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3월 20일 월요일[(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예수님을 기르는 일에 헌신한 의로운 요셉 성인을 기리고, 성인의 믿음과 덕을 본받기로 다짐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입당송
보라,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길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다.<대영광송>
본기도
복된 요셉에게 어린 시절의 구세주를 돌보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교회가 인류의 구원 계획에 충실히 봉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7,4-5ㄴ.12-14ㄱ.16
그 무렵 4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그의 후손들은 영원히 이어지리라.
○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제가 아뢰나이다. “주님은 자애를 영원히 세우시고, 진실을 하늘에 굳히셨나이다.” ◎
○ 나는 내가 뽑은 이와 계약을 맺고,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였노라.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 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 ◎
○ 그는 나를 부르리라.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 그와 맺은 내 계약 변함이 없으리라.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4,13.16-18.22
형제 여러분,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주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6.18-21.24ㄱ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또는>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51ㄱ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예물기도
복된 요셉이 충성스럽고 경건한 마음으로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신 성자께 봉사하였으니
저희도 깨끗한 마음으로 이 제사를 봉헌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특히 복된 요셉의 대축일에
아버지를 마땅히 찬송하고 찬양하며 찬미하나이다.
아버지께서는 의로운 요셉을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의 배필로 삼으시고
충실하고 지혜로운 종 요셉을 성가정의 가장으로 세우시어
성령으로 잉태되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살피게 하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사들이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고
주품천사들이 흠숭하며
권품천사들이 두려워하고
하늘 위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복된 세라핌이
다 함께 예배하며 환호하오니
저희도 그들과 소리를 모아 삼가 주님을 찬양하나이다.
영성체송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복된 요셉의 축제를 기쁘게 지내며
이 제대에서 생명의 양식을 배불리 먹었으니
저희를 영원히 지켜 주시어
자비로이 베푸신 은총을 길이 간직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구약의 예언자 중에 한 명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엘리야라고도 하였고, 예레미야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도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칭찬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느님께서 이끄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호칭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면서 하느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였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신앙인은 모두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저도 가끔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신문사 직원들은 저를 ‘사장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동북부 ME 부부들은 저를 ‘동북부 엠이 대표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부르클린 공동체에서 교우들은 저를 ‘본당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저의 직책은 다양하지만 저의 정체성은 ‘사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 병자를 고쳐주는 것입니다. 시대와 공간은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은 변함이 없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제가 복음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말을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마귀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재물, 명예, 권력’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병자를 고쳐주기 위해서는 병자들의 아픔을 공감해야 합니다. 사제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잉태한 것을 알았던 요셉 성인은 조용히 파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법대로 하면 요셉은 마리아를 상대로 고소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은 무척 엄격하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재판을 받고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셉이 기분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면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요셉 성인이 법대로 했다고 해도, 기분대로 했다고 해도 당시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명백히 마리아의 잘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고발하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치지도 않았습니다. 말 할 수 없었던 마리아의 입장을 생각하였고, 조용히 파혼만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커다란 배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셉은 이제 또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의로운 삶’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유명한 겟세마니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나사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놓고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은총을 주며, 그 은총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때가 많습니다. 출세와 성공이 삶의 기준이 되곤 합니다. 왜 공부를 하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되는 세상입니다. 돈이 삶의 중심이 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돈을 벌고,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서 양심을 팔고, 사람을 속이고, 소중한 것들을 멀리합니다. 오늘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 요셉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2. 송영진 모세 신부 강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2023. 3. 20. 월)(마태 1,16.18-21.24ㄱ)
<기도하는 사람>
“사랑은 같아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강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6-18).”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사람으로 사시다가 돌아가신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같아지는 과정에서 아기 예수님의 부모로 요셉과 마리아가 선택되었습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 이야기를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하느님의 지시를 받아서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1,27),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마리아만’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요셉도 함께 선택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태오복음 1장에 있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요셉이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요셉은 그 어려움들을
믿음으로 극복했고, 응답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18-21)”
1) 요셉은 마리아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저절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마리아는 요셉에게 그 일을 곧바로 알렸을 것입니다. 요셉은 ‘성령 잉태’ 자체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에 마리아가 부정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었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 마리아에게 일어났음을 믿었습니다.
<“사랑은 믿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을 보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믿지 못해서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경우를
볼 때가 많습니다. 사랑한다면 믿어야 합니다.>
2) 요셉이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한 일도,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나타냅니다.
‘사람들 모르게’ 파혼하려고 한 것은, 겉으로는 법적인 부부로 살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파혼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에게 그 어떤 불행한 일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즉 요셉은 사랑하는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고, 아기의 진짜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라면
자기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해서 파혼하려고 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3) 요셉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작정만 하고 실행하지는 못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는 고민하면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난 일은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됩니다. 사실 꿈에 천사가 나타난 일은 요셉 자신의 증언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중에 응답과 확신을 얻은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천사가 나타난 일이 많은데, 그 일들도 요셉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4) 요셉은 하느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 일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선’과 ‘사랑’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었기 때문에 응답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느님이 두려워서 복종하는 것과 하느님을 사랑해서 순종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두려워서 복종하는 것은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해서 순종하는 것은 끝까지 갑니다.
5) 요셉의 사랑과 믿음과 기도와 순종은 ‘인내’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도, 또 태어나신 뒤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요셉은 하느님과 마리아와 예수님을 사랑했고, 믿었고, 기도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일들을 기꺼이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만일에 사랑도 믿음도 없고 기도하지도 않는다면, 인내하지도 못합니다.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는 사람일수록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합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믿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말수가 적은(또는 말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은, 그의 사랑과 믿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우리는 요셉의 그 사랑과 믿음과 기도와 인내를 본받아야 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319. 사순 제 4주일.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요한 9,37)
오늘은 사순 4 주일이며, 기쁨주일 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기쁨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를 밝혀줍니다. 곧 참된 기쁨은 ‘빛을 보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말해주기에, 기쁨은 ‘빛이신 주님을 아는 데서 온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모두 눈을 지니고 있고, 눈으로 타인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바라본다고 해서 모두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당달봉사가 있는가 하면,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 심미안이 있고, 보아도 보여 지는 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보는 대로만 고집하는 편견이 있습니다.
<제1독서>는 눈이 빛나는 다윗이 선별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제2독서>는 빛의 자녀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입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말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리라.”(에페 5,8-14)
그리고 <복음>은 태생소경이 눈을 뜨고 빛을 보는 이야기 입니다. 제자들은 태생소경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죄든, 부모의 죄든, 죄 탓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이다.”(요한 9,3)
그렇습니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소경인 그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곧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대변해 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가 눈을 뜨게 되는가? 그에게 빛이 생기게 되는가?
그는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묻혀 진흙에 개어서 자신의 눈에 바르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요한 9,7)하신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도 못했지만, 말씀에 순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보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침을 묻힌 진흙을 눈에 발라 주었습니다. 진흙으로 빚어진 그의 살이 예수님의 신성과 결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도유된 것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친히 소경의 눈을 만지시고, 그의 가슴 속에 당신의 빛을 부어주시어 그가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남들처럼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도 보게 되었습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혹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도 아직 눈 먼 존재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를 주님을 계시하는 장소로 알아 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을 떠난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신학자라 불리는 보나벤뚜라는 인간에게는 3중의 눈이 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눈과 지성의 눈과 관조의 눈이 그것이다.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세계와 그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정신의 눈으로써 영혼과 그 안에 있는 것을 보며, 관조의 눈으로써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본다. 그리하여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인간 밖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지성의 눈으로써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관조의 눈으로써 인간 위의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이’에게 말합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요한 9,37)
분명, 우리는 이미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면, 곧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면, 완고하여 보고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분명, 여전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혹 나는 지금 빛이 아니라 어둠을 보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 자신에게서나 타인에게서 어둠이 보인다면, 얼른 그 어둠을 비추고 있는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세상과 모든 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 바로 이것이 “기쁨주일”인 오늘 우리가 누리는 참된 기쁨일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리사이들이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요한 9,37)
주님!
분명, 이미 당신을 보았습니다.
보고도 아직 보지 못함은 완고하여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항상 저를 향하여 계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빛을 보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나의 주님!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개안開眼의 여정
-빛의 자녀답게 삽시다-
사순시기 주일전례가 은혜롭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사순 제1주일에 우리는 주님과 함께 광야에서의 악마의 유혹을 통과했고, 사순 제2주일에는 주님의 최측근 애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했고, 사순 제3주일에는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야곱의 우물가에서 생명의 주님을 만나 영적 목마름을 완전 해갈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순 제4주일 래타레 주일, 기뻐하라 장미주일에는 실로암 못가에서 태생 소경과 함께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립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잔치가 열리는 성전이 상징하는바 주님을 만나 개안하는 눈이 열리는 실로암 못가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무지의 눈이 활짝 열리기를 갈망하면서 오늘 사순 제4주일 장미주일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아침 성무일도시 즈카르야 노래 후렴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못보는 사람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바로 못보는 사람을 보게 하려고 실로암못으로 오셨다는 주님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러니 깊이 알고보면 파견된 분, 예수님이 진짜 실로암못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성가연습을 하면서 새삼스레 잔잔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기뻐하라 장미주일에 이어, 사순 제4주간 월요일은 우리 요셉수도원의 주보성인인 “성 요셉 대축일”이요, 화요일은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이고, 토요일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주님은 사순 제4주간, 아름다운 축제의 기쁨의 빛으로 우리 마음을 환히 밝혀주십니다.
사순 제4주일 “기뻐하여라” 주일 제의 색깔도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색 분홍 제의입니다. 입당송 이사야서 말씀(66,10-11)도 오늘 기뻐하라 래타레 주일에 잘 어울립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즐거워하여라, 라틴어로 하며 ‘래타레(Laetare)’이며 그래서 래타레 주일입니다. 제2독서 바오로 사도 권고 말씀 역시 고무적이요 우리의 기쁨을 배가 하며 마음을 환히 밝힙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 내십시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얼마나 힘이 납니까! 제가 늘 강조하다시피 삶은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빛이자 생명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훈련과 더불어 습관화될 때 비로소 빛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제2독서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우리 모두 잠에서 깨어나 주님의 빛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 것을 촉구합니다. 영적 잠에서 깨어나 깨어 살아갈 때 깨끗한 마음에 무수히 쏟아지는 깨달음의 선물들이요 비로소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사순시기, 아주 적절한 충고 말씀입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늘 우리를 비추는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개안의 여정-빛의 자녀답게 삽시다”로 정했습니다. 강론 제목을 오늘 하루는 물론 평생 화두로 명심하고 살아도 좋을 것입니다. 사순 제4주일 서울주보 1면 오늘 강론 주제도 인상적입니다.
“완고함 3종 세트”란 제목하에 결론은 다음과 같이 맺고 있었습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의 믿음 중에 ‘미움으로 가득한 분노’, ‘내 이성의 합리성을 충족하려는 오만함’, ‘이웃에 대한 편견’, 이러한 일상의 ‘완고함 3종 세트’가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지의 죄라 할 수 있습니다. 무지에 눈멀 때 분노, 교만, 편견, 탐욕, 질투등 줄줄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인류의 빛이자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주님 말씀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어 우리 모두 주님의 빛 안에서 빛의 자녀로 살게 됩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지기 마련이요,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에페5,13).
그러니 오늘 화답송 후렴이 참 적절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는 고백입니다. 방금 성가 연습시 흥겹게 불렀다시피 가사도 곡도 흥겹습니다. 평생 좌우명이나 묘비명으로 삼아도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자주 노래 기도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불러도 감미롭고 전혀 싫증을 못 느낄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얼마전 어느 자매님으로부터 좋은 조언을 받았습니다. 정형외과 의사로부터 받은 충고랍니다. 가슴과 허리를 펴고 몸의 체형을 바로 잡는데 양손을 번쩍 올리는 ‘만세’가 그렇게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주 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만세 삼창을 자주 하며 몸의 균형을 바로 잡습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수도원 만세!”
가슴을 활짝 펴고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을 활짝 열고 만세부르기 수행에 충실할 때 저절로 주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살려는 의욕도 샘솟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참 깁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인 태생 소경을 고쳐 주시는 빛이자 생명이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태생 소경이 상징하는바 무지에 눈먼 사람들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마 원죄의 결과가 무지일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무지에 눈먼 우리를 눈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인류의 빛이신, 세상의 빛이신 주님뿐입니다. 평생을 살아도 무지에 눈먼, 눈뜬 소경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함은 무지에 눈멀고 무지에 귀먹었기 때문입니다.
삶은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이라 했습니다. 또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단번에 눈뜨는 개안은 없습니다. 개안의 여정입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을 만나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하면서 눈도 밝아지고 시야도 날로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이래야 비로소 빛의 자녀답게. 주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실로암 못가에서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린 태생 소경과 진짜 영적으로 눈먼 바리사이들과의 관계가 참 불편합니다. 전혀 소통의 대화가 되지 않으니 바리사이들이 무지에 눈이 멀고, 무지에 귀가 먹었기 때문입니다. 태생 소경의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도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에서 ‘예언자’로, ‘선생님’으로, 그리고 마침내 믿음의 눈이, 영안이 활짝 열려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참으로 눈이 열릴 때 우리의 눈은 주님의 눈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자비롭고 지혜로운 눈, 깊고 널리 통찰하는 눈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무엘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다윗을 선택할 때처럼 우리도 주님의 안목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의 외모를 보고 뽑으려 했을 때 주님은 즉시 차단하고 나섭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반면 막내인 다윗이 도착했을 때 주님은 즉시 사무엘에게 알립니다.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주님과 늘 함께 함으로 주님의 안목을 배운 사무엘이 우리에게는 롤모델이 됩니다. 평생 개안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날로 빛이자 생명이신 주님과의 신뢰와 사랑이 깊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빛안에서 빛의 자녀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아가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예수님 닮기의 “예닮기도”를, “행복기도”를 다시 나눔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주님,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3/20(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 요셉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조재형 신부)
2. 요셉이 말수가 적은(또는 말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은, 그의 사랑과 믿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우리는 요셉의 그 사랑과 믿음과 기도와 인내를 본받아야 합니다.>(송영진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요한 9,37)
주님!
분명, 이미 당신을 보았습니다.
보고도 아직 보지 못함은 완고하여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항상 저를 향하여 계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빛을 보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나의 주님! 아멘.(이영근 신부)
4. 주님과 늘 함께 함으로 주님의 안목을 배운 사무엘이 우리에게는 롤모델이 됩니다. 평생 개안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날로 빛이자 생명이신 주님과의 신뢰와 사랑이 깊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빛안에서 빛의 자녀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이수철 신부)
[3/20(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제 86일 기도]
하느님!
항상 저를 향하여 계신 사랑의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의 빛안에서 빛의 자녀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3월20일(월) 3시4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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