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1월 20일 금요일[(녹) 연중 제2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홍] 성 세바스티아노 순교자
입당송
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본기도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8,6-13
형제 여러분, 6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7 저 첫째 계약에 결함이 없었다면, 다른 계약을 찾을 까닭이 없었을 것입니다.
8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결함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9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이 내 계약을 지키지 않아 나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10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1 그때에는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제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2 나는 그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13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첫째 계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리라.
○ 주님, 저희에게 당신 자애를 보여 주시고, 당신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3-19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오니
이 거룩한 신비를 정성껏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게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3년 01월 20일 금요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성경에서 ‘산’은 지형적으로 평지보다 높은 곳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산은 구약 성경에서부터 하느님과 가까운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 하느님께서는 하늘 위에 앉아 계시는 분이시고, 산은 그분께 다가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또한 산은 모세가 하느님께 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나이산에 올랐던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십계명을 받은 이 사건은 하느님의 뜻이 직접 전해지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져 성경 전반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신학에서는 이를 모세의 예형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 하느님의 뜻이 계시된 장소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산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장소이기도 합니다(마르 6,46 참조).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이미 이런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산에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산에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부르심은 온전히 예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시고 제자들은 응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첫째 목적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분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공자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습니다. 3명이 같이 있으면 그 중에 반드시 배울 점이 있다고 합니다. 후배 신부님의 사제관에서 지내면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지난번에는 식탁에 예쁜 식탁보를 깔았습니다. 벽에는 좋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식탁보와 그림이 있으니 사제관 주방이 밝아졌습니다. 이번에 갔더니 거실에 화초들이 가득 반겨주었습니다.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신부님이 교우들에게 집에 있는데 시들어가는 화초가 있다면, 바빠서 물을 주기가 어려운 화초가 있다면 사제관으로 보내달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교우들이 하나 둘 화초를 가져다주었답니다. 신부님은 늘어나는 화초를 보관하기 위해서 선반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거실 안 선반 위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화초를 보니 거실이 정원이 되었습니다. 쌀을 씻을 물을 화초에 주니 화초가 더욱 생기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화초를 가꾸는 정성으로 교우들을 만나니 교우들도 신부님을 아끼고 존경하는 것 같았습니다.
‘삼인행필유아사’ 이야기를 하나 더 나누고 싶습니다. 함께 일하는 분이 그만 고속도로에서 자동차의 타이어가 펑크가 났습니다.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한분 나타났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어머니가 오기에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 중에 타이어가 펑크 난 차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 천사는 1시간가량 시간을 들여서 스페어타이어로 교체해 주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피부색도 다른 사람입니다. 다만 고속도로 위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어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약간의 돈을 주려고 했더니 받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 주려면 이번 성탄에 카드를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주세요.” 그리고 전화번호를 주면서 집에 무사히 도착하면 문자를 달라고 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성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이렇게 고속도로 위에도 있었습니다.
예전에 ‘넷째 왕의 전설’ 이야기를 연극으로 했었습니다. 예수님께 경배 드리기 위해서 출발한 사람은 원래 4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4번째 동방박사는 오는 길에 가난한 사람을 만났을 때 가지고 간 선물을 주었습니다. 굶주린 사람을 만났을 때도 가지고 간 선물을 드렸습니다. 병든 사람을 만났을 때는 여관에 데려다 주었고, 남은 돈을 여관 주인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네 번째 박사는 이제 가진 것이 없어서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30년 시간이 흐른 뒤에 네 번째 박사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 번째 박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내가 가난했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너는 내가 굶주렸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너는 내가 병들었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네 번째 박사는 예수님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갔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13번째 제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네 번째 동방박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초를 가꾸는 정성으로 교우들을 사랑하는 사제가 13번째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펑크 난 타이어를 교체해준 천사가 네 번째 박사라고 생각합니다. 2023년이 시작되었고 어느덧 1달이 되어갑니다. 2023년에는 나의 이름이 13번째 제자의 이름으로 기록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이름이 네 번째 박사의 이름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주님께로 가는 이정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르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119.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들은 이들이 온 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그들이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지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르 3,11)라고 외쳐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사실,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 일까요?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오히려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십니다. 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라고도 하셨습니다.
대체 왜 이처럼 알리지 못하게 할까요?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곧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바로 ‘그때 그곳’에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 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그분의 찢어진 살과 피를 마시며,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주님!
저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고 진정한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며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하느님 중심의 삶
-산(山)처럼-
이런저런 단상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잠깨어 ‘자비의 집’ 숙소 문밖을 나서면 맨먼저 눈들어 바라보는 불암산과 북두칠성입니다. 불암산 기슭에 위치한 제 사랑하는 요셉수도원입니다. 제 침실 창밖에는 불암산 정상이, 식당 창밖에는 불암산 기슭이, 집무실 창밖에는 불암산 봉우리의 동생 같은 ‘애기봉’이 보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삶을 상징하는 늘 거기 그 자리의 산이요, 이 불암산을 배경한 요셉수도원입니다. 오래 전에 써 놓은,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짧은 세 편의 시가 생각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늘 새롭게 느껴지는, 시작詩作의 가장 많은 소재가 된 불암산입니다.
-1.“산처럼
머물러 살면
푸른 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이 되어 주신다”-1997.8.11.
-2.“산은
다투지 않는다
서로
등을 기대거나
바라보면서
늘 거기
그 자리에 평화롭고 고요히
머물러 있다”-1997.10.4.
-3.“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1998.1.27.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움직이는 중심, 정주의 산같은 분이십니다. 얼마전 남편의 강력한 권유로 피정을 하고 떠난 자매와의 면담고백상담시 들은 말이 생생합니다.
“아, 여기 수도원은 진짜로 가득차 있어요. 텅빈 배밭같은데, 또 성전에 들어와도 주변 모두도 진짜로 가득차 있고, 주변의 겨울 환경 색깔도 수수하고 순수하기가 진짜입니다.”
이어지는 이 자매가 남기고 간 편지글의 일부입니다.
-“자고 일어 났더니 나무 가지마다 구슬이 가득 걸려 있더군요. 밤새 비가 와서 맺힌 것입니다. 구슬, 눈물, 저런 아픔이 있기에 나무가 더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수도원은 고요하고 배나무는 말이 없고 새들은 지저귀고 시간은 충만한데 도대체 무엇으로 가득한가, 무엇으로 가득한가, 무엇으로 가득한가, 도대체 가득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가득한가 생각했답니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조금 길이 보입니다. 그 길을 천천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께 묻고, 두려워하지 않으려 노력하겠습니다. 불순한 피정자에게도 기회를 주신 주님께 영광드리옵니다. 고맙습니다. 2023.1.15. Agnes”-
나뭇가지에 달린 빗방울을 구슬로 눈물로 본 감성이 참 신선합니다. 더불어 언젠가 가을 이른아침 풀잎마다 맺힌 이슬방울들을 보며 쓴 ‘별꿈’이란 자작시와 자주 산책때 부르는 ‘아침이슬’ 노래중 참 곱고 아름다운 대목이 생각납니다.
4.“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뒤척이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2000.10.1.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미소를 배운다.”
텅빈 허무가 아닌 텅빈 충만의 하느님 사랑을 체험한 피정 자매님 같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할 때 이런 충만한 기쁨, 순수한 기쁨에 행복 체험입니다. 오늘 복음은 명실공히 예수님 활약상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이는 중심이 되시어 당신께 가까이 오는 모든 이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십니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면 엎드려 소리쳐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최상, 최고로 보호되는 우리 삶임을 깨닫습니다. 여기 복음 장면에서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사람들과 함께 하되 때로 외딴곳을 꼭 찾으셨고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셨다는 것이니 몇 대목을 소개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적절한 때 조용히 뒤로 물러가는 것도 분별의 지혜입니다.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에게 이르셨다.’
열광하는 대중을 얼마나 경계하셨는지 깨닫습니다. 사실 호산나 노래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호하던 똑같은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쳤고 죽였습니다. 민심은 천심이라 하는데 이런 민심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예수님은 결코 대중의 인기에 현혹됨이 없이 늘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셨습니다. 마침 예전에 썼던 ‘사랑은’ 시도 생각납니다.
-5.“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셨기에, 늘 이탈의 초연한 삶에 초월과 내재, 관상과 활동의 삶을 동시에 사시며 늘 마르지 않는 구원의 샘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읽은 두 글귀가 생각납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 한다. 그러나 환경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 드러난다.”
“남보다 더 잘하려고 고민하지 마라. ‘지금의 나’보다 잘하려고 애쓰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참 많이 강조한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선택과 훈련, 습관의 강조입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타고난 것들, 주어진 것들에 마음 뺏기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날마다 용감히 지혜롭게 참 좋은 주님을 선택하여, 즉 주님의 기쁨을, 감사를, 행복을, 평화를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함으로 날로 주님을 닮아가자는 것입니다.
절로 주변 환경은 변화되고 나는 부단한 자아초월로 주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주변 환경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고 비교로 인한 열등감이나 우월감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니 이 또한 주님의 놀라운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로 오늘 히브리서는 이런 주님을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이자 초월과 내재의 주님과 사랑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날로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산처럼 살게 하십니다. 아멘.
[1/20(금)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첫째 목적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분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허규 신부)
2. 2023년에는 나의 이름이 13번째 제자의 이름으로 기록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이름이 네 번째 박사의 이름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주님께로 가는 이정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르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조재형 신부)
3. ‘그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 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이영근 신부)
4. 호산나 노래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호하던 똑같은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쳤고 죽였습니다. 민심은 천심이라 하는데 이런 민심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이수철 신부)
[1/20(금)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제 27일 기도]
하느님!
하느님과 함께 있음에 감사합니다.
더러운 영들에게 유혹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 2023년 1월20일(금) 7시10분...수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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