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1월 18일 수요일[(녹) 연중 제2주간 수요일(일치주간)]/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본기도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7,1-3.15-17
형제 여러분,
1 멜키체덱은 “살렘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로서,
“여러 임금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에게 축복하였습니다.”
2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의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이었습니다.
3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
15 멜키체덱과 닮은 다른 사제께서 나오시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16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17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하고
성경에서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
○ 주님께서 내 주께 이르셨나이다.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
○ 주님이 당신 권능의 왕홀을 시온에서 뻗치시리이다. “너의 원수들을 다스려라.” ◎
○ 네 권능의 날에 주권이 너와 함께하리라. 거룩한 빛, 새벽 품에서 나는 너를 낳았노라. ◎
○ 주님은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않으시리이다.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오니
이 거룩한 신비를 정성껏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게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3년 01월 18일 수요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계명을 따르다 보면 정확하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하는 계명은 무엇을 해야 또 하지 말아야 거룩하게 지내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열려 있는 가르침입니다.
유다인들의 율법도 마찬가지다 보니 라삐들은 안식일에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무엇이 노동이고 아닌지를 구분합니다.
물론 유다교에서 생명이 위독한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안식일에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위급하지 않은 지병인 경우는 다른 날에도 고칠 수 있기에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에 속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고치신 이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입니다.
복음이 정확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분명히 이 사람은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안식일에 치유하시는 것은 규정에 어긋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 질문에 어느 누구도, 바리사이들조차 대답하지 못합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고 목숨을 구하는 것은 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규정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나무라십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문자 그대로를 따르는 것보다 넓은 의미입니다.
어쩌면 그 계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숙고하고 고민하는 것부터가 계명을 따르는 과정일 것입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주간 수요일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8살에 억울하게 32년 동안 감옥에서 지낸 ‘흑인청년 보젤라’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보젤라가 사는 동네에 할머니가 잔혹하게 죽었습니다. 경찰은 두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보젤라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했습니다. 보젤라는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변했지만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되었고 그렇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나중에 할머니의 집에서 다른 사람의 지문이 나왔지만 그것도 보젤라를 감옥에서 나오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32년을 지낼 무렵 무죄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단체에서 보젤라를 위해서 변호사를 선임했고 재심 끝에 보젤라는 50세가 되는 해에 무죄를 선고받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32년 동안 죄를 인정하면 감형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한 번도 죄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젤라에게 감옥에 있던 32년은 고통의 시간만은 아니었습니다. 보젤라는 감옥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동료 죄수를 면회 왔던 여인을 알게 되어 감옥에서 결혼도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보젤라는 언젠가 나올 줄은 알았지만 너무 긴 시간이었다고 감회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불의와 거짓이 보젤라를 감옥에 가둘 수는 있었지만 보젤라의 정신과 영혼까지 감옥에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도 감옥에서 27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감옥이 만델라의 몸을 가둘 수는 있었지만 만델라의 정신과 영혼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만델라는 긴 감옥에서의 시간을 독서와 명상의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과 백인의 인종 갈등을 치유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사형선고를 받았고,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죽을 고비도 몇 차례 넘겼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감옥에서 많은 책을 읽었고, 언어를 공부했습니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표어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은 ‘IMF'의 국가부도 위기를 국민들과 함께 잘 극복하였습니다. 불의한 정권이 김대중 대통령을 감옥에 가둘 수는 있었지만 그의 정신과 영혼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우리에게 요셉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억울하게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무고하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비록 몸은 감옥에 갇혔지만 요셉의 정신과 마음은 자유로웠습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정확하게 해몽하였고, 이집트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제들을 용서하였고, 가족들이 가뭄을 피해서 이집트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자리에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손은 멀쩡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오그라드는 것을 넘어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그라든 손으로 평생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의 아픔을 보듬어 주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한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마음이 오그라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절망하는 사람은 비록 몸은 넓은 세상에 있어도 그 정신과 영혼은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이웃의 성공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비록 몸은 넓은 세상에 있어도 그 정신과 영혼은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몸을 가두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영혼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두려워하여라.” 저 자신은 보젤라처럼, 넬슨 만델라 대통령처럼, 김대중 대통령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큰 어려움 없이 지금까지 넓은 세상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정신과 영혼은 때로 오그라들었고, 쪼그라들었던 적이 많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었고, 허영과 교만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저의 정신과 영혼을 쪼그라들게 했습니다.
안식일은 규정과 율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안식일은 내가 있는 삶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있을 수 있습니다. 그곳이 삶의 자리입니다. 편하게 자유로운 세상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그곳이 삶의 자리입니다. 비록 몸은 삶의 자리에서 고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삶의 자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정신과 영혼은 어떤 삶의 자리에서도 지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마르 2,23)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 사이”를 질러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세상에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2,22). 그들이 바로 하느님 밀밭의 일꾼들임을 암시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는 것은 그들을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참여시킴을 암시해줍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바리사이들은 문제를 삼은 것은 그들이 남의 곡식을 수확했다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일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의 본질과 우선순위를 깨닫게 됩니다. 곧 ‘해야 할 일’(생명을 살리고 축복하고 하느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생명을 저해하고 자신이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자신의 유익과 유쾌함 따르는 일)의 순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일을 우선하고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왜 세우신 것일까?
그리고 그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그리고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야훼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장면에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너희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야훼임을 알리라.”(탈출 31,13)
이처럼, 안식일을 새운 이유를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혀줍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또한,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는 안식일이 누구를 위한 날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듯, 쉼도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마르 2,25) 하고 물으시고, 그들이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그렇게 해서,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으며,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이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임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주님!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새 옷을 입히시니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분별의 지혜
-사랑은 분별의 잣대이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참 좋은, 참 자랑스러운 보물이 성인들입니다. 우리 삶의 좌표가 되고, 끊임없이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밤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같은 존재가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이 없다면 우리 가톨릭 교회는 얼마나 쓸쓸하고 가난할까요? 가톨릭 교회는 성인들로 가득한 보물창고라 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고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모두 분발奮發하여 성인이 되라 있는 성인축일입니다. 사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모두는 참나의 성인이 되라고 불림받고 있으며 이보다 더 중요한 평생과제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성인 축일마다 확인하는 습관이 생몰生沒 연대를 통한 나이요 이어 꼭 제 나이와 비교합니다.
오늘은 사막 ‘수도승들의 원조’요 ‘은수자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또 오늘은 우리 요셉 수도 공동체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김도완 안토니오 수사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동방의 4대 교부는 아타나시오, 대 바실리오, 요한 크리소스토모,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입니다. 이중 아타나시오가 쓴 ‘성 안토니오의 전기’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된 성 안토니오 아빠스입니다.
놀라운 것은 안토니오 아빠스의 장수長壽입니다. 356년 빼기 251년이면 무려 만 105세 장수를 누린, 아마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중 최고의 기록일 것입니다. 장수의 비결이 무엇일까요? 물론 하느님의 은총을 전제로 하고 지혜가 그 비결임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고질적 마음의 질병이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이라 할 만큼 참으로 뿌리 깊은 불치의 병이 무지입니다. 불가의 삼독三毒이라 일컫는 탐진치(貪瞋癡;탐욕, 성냄, 어리석음) 역시 무지의 결과입니다.
끊임없는 전쟁, 과소비의 탐욕으로 망가져 가는, 하나뿐인 공동의 집인 지구를 지속불가능하게 만드는 원흉의 뿌리에는 바로 무지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탐욕이나 전쟁 역시 무지의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 무지에 대한 답이 바로 지혜이니 삶의 지혜, 분별의 지혜입니다. 사막 수도자들의 빛나는 특징이 바로 그 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은 지혜뿐입니다.
그리하여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는 사막교부들의 지혜를 모은 금언집입니다. 흡사 불가의 고승의 선사들이 남긴 일화도 이와 비슷합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 같은 삶의 지혜와 더불어 유머가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어제 재미있었던 일화에 크게 웃었습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산행山行을 하는 수도형제가 아름다운 풍경 사진과 곁들여 털모자를 쓴 자신의 사진을 올렸고 주고 나눈 대화입니다.
-“아름다운 사진 선물 감사합니다! 산악인이자 탐험가 같습니다!”
“개장수”-
유머로 번뜩이는 바로 ‘개장수’, 이런 말마디가 선사禪師들의 용어입니다. 사막 수도자들의 원조인 성 안토니오 아빠스가 남긴 지혜 가득한 일화는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성인을 결정적 회심으로 이끈 다음 예수님 복음 말씀이 주목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21)
복음에서 재산이 많은 젊은 부자는 슬퍼하며 떠났지만, 안토니오는 지체없이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아마 이 말씀은 안토니오의 평생 삶의 중심을 잡아 주는 지혜로운 말씀이 되었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에 나오는 ‘희망의 닻’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 희망은 닻과,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희망의 닻이 될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까? 제가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 역시 희망의 닻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우리를 천상의 지성소로 이끌어줄 예수님보다 더 좋은 희망의 닻은 없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예수님인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삶의 지혜,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입니다. 어제의 단식논쟁에 이어 오늘 사건의 발단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는 것에 시비를 건 바리사이들로 인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면서 자신의 처신을 옹호합니다. 다윗처럼 예수님이 얼마나 하느님 마음에, 사랑에 정통해 있는지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면, 하느님 사랑의 마음에 정통해 있지 않으면 다음같은 대답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 답은 너무 자명했습니다. 분별의 잣대는 안식일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새삼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요, 사랑에서 나온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사랑만이, 사랑의 법만이 모든 율법을 상대화하는 절대적 법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사랑이자 지혜요, 하느님의 사랑이자 지혜이신 예수님이야 말로 분별의 잣대이자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천상 지혜로 빛나는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의 주인인, 하느님 지혜와 사랑의 화신인 예수님이야말로 유일한 분별의 잣대이자,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이요, 참 좋은 희망의 닻입니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이 분별의 최종 잣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날로 당신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깊게 하시며 참 좋은 사랑과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아멘.
[1/18(수) 연중 제2주간 수요일(일치주간),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규정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나무라십니다.(허규 신부)
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몸을 가두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영혼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두려워하여라.” (조재형 신부)
3.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듯, 쉼도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말해줍니다.(이영근 신부)
4. 오늘은 사막 ‘수도승들의 원조’요 ‘은수자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또 오늘은 우리 요셉 수도 공동체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김도완 안토니오 수사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동방의 4대 교부는 아타나시오, 대 바실리오, 요한 크리소스토모,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입니다. 이중 아타나시오가 쓴 ‘성 안토니오의 전기’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된 성 안토니오 아빠스입니다.
놀라운 것은 안토니오 아빠스의 장수長壽입니다. 356년 빼기 251년이면 무려 만 105세 장수를 누린, 아마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중 최고의 기록일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1/18(수) 연중 제2주간 수요일(일치주간), 제 25일 기도]
하느님!
마음이 완고하지 않게 하소서.
저의 영혼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1월18일(수) 4시10분...수산나 -
'매일미사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묵]2023년 1월 20일 금요일[(녹) 연중 제2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3.01.20 |
---|---|
[매묵]2023년 1월 19일 목요일[(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1) | 2023.01.19 |
[매묵]2023년 1월 17일 화요일[(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2) | 2023.01.17 |
[매묵]2023년 1월 16일 월요일[(녹) 연중 제2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2) | 2023.01.16 |
[매묵]2023년 1월 15일 주일[(녹) 연중 제2주일]/신부님 강론 4개 (2) | 2023.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