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3월 19일 주일[(자) 사순 제4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사순 제4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늘 전례에서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기회를 가집니다. 입당송에 나오는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라는 성경 말씀에 그 정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기쁨은 희생과 극기를 실천하며 주님 수난의 길에 기꺼이 함께하려는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하여 사순 시기에 요구되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를 더욱 새롭게 합시다.
입당송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본기도
말씀이신 성자를 통하여 오묘하게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그리스도인들이 다가오는 파스카 축제를
열렬한 믿음과 정성으로 준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6,1ㄱㄹㅁㅂ.6-7.10-13ㄴ
그 무렵 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이사이와 그의 아들들이 6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10 이사이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사이에게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없소.” 하였다.
11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12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5,8-14
형제 여러분, 8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9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10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11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
12 사실 그들이 은밀히 저지르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
13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14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41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4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5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8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9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0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11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12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그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15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17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18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19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20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22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23 그래서 그의 부모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말한 것이다.
24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25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26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 하고 그들이 물으니,
27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28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29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30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31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32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33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3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39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40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또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6-9.13-17.34-38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6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8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9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3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15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17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3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인도자이신 주님,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에 은총을 베풀어 주시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하느님 나라의 행복과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소서.
2. 우리 나라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의로우신 주님, 저희 나라를 굽어살피시어, 모든 이가 주님의 정의를 올바로 깨닫고, 생활 안에서 실천하며, 공정한 사회에서 참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3.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비하신 주님,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고, 하루빨리 일자리를 찾아 기쁘고 보람된 생활을 이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주님의 보살핌으로 살아가는 저희 가정을 이끌어 주시어, 주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작은 교회가 되어,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하는 복된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예물기도
기쁜 마음으로 이 예물을 바치며 간절히 비오니
저희가 올바른 마음으로 천상 영약인 성체를 기리며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이 제사를 정성껏 드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강생의 신비를 통하여
어둠 속에서 살던 인류에게 신앙의 빛을 주시고
옛 죄의 종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재생의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이 모두 주님을 흠숭하며 새로운 노래를 부르오니
저희도 모든 천사들의 군대와 함께 큰 소리로 끝없이 외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내 눈에 진흙을 바르셨네.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네. 나는 하느님을 믿었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비추시니
은총의 빛으로 저희 마음도 밝혀 주시어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을 생각하며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께 탄원하는 이들을 지켜 주시고
약한 이들의 힘을 북돋아 주시며
세상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을
언제나 주님 빛으로 이끄시고
온갖 악에서 인자로이 구해 주시어
모두 완전한 행복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고인이 되신 어머니는 생전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하였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어머니는 배움이 적었습니다. 어머니는 배우자를 만날 때 딱 한 가지 기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배우자의 능력, 재력, 외모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배우자의 ‘학력’을 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당시 사범학교를 다녔기에 어머니의 기준에 적합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해서 57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재력을 보고 결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이사를 다 마치면 집으로 오셨습니다. 이사를 하는 것도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집안일을 잘 못해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을 보고 결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책을 가까이 하고, 서예를 하는 아버지를 존경하였습니다. 자식들에게도 늘 ‘아버지의 자리’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앙과 배움은 어머니 삶의 두 날개였습니다. 어머니는 야학으로 한글을 배웠고, 검정고시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레지오 단원으로 지냈습니다. 어머니의 안목으로 동생은 수도자가 되었고, 저는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들어온 며느리는 어려운 집안을 일으켜 세운다고 합니다. 잘 못 들어온 며느리는 집안에 분란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정부는 인사를 할 때마다 ‘홍역’을 치르곤 합니다. 후보자의 능력과 자질을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보자의 인격과 품성을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능력과 업적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인격과 품성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 수사본부장이 임명된 지 하루 만에 자진 사퇴하였습니다. 정부는 임명을 철회하였습니다. 본인도 사퇴의사를 밝혔고, 정부도 임명을 철회하였기에 사퇴의 이유를 거론할 필요는 없지만, 인사를 할 때는 좀 더 명확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인사이동 때가 되면 주교님들의 고민도 깊어 질 것 같습니다. 꼭 보내고 싶은 사제는 겸손하게 사양을 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보내고 싶지 않은 사제는 굳이 찾아와서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인사이동이 별 무리 없이 이루어지면 그제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습니다.
눈이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겉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잣대로 보려하기 때문에 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조상의 탓도 아니고, 본인의 탓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사람이 아픈 것도, 장애인이 되는 것도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랜 동안 앞을 보지 못한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축하할 일입니다. 가족들에게도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인들은 소경이 눈을 뜬 것이 신학적으로 합당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너희는 사람들의 외모와 능력,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지만, 야훼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신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볼 수 있는 “心眼”을 요구하십니다. 참으로 들을 수 있는 “智慧”를 요구하십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봅니다. 참으로 보지 못하고, 참으로 듣지 못해서 눈과 귀가 있으면서도 그릇된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여, 욕하고, 비난하고, 침을 뱉으며, 인격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하려고 왔다.”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거짓과 가식과 허영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를 보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참된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희망과 평화, 진실과 사랑이 한데 어울려, 참된 빛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기 전에, 저 땅 속에서 쉼 없이 양분과 물을 찾고 있는 뿌리를 볼 수 있다면, 깨끗한 거리를 보기 전에,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볼 수 있다면, 일등에게 찬사와 축하를 보내기 전에, 꼴등에게 위로와 격려를 먼저 할 수 있다면, 용서받기를 원하기 전에, 먼저 용서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둠에서 벗어나 이미 빛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참회와 절제, 자선의 사순시기도 벌써 반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난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난 과연 무엇을 보기 싫어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2. - 방효익 바오로 신부 강론-
사순 제4주일(가해)
제1독서(1사무 16,1b.6-7.10-13a)는 하느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사울을 왕좌에서 끌어내려야 하므로 슬픔에 젖은(15,10-16,2) 사무엘에게 하느님께서는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사무엘은 이사이의 아들들 가운데 엘리압(“하느님은 아버지”)의 수려한 외모에 마음이 들어 임금이 될 적격자라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라고 하십니다.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사람을 선뜻 칭찬하지 말고, 겉모습을 보고 그를 함부로 혐오하지 말라’(집회 11,2)는 것입니다. 사람을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꾸짖지 말고, 먼저 깊이 생각해 보고 나서 질책하라’(집회 11,7)는 것입니다. 장남도 아니고 아직 성숙하지 않았지만, 열정적이고(볼이 불그레하고), 맑은 정신을(눈매가 아름다운) 지니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면서 인간의 생각과 길은 하느님의 그것들과 같지 않다는 뜻을(이사 55,8)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다윗과 맺으신 계약을 절대로 파기하지 않으신다는 약속(시편 89,4; 2사무 7,8-16)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이끄는 목자(시편 23장: 화답송)가 그의 후손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요한 9,1.6-9.13-17.34-38)은 태생 소경을 치유하시면서 구세주로 드러내십니다.
성전 밖으로 나가시던(8,59) 예수님의 눈길이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유다인)에게 멈췄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 태생 소경임(마르 10,46-52)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9,5)라고 하신 다음 이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발라주시고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진흙은 당시 민간요법인 듯하며, 실로암 연못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기혼 샘물(기원전 740년경에 팠다)의 저수장을 말합니다(2열왕 20,20; 2역대 32,30). 진흙이나 실로암이 치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실로암이 “파견된 이”라는 뜻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파견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9,39)입니다.
그날은 안식일인데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하시자 바리사이들이 즉시 시비를 겁니다. 바리사이들이 눈을 뜬 태생 소경에게 자기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두 번씩이나 묻자, 그는 즉시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합니다.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바리사이들의 생각을 뒤집는 엄청난 고백입니다. 눈 뜬 이는 바리사이에게 “어째서 자기 말을 믿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또한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하면서 바리사이들에게 엄청난 모욕감을 안겨줍니다. 이 말을 듣자 바리사이들은 즉시 치유된 이를 회당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회당에서의 추방은 유다인 공동체를 떠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합류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 뜬 이를 다시 만나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고 물으셨고, 눈 뜬 이는 “선생님, 그분이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셨듯이(4,26),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눈 뜬 이는 즉시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태생 소경은 자기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을 처음에는 “예언자”라고 했으나, 눈을 뜬 다음, 사마리아의 여인처럼 예수님을 뵙고 대화하는 가운데,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눈을 떴다고 해도 예수님과의 만남(대화)이 없었다면 자신을 치유해주신 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던 태생 소경이 예수님과의 접촉을 통하여 구원자를 볼 수 있게 되었고, 대화를 통하여 목자의 소리를 듣고 따라나서는 양(10,27)으로 바뀝니다.
제2독서(에페 5,8-14)는 빛의 자녀답게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고 받은 세례성사 때문에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게 되었으니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에페소인들에게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다시 하라(묵시 2,4-5)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로마 13,12)고 합니다. 빛의 자녀는 말과 행동이 같아야 하며,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으려 노력해야 하고,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않도록 애써야 하므로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라고 합니다(로마 13,13). 또한 세례를 받은 이들은 그리스도를 입었으므로(로마 13,14) 분별력을 갖추고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빛(향기)을 반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행동을 통해서 반사되는 그리스도의 빛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보고, 믿을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그리스도)이 있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빛(그리스도)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려는 관습에 젖어 어둠 속에 사는 이들(바리사이들)은 빛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보아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요한 1,5).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어겼기 때문에 빛을 잃어버린 이(유다인)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고,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려는 이들의 대표적인 인물인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보는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다는 것은 빛이 없기 때문이며, 사무엘처럼 겉모습만 보려 하고, 편협한 시각과 왜곡된 마음으로 보려고 애쓰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들은 다 보는데 자기만 못 본다는 것은 관심이 전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보는 눈이 있어도 못 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또한 보는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눈에 커다란 들보가 들어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눈에 들보가 있다는 것(루카 6,41-42)은 자아도취에 빠져있다거나, 자만심과 우월감, 독선과 자기중심적 태도에 젖어 있다는 것입니다. 보는 눈이 있어도 못 본다는 것은 지나친 자기 비하와 열등감은 물론 자기 연민에 빠져 진정한 자기(참 자아)를 숨기고 위선적으로(거짓 자아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눈에 들보가 있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데도,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보려고 하면서 제 눈에는 들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을 바라보는 눈이 멀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요한 9,39-41).
유다인을 상징하는 태생 소경의 눈은 진리(빛)를 볼 수 없는 눈이었습니다. 태생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하는 가운데 통하여 그분을 선생님에서 예언자로, 예언자에서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눈을 떴기에 눈에 진리(그리스도)의 빛이 들어가게 되어 자기중심적 생활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세상과 이웃을 볼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빛을 보게 함: 생명으로 나아감)은 바리사이(어두움: 거짓, 악, 죽음)에 의해 명확하게 더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빛이 없어서 세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마음은 바리사이처럼 늘 어둠에 덮여있어서 온 세상 것이 시빗거리로만 다가올 것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과 세상을 위해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다루지 않거나, 거룩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요한 12,36). 빛의 자녀가 빛을 반사하지 못하거나, 빛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기를 거절하거나, 어둠과 어울리려고 한다면 빛이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이웃과 세상을 볼 수 있게 도와주는 빛은 바로 우리의 참빛이시며 목자인 그리스도십니다.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바른길로 이끌어주시고 우리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실 것입니다(시편 23장). 그런데 우리 마음 안에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시지 못한다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에페 5,14)라고 외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318. 사순 제3주간 토요일.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상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 곧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인 세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차이는 ‘보는 눈’에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는, 그들은 ‘타인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곧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는, 그들은 눈이 ‘바라보는 곳’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혼자말로 기도했습니다.”(루카 18,11)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루가 18,13).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곧 죄인임을 깨닫고서,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상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되, 결코 자신을 하잖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귀중하게 여기고 중시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자신을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고,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주님!
낮추는 이가 되게 하소서.
타인의 평가나 꾸짖음을 물리치지 않게 하시고,
인정할 줄을 알고 굽힐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을 차별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게 하시고,
존중하고 존경하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앞에 서 있는 자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내세우지도, 숨기지도 않게 하시고,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구하게 하소서.
오,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참된 기도와 회개의 은총
-겸손, 신의, 예지-
역사는 반복되는 듯 합니다. 나라안팎의 현실을 대하노라면 블랙홀과도 같고 카오스와도 같이 아주 어지롭고 혼란스럽습니다. 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정반대의 견해니 참 분별하기 힘듭니다. 마치 무지의 블랙홀, 무지의 카오스같습니다. 오늘만의 현실이 아니라 예전에도 동서방 어느 나라나 늘 그랬습니다. 늘 위기였고 그때마다 통과해 왔습니다. 너무 비관적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해마다 특별 영적 훈련기간이자 회개와 정화의 시기인 교회의 사순시기가 참 고맙습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고 온전히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단 하나 참된 회개뿐입니다. 참된 기도에서 참된 회개요 참된 겸손입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바리사이는 무지한 사람의 전형입니다. 참으로 무지한 사람으로 참된 회개와 겸손이 절실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바리사이들입니다. 의로움은 자기의 행동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하느님만이 부여하시는 은혜입니다.
다음 바리사이의 기도를 통해 그의 삶과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기도했다니 이것은 대화의 기도가 아니라 독백입니다. 실감나는 바리사이 기도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기도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를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교만한 삶입니다. 순전히 자화자찬 자기자랑의 유치한 기도입니다. 말그대로 하나마나한 기도입니다. 기도하며 비교하며 판단하며 무시하니 판단의 죄, 무시의 죄를 짓습니다. 자기를 전혀 모르는 무지하고 교만한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참된 회개와 겸손의 정신이 전무합니다. 하느님을 향해 열린 기도가 아니라 완전히 자기 안에 닫힌 기도입니다. 과연 나의 기도는 바리사이를 닮지는 않았는지요. 다음 호세아서의 말씀이 그대로 바리사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에프라임라,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같다,”
아침 구름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같은 신의라 하니 전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는 완벽해 보여도 겸손과 회개의 정신이 전무한 바리사이의 기도와 삶입니다.
반면 바리사이와 너무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완전히 자기를 비운 세리의 가난하고 겸손한 기도입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합니다. 짧으니 진정성 가득한, 세리의 주님 자비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바로 우리가 바치는 자비송은 여기 근거합니다. 진정 가난하고 겸손한 영혼들이 마지막으로 바칠 수 있는 기도는 이 자비송 하나뿐일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가 여기 근거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로 호세아서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 바로 세리입니다. 우리 모두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가난하고 겸손한 세리가 되어 주님의 회개의 부르심에 지체없이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호세아서의 주님께 돌아가자는 회개의 촉구가 참 다정하고 위로가 됩니다. 얼마나 좋으시고 아름다운 주님이신지 회개를 통해 닮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역시 아름다운 전문을 인용합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사흘째 되는 날에 일으켜 살려 주신다니 회개한 이들에게 파스카의 삶을 선사하신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된 회개와 더불어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주님을 닮아가고 알게 됩니다. 회개할 때 봄비처럼 오시어 우리의 무딘 마음을 적시어 부드럽게 하시는 주님 사랑의 은총입니다. 그대로 회개의 기도를 바친 겸손한 세리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간 것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이니, 세리만이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말씀과 제1독서 호세아서 말씀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참된 회개를 통한 은총이 겸손임을 깨닫게 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교만으로 낮아지고 겸손으로 높아진다는 역설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참된 회개의 은총의 열매가 이런 겸손입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바로 호세아의 메시지를 집약하는 말입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겸손해질수록 하느님께서 바라시는바 신의요 당신을 아는 예지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의 사람은 바로 주님을 닮아 겸손한 사람이요, 신의와 예지의 사람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겸손의 사람, 신의의 사람, 예지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멘.

[3/19(일) 사순 제4주일, 되새김 구절]
1. “그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조상의 탓도 아니고, 본인의 탓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다.”
아름다운 꽃을 보기 전에, 저 땅 속에서 쉼 없이 양분과 물을 찾고 있는 뿌리를 볼 수 있다면, 깨끗한 거리를 보기 전에,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볼 수 있다면, 일등에게 찬사와 축하를 보내기 전에, 꼴등에게 위로와 격려를 먼저 할 수 있다면, 용서받기를 원하기 전에, 먼저 용서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둠에서 벗어나 이미 빛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조재형 신부)
2. 사무엘은 이사이의 아들들 가운데 엘리압(“하느님은 아버지”)의 수려한 외모에 마음이 들어 임금이 될 적격자라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라고 하십니다.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사람을 선뜻 칭찬하지 말고, 겉모습을 보고 그를 함부로 혐오하지 말라’(집회 11,2)는 것입니다. 사람을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꾸짖지 말고, 먼저 깊이 생각해 보고 나서 질책하라’(집회 11,7)는 것입니다. (방효익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주님!
낮추는 이가 되게 하소서.
타인의 평가나 꾸짖음을 물리치지 않게 하시고,
인정할 줄을 알고 굽힐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을 차별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게 하시고,
존중하고 존경하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앞에 서 있는 자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내세우지도, 숨기지도 않게 하시고,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구하게 하소서.
오,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합니다. 짧으니 진정성 가득한, 세리의 주님 자비를 청하는 기도입니다.(이수철 신부)
[3/19(일) 사순 제4주일, 제 85일 기도]
하느님!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하여...
저를 선택하심에 감사합니다.
용서를 청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하느님!
제 자신을 내세우지도, 숨기지도 않게 하소서.
제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고 존경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3월19일(일) 4시...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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