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7월 18일 화요일[(녹) 연중 제15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본기도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2,1-15ㄴ
그 무렵 1 레위 집안의 어떤 남자가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겨 길렀다.
3 그러나 더 숨겨 둘 수가 없게 되자,
왕골 상자를 가져다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
4 그리고 아기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아기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5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내려왔다.
시녀들은 강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공주가 갈대 사이에 있는 상자를 보고,
여종 하나를 보내어 그것을 가져오게 하였다.
6 그것을 열어 보니 아기가 울고 있었다.
공주는 그 아기를 불쌍히 여기며,
“이 아기는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로구나.” 하였다.
7 그러자 아기의 누이가 나서서 파라오의 딸에게 말하였다.
“제가 가서, 공주님 대신 아기에게 젖을 먹일
히브리인 유모를 하나 불러다 드릴까요?”
8 파라오의 딸이 “그래, 가거라.” 하자,
그 처녀가 가서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왔다.
9 파라오의 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아기를 데려다 나 대신 젖을 먹여 주게.
내가 직접 그대에게 삯을 주겠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아기를 데려다 젖을 먹였다.
10 아이가 자라자 그 여인은 아이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갔다.
공주는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 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
11 모세가 자란 뒤 어느 날, 그는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가,
그들이 강제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는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12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이고서 모래 속에 묻어 감추었다.
13 그가 이튿날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자는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당신은 이집트인을 죽였듯이 나도 죽일 작정이오?” 하고 대꾸하였다.
그러자 모세는 “이 일이 정말 탄로 나고야 말았구나.” 하면서 두려워하였다.
15 파라오는 그 일을 전해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파라오를 피하여 도망쳐서,
미디안 땅에 자리 잡기로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 깊은 수렁 속에 빠져, 발 디딜 데 없나이다. 깊은 물속에 잠겨, 급물살이 저를 덮치나이다. ◎
○ 주님, 저의 기도가 당신께 다다르게 하소서. 은총의 때이옵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 ◎
○ 가련한 저는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하느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
○ 가난한 이들아, 보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0-24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교회가 바치는 예물을 굽어보시고 받아들이시어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성덕을 더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또는>
요한 6,5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거룩한 선물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이 성찬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지순례 중에 미술관을 가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습니다. 성지순례 일정이 빠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성지순례 중에는 피렌체에서 미술관 방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미술관 방문에서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수태고지’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림을 해설하는 분은 수태고지의 그림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성모님의 오른 팔이 왼 팔에 비해서 더 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모님의 무릎이 유난히 두껍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모님이 읽는 성경의 탁자가 너무 멀리 있다는 것입니다. 미술을 전공하는 분들이 오랜 시간 연구를 했지만 그 이유를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그 문제를 풀었는데 그것은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성모님의 수태고지 그림을 정면에서 보면 이해할 수가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수태고지 그림을 옆에서 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옆에서 보니 성모님의 오른 팔도 왼팔과 균형이 맞았습니다. 옆에서 보니 성모님의 무릎이 균형이 맞았습니다. 옆에서 보니 성모님이 읽는 성경의 탁자가 성모님과 가까이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철저히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은 제대의 높은 곳에 있었기에 옆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을 때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근대과학 혁명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바로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신앙은 관점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의 삶은 관점이 달랐습니다. 첫 번째는 ‘안식일’에 대한 관점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두 번째는 ‘자리’에 대한 관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높은 자리는 성공과 부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 중에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늘 ‘낮은 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나신 것도 낮은 자리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너희가 잔치에 초대 받거든 낮은 자리에 앉도록 하여라. 세 번째는 ‘재물’에 대한 관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많이 모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자비, 나눔, 겸손, 희생’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이 ‘관점’을 바꾸는 출발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루가복음 15장에서 ‘회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온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점은 생각으로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관점이 바뀌면 행동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이 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납니다. 알이 깨어지는 아픔이 없이 병아리는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힘들고 어려운 일은 있었습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절망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고, 장애물을 넘어서는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갖는 것도 우리의 선택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해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마태오 11,20-24
사랑하는 아들아, 울지마라. 그간 얼마나 힘 들었느냐?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고쳐주겠다!
우리 인간을 향한 불같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 그리고 그분의 외아들이자 분신이신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메시지는 백 퍼센트 일치합니다.
때로 세파에 지쳐 휘청휘청 걸어가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부드럽고 감미로우며,
따뜻하고 자상한지 모릅니다.
2천년 전으로 돌아가, 나병 환자나 중풍 병자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너무나 은혜롭고 감동적이어서 목까지 다 메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울지마라. 그간 얼마나 힘 들었느냐?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고쳐주겠다. 내가 다시 보게 해주겠다.
내가 깨끗하게 해주겠다. 일어나라. 내 딸아!”
그런가 하면 그 말씀이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울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강도가 센지 천둥 벼락이나 철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사항 한 가지, 그런 폐부를 찌르거나 뼈 때리는 강한 말씀 역시
그 배경에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들이 갈 길을 제대로 걸어가지 못하고 엉뚱한 길, 그릇된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간다면,
그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알아서 하겠지 하며 방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허허! 말세로다’하고 웃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 빨리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라고 간곡히 호소할 것입니다.
때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눈물로 부르짖을 것입니다.
그래도 모르는체한다면, 벼락같이 화를 내며 강력한 경고의 말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 옛날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에게 던진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 21-22)
오늘도 우리를 향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뿐인 주님께서는 그 옛날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 사람에게
던진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건네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말씀은 많은 경우 우리와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의 입을 통해 선포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717. 연중 제15주일 월요일.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는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이요,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평화로운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 곧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십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변혁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참 행복선언”을 선언하는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2013.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이 혁명은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에 의해 실행되는 혁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 4,12)
‘내 칼을 받아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선사하십니다. 그것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져라’고 주는 칼입니다. 자기 자신의 심장에 던지라고 주는 칼입니다. 사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그를 수술할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병든 몸에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 해서 결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듯, 병자는 칼로 병을 도려내는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칼이야말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이요, 말씀을 이루기 위한 쌍날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목에 칼을 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처럼, “제자의 길”은 그야말로 도전입니다.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아니 자신의 목숨마저 내 걸어야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권고대로, “말과 혀가 아닌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하는 사랑”(1요한 3,18 참조)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마태 10,40)
주님!
아침처럼 어김없이 찾아온 당신을
지나가는 행인처럼 무심히 흘러 보내지 않게 하소서.
반겨 맞아들여 상처받을 줄을 알고, 부둥켜안고 눈물 흘릴 줄을 알게 하소서.
넘어지고 쓰러지신 당신과 함께 아파할 줄을 알고,
더 이상은 당신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찔리고 못 박히신 당신과 함께 거부당할 줄을 알고,
조롱당해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억울해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고,
수없이 거부당하면서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30717. 연중 제15주일 월요일.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인내와 겸손이 답이다-
“항상 그 자리에 계셔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부님의 지혜가 담긴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새벽에 일어나 읽어보는 지난 밤에 받은 카톡메시지입니다. 90년대초 30대 초반의 나이였던 자매인데 30년이 지난 지금은 60대 초반에 접어든, 수도원과 오랫동안 계속 관계를 맺어온 분입니다. 하루가 끝나갈 무렵 힘차게 온힘을 다해 불렀던 잠자리에 들기전 끝기도 ‘찬미가 둘째 연’과 ‘시메온의 노래 후렴’ 그리고 ‘본기도’ ‘강복’ 내용이 새삼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 영광을
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다.”
이래서 하루중 가장 기다려지는 행복한 시간은 온전히 주님과 함께 하는 잠들기 전과 잠깬후의 시간입니다. 이어지는 시메온의 노래 후렴과 강복, 본기도도 좋습니다.
“낮동안 우리를 활기있게 하신 주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리니, 자는 동안도 자켜주시어 편히 쉬게 하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이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주여, 오늘 우리가 주님의 부활신비를 경축하였사오니, 겸손되이 비는 우리 목소리를 들으시어, 거칠 것 없는 당신의 평화속에 쉬게 하시고, 내일도 당신께 찬미드릴수 있도록 기쁜 마음으로 잠깨게 하소서.”
알렐루야 찬미로 시작하여 아멘 감사로 끝나는 하루입니다. 문득 생각나는 23년전 5월 요셉상 배경의 흐드러지게 폈던 연산홍꽃 장면을 보며 써놨던 시가 생각납니다.
-말없이
고요해도
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요셉상 옆
붉게 타오르는
연산홍!-2000.5.10.
주님을 닮아 경거망동, 부화뇌동,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주의 내적 삶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인내와 겸손이 답이다-”로 정했습니다. 어제 새벽 산책중 무수히 피어나는 무궁화꽃에 감동하여 저절로 흘러나온 제 고백같은 시입니다. “무궁화꽃나무의 고백”이라 했지만 실은 제 소망이 담긴 고백입니다.
-일년내내 아니 평생을
날마다 위로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며
사랑을 배웠습니다.
날마다 아래로 땅 어머니를 바라보며
흙의 겸손을 배웠습니다.
“사랑합니다!”
때되어 하늘 사랑 고백하며 환하게
송이송이
무수히 환대의 사랑으로 피어나는
무궁화꽃들
깊고 깊은 하늘 사랑 찬미의 고백은 끝이없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을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의 삶입니다. 이런 마음을 바탕으로 오늘 말씀을 묵상하니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제1독서의 변화가 가벼운 충격입니다. 창세기의 별같이 찬란히 빛나던 성조들의 이야기는 요셉으로 끝나고 다시 시작하는 출애굽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의 시련과 고난을 보여줍니다.
아, 이게 인생입니다. 늘 순탄대로의 인생이 아니라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삶의 리듬처럼 반복되면서 전개되는 파란만장한 세상의 삶입니다. 다시 이런 시련과 고난이 시작되는데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아,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의 수난은 계속됩니다. 하느님만큼 걱정많고 고생많은 분도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했던 하느님께 위로와 힘이 됐던 분들이 바로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면 묵묵히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과 함께 끝까지 견녀내고 버텨낼 것입니다. 내적 평화와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 미소를 머금고 말입니다. 고통과 시련중에도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를 잃지 않았던 믿음의 성인들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순교적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배우는 평화, 사랑, 십자가, 환대입니다. 주님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말씀하십니다. 충격적 표현에 놀라지 마십시오. 값싼 평화는 없습니다. 성 베네딕도는 “거짓평화를 주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앞에 드러나는 거짓이요, 빛앞에 드러나는 어둠이요, 정의앞에 드러나는 불의입니다. 주님은 참평화를 주러 오셨지 결코 거짓 평화, 값싼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처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면 이처럼 칼로 나누듯 선명한 분리로 분열이요 불화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참평화의 과정일뿐입니다. 이런 창조적 정화과정후의 평화가 값비싼 진짜 참평화입니다. 바로 저희 수도자들의 오랜 정주생활후의 베네딕도의 평화가 이런 평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힘차게 고백합니다.
다음은 사랑입니다. 사랑에도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워선 안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우리는 잘 알아 들어야 합니다. 모두 사랑하되 주님께 대한 열렬하고 항구한 사랑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앞서의 무궁화꽃나무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이래야 모두에 대한 집착없는 초연한 무사한 사랑, 자유롭게 하고 생명을 주는 사랑 깨끗한 사랑,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십자가입니다. “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결코 값싼 십자가가, 악세사리, 장식품 십자가가 아니라, 끝까지 죽기까지 온힘을 다해 지고 주님을 따라 가야할 내 십자가입니다. 구체적으로 아모르 파티 내 책임의 십자가, 내 운명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여 어깨에 메고 하루하루 날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래야 항구한 정주의 삶이요 존엄한 품위의 참삶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은 우리 모두 십자가를 질 힘을 주십니다.
다음은 환대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내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하나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들이요, 잠시 이 세상에 온 손님들이요 나그네 길손들이라 생각하면 불쌍한 마음에 연민의 사랑이 넘칠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하나라도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궁극에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고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는 주님의 단호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베네딕도 성인은 찾아오는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을 섬기듯 그런 환대의 사랑으로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우리의 궁극의 갈망이요 소망이 주님께 합당한 사람, 참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평화의 사람이, 주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제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그리고 모두를 주님처럼 맞이하는 환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靜水流深’정수유심),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深水無聲;심수무성). 아멘.

[7/18(화)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신앙인들이 ‘관점’을 바꾸는 출발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낮은 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나신 것도 낮은 자리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너희가 잔치에 초대 받거든 낮은 자리에 앉도록 하여라. 세 번째는 ‘재물’에 대한 관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많이 모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자비, 나눔, 겸손, 희생’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조재형 신부)
2. 오늘도 우리를 향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뿐인 주님께서는 그 옛날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 사람에게
던진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건네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말씀은 많은 경우 우리와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의 입을 통해 선포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마태 10,40)
주님!
아침처럼 어김없이 찾아온 당신을
지나가는 행인처럼 무심히 흘러 보내지 않게 하소서.
반겨 맞아들여 상처받을 줄을 알고, 부둥켜안고 눈물 흘릴 줄을 알게 하소서.
넘어지고 쓰러지신 당신과 함께 아파할 줄을 알고,
더 이상은 당신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찔리고 못 박히신 당신과 함께 거부당할 줄을 알고,
조롱당해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억울해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고,
수없이 거부당하면서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늘 순탄대로의 인생이 아니라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삶의 리듬처럼 반복되면서 전개되는 파란만장한 세상의 삶입니다. 다시 이런 시련과 고난이 시작되는데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아,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수철 신부)
[7/18(화)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제206일 기도]
임마누엘 하느님! 야훼이레 하느님!
동행하시고 예비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찔리고 못 박히신 예수님과 함께 거부당할 줄을 알고,
조롱당해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억울해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고,
수없이 거부당하면서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7월18일(화) 5시3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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