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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5월 9일 화요일[(백) 부활 제5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5월 9일 화요일[(백) 부활 제5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묵시 19,5; 12,10 참조
낮은 이든 높은 이든 하느님을 경외하는 모든 이들아, 우리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그리스도의 권세와 권능과 구원이 나타났다. 알렐루야.

본기도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저희가 한결같은 믿음과 희망으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심을
의심 없이 믿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4,19-28
그 무렵 19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20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2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5(144),10-11.12-13ㄱㄴ.21(◎ 12 참조)
◎ 주님,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알리나이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 당신의 위업과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 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
○ 내 입은 주님을 노래하며 찬양하리라. 모든 육신은 그 거룩하신 이름 찬미하리라. 영영 세세에. ◎

복음 환호송

루카 24,46.26 참조
◎ 알렐루야.
○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당신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네.
◎ 알렐루야.

복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27-31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에게 이토록 큰 기쁨의 원천을 마련해 주셨으니
기쁨에 가득 찬 교회가 드리는 예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영원한 즐거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로마 6,8 참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 믿나이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파스카 신비로 새롭게 하신 주님의 백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육신의 부활로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지금은 자동차가 사치품이 아닙니다. 자동차는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자동차는 신발과 같습니다.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곳이 많기에 자동차는 생활에 꼭 필요한 도구입니다. 저는 본당 신부님의 배려와 도움으로 동창 신부님들 중에서 제일 먼저 자동차를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제가 산 자동차의 사양은 엑셀 TRX’였습니다. 엑셀은 자동차의 출시된 이름이고, TRX는 자동차의 기능이었습니다. 당시 엑셀의 사양은 ‘GL, GLSI, TRX’ 3등급이 있었습니다. 저의 차는 그중에서 등급이 제일 높은 TRX였습니다. 핸들이 파워핸들이었고, 문이 자동으로 잠기는 정도였습니다. 당시에는 핸들을 손으로 돌리는 것이 많아서 정차 중에 핸들을 돌리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문도 일일이 열어야 했습니다. 제 차의 등급 정도면 당시로는 좋은 편이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요즘의 차들은 성능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사양의 차에도 파워핸들, 자동잠금장치는 있습니다. 내비게이션, 룸미러 조정, 쿠르즈 기능도 있습니다. 기본 차선을 유지하기도 하고, 차선을 넘어가면 경보음이 울리기도 합니다. 이제는 자동차와 컴퓨터가 결합되고 있습니다. 자동차의 기본등급이 높아졌습니다.

 

컴퓨터의 발전도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30년 전에 컴퓨터를 살 때는 그저 문서작업을 할 정도였습니다. 컴퓨터의 기본 사양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통신도 전화선으로 하였습니다. 노래한곡 다운 받는데 1시간이 걸렸습니다. 동영상을 보내고 받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컴퓨터의 하드웨어의 용량이 작았기 때문입니다. 전국적으로 광케이블이 설치되고, 컴퓨터의 하드웨어의 용량도 커지면서 드디어 검색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컴퓨터는 게임을 즐기고, 문서작업을 하는 용도를 뛰어넘었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쇼핑을 할 수 있습니다. 은행업무도 볼 수 있습니다. 공문서를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노래는 물론 동영상도 아주 쉽고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컴퓨터의 기본등급이 높아졌습니다. 현대의 걸리버, 삼성의 갤럭시로 대표되는 핸드폰도 90년대 중반에 보급되었습니다. 핸드폰은 이동하면서 전화를 주고받는 기능이 기본 값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자를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스마트폰이라는 이름으로 전화기와 컴퓨터가 결합되었습니다. 컴퓨터가 스마트폰에게 자리를 내어 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핸드폰의 기본등급이 높아졌습니다.

 

사람들이 자동차, 컴퓨터, 스마트폰을 만들었고, 기본사양은 점차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미래의 자동차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될 수 있고,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미래의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정보와 통신의 영역을 넘어서 문학과 예술 그리고 종교와 창작의 영역으로 확대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에게도 기본등급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녀를 출산하고, 종족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 있는 기본등급입니다. 사람도 육체를 지닌 생명이 가지는 한계를 넘어서기가 어려웠습니다. 생로병사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번뇌입니다. 아담이 죄를 범한 후에 들어온 죄의 뿌리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이 있고,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해야 하는 고통이 있고,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하는 고통이 있고, 거짓 자아에 넘어가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번뇌와 고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원숭이에게 너는 왜 원숭이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번뇌와 고통은 사람에게 주어진 기본사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번뇌와 고통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업그레이드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불교는 그런 과정을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최종의 목적지는 깨달음입니다. 정화와 성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스스로 업그레이드 할 수 없듯이 사람은 창조하신 하느님께 의탁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면 번뇌와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번뇌와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우리는 번뇌와 고통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 부활의 삶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교회는 관상을 통해서 하느님과 직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 성령을 받은 사람은 완덕의 길로 나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체의 길과 영의 길에서 방황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의 길에서 구원받았음을 확신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평화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전도 여행길에 나섰던 바오로 사도!

 

오늘 돌에 맞아 거의 요르단강을 건너갔다 오셨던 바오로 사도에 대한 사도행전의 말씀을 읽으며 아스라한 옛일 한 가지가 생각났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열심히 운동장에서 축구 시합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장난꾸러기 친구 두 녀석이 하라는 축구는 안하고 옥신각신 다투다가, 마침내 손에 돌을 들고 서로 던지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그런 상황도 모르고 열심히 축구에 열중하고 있던 저는, 한 녀석이 잘못 던진 큼지막한 돌에 정통으로 맞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엄청난 강속구였습니다. 얼마나 강하게 맞았던지 저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응급실로 실려 갔습니다.

 

돌에 맞기 전만 해도 저는 공부 쫌 한다는 소리 들었었는데, 그 뒤로 도통 집중도 잘 안되고, 학교 성적이 수직 낙하했습니다. 여파가 상당했던 것입니다.

 

선교 활동에 전념하던 바오로 사도 역시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온 유다인들이 던진 돌에 맞았습니다. 그냥 돌이 아니었습니다. 야구공만한 돌이었습니다. 정통으로 맞았던지 바오로 사도 역시 그 자리에서 실신해서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습니다.

 

당시 돌은 살상용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건장한 장정들이 손에 손에 돌을 들고 한 사람을 둘러쌉니다. 집행인이 돌을 던지라는 신호를 보내면, 양손에 들고 있던 돌을 일제히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던집니다. 강속구로 말입니다.

 

하나 하나 돌을 맞을 때 마다 그 충격이 엄청납니다. 돌에 맞은 부분에서 피가 흐릅니다. 머리에 맞게 되면 즉시 정신이 몽롱해지고, 마침내 외부충격에 의한 뇌진탕으로 절명에 이르게 됩니다. 참으로 끔찍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잔뜩 적개심을 품은 이방인들, 이방인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동족 유다인들, 그들이 던지는 돌팔매 사이를 아슬아슬 피해 다니며, 그렇게 바오로 사도는 유랑 선교 활동에 나섰던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번이고 삶과 죽음 사이를 오고 갔습니다. 매일 매순간이 살얼음 판 위를 건너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선교활동 중에 체험하게 된 기쁨과 보람도 컸습니다. 그러나 수시로 다가오는 것이 생명의 위협이었습니다. 미움과 박해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오로 사도는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전도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이 마을에서 전도 여행이 성공하면 하느님께 큰 감사를 드리며 찬미의 송가를 불렀습니다. 다른 마을에서 협박하고 위협하면 그러려니 하면서 쿨하게 또 다른 마을로 건너갔습니다.

 

마치 짐짝처럼 성밖으로 내던져진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돌아가신 줄 알고 슬피 울며 제자들이 둘러싸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훌 털며 자리에 일어나셨습니다.

 

돌에 맞은 후유증이나 트라우마가 상당했을텐데 바오로 사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튿날 바르나바와 함께 또 다른 도시 테르베로 갔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 상태에서 한 며칠 연가를 내서 휴식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해가 뜨자 벌떡 일어나서 또 다시 복음 선포에 매진했습니다.

 

그 끔찍한 고통과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흔들리지 말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고통과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전진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행전 14장 22절)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508.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를 제시해줍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해보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금방 들통 납니다. 여기에서, “계명과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우선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사랑과 신의로 맺어진 예수님과의 결속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믿지 않고서는 그분의 말씀과 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래 “지키다”라는 동사는 “간직하다” “새기다” 혹은 “신경 써서 돌보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곧 ‘마음이 담긴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의무나 규칙이나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전제 됩니다.
 
그러기에,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넘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지키는 것, 곧 마음으로 결속된 바를 사랑으로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첫째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그렇습니다. 사랑의 증거는 ‘행실’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이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 14,21 참조). 이미 그이 안에 거처를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당신의 어좌로 삼으신 까닭입니다. 이미 그이 안에 함께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그와 함께 살 것이다”라는 말씀은 ‘안에’(εν)서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성령으로 일치를 이루어 산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1요한 4,16)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내주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삼위의 사랑을 드러낼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하오니 주님!
빛이 되어 오소서. 저를 사르는 빛으로 오소서.
함께 살며, 불살라 태우소서. 저를 태워 세상을 밝히소서.
제가 빛이 되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주님!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저 자신보다 당신을 앞세우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도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을 믿고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키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 지키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영성의 시냇물

-“한결같은 주님 사랑, 말씀 사랑”-

  

“주님, 저희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시편115,1ㄱㄴ)

 

몇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두분으로부터는 자녀들로부터 어버이날을 앞두고 저녁을 대접 받았다는 흐뭇한 소식도 들었고, 1인가구 독신으로 살아가는 어느 형제로부터는 ‘홀로(solo)’살아가는 분들을 만나 노후 삶에 대해 의논을 나눴다는 대비되는 이야기들도 들었습니다. 참 다양한 삶입니다. 

 

새벽 휴게실에 들렸다가 주간지 첫 페이지 “군사비 지출 1분에 56억원 ‘지구는 탄다’”라는 말마디에 내용을 읽어 봤고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가 지난 4월24일 ’2022녀 세계 군사비 지출 현황’을 발표했다. 이에 맞춰 세계군축행동의 날 캠페인에 나선 35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에 따르면 2022년 전 세계가 지출한 군사비는 2021년 대비 3.7% 증가해 약 2980조 원이며, 한국의 군사비 지출 순위는 사상 처음으로 세계 9위를 기록했다. 참가 활동가들은 ‘1분에 56억원이 군사비로 사라지고 있으며, 한정된 예산과 자원의 우선순위를 군사비가 아닌 기후위기 대응과 평화구축에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가 쓸데없는 군사비 지출로 작년 2980조원이 사라져 갔다니, 정말 미쳐가는 인간 무지의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정말 영성의 시대가, 자비와 지혜의 시대가 도래했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불암산 계곡물 소리를 들으니 참 상쾌했습니다. 강론쓰는 중에도 하느님의 생음악처럼 들리는 계곡물 소리가 마음에 평화를 줍니다. 어제 써놓고 나눴던 ‘영성의 시냇물’이라는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바싹 말랐던

시내가 갑자기 내린 봄비에

 

맑게 깨어 

노래하며 흐르는 시내가 되었다

 

꼭 하늘 은총 비내려야

흐르는 시냇물인가

 

하늘 비 없어도

늘 끊임없이

 

맑게 깨어 노래하며 흐르는

영성의 시냇물이고 싶다”-2023.5.7.

 

어제는 시냇물 소리가 좋아 불암동 버스 정류장까지 동요를 부르며 시냇물 맑게 흐르는 개천가를 두 번 걸었습니다. 즉시 영성의 시냇물 소리가 연상되는 여기 수도자들의 성무일도 기도 노래였습니다.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성전으로부터 세상 곳곳으로 울려 퍼져 나가는 찬양과 감사의 노래 기도 소리가 그대로 영성의 시냇물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어제 따라 와닿던 세 가사를 소개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어제 복음을 요약한 위 성구를 아치저녁 성무일도시 노래할 때는 얼마나 흥겹고 은혜롭던지요!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명예도 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이 세상 모든 영예와 행복도

 슬픔과 괴로움 밀려와도 영원히 주님만 의지하리.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명예도 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요즘 계속되는 성체강복후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퇴장 성가가 비장미(悲壯美)와 더불어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동병상련이라 유난히 우렁찬 수도자들의 성가소리가 그대로 지금도 들려오는 끊임없이, 한결같이, 맑게 노래하며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 소리를 닮았습니다. 말 그대로 영성의 시냇물 소리를 상징합니다. 어울리지 않게 강론 쓰는 이 시간에 소쩍새 울음소리인지 노래소리인지 끊임없이 들려오네요.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영광을, 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다.”

 

끝기도 찬미가때마다 마음에 와닿은 간절한 대목을 노래한후 잠자리에 들어 단잠을 자게 됩니다. 아, 이 모두가 주님 사랑, 말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을 사랑할 때, 말씀을 사랑할 때, 끊임없이, 한결같이 흐르는 영성의 시냇물에 참 맑고 향기로운, 멋지고 매력적인, 아름답고 행복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그대로 공감하고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이 참행복의 원천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주저없이 예수님을 저의 절친이라 고백합니다. 다시 이어지는 말씀도 대동소이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지키면 하느님 아버지도 나를 사랑하시고 아버지와 아드님도 와서 나와 함께 사신다니 이보다 더 큰 행복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주님의 절친들이자 서로간에는 영적도반이 되는 제1독서 사도행전의 주님의 제자들인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말그대로 백절불굴의 ‘복음의 전사들’인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리스트라에서 태생 앉은뱅이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바오로가 이자를 치유해주는 장면도 감동적입니다. 정말 명불허전(名不虛傳), 주님과 사랑으로 하나된 바오로였기에 가능한 치유기적입니다. 바오로을 통해 주님께서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정말 반듯한 자세는 영육의 건강에도 필수입니다. 똑바로 일어서고, 똑바로 바라보고, 똑바로 말하고, 똑바로 앉고, 똑바로 걷고, 똑바로 눕도록 훈련, 습관화하기 바랍니다. 제우스 신전의 무지한 사제가 이 주님의 두 제자를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여겨 모시려 하자 두 제자는 자기들의 옷을 찢으며 참으로 아름답고 멋진 설교를 합니다. 참으로 두 제자는 명실공히 주님의 절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그 분은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길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이런 영적 현실에 참으로 무지한 탓에, 무지에 눈먼 탓에 1분에 군사비 지출로 56억원을 날려 보내니 지구는 속타고, 무엇보다 하느님은 얼마나 개탄스럽고 아프고 슬프고 답답하실까요! 창세기에서처럼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무지의 병을 치유하시고 주님 사랑, 말씀 사랑에 전념하게 하십니다.

 

“너희는 받아라, 하느님의 축복을, 

 하늘 땅 만드신 당신의 축복을.

 하늘은 주님의 하늘이어도, 

 땅만은 사람들에게 주시었도다.”(시편115,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