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5월 23일 화요일[(백) 부활 제7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알렐루야.
본기도
성령께서 내려와 저희 안에 머무르시어
저희가 성령의 영광스러운 성전이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0,17-27
그 무렵 17 바오로는 밀레토스에서 에페소로 사람을 보내어
그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18 그들이 자기에게 오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지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9 나는 유다인들의 음모로 여러 시련을 겪고 눈물을 흘리며
아주 겸손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20 그리고 유익한 것이면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회중 앞에서
또 개인 집에서 여러분에게 알려 주고 가르쳤습니다.
21 나는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오고
우리 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
22 그런데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23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 주셨습니다.
24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25 이제, 내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무도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26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27 내가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세상의 나라들아,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또는
◎ 알렐루야.
○ 하느님, 당신은 넉넉한 비를 뿌리시어, 메말랐던 상속의 땅을 일구셨나이다. 당신 백성이 그곳에 살고 있나이다. 하느님, 당신은 가련한 이를 위하여, 은혜로이 마련하셨나이다. ◎
○ 주님은 날마다 찬미받으소서. 우리 짐을 지시는 하느님은 우리 구원이시다. 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 주 하느님께 있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는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1-11ㄴ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1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2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4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5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6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7 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8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
이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9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0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11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와 예물을 받아들이시고
이 정성된 제사로 저희가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또는>
<주님 승천 감사송 1 : 승천의 신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광의 임금님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로서
(오늘) 천사들이 우러러보는 가운데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으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 세상의 심판자,
하늘과 땅의 주님이 되셨나이다.
저희 머리요 으뜸으로 앞서가심은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함이 아니라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내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시리라. 성령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시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면서 ‘올리브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의 정점에는 ‘주님의 승천 성당’이 있습니다. 승천 성당에서 내려오면 ‘주님의 기도’ 성당이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기도 성당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곳은 프랑스의 공주가 땅을 매입하였고, 봉쇄 수도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기도 성당을 순례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국의 언어로 ‘주님의 기도’를 봉헌하였습니다. 한국에서도 주교님께서 순례를 하신 후 ‘주님의 기도’를 한국어로 봉헌하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주님의 기도의 내용이 ‘개신교’의 용어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사건의 경위는 어떤 사람이 봉쇄 수도원을 찾아와서 기도문의 내용을 수정하겠다고 하였고, 수도원 측에서는 당연히 받아 들여서 수정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분은 주님의 기도 내용을 개신교의 기도문으로 바꾸어서 수정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순례자들은 주님의 기도 내용이 바뀐 것을 알고 놀라기도 하였고, 분노하기도 하였습니다. 수도원 측에 문의를 하였지만 수도원도 누가 그랬는지는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가톨릭의 주님의 기도로 바꾸려고 했지만 수도원 측은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해서 개신교의 주님의 기도는 그대로 두고 가톨릭의 주님의 기도를 다시 봉헌하도록 제안하였습니다.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다시 주님의 기도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기도 성당에는 2개의 한국어 ‘주님의 기도’가 봉헌되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과정이나 방법은 올바르지 않았지만 주님의 기도의 가르침대로 용서하자는 이야기를 하였고, 함께 했던 3명의 개신교 신자들도 기뻐하며 순례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미사에는 참례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나중에는 모두 미사에 참례하였고, 가톨릭에 대한 오해를 많이 풀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기도문 수정은 어쩌면 작은 일이지만 역사를 보면 종교의 이름으로 타 종교와 문화를 무시하고, 그 흔적을 지워버린 적이 많았습니다. 원주민들이 신성시 하는 신전을 헐어버리고 그 위에 웅장한 교회를 세운 적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몇 번씩 파괴되었고, 성전의 기물들이 손상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은 아름다운 성화가 회색으로 칠해지기도 했습니다.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이슬람의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는 ‘현상유지법’이 생겼다고 합니다. 성지의 모든 소유는 지금 관할하고 있는 종교에게 권한이 있다는 법입니다. 예전에 가톨릭의 소유였다고 다시 가톨릭의 소유로 주장할 수 없다는 법입니다. 예전에 이슬람의 소유였다고 다시 이슬람의 소유로 주장할 수 없다는 법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2층 발코니에는 빛바랜 나무 사다리가 있습니다. 현상유지법이 발효되면서 100년 동안 그 자리에 있다고 합니다. 현상유지법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은 다양한 종교가 한 지붕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남의 기도문을 떼어내고 자기들의 기도문을 봉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이방 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부활의 꽃이 피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려고 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감동 깊고 비장한 고별 연설
오늘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고별 연설이,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고별 연설이 각각 소개되고 있습니다.
에페소에서의 냉대와 박해 속에 겨우 목숨을 건진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로 갔습니다. 그리스에서 석 달가량 머문 뒤에 시리아로 가려 했으나, 유다인들이 바오로 사도를 해칠 계략을 짜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할 수 없이 바오로 사도는 마케도니아를 거쳐 돌아갑니다.
그야말로 기약 없는 고난의 행군입니다. 필리피에서 트로아스로, 트로아스에서 또다시 배를 타고 아쏘스로, 아쏘스에서 미틸레네로, 미텔레네에서 사모스 섬으로, 그다음 날에는 밀레토스로 넘어갔습니다.
오랜 여독과 박해와 매질로 온몸이 병든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 참으로 혹독한 여행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도를 횡단하는 먼 거리를 도보로 걸은 후에는 하루 쉴만한데, 바오로 사도는 그다음 날 이른 아침 또 다시 배에 오릅니다. 기도로 꼬박 밤을 지새운 후,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행장을 꾸리곤 했습니다.
밀레토스에 도착한 바오로 사도는 64 Km나 떨어진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감동 깊기로 유명한 ‘고별 연설’을 행합니다. 이 연설은 바오로 사도가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신 유일한 연설입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고별 연설은 사도행전 20장 17~38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지상에서는 더 이상 만날 기약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바오로 사도의 음성은 비장함으로 가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과 박해를 받게 될 남아있는 제자들과 양 떼를 생각하니 깊은 슬픔과 측은함이 밀려와 바오로 사도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립니다.
“나는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사도행전 20장 22~35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던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 전도 여행길에 겪었던 고초들, 남겨질 양 떼를 향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바오로 사도의 염려가 아무런 가감 없이 잘 소개되고 있는 명설교입니다.
고별 연설이 끝나자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에페소 교회 원로들은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그런 모습을 본 바오로 사도는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지상에서는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다들 흐느껴 울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바오로 사도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습니다.
“그간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 불찰을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부디 건강하십시오. 저 위에서 기쁜 얼굴로 다시 만납시다.”
고통과 시련, 그러나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정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모든 것이 잘 갖춰진 여건 속에서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에 임하지 못하는가 하는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선교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바오로 사도와 쥐꼬리만큼 일하고도 ‘피곤해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가 입에 붙은 제 모습이 크게 대조되어 많이 서글펐습니다.
3. 이영근 신부의 복음 묵상
230522.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
그동안 부활시기 내내, 우리는 예수님의 고별담화인 요한복음 13장 후반부부터 14장, 15장, 16장의 다락방에서의 유언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마지막 장면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약해질 때가 올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요한 16,32)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좌절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의혹에 휩싸이고 혼동에 빠질 것입니다. 각자 제 갈 길로 가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은 “약하고 더듬거리고 무지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강함은 우리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우리를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지탱한다.”(루돌프 스테르텐브링크. “하늘은 땅에서 열린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33)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남겨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란, 그 어떤 곤란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께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평화’란 단순히 갈등이나 시련이나 고통이 사라진 상태, 분열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 혹은 그 어떤 낙담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요한 16,33)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당신이 주시는 평화를 말씀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만드는 평화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좋은 환경이나 자기만족에서 얻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 안에서’ 얻게 되는 평화를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데서나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자신의 마음 안에서 찾는 ‘마음의 평화’가 아닙니다. 오로지, ‘그분 안에서’ 평화를 찾는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고자 ‘당신 안에’ 마련한 평화를 찾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이 주시는 평화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주는 평화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
이제 그분이 주신 평화로, 우리도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주님!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옳고도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죄마저 뒤집어쓰고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지는 무능이 이기는 전능임을 알게 하소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이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한결같는 하느님 중심의 삶
-하루하루, 이제부터, 늘 새로운 시작-
어제 저녁식당 독서시 성규의 말씀에 공감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자연스레 따라 오는 수행 요목들입니다.
44.심판의 날을 두려워하라.
45.지옥을 무서워하라.
46.모든 영적 욕망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라.
47.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
48.자신의 일상 행위를 매순간 조심하라.
49.어느 곳에서나 하느님께서 자신을 지켜보고 계심을 확실히 알고 있어라.
50.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나쁜 생각을 즉이 그리스도께 쳐바수고, 영적장로에게 밝히라.
51.나쁘고 추잡한 말을 입에 담지 마라.
52.많이 말하기를 좋아하지 마라.
53.실없는 말이나 웃기는 말을 하지 마라.
54.거룩한 독서를 즐겨 들어라.
55.기도에 자주 열중하라.
늘 강론을 써오며 깨닫는 사실은 삶은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냥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 엄중한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서의 정주의 삶을 잘 들여다 보면 반복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일종의 반복도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좋은 반복을 통해 날로 깊어지는 내적여정의 삶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수도사제로서 초창기 34년전부터 지금까지 강론중 참 많이 반복해온 주제가 삶의 중심,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어제도 뜻밖의 모녀의 방문을 받고 두시간 동안 집중 만남 시간을 갖고 강조한 삶의 중심과 의미, 희망과 기쁨이었습니다.
“정말 건강은, 중요한 명약은 ‘사랑, 희망, 기쁨, 감사’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삶의 의미, 그리고 사랑, 희망, 기쁨, 감사의 삶입니다. 건강 식품, 좋은 음식보다 더 중요한 명약이 샘솟는 사랑, 희망, 기쁨, 감사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이런 명약으로 영혼을 튼튼히 하는 것이 건강생활의 첩경입니다.”
조언을 드린후 이어 보속으로 어제 강론을 소리내어 읽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강론 역시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하루하루, 이제부터-”로 정했습니다. 요즘 산책하다 보면 이맘때쯤 어김없이 수녀원 담장 넘어에서 곱게 피어나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장미꽃들이요, 담벼락을 줄기차게 타고 오르는 담쟁이입니다. 담쟁이를 볼 때 마다 참 많이도 반복했던 떠오르는 하느님 중심을 노래한 ‘담쟁이'란 시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를 하루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하느님만 아실뿐 나는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1998년 6월 여기에서의 작품이니 무려 25년전 시입니다. 읽을 때 마다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전의를 새롭게 하는 느낌입니다. 그렇습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88세 노령에도 정신은 영원한 청춘입니다.
영원한 청춘의 젊은이로 하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가 영원한 청춘의 모범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서의 위인들,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제자들의 배신을 예상 하면서도 전혀 동요됨이 없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고백하며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예수님입니다.
공동체를 강조하지만 때로 공동체도 허상일 수 있습니다. 궁극에는 혼자요 하느님 중심의 삶이 나를 버텨내고 견뎌내고 지탱해줍니다. 각자도생을 목표로 떠날 제자들을 예상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이런 와중에도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물하시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내가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주님께서 선물하시는 참평화가, 내적평화가 고난을 견뎌낼 수 있게 합니다. 평화의 힘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평화의 전사로 살게 합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으로 자주 써드리는 성구이기도 합니다. 바로 주님의 영적승리에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주님이 이겨놓은 세상의 영적전투에 참여한 우리들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의 지칠줄 모르는 선교활동이 참 불가사의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샘솟는 열정의 에너지임을 깨닫습니다. 아테네에서의 실패에 아랑곳 없이 안티오키아 본거지에 돌아와 충전한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으로 에페소에서 선교활동에 전력투구합니다.
요한의 세례만 받은 불충분한 이들에게는 안수를 통해 성령을 선물함으로 이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하도록 이끌기도 합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사도는 자신의 집요하고 치열한 한결같은 선교활동을 통해 그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확고한지 보여줍니다. 바오로의 일차적 선교 대상은 동족인 유다인이였습니다.
‘바오로는 석 달 동안 회당에 드나들며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담대히 설교하였다.’
바오로 사도의 백절불굴 믿음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복음 말씀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하루하루 이제부터, 지금부터 하느님 중심을 잡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시작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5/23(화)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부활의 꽃이 피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려고 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고통과 시련, 그러나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정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모든 것이 잘 갖춰진 여건 속에서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에 임하지 못하는가 하는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선교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바오로 사도와 쥐꼬리만큼 일하고도 ‘피곤해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가 입에 붙은 제 모습이 크게 대조되어 많이 서글펐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주님!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옳고도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죄마저 뒤집어쓰고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지는 무능이 이기는 전능임을 알게 하소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이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바오로 사도의 백절불굴 믿음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복음 말씀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하루하루 이제부터, 지금부터 하느님 중심을 잡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5/23(화)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제 150일 기도]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
하루하루, 이제부터, 늘 새로운 시작으로 살게 하소서.
죄마저 뒤집어쓰고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지는 무능이 이기는 전능임을 알게 하소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2013년 5월23일(화) 7시1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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