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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월 19일 목요일[(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월 19일 목요일[(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66(65),4 참조
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한 번에 다 이루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7,25―8,6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25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8,1 지금 하는 말의 요점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대사제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곧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2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3 모든 대사제는 예물과 제물을 바치도록 임명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대사제도 무엇인가 바칠 것이 있어야 합니다.
4 만일 그분께서 세상에 계시면 사제가 되지 못하십니다.
율법에 따라 예물을 바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5 모세가 성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지시를 받은 대로,
그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
하느님께서 “자, 내가 이 산에서 너에게 보여 준 모형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6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40(39),7-8ㄱㄴ.8ㄷ-9.10.17(◎ 8ㄴ과 9ㄱ 참조)
◎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
○ 두루마리에 저의 일이 적혀 있나이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나이다. ◎
○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
○ 당신을 찾는 이는 모두, 당신 안에서 기뻐 즐거워하리이다. 당신 구원을 열망하는 이는 언제나 외치게 하소서. “주님은 위대하시다.” ◎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더러운 영들은“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오니
이 거룩한 신비를 정성껏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3(22),5 참조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게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오늘의 묵상

1. 2023년 01월 19일 목요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예수님의 주된 활동 무대는 갈릴래아입니다.

갈릴래아는 호수의 이름이자 호수가 속한 지역을 일컫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지역으로 보면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유다 지역이 자리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스라엘 지역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활동을 설명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중심 도시가 속한 유다 지역이스라엘의 최남단인 이두매아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은 동쪽의 경계를 나타냅니다구약 성경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티로와 시돈은 갈릴래아보다 더 북쪽에 있는당시에는 페니키아에지금은 레바논에 속하는 도시입니다.

도시와 지역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갈릴래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전 지역에더 나아가 다른 나라들에도 퍼져 나갔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결과를 통하여 마르코 복음은 이미 예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악령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외칩니다.

악령의 외침은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내지만 그분께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악령의 외침은 진정한 고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신 가르침과 업적을 통하여특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드러나는 신비를 통하여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믿음은 단순히 아는 것 이상입니다. 믿음은 알고 고백하며 그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아름답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중국어로는 '()'라고 합니다. 미는 양()과 대()의 합성어입니다. ‘큰 양이 맛있다.’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라는 말에는 맛이라는 말이 어울리기도 합니다. 영어로는 ‘Beauty'라고 합니다. 영어의 아름다움은 그 어원이 사람의 이름에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여성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영어에서 아름다움은 여성의 외모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말의 아름답다.’는 아름과 답다의 합성어입니다. 아름은 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답다는 사물의 본질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말의 아름답다는 자신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이나 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기준은 품격입니다. 자신의 고유한 품격을 드러낼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난향천리 덕향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고유한 품격은 덕으로 드러납니다. 덕의 아름다움은 만리까지 전해지는 것입니다. 측은지심을 가진 사람, 수오지심을 가진 사람, 사양지심을 가진 사람, 시비지심을 가진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사제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외모나 언변이 출중해서가 아닙니다. 사제의 아름다움은 그가 입은 제의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사제가 아름답다면 사제가 사제의 직분을 충실히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제의 아름다움은 복음을 전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병자를 고쳐주는데서 시작됩니다. 마귀를 쫓아내는데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금도 없고, 은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야기합니다. 일어나십시오.”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교회를 박해했지만 회개했던 바오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사제들이 있습니다.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땀의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던 최양업 토마스 사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신자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명예, 권력, 재물이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자의 아름다움은 신앙생활의 연륜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가 아름답다면 신자의 직분을 충실히 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아름다운 신앙인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아름답습니다. 재산의 반을 나누어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는 아름답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으로 데려갔던 사마리아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뜨거운 믿음을 보여주었던 백인대장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여인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꽃동네의 시작이 되었던 최귀동 할아버지는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한센인들의 치료해준 강대건 원장님은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요셉의원을 시작한 선우경식 원장님도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화려한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당신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서 부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원하신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면 됩니다. 그런 아름다움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3.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30118.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마르 2,28).
 
오늘 <복음>도 여전히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고 한 것이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입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빈 손에 못을 바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건네주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께서는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죽음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이 되셨습니다.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손을 뻗어 상처를 입고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사랑으로 상처 입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줄 줄을 알아야 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하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손을 뻗어라.”(마르 3,5)

주님!
붙들고 있는 것을 놓게 하소서!
꼭 붙들고 있는 바람에 주지도 받지도 못한 채
단절되고 분리된 이 어리석음을 놓게 하소서!
상처와 자존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아집과 자신을 내려놓게 하소서.
말씀의 권능으로 손을 뻗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배움의 여정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이다-

 

교회는 오늘 1월18일부터 1월25일 성 바로오 사도의 회심 축일까지 일치주간으로 지냅니다. 주제는 “선을 행하고, 공정을 추구하라(Do good; seek justice)”, 이사야서 1장17절 앞부분 말씀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일찍 정해 놨습니다. ‘배움의 여정-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이다-’라는, 제가 자주 사용했던 좋아하는 제목입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 고백 기도시 6섯째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여전히 공감하고 마음 중심에 담고 살아가는 수도공동체에 속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신원이자 정체성입니다. 참으로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학인으로서의 신원임을 참 많이도 나눴습니다.

 

이 셋중 오늘은 두 번째 영원한 주님의 학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싶습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동시에 평생과제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에 항구히 충실함으로 은총의 선물을 완성해가야 하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배움의 여정에 있어 초발심의 겸손한 순종과 섬김의 자세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수도승의 신원을 요약하는 두 필수적 말마디가 바로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니 결코 지치지 말아야 할 것이 평생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날마다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어제 잊지 못할 세 경우를 통해 저는 참 많이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배움의 여정은 그대로 깨달음의 여정이요, 이런 여정에 충실함으로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1.끊임없이 불도佛道를 찾아 나섰던 구도자求道者 선재(善財)라는 이름을 가진 꽤 커다란 착하고 순한 개에 관한 일화입니다. 얼마전부터 수도원 개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마치 개들의 맏형처럼 보이는 크고 흰 개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바로 이웃 불암사의 개라는 것입니다. 불암사 절에서는 잠만 자고 낮에는 요셉 수도원의 개들과 하루종일 사이좋게 놀다가 밤에는 절로 간다는 사실을 개를 돌보는 자매들이 밝혀 낸 것입니다. 

 

아마 외로워서 동료 개들을 찾아왔는가 봅니다. 이런 평범한 사실에서도 새삼 배워 깨닫게 되는 수행생활중 더불어의 도반들에 대한 고마움입니다. 이에 저는 기발한 의견을 첨부했습니다. 

 

“아마 선재라는 불암사의 개는 전생에 베네딕도회 수도자였던 듯, 옛집 수도원이 그리워 날마다 찾지 않았나 싶습니다.”

 

2.제 손자뻘 되는 아이가 그동안 궁금했었는데 한동안 방황하다가 해군에 자원입대하여 해군 조리병으로 근무하던중 제대를 앞둔 얼마전 해군에서 있었던 조리 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상을 받았다며 조카가 상장 사진을 보내 왔습니다. 

 

이제 방황은 접고 제대하면 제 좋아하는 대학 ‘외식조리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할 것이라는 소식에 얼마나 기뻤는지, 이런 평범한 사실에서도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누가 뭐래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훌륭한 삶이라며 제 손주뻘 되는 아이를 아낌없이 격려했습니다.

 

3.오랫동안 수도사제로 생활하던 한 형제의 퇴회소식과 더불어 사제직으로부터도 떠나게 되었다는 충격적 소식을 접하고 잠시 망연자실했습니다. 한시도 방심하면 안되는 수도성소의 길임을 새롭게 배웁니다. 새삼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사랑의 분투의 노력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제 미사중 본기도 마지막 부분과 얼마전 선종하신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임종어를 배우는 마음으로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평생 배움의 여정에서 주님께 대한 사랑이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했던 아드님 예수님이요 그분의 자비와 지혜가 바로 여기서 기인함을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예수님의 자유로운 처신이 인상적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하느님 마음에 정통했던 것이며 두려움없이 소신대로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일법이 아닌 사랑의 법이란 잣대로 보면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본질을 직시하라는 물음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질책성 물음 안에 자명한 답이 있으니 적대자들은 묵묵부답할 뿐입니다. 새삼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며 예수님 자신임을 배우게 됩니다. 분별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깊이 생각하면 저절로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했던 신비의 사제, 멜키체덱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음 히브리서 내용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에 관해 더 깊이 배우며 이해하게 됩니다.

 

“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의 임금’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입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

 

은연중 하느님 아버지께 뿌리를 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암시처럼 읽힙니다. 예수님 역시 오늘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시편110,4ㄴㄷ) 라는 시편의 화답송 시편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자주 확인하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이런 이해와 더불어 초대 교회 신자들의 ‘정의의 임금’, ‘평화의 임금’으로 상징되는 영원한 대사제 파스카 예수님에 대한 이해 지평도 더욱 확장되었을 것이며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도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열린 자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바리사이 적대자들인 무지의 닫힌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배움의 자세가, 회개가 절실한 이들입니다. 배움의 여정에 소홀하여 무지의 감옥에 갇힐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이런 완고한 마음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의 답답한 심정이 잘 드러납니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말씀 하시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 졌다.’

 

오늘 복음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성하게 해 주신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두려움과 불안으로 오그라든 마음을 활짝 펴 성하게 해 주십니다. 마음이 오그라들어 있으면 몸도 오그라들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활짝 열린 마음의 자세가, 배움의 자세가 절실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했으니 말그대로 점입가경의 야합이자 악의 카르텔입니다. 이렇게 무지의 눈이 멀면 악과의 연대도 자연스럽고 거침없이 이루어 집니다. 말그대로 악의 카르텔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얼마전 원로 정치인에게 들은 ‘선무당과 색맹色盲의 카르텔’이란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참으로 겸손히 배움의 여정에 충실하지 못할 때 악의 카르텔 유혹에 빠지기 십중팔구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처럼, 무지무식하여 용감한 선무당들과 교통 신호들을 보지 못하는 색맹들이 결합하여 악의 카르텔을 이룰 때, 이보다 위험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이렇게 불의하게 이뤄졌지만 하느님은 파스카의 신비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심으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으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평생 학인으로서 매사 깨어 겸손히 지혜로이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배움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1/19(목)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악령의 외침은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내지만 그분께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악령의 외침은 진정한 고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허규 신부)

 

2. 우리말의 ‘아름답다.’는 아름과 답다의 합성어입니다. 아름은 ‘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답다는 사물의 본질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말의 아름답다는 자신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조재형 신부)

 

3.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이영근 신부)

 

4. 오늘 복음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성하게 해 주신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두려움과 불안으로 오그라든 마음을 활짝 펴 성하게 해 주십니다. 마음이 오그라들어 있으면 몸도 오그라들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활짝 열린 마음의 자세가, 배움의 자세가 절실한 사람들입니다. (이수철 신부)

 

[1/19(목)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제 26일 기도]

 

하느님!

움켜쥐고 있는 제 마음을 펴게 하소서.

열린 마음, 배움의 자세로 살게 하소서.

저 답게...아름 답게...용기내어 살게 하소서.

늘상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1월19일(목) 8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