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6월 25일 주일[(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신부님 강론 3개
오늘 전례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이 독서 말씀대로 우리 민족이 화해하고 일치를 위하여 나아가도록,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입당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대영광송>
본기도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시고 모인 사람들을 지켜 주시니
남북으로 갈라진 저희 민족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평화 통일을 이루어 주시고
흩어진 가족들이 한데 모여
기쁘게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30,1-5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2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3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4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5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이 차지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어,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조상들보다 더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흩어진 당신 백성을 모으소서.
○ 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먼 바닷가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이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지켜 주시리라.” ◎
○ 정녕 주님은 야곱을 구하셨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네.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산에 올라와, 주님의 선물을 받고 웃으리라. ◎
○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사제들에게는 기름진 것을 배불리 먹이고, 내 백성을 내 선물로 가득 채워 주리라.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4,29―5,2
형제 여러분, 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주님의 교회는 하나의 빛, 온 세상에 퍼져 있어도 갈라지지 않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일치의 주님, 주님께 마음을 모아 도움을 청하는 교회를 굽어보시어, 분열과 불화로 고통받는 세상에서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전하며 화해와 일치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2.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통치자이신 주님, 남북의 정치인들을 굽어살피시어, 서로 맞서고 헐뜯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한민족으로서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노력하며 통일로 나아가게 하소서.
3. 6·25 전쟁으로 희생된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위로자이신 주님, 70여 년 전 6·25 전쟁으로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시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시고, 전쟁이 가져온 미움과 분열을 용서와 화해의 마음으로 이끌어 주소서.
4. 지역 사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저희 지역 사회의 모든 이를 굽어살피시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이해와 배려로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물기도
주님의 자녀들이 예물을 바치며 청하오니
이 사랑의 성사가 저희 민족을 하나로 묶어 주고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가 가진 것을 나누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희 선조들에게 놀라운 방법으로
주님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일치의 표상인 거룩한 교회를 세워 주셨나이다.
이 나라가 지금은 남북으로 갈라져 쓰라린 시련을 겪고 있으나
주님께서는 불가능을 모르시며 흩어진 이들을 하나로 모으시니
주님의 오묘한 섭리로
저희가 민족 통일의 희망을 키우고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침내 한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도록 이끄시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한국 순교 성인들과 함께
저희도 기꺼이 주님을 찬미하며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이니, 무엇보다 사랑을 입어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사랑과 일치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하루빨리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 주시고
남북의 온 겨레가 함께 모여
기쁨의 잔치를 나누며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그리스와 터키’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4년 전에 가려고 했는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연기되었다가 이번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4년 동안 순례의 여정을 기다려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4년 전에는 54명이 신청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30명이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새삼 ‘바오로 사도’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지칠 줄 모르는 선교에 대한 열정과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그리스와 터키로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습니다. 그 씨앗이 열매를 맺어서 굳게 닫혔던 로마의 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가장 강한 국가였던 로마의 길을 따라 ‘PAX ROMANA'는 ’PAX CHRISTIANA'가 되었고, 교회는 오랜 박해의 터널을 지나 유럽문명의 토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을의 중심에는 ‘성당’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삶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사도들 중에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유일한 사도가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박해하였던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러 가는 길에서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이 워낙 강열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몇 번에 걸쳐서 바오로 사도의 체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사막에서 3년 동안 자신이 체험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는 예수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복음을 선포했고 죽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면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복음 선포는 그리스와 터키에 전해졌고,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현실의 삶에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노예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부활’은 희망이었고,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선포할 당시에는 아직 ‘복음서’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선교한 공동체를 격려하거나, 엄중하게 책망할 때 편지를 작성하였습니다. 그것이 신약성서의 한 부분이 되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입니다. 공동체가 분열 할 때는 일치할 수 있도록 편지를 보냈습니다. 공동체가 이교도의 풍습에 빠져들 때는 엄하게 책망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공동체가 성령의 감도로 성장할 때는 축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공동체가 절망 중에 있을 때는 희망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업적과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과 계명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면 구원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생활로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할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니 깨어서 준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에게서 두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학이라는 ‘틀’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심금을 울리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 글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삶의 ‘이정표’가 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여러 글들이 있지만 저는 오늘 고린토 전서 13장의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오늘은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린토인들에게 전해준 ‘사랑’의 축복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에게도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이 다리가 되어 평화와 자유가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이 다리가 되어 일치와 화해가 넘어오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하여 남과 북의 일치와 협력을 위해서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2.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23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탄생이야기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받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그 경이로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 139,4)
또한,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이사 49,1-2).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이사 49,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 존재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사실, 그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리아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는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만약,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리해 버린다면, 요한의 탄생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제 몸에 새겨진 당신 소유의 이름을 드러내주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고
당신이 주신 소명을 살게 하소서.
오늘, 제 삶안에서 당신이 뜻하신 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3.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모두가 “신(神)의 한 수(手)”이다
-성소, 주님과의 관계, 훈련-
참 사람되기 힘듭니다. 가장 힘든 것이 참사람이 참내가 되는 것입니다. 평생공부가 참내가 되는 공부입니다. 한마디로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인생 폐인이, 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은 참나의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나이들어도 순수와 놀라움의 감각을 잃지 말아야 하고 시적 감성을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
시편 8장은 온통 하느님과 인간, 우주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심으로 가득합니다. 교황님도 얼마전 천문학자들 모임에서 결코 놀라움의 감각을 잃지 말라 강조하셨습니다. 역시 여기 수도원에서 26년전 쓴 “아침”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아침의 자연은
늘 새롭다 놀랍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밤의 침묵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었느냐?” 가 아닌
“아침을 보았느냐?”
“아침을 들었느냐?”
인사할 수는 없을까
똑같은 사람, 환경, 말과 글도
살아 있으면
침묵의 밤이 있으면
늘 새로운 놀라운 좋은 아침일 수 있겠다’-1997.8.16
배밭사이 배봉지 흰별들 가득 달린 별밭사이를 걸을 때마다 놀라움, 새로움의 감각을, 원초의 순수를 회복하려 노력합니다.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세상도, 수도원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내적성장과 성숙을 통해 참나가 되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한국적 수도생활의 토착화로 시작된 단순소박한 수도승 생활이었습니다. 모두가 자리에 앉는 좌식이었고 참으로 최소한의 필요로 시작한 편안한 고향집같은 수도원 환경이었습니다. 이젠 수도원 성전내 수도자의 자리도 어제 저녁기도부터는 의자에 앉는 좌석으로 바뀌었습니다. 1987년 수도원 개원후 36만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과거 넓은 공간의 성전은 이제 의자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런 시대적 추세라지만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젠 큰 절만 하는 것만 남았네요.”
“그것도 언제 없어질지 모릅니다.”
원장과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아마 머지 않아 성전에 들어오고 나갈 때 제대 앞에 큰절하는 관행도 사라질 것입니다. 수도원의 쓰레기들은 또 얼마나 많아졌는지요! 이런 추세라면 세상이 온통 쓰레기장이 될 것 같습니다. 공기도 사람도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수도원 앞에는 거대한 별내신도시가 들어서 상전벽해가 되었고 그나마 원형의 자연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수도원뿐입니다. 며칠전 읽은 탈성장, “포스트 자본주의를 고민하자”라는 제하의 글 일부를 인용합니다.
“녹색성장, 지속 가능한 성장만이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하기 십상이죠. 하지만 지속가능한 성장은 환상일뿐입니다. 수백년간 세계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자본주의가 추구해온 성장지상주의 탓에 인류와 지구 생태계가 존폐 기로에 몰렸습니다. 탈성장이 유일한 해법이나 자본주의하에서 탈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인류가 계속 살아남으려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참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연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를 벗어날 수 있을지, 단순소박한 삶의 양식을 어떻게 지녀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으로 영적혁명이, 내적혁명이, 의식의 변화가 절박한 시절입니다. 병자들이, 특히 정신질환자들이 넘쳐 납니다.
어제 공부하며 깨달은 소시오패스와 사이코패스 정신 장애자들입니다. 일종의 괴물같은 인간입니다. 둘다 공통적 특징은 양심이 없다는 것이며 공감, 배려, 존중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추세라면 더욱 늘어날 이런 정신 장애자들입니다.
“사이코패스는 심신미약이나 심신상실이 아닙니다. 인지능력 자체가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양심이 없어서입니다. 이같은 기질은 타고나더라도 어릴 때 부모의 훈육등을 통해 충분히 누를 수 있습니다. 조현병은 치료하면 나아질 수 있으니까 사회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약물치료를 중단할 경우 재발률이 90%에 달하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반면 사이코패스는 치료가 잘 안됩니다. 타고난 부분이 나쁜 데다 입원해도 큰 의미가 없어서 교도소에 수감하는 게 낫습니다.”
아, 정말 사람되기 힘든 세상입니다. 얼핏 분별이 안되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에 속한 이들이 공동체의 지도자나 가정의 부모가, 배우자가 된다 할 때 그 피해는 얼마나 크겠는지요. 저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참으로 온전한 참사람으로 살기위해 신앙생활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을 떠나 길을, 나를 잃어 버리면 누구나 괴물이 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제는 미사중 면면을 살펴보며 한분한분이 영적전쟁에 백전노장의 믿음의 용사요 신의 한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신의 한 수입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 세례자 요한이 그러하고 여기 수도자들이 그러하고 엊그제부터 저에게 물리치료를 해준, 20년간 수도원을 노동으로 도운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는 믿음의 사람, 박응표 세례자 요한 형제가 그러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신의 한수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나의 성인으로 살기위해 평생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이 되어 시종일관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세례자 요한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분은 예수님 말고는 유일합니다.
첫째, 성소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연적 무명의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불림 받은 신의 한수같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오늘 제1독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는 성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은 물론 나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정말 이런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래야 정체성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나의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바로 이런 주님의 종이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신원이자 정체성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맞습니다. 이래야 자존감 높은 정신 건강, 영혼 건강의 삶에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존엄한 품위의 삶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139장도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인간존재임을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때로 삶의 허무와 허망함에 좌절도 있겠지만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께 두고 곧장 일어나 주님을 붙잡을 것입니다.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음 말씀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우리 모두 주님께 불림받은 신의 한수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대신 내 이름을 넣어 좌우명처럼 늘 되뇌이기 바랍니다.
둘째,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 없는 성 요한 세례자 상상할 수 없듯이, 예수님 없는 우리 상상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인 예수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여 평생 닮아갈 때 참나의 성인이 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인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을 떠나버리면 참나의 상실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깊어가는 관계와 더불어 온유와 겸손입니다. 다음 제2독서중 바오로를 통해 소개되는 성 요한 세례자의 겸손한 고백은 나의 고백이 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처럼 주님 앞에서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겸손과 순수, 지혜의 은총이요, 주님 앞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 책임을 다하며 제대로 온전한 삶을 살아갈 때 정신건강, 영혼건강의 삶이겠습니다. 영혼건강, 정신건강의 명약 넷이 희망, 기쁨, 감사, 평화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훈련입니다.
도대체 영성생활에 훈련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진인사대천명입니다. 날마다 한결같은 영적훈련으로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의 은총도 함께갑니다. 정신건강, 영혼건강을 위해 한결같은 치열한 영적훈련은 필수입니다. 이래야 괴물이나 폐인이 되지 않습니다. 유비무환, 평상시 영적훈련을 통한 예방이 처방보다 백배 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탄생한 요한 세례자 작명 과정을 통한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의 영적훈련이 참 인상적입니다. 잠시의 불신으로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 인내와 기다림의 영적 훈련중에 귀는 활짝 열려 경청의 사람, 관상의 사람으로 변모했음을 봅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쓰는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자 감사에 벅차 하느님을 찬비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성무일도시 끝무렵에 바치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경청도 순종도 찬미도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이런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모를 그대로 보고 배웠을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어떻게 얻는 아들인데, 참으로 한결같은 영적훈련의 모범된 삶을 통해 성 요한 세례자를 교육했을 것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의 광야는 그대로 영적훈련장이였음을 봅니다. 부모로부터 보고 배운 것을 기초로 삼아 영적훈련에 전념했기에 굳센 정신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불림받은 신의 한수같은 고귀한 품위의 존재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은 참나의 삶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파견되었습니다."(사도13,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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