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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5월 13일 토요일[(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5월 13일 토요일[(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파티마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콜로 2,12 참조
우리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네. 알렐루야.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세례로 새로 난 저희에게 천상 생명을 주시니
저희를 의롭게 하시고 불사불멸의 옷을 입히시어
완전한 영광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6,1-10
그 무렵 1 바오로는 데르베를 거쳐 리스트라에 당도하였다.
그곳에 티모테오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신자가 된 유다 여자와 그리스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2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3 바오로는 티모테오와 동행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에 사는 유다인들을 생각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을 그들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 바오로 일행은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이 정한 규정들을
신자들에게 전해 주며 지키게 하였다.
5 그리하여 그곳 교회들은 믿음이 굳건해지고 신자들의 수도 나날이 늘어 갔다.
6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은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을 가로질러 갔다.
7 그리고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로 가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8 그리하여 미시아를 지나 트로아스로 내려갔다.
9 그런데 어느 날 밤 바오로가 환시를 보았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오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10 바오로가 그 환시를 보고 난 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방도를 찾았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0(99),1-2.3.5(◎ 1)
◎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또는
◎ 알렐루야.
○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 ◎
○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
○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그분 자애는 영원하시며, 그분 진실은 대대에 이르신다. ◎

복음 환호송

로 3,1
◎ 알렐루야.
○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8-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20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21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가족이 드리는 제물을 자비로이 받으시고
주님의 도우심과 보호로
저희가 받은 것을 잃지 않고 영원한 선물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7,20-2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비오니,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자의 십자가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주님 사랑으로 저희를 지켜 주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평화신문 창립 35주년 기념으로 요르단,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시작한 성지순례였습니다. 미주 전 지역과 한국에서도 순례자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순례를 시작하는 요르단의 암만까지 모이는데도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습니다. 뉴욕에서 이스탄불, 이스탄불에서 암만까지 가는데 이틀이 걸렸습니다. 화요일 저녁에 출발한 저는 목요일 오전에야 암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의 노선이 취소되어서 다른 비행기로 바뀌면서 공항에서 10시간가량 머물러야 했습니다. 비행기의 게이트가 변경되면서 바뀐 게이트를 찾아 이동하는 번거로움도 있었습니다. 늦은 밤 비행기를 타면서 비행기의 등급을 보았습니다. 1등급과 비즈니스 석은 일찍 탑승하였습니다. 물론 좌석도 편하고 좋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겸손하게 경제적인 좌석에 탑승하였습니다. 통로도 좁고, 좌석도 불편했지만 모두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설렘을 듬뿍 안고 순례를 시작하였습니다.

 

첫날 순례의 시작은 광야였습니다. 4년 전에 만났던 가이드는 여전히 활기차게 순례자를 맞아 주었습니다. 수도꼭지를 틀면 시원한 물이 나오듯이 형제님은 4년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어김없이 해 주었습니다. 아라비아 로렌스의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해 주었습니다. 중동의 슬픈 역사도 가슴이 찡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쉽게 광야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고, 미리 정찰대를 보냈습니다. 정찰대는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메뚜기 때와 같았다고 보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났던 모세 역시 눈앞에서 약속의 땅을 보면서도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아쉬움이 큰 여정이었지만 모세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일의 결과도 중요하겠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광야는 하느님의 뜻을 시험하려는 유혹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순례의 첫날 광야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무척 감사했습니다. 인솔자는 광야에서 미사를 드리면 먼지가 많을 것이라고 걱정하였습니다. 한 형제님의 말이 우리의 걱정을 웃음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먼지가 없다면 광야가 아니죠.’ 그랬습니다. 광야에서는 먼지가 바람에 날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위 언덕이 있는 곳을 병풍삼아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언덕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순례자를 보니 마치 산상수훈의 모습 같았습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현장 같았습니다. 먼지와 바람이 하느님의 찬양하는 우리의 마음과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수신기의 도움으로 바람이 불었지만 미사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고 사람의 일만 먼저 생각한다면 우리의 마음도 먼지가 불어오는 광야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도시에 살고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과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곳도 역시 광야입니다. 먼지가 불어오는 광야에 있어도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그곳은 약속의 땅입니다.

 

순례자들에게 광야의 두 가지 의미를 말하였습니다. 하나는 정화의 시간, 준비의 시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면서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도 40일 동안 광야에 머물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을 수 있는 정화의 시간, 준비의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유혹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3가지 유혹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나뭇잎의 숙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지에 붙어 있는 나뭇잎은 바람이 불어 흔들릴지언정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비록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유혹의 바람이 불지라도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굳게 의지한다면 우리는 유혹을 디딤돌로 삼아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유혹이 없었던 분들이 아닙니다. 그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낸 분들입니다. 우리들 또한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천국을 향한 준비를 열심히 하면 좋겠습니다. 다가오는 유혹을 주님의 말씀으로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2. ♣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강론

 

사도 바오로는 주로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것을 이제는 더 넓혀서
두 번 째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주로 바르나바와 동행하던 그와 헤여져 이제는 라스트라에서 평판의 좋은 티모테오와
동행합니다. 그는 여러곳을 다니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정한 규정들을 신자들이
지키게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뜻대로가 아닌 성령의 인도로 선교활동을 다니는 것입니다.

사도 행전은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은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로 가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미시아를 지나 트로아스로 내려갔다.”(사도 16,6-8)

그런데 그날 밤에 바오로는 환시를 통해 마케도니아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갈 채비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람에서 수난 전 날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여러 당부의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세상이 당신 제자들을 미워할 날이 다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하십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주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것처럼 제자들도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 뿐 아니라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봉헌한 사람들에게도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입니다. 때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삶에서 인기에 영합할 유혹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매스컴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요즈음의 세상에는 더군다나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세상이 말하는 인기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복음의 중심인 예수님이 주인이신 것입니다.

봉사자들에게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우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연예인들이 생각지도 않게 실의에 빠져서 생을 마감하는 사례를 마음 아프게 볼 때가 있는데
그들은 변하기 쉽고 사라지기 쉬운 인기와 명예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인들은 사람이 겸손해야 하고 복음에 충실할 것을 가르칩니다.

인기라는 것은 아침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하므로 거기에다가 너무 무게를
두었다가는 큰 코 다칠 뿐 아니라 망가지기도 하지요. 거기에는 교만의 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왜 그런 말 있지요? 내가 좋아하고 내가 보람 있어하면 봉사에서 멀어지니다고요.
바로 복음 정신에 맞아야 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하겠지요. 사랑도 마찬가지이요.

내가 좋아서 하는 사랑은 얼핏보기에는 맞는 것 같지만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지
결코 수순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따랐던 것입니다. 참 좋은 표양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에게 속한 말과 행동을 하며 멋진 날을 맞읍시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512.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오늘 <복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그리고 아들과 제자들 간의 사랑이, 이제 제자들 상호 간에 지켜야 할 계명으로 제시됩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서로 사랑하기 위함임을 시사해줍니다. 곧 타인은 나의 적이거나 경쟁자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동반자로 짝 지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서로 사랑하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고 하십니다. 이는 이미 먼저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얼마 후 그 사랑을 직접 십자가에서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께서 손수 보여주실 바로 그 사랑, “가장 큰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5,13)고 하십니다.
 
왜 친구를 위한 사랑이 원수나 죄인을 위한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대체 친구가 누구이기에 그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 되는 조건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예수님 편>에서의 친구 되는 조건이요, 또 하나는 <우리 편>에서의 친구 되는 조건입니다.
 
<예수님 편>에서 친구 되는 조건은 주인이 하는 일, 곧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이는 한분이신 아버지를 아는 것이 친구가 되는 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 분이신 아버지를 알게 된 까닭에 예수님과도 그리고 우리 서로 간에도 친구입니다.
 
한편, <우리 편>에서의 친구 되는 조건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는 실제로 서로 사랑을 실천할 때라야 친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실제로 자신을 위하여 타인을 배척할 때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내놓을 때라야 친구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벗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들어주시게 하려는 것이다.”(15,16)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벗으로 선택하신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알려주시고, 사랑하시는 까닭에 벗으로 선택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고, 사랑하시는 까닭에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권능을 입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얻어주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바로 그 “가장 큰 사랑”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랑을 하라는 호소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사랑의 호소를 듣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네 친구들 사이에서 그 사랑의 열매가 맺힌다면, 그 열매는 영원히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당신의 벗, 당신 것으로 뽑으셨습니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애와 호의를 입히셨습니다.
당신 진리를 가르치시고, 당신을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저는 끝없이 빗나가지만, 당신은 끝없이 충실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의 소명을 살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으로 세상을 축복하게 하소서.
저의 전 존재, 전 생애가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과 우정(友情)의 여정-

  

“내 영혼아 잠 깨어라,

 거문고야 기이타야 잠을 깨어라

 새벽을 흔들어서 나는 깨우리라.”(시편57,9)

 

화답송 시편이 좋습니다. 꼭 새벽을 흔들어 깨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입니다.

 

“나

‘소’씨라면

이름은  

무조건 ‘소나무’로 하겠다”

 

소나무 사랑을 고백한 짧은 시입니다. 예전 언제나 거기 그 자리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껴안아보며 쓴 짧은 자작시 입니다. 한곳에 오래 정주하다 보면 정주의 산과 나무들에 대한 애정도 날로 깊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써온 시들을 보면 산과 나무가 소재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요즘 5월 신록의 나무들이 장관입니다. 특히 날마다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즐비한 수도원길 하늘길, 새벽길을 걸을 때면 나무들의 사열을 받는 듯 가슴을 활짝 펴고 하늘을 우러러 별들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똑바로 걷곤 합니다. 저절로 느껴지는 충만한 기쁨, 충만한 행복입니다. 2009년 심었던 애목들이 2023년 14년만에 이처럼 울창한 숲을 이룬 나무들이 되었습니다.

 

오랜시간이 흐른후 나무들은 모르지만 사람들은 나무의 성장을 알 듯, 우리의 내적 성장도 나무처럼 우리는 몰라도 하느님은 아실 거란 생각이듭니다. 얼마전 원장 강론중 아기가 얼마나 주변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모르듯, 사람도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모를거란 언급도 생각납니다.

 

사랑의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육신은 날로 노쇠해가도 사랑은 날로 성장, 성숙해갔으면 좋겠습니다. 내적성장과 성숙을 상징하는 사랑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우리 베네딕도회는 섬김의 학교로 정의하지만, 같은 규칙서를 사용하는 형제회인 시토회는 사랑의 학교로 수도공동체를 정의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사랑의 학교, 인생에 대한 정의입니다. 졸업이 없는 평생학인이요, 아무리 공부해도 하느님 사랑에 비하면 사랑에는 언제나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추기경님은 고등학생 같습니다.”

 

예전 살아계실 때 도봉산을 산행하던 김수환 추기경이 도선사에 잠시 들렸을 때 장난기 가득한 젊은 스님이 던진말에 추기경님의 유머가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나 재수생입니다.”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는 일화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랑의 학교를 졸업 못하고 여전히 재수생으로 머문다는 뜻이겠습니다. 아마 평생 사랑의 학교를 졸업 못하고 재수생으로 머물다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사랑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사랑도 선택이요 배움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평생 배우고 공부하고 실천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나이만 먹었지 사랑에 무지한 이들이, 여전히 사랑에 참으로 미숙한 철부지 어른들이 많습니다. 사랑의 학교, 사랑의 여정입니다. 과연 성장하는 나무처럼 날로 성장하는 사랑의 여정인지 묻습니다. 엊그제부터 오늘까지 3일간 요한복음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금과옥조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어제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명하신 주님은 오늘은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어떻게? ‘주님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분명히 드러나는 사랑의 롤모델인 예수님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배워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 집착없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초연한 사랑,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 산을 순식간에 불살라 버리는 ‘산불’같은 사랑이 아니라 ‘생명과 빛’의 ‘봄볕’같은 무사無私한 부드럽고 따뜻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요즘 제 집무실옆 짧은 길, 꽃길이지만 순간 꽃들을 보며 아카시아꽃 그윽한 꽃향기를 숨쉬며 꽃길을 걸을 때는 주님의 사랑을 만끽하는 파스카의 꽃이된 듯 충만한 행복을 느낍니다. 계속되는 복음 말씀의 진리가 참 좋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아,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영예로운 칭호가 주님의 친구입니다.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 감동입니다. 주님의 친구답게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건 수도자들입니다. 저 역시 주님의 절친(切親)답게 날마다 한밤중 일어나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걸고 강론을 씁니다. 하루하루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걸고 절실하고 절박하게 주님과 우정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소수의 엘리트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누구에게나 주어진 영예로운 칭호, 주님의 친구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종이 아니라 주님의 친구답게 품위있게 사랑하며 살아갑니까? 날로 성장 성숙하는 주님과 우정의 여정입니까? 주님의 친구답게 살아간다면 결코 함부로 되는대로 생각없이 막 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친구답게, 참 맑고 향기로운 사랑에 사람입니다. 사랑할 때 사람이니 우리말의 묘미가 기막힙니다. 이렇게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과 함께 가는 형제 도반들과의 우정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우정의 여정과 더불어 함께가는 형제자매들과의 깨끗한 사랑의 우정입니다. 

 

이의 빛나는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 원로 사도들이 인정한 두 제자의 사랑입니다. 유다와 실라스를 이들과 동행시키며 안티오키아 교회에 전한 서간문 일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 이보다 행복한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주님의 절친인 제자들입니다. 제가 볼 때, 바르나바와 바오로뿐 아니라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베드로, 야고보를 위시한 모든 사도들과 원로들 역시 주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 주님 사랑에 목숨을 내놓았던 무수한 주님의 절친들인 순교자들 덕분에 이렇듯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2000년 유구한 살아 있는 전통을 살아가는 가톨릭교회입니다. 마지막 복음 말씀도 결정적이요 은혜롭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 하나하나 주님께서 친구로 뽑았으니 풍성한 사랑의 열매로 친구답게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절친들이 되어 주님을 날로 닮아감으로 주님의 뜻에 정통하기에 이들이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것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꽃향기보다 더 깊고 그윽한 향기가 열매 향기입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익어가는 사랑의 열매 향기는 얼마나 마음을 설레게 하는지요! 저는 날마다 주님 뵈올 기쁨에 한밤중 설레는 마음으로 일어납니다. 설렘하니 생각나는 기사가 있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참 곱고도 아름다운 ‘설렘’이란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25년 이상 한국적 성화를 그려온 심순화 가타리나 화백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가톨릭신문 2023.5.7.11면).

 

“제 작품활동의 원동력은 설렘입니다. 하느님과 성모님을 만나는 설렘입니다. 저는 이 설렘 때문에라도 아마 죽을 때까지 붓을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첫사랑의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의 모든 수행에 임한다면 정말 멋지고 매력적인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설렘의 사람들’인 주님의 절친들인 사도회의 원로들의 결정은 얼마나 멋지고 지혜로운지 사랑은 분별의 잣대임을 입증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품위있는 편지의 전범을 보여줍니다.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는 편지를 읽고 그 격려 말씀에 기뻐하였다 합니다. 참으로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충실할수록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에, 형제들 서로간의 사랑의 우정도 깊어져 기쁨의 향기 가득한 삶이 될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하늘 닿도록 당신 사랑 크옵시기에,

 구름에 까지 당신 진리 미치시기에,

 

 높직이 하늘 위에 주여 나타나소서,

 온땅에 빛나소서 당신의 영광”(시편27,11-12). 아멘.


[5/13(토)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성인과 성녀들은 유혹이 없었던 분들이 아닙니다. 그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낸 분들입니다. 우리들 또한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천국을 향한 준비를 열심히 하면 좋겠습니다. 다가오는 유혹을 주님의 말씀으로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조명연 신부)

 

2.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주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것처럼 제자들도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정인준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당신의 벗, 당신 것으로 뽑으셨습니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애와 호의를 입히셨습니다.
당신 진리를 가르치시고, 당신을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저는 끝없이 빗나가지만, 당신은 끝없이 충실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의 소명을 살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으로 세상을 축복하게 하소서.
저의 전 존재, 전 생애가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첫사랑의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의 모든 수행에 임한다면 정말 멋지고 매력적인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설렘의 사람들’인 주님의 절친들인 사도회의 원로들의 결정은 얼마나 멋지고 지혜로운지 사랑은 분별의 잣대임을 입증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이수철 신부)

 

[5/13(토)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제 140일 기도]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

설렘으로 삶을 살게 하소서.

늘상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5월13일(토) 4시4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