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1월 9일 월요일[(백) 주님 세례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본기도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그리스도께 성령을 보내시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로 선포하셨으니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또는>
하느님, 외아드님께서 저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니
겉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에서도 저희가 그분을 닮아 새로워지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2,1-4.6-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34-38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36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을
37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강복하여 평화를 주시리라.
○ 하느님의 아들들아, 주님께 드려라. 그 이름의 영광 주님께 드려라. 거룩한 차림으로 주님께 경배하여라. ◎
○ 주님의 소리 물 위에 머무네. 주님이 넓은 물 위에 계시네. 주님의 소리는 힘차고, 주님의 소리는 장엄도 하네. ◎
○ 영광의 하느님 천둥 치시네. 그분의 성전에서 모두 외치네. “영광이여!” 주님이 큰 물 위에 앉아 계시네. 주님이 영원한 임금으로 앉으셨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3-17
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15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16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사랑하시는 성자께서 세상에 드러나셨음을 기념하며 드리는
이 예물을 받으시어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이
세상의 죄를 씻으신 성자의 희생 제사가 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새로운 세례의 신비를 드러내시고
하늘의 소리로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 계심을 믿게 하셨나이다.
또한 비둘기 모양으로 성령을 보내시어
주님의 종 그리스도에게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며 끝없이 외치나이다.
영성체송
보라,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보았다. 그래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였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거룩한 양식을 가득히 받고 주님의 자비를 간청하오니
저희가 성자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며
주님의 참된 자녀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3년 01월 09일 월요일
[주님 세례 축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메시아로서 그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물로 베푼 세례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주실 세례와 비교됩니다.
세례(洗禮)는 회개(悔改)를 의미합니다.
공관 복음서가 모두 이러한 의미의 세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마태오 복음서도 특별히 의로움을 강조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이어 주는 주제는 의로움입니다.
오늘 독서인 이사야서는 희망에 찬 표현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공정을 세울 것이라는 내용이 반복됩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대화는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것을 주저하는 세례자 요한과,
그것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의로움은 마태오 복음서가 강조하는 특징적인 낱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듣는 군중에게도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뛰어넘도록 요구하시고(5,20 참조),
요한이 가르치던 의로운 길을 걷도록 요청하시며(21,32 참조),
하늘나라 또한 의로움과 관련되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5,10 참조).
의로움은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통하여 모든 의로움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분의 길은 이렇게 공적 활동의 시작에서부터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여기에 화답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미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어느덧 4년이 되었습니다. 미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사회보장번호(SSN)’가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야 다른 것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운전면허증’이 있습니다. 국내선 비행기를 탈 때도 필요하고, 운전면허증은 신분증의 역할을 하기에 있으면 좋습니다. ‘은행계좌’를 개설합니다. 은행계좌를 통해서 급여를 받기도 하고, 신용카드 결제를 합니다. 미국교회에서 사목하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한국에 속한 교구로부터 ‘사제증명서’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부르클린 교구로부터 사목에 대한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문사의 일도 하지만 다른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언론인으로 등록하여 5년 동안 있을 수 있는 비자를 받았지만 본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들은 30개월만 비자를 받기에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서 한국엘 다녀오기도 합니다.
어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이었습니다. 동방에서 온 3명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 드렸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유대인들만의 구세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세주로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도 고쳐주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도 칭찬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율법학자가 물어보았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유대인인 레위나 사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스라엘을 넘어서 한국까지 전해 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대학은 논문을 통과한 사람에게 학위를 수여합니다. 대학은 학위를 수여할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때로 대학은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합니다.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 추기경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추기경님께 학위를 수여한 대학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교황님께서 신학교에서 미사를 집전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교황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학교 기쁨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오히려 세례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습니다.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단순히 회개를 촉구하고, 영혼을 정화하는 과정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제 세례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그래서 사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가브리엘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는 지난 날 모든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오늘 주님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내가 받은 세례의 축복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세례 받은 신앙인으로 충실히 살도록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하늘의 소리로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 계심을 믿게 하셨나이다. 또한 비둘기 모양으로 성령을 보내시어 주님의 종 그리스도에게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나이다.”
3. 이영근 신부 강론
230108. 주님 공헌 대축일.
“그분의 별”(마태 2,2)
찬미 성탄! 오늘은 “제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의 공현 대축일” 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계시되었습니다.”(에페 2,5)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오늘을 “거룩한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때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이사 60,5)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벅찬 기쁨을 찾아, 동방박사와 함께 임을 찾아나서는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길’은 성경의 핵심단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고(요한 14,6), 프란치스코 교종은 친구인 ‘한 랍비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할 때, 그는 길을 떠나야 합니다.
사람은 걸어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하느님을 찾으면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기를 찾아 나서도록 허락하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길을 떠난 이들’이요, 또 한 부류는 ‘길을 떠나지 않는 이들’입니다. ‘길을 떠난 이들’은 빛을 따라나선 동방박사들과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온 마리아와 요셉이 있고, 멀리 하늘에서 길을 떠나온 아기 예수님이 있습니다. 한편 ‘길을 떠나지 않은 이들’에는 왕궁에 머물러 있는 이들, 수석 사제들, 율법학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요? 빛과 진리를 찾아 길을 떠나 여행하는 사람일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안전과 편리에 머물러 안주하고 있는 사람인가요?
또 오늘 <복음>에는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한 ‘왕’은 황포를 걸치고 화려한 왕궁에 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로데 왕’이요, 또 한 ‘왕’은 포대기로 둘러싸여 무력하게 누추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어떤 왕을 만나려고 길을 떠나 여행을 하고 있나요?
지상이 화려한 왕인가요? 아니면 가난하고 힘없는 아기 예수 왕인가요?
또 오늘 <복음>에는 세 번의 ‘길 떠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의 터전에서 예루살렘으로의 길 떠남이요, <두 번째>는 헤로데 왕궁에서 마구간으로의 길 떠남이요, <세 번째>는 마구간에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길 떠남입니다.
‘길 떠남’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빛’이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별이 나타나 우리를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 별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만이 그 빛을 볼 수 있으며, 그 별을 보는 자만이 그 별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나 길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애타게 갈망하고 고대하는 자만이, “그분의 별”(마태 2,2)을 따라 그분을 만나 경배하러 길을 떠납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떠나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비추고 계시는 그분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으로 ‘떠나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첫 번째> 길 떠남을 위해 우리는 온갖 편리와 안주를 포기해야 했고, 위험과 위기의 십자가도 져야 했습니다. 이 길을 오면서 때로는 사막처럼 무미건조하고 쓸쓸할 때도 있었고, 빛을 놓치고 어둠에 쌓여 길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길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고, 반항할 때도 있었습니다. 더러는 좌절하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했고, 그분이 계실만한 화려한 하려한 왕궁을 찾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 왕궁을 기웃거렸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처럼, 별의 안내를 받아서 이스라엘까지는 왔지만, 메시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찾아 만나는 데에는 “꼭 필요한 한 가지”(루가 10,41)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참된 빛이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마태 2,3)를 이미 “말씀” 속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예언자 미카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그리하여, 마침내 동방박사들이 “말씀”을 따라 다시 <두 번째> 길을 떠났듯이, 우리도 ‘말씀을 따라’ 여행 중입니다. 잠시 착각하고 머문 허황한 왕궁인 자기를 떠나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향하여 갑니다. 이제 오로지 “참 빛이신 말씀”의 비추임을 따라 걷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빛”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비추는 곳을 따라 걷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빛” 이 비추는 낮은 곳, 누추한 마구간에서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낮은 곳, 마구간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비로소 ‘참된 빛’이 낮게 엎드린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배 드리는 일, 자신을 땅에 내려놓는 일, 낮아져 예물이 되면, 우리 안에 참 빛이 들고, 우리 안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세 번째> 길을 떠납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우리 안에 탄생한 빛이신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 번째> 길을 떠남이 바로 오늘 주님의 공현이 우리에게 이끄는 “길”입니다.
이제는 빛이 되어 걸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은 자신을 채우기 위해 온갖 화려함으로 꾸미고 있는 왕궁을 향해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찬란히 빛나는 예수님과 동행하여 빛을 비추며 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분의 별”(마태 2,2)
주님!
당신은 먼저 저를 찾아와 비추셨습니다.
제 마음에 열망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랑을 심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빛이 되어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순례 여정
-꿈의 순례자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내 주님 계신 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 곳
이 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하느님 계신 곳 본향집이 그리울 때 마다 애창하는 성가 177장입니다.
“허다한 도시중에 제일 큰 도시 너홀로 뛰어난다 베들레헴이여
구원의 임금님이 하늘로부터 네게서 사람되어 태어나셨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 아침성무일도시 은혜롭고 아름다운 찬미가였습니다. 방금전 부른 다음 복음전 화답송 시편 후렴은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하느님, 만백성이 당신께 조배하리이다."(시편72,11)
뮤지컬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영화배우 나문희에 대한 인터뷰 기사와 영원한 현역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삶에 감동했습니다. 1941년생이니 우리나이로 83세, 방송인으로 데뷔한지 만61년이니 참 대단합니다.
-“배우로서 중요한 건 평소 삶이요 일상의 감각이다. 제대로 살아야 한다. 그게 연기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사는 게 힘들잖아요. 나이 들수록 웃음이 있는 역할이 중요해요.”
“이렇게 힘들어도 좋아하는 연기라면 다음 생에도?”
“아우, 싫어요. 사는 거 자체가 힘든데 왜 또 태어나요.”
명랑한 할머니 배우에게서 듣는 이 말보다 더 큰 공감과 위로가 또 있을까.-
공감이 가는 일부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배우의 약력을 일별해 봤더니 참 치열한, 가열찬 아름다운 제자리에서의 제대로의 삶이였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종교를 봤더니 열심한 불자로 법명은 칠보화라 하지만 웬지 천주교 교우같은 느낌을 주는 배우입니다. 이런 삶이라면 말그대로 성공적 순례 여정의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그 멀리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찾아나선 ‘꿈의 순례자들’인 동방 박사들을 생각하면 저는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 생각납니다. 이미 9년전 2014년 안식년때의 순례여정이었지만 아마 죽을 때까지 내적 순례여정은 계속될 것입니다. 날마다 새벽 강론쓰기를 마친후 4시부터 4:30분 아침성무일도 시작전까지 묵주기도를 바치며 수도원 경내를 걸을 때는 그대로 산티아고 순례 여정의 계속임을 실감합니다.
산티아고 순례중 가장 행복하고 설렜던 시간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새벽마다 일어나 강론쓰고 미사드린후 아침 일찍 이마에 헨드랜턴을 하고 순례 여정을 떠날 때의 시간이었습니다. 세상에 주님의 집을 향해 떠나는 ‘떠남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꿈의 순례자’되어 영원한 꿈을 상징하는 산티아고를 향해 도반과 함께 떠날 때는 정말 기뻤습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시편122,1)
도보 순례 여정중 가장 많이 끊임없이 기도로 바쳤던 시편 성구 노래였습니다. 지금도 뚜렷이 각인된 순례 여정의 네 요소, 1.목적지, 2.이정표, 3.도반, 4.기도입니다. 또 그동안 참 많이도 인용했던 늘 새롭게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내 삶의 순례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에, 또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어느 계절의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자신의 현재 삶의 시점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삶의 거품이나 환상은 사라질 것이며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해 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의 순례 여정은 그대로 우리의 인생 순례 여정을 상징합니다. 이들이 길을 잃지 않고 끝까지 꿈의 목적지, 베들레헴에 도착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주 예수님을 뵈올 베들레헴 ‘꿈의 목적지’가 분명했기 때문이요 살아 있는 이정표와도 같은 ‘별의 인도’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객관적인 고정불변의 자명한 주님의 별, 진리의 별이 아니라, 깨어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살아 있는 이정표인 주님의 별입니다. 예수님 탄생하신 베들레헴 지근 거리에 있던 예루살렘 사람들 그 누구도 이 주님의 별, 진리의 별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먼 타지에서 온 이방의 동방박사들의 방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혼비백산 허둥대는 모습들을 보세요.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 예루살렘이 가리키는 바, 복음의 동방박사들이요 오늘 순례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나타나는 살아 있는 이정표, 우리를 인도하는 주님 진리의 별입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또 주목할 바 동방박사들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도반들과 ‘더불어의 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혼자라면 그 먼 이방에서 끝까지 순례 여정에 충실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들 꿈의 순례자들인 동방박사들은 함께 깨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주님의 별을 찾았을 것이며, 은총의 선물처럼 나타난 별의 인도에 따라 순례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했을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는 주님을 찾는 모든 꿈의 순례자들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과거의 모든 세대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신비가 이방의 동방박사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 계시됨을 바오로 사도가 명쾌하게 밝힙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꿈의 순례여정에 충실한 교회내의 꿈의 순례자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은 산전수전, 온갖 고난의 순례 여정후 마침내 별의 인도에 따라 꿈의 목적지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 예수님을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흠숭의 ‘경敬’이 사라진 개탄스런 오늘의 현실입니다. 무릎 꿇고 기도중에 신학했다는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이 생각납니다. 참으로 회복해야할 경배敬拜, 경애敬愛, 공경恭敬, 경천敬天, 경청敬聽, 경건敬虔이란 아름다운 삶의 자세들입니다.
이들 동방박사들이 얼마나 깨어 한결같이 기도에 충실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이들은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참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동방박사들의 순례여정이 우리에게도 용기백배하게 합니다.
과연 오늘 여러분은 오늘 무슨 예물을 아기 예수님께 바치시겠는 지요. 황금과 유향과 몰약보다 더 좋은 하느님 향한 믿음, 희망, 사랑을 바치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의 믿음, 희망, 사랑의 보물로 되갚아 주실 것입니다. 복음 마지막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이들 동방박사들은 새삼 기도의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꿈에 주님의 지시를 받았다니 끊임없는 기도중에 주님과 친교를 나누며 주님과 함께 했던 삶임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자기 고장에 돌아간 동방박사들의 삶은 예전과는 정말 달랐을 것이며, 이제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외적 순례 여정이 아닌 내적 순례 여정의 ‘정주定住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끝은 늘 새로운 시작이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매일매일이 좋은 날입니다. 우리는 꿈의 순례자로 “매일” 순례 여정중 주님을 만나 힘을 얻고 주님 진리의 별의 인도따라 또 새롭게 순례 여정에 오릅니다. 어찌보면 하루하루가 순례여정을 압축합니다. 매일 찾던 주님을 매일 만나고 또 영원한 도반인 주님과 더불어 형제 도반들과 다시 새롭게 내적 순례여정에 오르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집에 귀가할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계속될 꿈의 순례 여정에 꿈의 순례자들인 복된 우리들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살아 있는 이정표와도 같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평생 순례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 아침성무일도시 참 흥겹고 아름다웠던 즈카르야 후렴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강에서 죄를 씻어 주시니,
교회는 천상 신랑과 결합하였도다.
박사들이 예물을 가지고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달려오고,
물이 술로 변하여, 잔치 손님들이 기뻐하였도다.” 아멘.
[12/9(월) 주님 세례 축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통하여 모든 의로움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분의 길은 이렇게 공적 활동의 시작에서부터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여기에 화답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허규 신부)
2. 요한의 세례는 단순히 회개를 촉구하고, 영혼을 정화하는 과정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제 세례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하늘의 소리로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 계심을 믿게 하셨나이다. 또한 비둘기 모양으로 성령을 보내시어 주님의 종 그리스도에게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나이다.”(조재형 신부)
3. 이제는 찬란히 빛나는 예수님과 동행하여 빛을 비추며 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이들 동방박사들은 새삼 기도의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꿈에 주님의 지시를 받았다니 끊임없는 기도중에 주님과 친교를 나누며 주님과 함께 했던 삶임이 분명합니다.(이수철 신부)
[12/9(월) 주님 세례 축일, 제 16일 기도]
하느님!
별을 보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던 동방박사들 처럼...
끊임없는 기도중에 주님과 친교를 나누며...
주님과 함께 했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1월8일(월) 5시3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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