하고 살라고 합니다. 천동설은 당연한 관행이었습니다. 아침에 태양이 뜨는 것을 보고, 저녁이면 태양이 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태양은 지구보다 훨씬 작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관행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 관행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단죄를 받았습니다. 관행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재물을 가진 사람에게는, 명예를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관행은 가난한 이에게는, 아픈 이에게는, 이방인에게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드는 족쇄였습니다.
‘관습(慣習)’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제게 관습이라는 말이 강하게 다가왔을 때가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행정수도를 옮기는 문제가 쟁점이 된 적이 있습니다. 행정수도를 옮기려는 정부의 의지가 있었고, 행정수도를 옮기면 안 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2004년 헌법재판소는 행정수도를 옮기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그리고 판결의 주된 이유는 ‘관습헌법’이었습니다. 서울이 행정수도인 것은 관습헌법이라고 하였고, 헌법에 그리 되어있으니 옮길 수 없다는 판결이었습니다. 수도권에 전 국민의 50%가 넘게 살고 있습니다.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시설이 수도권에 몰려있으니 사람들은 당연히 수도권으로 몰리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속지주의를 원칙으로 교구를 분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동이 적었던 농촌시대와 중세시대에는 합리적인 분할입니다. 그러나 교통이 발전하고, 사람의 이동이 빈번한 현대사회에서는 속지주의라는 관습은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음에 떨어진 인간을 굽어 살피시고 저희를 구원하시려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구세주의 강생을 경축하며 마침내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것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는 생명에게 주어지는 관행입니다. 관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관행과 관습을 버리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죽음이라는 관행을 따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관행, 관습, 율법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어서 위선과 가식을 일삼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비난하셨습니다. 관행과 관습의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관행과 관습을 버리고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관행과 관습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러나 관행과 관습이 나의 기득권을 지키는 보호막이라면, 그러한 관행과 관습이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이방인에게 족쇄가 된다면 기꺼이 버려야 합니다.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성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는 관행과 관습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따를 수 있다면 매일의 삶이 성탄입니다.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이방인들에게 족쇄가 되는 관행과 관습을 버릴 수 있다면 매일의 삶이 성탄입니다.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며, 저승으로 내리기도 저승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3.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는 기쁨의 노래, 마니피캇을 노래합니다. 이 노래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잉태하셨을 때, 혹은 낳으셨을 때, 혹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셨을 때가 가장 기쁘셨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때도 기쁘셨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 기쁨의 노래를 부르신 것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입니다. 이 ‘때’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성모님의 참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선 기쁨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기쁨은 존재론적 기쁨입니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없고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그것만큼 큰 고통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를 찾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려 합니다. 그래야 마음의 평화가 오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의 평화가 오게 만드는 것은 부모가 주는 사랑의 증거, 곧 사랑의 선물입니다.
저는 저의 부모가 나의 참 부모임을 믿으려 할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주는 사랑의 증거들, 예를 들면 나를 위해 일하셨을 부모의 발에 박인 굳은살을 볼 때 참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때가 천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잃고 무덤에 홀로 앉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기쁨에 찼습니다. 이것이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의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않으면 기쁘지 않습니다. 다른 기쁜 무엇을 찾아도 일시적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계시고 나의 창조자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원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50회에 기괴한 장면이 나왔었습니다. 바로 엄마가 아이 둘을 쌍 수유하는 장면입니다. 여섯 살 딸과 모유를 먹어야 하는 갓난아기 동생을 동시에 모유 수유를 하는 것입니다. 여섯 살 아이는 분명 애정 결핍을 겪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 사랑을 느끼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엄마의 모유를 원합니다.
재밌는 것은 엄마가 때가 지난 아이에게 모유를 수유하면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엄마로 자녀에게 사랑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게 기쁩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끊지 못합니다. 사실 아이보다 엄마가 더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엄마도 부모로부터 애정 결핍의 감정이 있고 자녀에게 애정을 듬뿍 주면서 그 결핍을 채우려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117회에서는 더 기괴한 장면이 나옵니다. 모유 수유와 변을 닦아주는 것은 물론이요, 여섯 살 짜리 딸을 엄마가 업고 다닙니다. 엄마는 젖을 떼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도 엄마가 자신의 엄마에 대해 애정 결핍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았던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보아 주지 않은 상처를 자녀에게 주지 않으려는 행동입니다. 자녀는 엄마에게 업히고 젖을 먹으며 편안함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못한 순간에는 불안함에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참 기쁨은 부모로부터 사랑 받는다는 느낌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랑 받아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친교를 이루고 선교 할 때 더 완성된 기쁨을 느낍니다. 기도 안에서 관상까지 도달하여 주님의 사랑을 느낀들 무엇 하겠습니까? 그것이 이웃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시간은 불안함에 휩싸입니다. 결국 내가 느낀 그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부모와 같은 존재가 되었을 때 부모의 사랑을 가장 확신하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니 자녀에게도 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젖을 떼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와 같은 짐승들은 때가 되면 단호하게 젖을 떼게 합니다. 더 큰 기쁨으로 새끼들을 보낼 줄 아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 그 기쁨을 전하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기쁨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기도만 하는 것보다 그 기도한 것을 전할 때 더 큰 기쁨을 느낍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인사를 건넸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하였고 태중의 아기도 기뻐 뛰었습니다. 곧 성모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셨을 때 가장 기쁘셨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셨을 때보다, 성령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하였을 때 가장 기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 것보다 성령을 흐르게 할 때 기쁨이 완성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 뜻입니다. 내가 성령으로 기쁨으로 충만하고 다른 이를 성령으로 기쁘게 한다면 그게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울증에 자살 직전이었던 어떤 자매가 마더 데레사에게 상담을 요청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그 여인에게 상담해 주지 않고 자신의 봉사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한 달 만에 우울증이 가셨습니다. 성령님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힘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느끼는 기쁨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이 닉 부이치치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우울증은 타인을 기쁘게 해 줌으로써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요한복음 9장을 읽으면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태생 소경이 다 하느님 뜻이 있어서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이유가 있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령을 받아들이고 그 성령의 기쁨을 타인에게 전할 때 기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배우고 가야 할 유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12월 22일, 되새김 구절]
1. “자신에 대해 판단하지 마세요. 뭘하든 ‘나’라는 존재는 다 옳습니다. 명상을 통해 순간순간 존재하는 자신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명상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영적 아나뷤인 우리를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이수철 신부)
2. 관행과 관습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러나 관행과 관습이 나의 기득권을 지키는 보호막이라면, 그러한 관행과 관습이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이방인에게 족쇄가 된다면 기꺼이 버려야 합니다. (조재형 신부)
3.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인사를 건넸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하였고 태중의 아기도 기뻐 뛰었습니다. 곧 성모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셨을 때 가장 기쁘셨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셨을 때보다, 성령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하였을 때 가장 기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 것보다 성령을 흐르게 할 때 기쁨이 완성됩니다. (전삼용 신부)
[100일 기도후 제8일차 기도]
하느님!
관행과 관습으로 방어막을 치거나... 족쇄를 차지 않게 하소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랑과 기쁨을 주변에 지속적으로 흐르게 하소서.
아멘.
- 2022년 12월22일(목) 6시4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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