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6월 27일 화요일[(녹) 연중 제12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6월 27일 화요일[(녹) 연중 제12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 학자

입당송

시편 28(27),8-9 참조
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당신 메시아에게는 구원의 요새이시다. 주님,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 재산에 강복하시며, 그들을 영원히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주님,
저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니
저희가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너와 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3,2.5-18
2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였다.
5 아브람과 함께 다니는 롯도 양과 소와 천막들을 가지고 있었다.
6 그래서 그 땅은 그들이 함께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들의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7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이 살고 있었다.
8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9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10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들판을 바라보니,
초아르에 이르기까지 어디나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다.
그때는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11 롯은 요르단의 온 들판을 제 몫으로 선택하고 동쪽으로 옮겨 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요르단 들판의 여러 성읍에서 살았다.
롯은 소돔까지 가서 천막을 쳤는데,
13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
14 롯이 아브람에게서 갈라져 나간 다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을, 또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15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16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17 자, 일어나서 이 땅을 세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고
가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여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
18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5(14),2-3ㄱ.3ㄴㄷ-4ㄱㄴ.5(◎ 1ㄱ)
◎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 진실을 말하는 이, 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는 이라네. ◎
○ 친구를 해치지 않으며,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악인을 업신여기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존중한다네. ◎
○ 이자를 받으려 돈놀이 않으며, 죄 없는 이를 해치는 뇌물 받지 않는다네. 이 모든 것 행하는 그 사람, 영원토록 흔들림 없으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8,12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6.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화해와 찬미의 제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이 제사의 힘으로 깨끗해져
사랑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45(144),15 참조
주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또는>
요한 10,11.15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인자하신 주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저희를 새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행하는 이 성사로 완전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망해버린 고려의 슬픔을 노래했던 시조가 생각났습니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흥하고 망함이, 또 성하고 쇠함이 모두 운수가 정해져 있는 법이니 멸망한 고려 왕조의 궁터 만월대에도 이제는 임자 없는 가을철 풀숲으로 덮여져 있구나. 오백년이나 이어오던 왕업도 저 목동이 부는 피리 곡조에 붙이게 되었으니, 해질 녘에 지나치는 나그네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구나.) 터키 이스탄불에는 성 소피아 성당이 있습니다. 3번에 걸쳐서 성당은 완공되었고, 성당을 완공한 황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이시여, 이제 나는 당신이 부럽지 않습니다.” 황제는 성 소피아 성당이 솔로몬 왕이 건축했던 예루살렘 성전보다 뛰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주교좌성당으로 자리를 지켰던 성당은 이슬람 사원이 되었습니다. 성당에 있던 아름다운 모자이크 성화는 회칠로 지워졌습니다. 순례의 여정 중에 바오로 사도가 세웠던 교회들이 지금은 폐허가 되었고, 대부분의 지역은 이슬람 교회가 되었습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는 박해와 시련을 겪으면서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의 박해와 시련은 끝이 났습니다. 교회는 로마가 깔아 놓은 길을 따라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로마의 제도와 법은 교회의 법과 제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법과 제도에 따라서 교회는 성장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이 빛은 조금씩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권력과 부가 쌓여갈수록 교회의 부패와 부정도 늘어났습니다. 문화와 민족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고유한 전통과 종교를 무시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의 사원을 부셔버리고 그 위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원주민들이 세웠던 성전의 돌을 뜯어내어 성전을 세웠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힘으로 인류와 역사에 큰 아픔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등불을 켜놓고 됫박으로 가려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교회가 복음의 빛을 권력과 권위라는 됫박으로 가려놓았을 때, 교회가 가난이라는 소금을 교만과 부유함이라는 물에 담가놓았을 때가 있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겸허하게 교회가 인류와 역사에게 잘못한 것들을 인정하고 사과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정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오늘 독서에서 아브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실천하였습니다. 조카 롯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다.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조카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조카에게 해 주었던 아브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자업자득의 허물은 없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 진실을 말하는 이, 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는 이라네.”


2.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복음마태 7,6.12-14: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6

여기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소중히 여겨야 하는 모든 영적인 것들이다

 

룩한 것이나 진주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개 안에 담겨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드러낼 때신중해야 한다

사람들이 명백하게 중요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미워하고 하찮게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개로 배를 불리고 어떤 이들은 돼지로 배를 불린다

나는 어떠한 것으로 풍요를 노력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요약하신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면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동료가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주라고 하셨다

이보다 짐스럽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공평한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몰랐다고 핑계 대며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그렇게도 평범한 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모습은 아니다

 

복음을 아는 우리의 모습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그만큼 성숙하는 것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셨

산상설교에서 겸손하고 온유한 이들에 대해 말씀하시지만이 편안한 멍에와 이 가벼운 짐을 마다하는 사람이 많아서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힘들고 문은 좁게 느껴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우리는 하느님께서 남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그 짐은 은총이기 때문에 가볍고 기분 좋은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좁고 비좁은 길을 편하다고 하는 것이냐

그것은 그것이 문이면서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하셨다

그 길이 좁아 보이는 것은 주님의 멍에 곧 계명이 무거워서가 아니라기꺼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가

적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안에곧 성령 안에 머물 수 있을 때만이그 계명을 따를 때만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다

주님의 뜻을 오늘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626.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심판하지 않으려면, 먼저 우리 안에서 심판을 하게 하는 것을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곧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들보’를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우선, 자기 눈 안에 있는 ‘들보’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방식, 곧 보는 틀, 보는 관점을 말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곧 심판이 행해지는 데 기준이 되는 ‘준거 틀’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준거 틀’이 복음의 정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 편견, 세속정신 등의 고정관념이라면, 그것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들보를 빼내기만 하면, 다 일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하느님의 눈과 마음’이 들어서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눈과 마음”이야말로 그것을 빼내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관점, 자신의 눈’을 빼낼 수 있는 길은 바로 우리 안에 심어진 사랑의 빛을 밝히는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추는 빛으로 상대를 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호의와 자비’로 상대를 보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위하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예수님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일입니다.
 
결국,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그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2-13)
 
그래서 <루가복음>에서는 병행구문에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결국, 심판을 넘어서는 이 용서와 자비야말로 바로 심판을 벗어나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
 
이는 타인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심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가 남에게 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결국, 심판은 ‘자기 얼굴에 침 뱉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 2,3)
 
하오니,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주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떠남의 여정

-자기인식의 복(福)된,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

 

 

"주님을 찬미하라 좋으신 하느님을,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시편135.3)

 

오늘 제1독서 창세기가 참 아름답습니다. 아브라함의 멋지고 아름다운 삶이 압축되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떠남의 여정으로 압축된 아브람의 복된 삶입니다. 첫 대목 다음 부분은 늘 읽을 때마다 신선한 감동이자 충격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집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 일흔다섯이었다.‘-

 

나이 일흔다섯 놀랍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복덩어리 아브람입니다. 모든 것이 안정되어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미지의 곳을 향해 떠나라니 어처구니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군말없이 떠납니다. 하란을 떠날 때 일흔다섯이니 제 나이가 일흔다섯입니다. 영원한 현역의 아브람은 내적순례여정중의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의 모범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떠남의 열정에 있습니다.

 

안주하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부단한 떠남의 여정에 충실한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이듯 끊임없이 떠남의 내적 여정에 충실할 때 맑은 삶입니다. 정말 우리의 삶은 떠남의 여정으로 요약됩니다. 잘 떠날 때, 떠나야 할 때, 지체없이 떠나는 삶이, 뒷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떠나도 향기로 남습니다. 

 

마지막 떠남이 죽음입니다. 최고로 복된 떠남이 향기로운 선종의 죽음입니다.  언젠가 갑자기의 선종이 아니라 아브람처럼 영원한 현역으로 하루하루 떠남의 여정에 충실할 때 아름답고 향기로운 죽음의 은총이요, 이보다 남은 이들에게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잘 떠나는 죽음이 될 수 있도록 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브람의 떠남의 여정은 홀로가 아닌 “더불어together” 떠남의 여정이었음을 봅니다. 그대로 우리 수도공동체를 닮았습니다. 주목되는 사실은 아브람이 일단 거주하게 될 때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도 두 번 나오며 후반부 대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 차츰차츰 네겝쪽으로 갔다.’

 

끊임없는 도상중에 있는 떠남의 사람, 아브람입니다. 도착할 때마다 우선 주님의 제단을 쌓으니 그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확고한지 깨닫습니다. 외적으로 떠남의 여정이지만 내적으로는 하느님 중심에 닻을 내려 정주한, ‘정주의 사람’ 아브람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아브람은 떠남의 사람이자 주님 말씀을 경청하여 순종한 사람입니다. 이런 떠남의 여정을 통해 참으로 자기를 아는 자기인식의 겸손과 지혜의 사람, 복된 존재인 아브람이 됐음을 봅니다. 아브람의 삶은 우리 정주수도자들의 롤모델이 됩니다. 우리 역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음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분명히 합니다.

 

아브람처럼 미지의 곳을 향해 떠나는 막막한 여정과는 달리 우리의 내적순례여정의 궁극 목표는 분명하니 바로 우리의 본향 천상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러니 떠남의 여정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이기도 합니다. 이점이 우리에게는 아브람보다 유리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가 177장 2절도 이런 희망과 기쁨을 노래합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내 주님 계신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우리 베네딕도회 정주수도자들의 영원한 몰모델인 아브람입니다. 우리의 삶은 안주가 아닌 끊임없는 내적 순례 여정중에 있는 정주의 삶입니다. 바로 이를 요약한 영성이 제가 즐겨 쓰는 산과 강의 영성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맑은 강”

 

전번 봄소풍때 삼척, ‘덕항산’속 환선굴에서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 흡사 강처럼 느껴져 위 시에다 한 대목을 추가했습니다.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 산속의 강”

 

그대로 우리 정주의 삶에 대한 기막힌 상징입니다. 산같이 정주해도 우리는 내적으로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으로 삽니다. 우리 안에는 누구나 하느님 향해 흐르는 강을 하나씩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매일 일과표의 궤도 따라 사는 정주의 삶이 끊임없이 흐르는 강같은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삶이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의 사람들은 결코 절대로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무지로 인해 자기를 몰라서 심판이지 자기의 한계와 부족함을 아는 겸손과 지혜의 사람은 일체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랜 정주의 삶중 정화과정의 성숙한 열매입니다. 

 

자기 눈에 있는 티는 물론 들보를 잘 알기에 자기수련에 전념할 뿐 절대로 겁 없이 무모하게 남의 눈에서 티를 뽑아내는 만용의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습니다. 오랜 정주의 기도와 회개, 정화과정을 통해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에 도달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베네딕도 수도공동체의 정주의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대로 베네딕도의 정주의 평화가 됩니다. 

 

보십시오. 오랜 정주생활을 통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에 도달한 우리 수도형제들 절대 누구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끝없는 인내와 기다림의 사랑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사실 심판할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정말 주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 남을 심판하지,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부족과 한계를 잘 알기에 절대로 결코 남을 심판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기 눈에 티나 들보를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자체가 아브람처럼 이웃에게는 복이 됩니다. 바로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의 복된 사람들, 바로 참된 정주의 열매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눈의 티와 들보를 뽑아주시고 내적 떠남의 순례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느님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 몸 둘 곳 주님, 나는 좋으니

 하신 일들 낱낱이 이야기하오리다."(시편73,28). 아멘.


[6/27(화)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신앙인들은 자업자득의 허물은 없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 진실을 말하는 이, 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는 이라네.”(조재형 신부)

 

2.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조욱현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주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영원한 현역의 아브람은 내적순례여정중의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의 모범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떠남의 열정에 있습니다. 안주하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부단한 떠남의 여정에 충실한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이듯 끊임없이 떠남의 내적 여정에 충실할 때 맑은 삶입니다.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부족과 한계를 잘 알기에 절대로 결코 남을 심판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기 눈에 티나 들보를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이수철 신부)

 

[6/27(화)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제 184일 기도]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

하느님의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 진실을 말하는 이, 

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는 이 되게 하소서.

남을 심판하거나 판단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6월27일(화) 4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