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7월 19일 수요일[(녹) 연중 제15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본기도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3,1-6.9-12
그 무렵 1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2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4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6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9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10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11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12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정의를 펼치시고, 억눌린 이 모두에게 공정을 베푸시네. 당신의 길을 모세에게, 당신의 업적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교회가 바치는 예물을 굽어보시고 받아들이시어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성덕을 더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또는>
요한 6,5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거룩한 선물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이 성찬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성지순례를 하면서 말씀카드를 만들어서 나누어 주곤 합니다. 지난번 이스라엘 성지순례에서는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뽑았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제가 가톨릭평화신문을 만들기 때문에 ‘평화’에 대한 성경 말씀을 뽑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좋은 기사와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독자들에게 ‘평화’를 주겠다고 묵상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환난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고통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이탈리아 성지순례에서는 루카복음 12장 15절을 뽑았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사실 그즈음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4년간 팬데믹의 시간을 보내면서 신문사의 재정에도 손실이 있었습니다. 저는 8월부터 신문사에서 급여를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직원들도 주 4일 근무에서 주 3일로 근무시간을 조정하면서 급여를 조정하기로 했습니다. 며칠 동안 마음고생이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을 뽑으면서 제 마음에도 평화가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이제 하느님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사명을 받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파스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신약의 파스카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이라는 ‘틀’에 갇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을 보았으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누렸던 ‘기득권’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했을 때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시기와 질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동방박사들로부터 메시아가 왔음을 들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의 아들을 죽였던 것처럼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어렵게 쌓아왔던 권력을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권력에 취해서 ‘진리’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파스카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을 치던 목동들입니다. 양을 돌보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입니다. 율법과 계명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아기 예수님께 ‘선물’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갈릴래아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입니다.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순수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관장 자캐오입니다. 자신의 재물을 기꺼이 이웃에게 나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습니다.” 오랜 동안 하혈하는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였던 바오로도 신약의 파스카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따뜻한 마음이 있다면,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다면, 순수한 마음이 있다면, 가진 것을 나누는 헤아림이 있다면, 절박한 믿음이 있다면,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가 있다면 우리는 모두 신약의 파스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가해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마태오 11,25-27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하느님 얼굴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던 모세,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소명으로 주신 하느님께
도저히 자신 없다고 난감해하는 모세에게 건네시는 하느님의 한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탈출 3, 12)
이 세상에 이보다 더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말씀이 또 있을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 내가 어디를 가든지,
어떤 상황 앞에 놓이던지,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겠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 큰 위로요
기쁨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언약에 용기백배한 모세는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과 행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아직도 타고난 나약함과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고민하고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도자로서 강한 결단력과 추진력을 보이며
그들을 이끌기 시작합니다.
절대 권력자 파라오의 권력과 위협에도 모세는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매일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굳게 믿으며, 매 순간 하느님과 긴밀히 소통하며
이스라엘 백성들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그 귀중한 소명을 시작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인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기쁨 충만한 신앙생활을 지속해나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바로 언제 어디서나 주님 현존 의식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나자렛의 마리아의 행보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언제나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굳게 믿었으며, 이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굳게 믿고 살아가셨던 마리아에게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 현존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 기쁨의 원천입니다.
따라서 고통 중에도 기쁘게 사는 비결은 주님 현존을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는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이런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라씨아 플레나(Gratia plena)! 번역하면 ‘충만한 은총을 받은 여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리아를 각별히 공경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세상만사 모든 것을 기쁨으로, 은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특히 주님께서 항상 자신 안에 현존하심을 수용했습니다. 성령께서 자신 안에 현존하시고
역사하심을 수용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가 오로지 성령의 힘으로 인한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마리아는 이제 새로운 계약의 궤, 성령의 궁전, 살아있는 감실이 되신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718. 연중 제15주일 화요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티로나 시돈처럼
바알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소돔처럼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또는 단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도시들이 질책과 경고를 받은 직접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그 이유를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는 이렇게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그렇습니다. 단지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가장 많은 기적을 보았는데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은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영적 무지로 가려져 있는 어리석음과 굳어진 완고함이었습니다. ‘회개’(슈브, 메타노이아)란 베풀어진 사랑을 빗나갔음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바퀴를 돌리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영적 무지의 어리석음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돌아온 탕자이야기’에서, 특은을 받고도 받은 줄도 모르고 죄지은 줄도 모르기에 돌아오지도 않은 큰아들과 같습니다. 또한 파라오처럼, 많은 기적으로 자꾸자꾸 체험시켜주건만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과 고집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 우리가 하느님과 공동체로부터 많은 사랑과 특은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영적무지로 어리석고 완고하고 고집스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이야기”(루카 12,41-48)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바로 제가 당신의 뜻을 알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요, 많이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주저하고 망설이며, 이기심과 자애심과 편리와 안주에 사로잡혀 깊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경고하신 것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애타는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멸망으로 빠져드는 그들에 대한 동정과 애도의 한탄이요 경고였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애타는 호소를 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주님께서 저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희에게 그 사랑을 주신 까닭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제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에게 그만큼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부를 건네주신 우리 주님께 우리도 전부를 건네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주님!
당신의 꾸짖음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사랑을 받고 또 받으면서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함은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에 눈이 가려 마음이 비뚤어지고 변덕스런 까닭입니다.
당신이 많은 사랑을 요구하심은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음임을 알게 하소서.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으듯 품으신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15주일 화요일./ 회개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하느님
"내 영혼은 밤에도 당신을 사모하오며,
아침에도 내 마음 당신을 그리나이다."(이사26,9)
하느님께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지금(now)을, 새로움(new)을 뜻합니다. 지금의 하느님, 새로움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깨어 있는 영혼들은 늘 하느님의 지금을, 하느님의 새로움을 삽니다. 어제 다음 말마디를 게시판에 써불이고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잠자는 시간외에는 결코 눞지 않는다!"
"잠자는 시간, 묵상시간, 말씀을 경청하는 시간외에는 결코 눈을 감지 않는다!"
요즘 불길하고 우울한 뉴스가 가득합니다. 무엇보다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입니다. 국내의 홍수 피해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천재에 인재까지 겹처 정말 회개하여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전세계 덮친 폭염, 홍수”라는 1면 톱기사 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지난 주말 한국에서 폭우로 40명이 희생된 가운데 미국 북동부 펜실베니아주 돌발 폭우로 5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시에 미국 남서부엔 폭염이 덮져 데그밸리의 기온이 50도를 넘어서며 종전 지구 최고 기온 기록 경신을 앞두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48도가 넘는 폭염이 예고되며 유럽 최고 기온도 곧 다시 쓰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웃 중국과 일본도 폭염과 홍수에 몸살을 앓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폭염 및 극단 기후의 배후로 지목되는 가운데 온실가스 최대 배출국인 미국과 중국이 기후 관련 논의에 나섰지만 실질적 합의가 도출될 것이라는 기대는 크지 않다.-
국내외가 총체적 난국입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가 인간의 무지와 탐욕으로 인해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자연 재해 앞에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지요. 홍수 및 산사태로 인해 초토화되는 현실 앞에 망연자실한 사람들입니다. 피해는 언제나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인 사람들이 우선입니다. 어떻게? 뾰족한 답이 없어 보입니다. 답은 단 하나, 회개뿐입니다. 말로만, 마음만으로의 회개가 아니라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생활방식의 변화입니다. 개인의 노력은 물론 정책이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참 격렬합니다. 오늘날 세상에 오셔도 주님의 반응은 똑같을 것입니다. 예나 이제나 참 벗어나기 힘든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돌아오는 철저한 회개만이 무지에 대한 답임을 오늘 복음이 가르쳐줍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했을 것이다...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대로 오늘의 하느님을 잊은 무지한 이들을 향한 불행 선언같습니다. “행복하여라” 많이도 반복됐던 행복선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불행선언입니다. 불행도, 행복도 선택입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요 지체없는 회개의 실행입니다. 예수님께서 활약하시며 세고을에 많은 기적들을 베푸셨는데 그 기적들이 궁극으로 목표했던 바는 무지한 사람들의 회개였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뿐입니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없이는 온유와 겸손도 자비와 지혜도 없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아니곤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복음 선포와 더불어 늘 강조하신 것도 회개였습니다. 하느님안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게 회개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날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의 행복한 자유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한 참자유요 참행복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사는 이에겐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뿐입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창세기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어제 부터 시작된 제1독서 탈출기가 흥미진진 새롭기가 처음 읽는 듯합니다. 다시 시작하는 하느님의 결의가 우리에게는 용기와 힘이 됩니다. 좌절함이나 절망함이 없이 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하느님이야말로 우리 회개의 여정에 최고의 참 좋은 안내자가 됩니다.
모세를 통해 다시 시작하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시며 우리의 평생 동반자가 되고 계십니다. 모세를 준비시키는 심모원려의 하느님의 지혜와 겸손, 끝없는 인내와 기다림이 놀랍습니다.
참으로 회개의 여정에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믿음임을 배웁니다. 야곱을 수련시키고, 이어 요셉을 치열히 수련시킨 하느님은 모세를 수련시킴으로 구원역사를 시작합니다. 모세의 탄생과정과 성장과정이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섬세한 개입을 통해 이뤄집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절망은 없음을 배우고 깨닫게 됩니다. 파라오의 딸, 공주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었을 때, 공주는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합니다. 새삼 세례성사로 물에서 건져 낸 우리들 하나하나 역시 모세임을 깨닫습니다.
모세야말로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겪으며 혹독한 수련을 겪으셨던 예수님이요, 예수님에 앞서 하느님의 도구로 선택된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하느님을 수련장으로 하여 기나긴 회개의 여정에, 수련에 돌입합니다. 여전히 인생 광야에서 회개의 여정중 평생 수련자들인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수련장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선언하신 임마누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도 친히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오시는 주 예수님은 우리의 수련장이 되시어 회개의 여정중 늘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주십니다. 저절로 나오는 행복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 예수님을 수련장으로 모시고 평생 회개의 수련자로 사는, 회개의 여정중인 사람들!” 아멘.
[7/19(수) 연중 제15주일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따뜻한 마음이 있다면,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다면, 순수한 마음이 있다면, 가진 것을 나누는 헤아림이 있다면, 절박한 믿음이 있다면,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가 있다면 우리는 모두 신약의 파스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조재형 신부)
2.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탈출 3, 12)
매일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굳게 믿으며, 매 순간 하느님과 긴밀히 소통하며
이스라엘 백성들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그 귀중한 소명을 시작합니다.
마리아...그라씨아 플레나(Gratia plena)! 번역하면 ‘충만한 은총을 받은 여인!’입니다.
세상만사 모든 것을 기쁨으로, 은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특히 주님께서 항상 자신 안에 현존하심을 수용했습니다. 성령께서 자신 안에 현존하시고
역사하심을 수용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가 오로지 성령의 힘으로 인한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주님!
당신의 꾸짖음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사랑을 받고 또 받으면서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함은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에 눈이 가려 마음이 비뚤어지고 변덕스런 까닭입니다.
당신이 많은 사랑을 요구하심은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음임을 알게 하소서.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으듯 품으신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날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의 행복한 자유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한 참자유요 참행복입니다. (이수철 신부)
[7/19(수) 연중 제15주일 수요일, 제 207일 기도]
임마누엘 하느님! 야훼이레 하느님!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굳게 믿으며,
매 순간 하느님과 긴밀히 소통하며
지속적인 회개를 하게 하소서.
그라씨아 플레나(Gratia plena)! ... ‘충만한 은총을 받은 여인!’
세상만사 모든 것을 기쁨으로, 은총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7월19일(수) 5시3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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