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7월 25일 화요일[(홍) 성 야고보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7월 25일 화요일[(홍) 성 야고보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야고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이다. 어부인 야고보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동생 요한과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세 제자 가운데 하나이다. 열두 사도에는 야고보가 둘 있는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작은[소] 야고보’와 구분하여 ‘큰[대] 야고보’라고도 부른다. 야고보 사도는 42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다.

입당송

마태 4,18.21 참조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대영광송>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야고보 사도가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게 하셨으니
그의 영광스러운 증거로 교회를 튼튼하게 하시며
하느님의 보호로 교회를 지켜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4,7-15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6(125),1-2ㄱㄴ.2ㄷㄹ-3.4-5.6(◎ 5)
◎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
○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15,16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20-28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복된 야고보 사도가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
성자께서 마신 수난의 잔을 마시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를 기억하며 바치는 이 제사를 받으시고
성자의 수난으로 마련하신 구원의 세례로 저희를 깨끗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도 감사송 1 : 하느님 백성의 목자인 사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그들은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복된 야고보 사도 축일에 천상 양식을 기쁘게 받아 모시고 비오니
그의 전구로 저희를 지켜 주시고 마침내 주님 나라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성 야고보 사도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서랍장의 손잡이가 떨어져서 순간접착제로 붙여 보려고 하였습니다. 성격이 급하다보니 접착제가 손가락에 묻었습니다. 떨어진 손잡이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손에 묻은 접착제를 떼어내려고 하였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저 같은 분들이 많았는지 손에 묻은 접착제를 떼어내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식용유, 소금, 마가린, 세제, 비누, 아세톤을 이용하는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하려면 일회용 장갑을 끼고 하는 것이 쉽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손에 묻은 순간접착제는 불편하기 때문에 빨리 떼어내야 하지만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의 관계는 순간접착제로 붙이듯이 계속 끈끈하게 이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관계에 금이 가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것 중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소감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는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감사와 찬미를 드렸으면 좋은 열매를 맺는 성지순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불평과 비난이 함께했으면 나쁜 열매를 맺는 성지순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았지만 불평과 비난의 마음이 있었던 분들 중에는 제가 그분들을 향해서 글을 썼다고 오해 하였습니다. 오해가 풀려서 웃음으로 만났지만 처음에는 저도 좀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3년 동안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권위에 놀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그 무엇으로도 떼어 놓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도 이 가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는 욕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욕망은 바벨탑과 같습니다. 그 욕망을 떨쳐 버리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재물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명예에 대한 욕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겸손의 길만이 우리를 하느님과 더욱 강하게 묶어 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이 크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모두 뿔뿔이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반석이라고 하였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던 베드로도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둠을 이기는 것은 작은 불빛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오직 성령의 빛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이제 용기를 내서 다시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니 두려움은 담대함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환난도, 박해도, 칼도, 죽음도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야고보 사도는 욕망을 버리고 겸손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두려움을 버리고 담대함으로 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습니다.

 

왼손에는 겸손을 들고, 오른손에는 담대함을 들고 우리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가해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마태오 20,20-28

 

예수님께서 우리 열정에 기름 부으시는 방법

 

오늘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야고보는 동생 요한과 함께 열정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마지막 날에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하시자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저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실 잔은 십자가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이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자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올바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목사님들에게 어느 교회에서 사목하시느냐고 물으면 그분들은 항상

“어느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조원동 주임 신부입니다”,

혹은 “조원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목합니다”라고 대답하는데,

이런 면에서 그분들 앞에서는 조금 부끄럽습니다.

저희도 섬긴다는 말을 많이 썼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야고보 사도의 열정을 나무라시지 않으신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높은 자리에 오르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처럼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

 

며칠 전에 직장에서 회장님에게 선교해서 세례를 주고 사장님에게 선교해서 오랜 냉담을 풀고

견진성사를 받게 한 신자 한 분을 만났습니다. 아랫사람을 선교하는 일도 쉽지 않은데

윗분들을 이렇게 선교했다는 말을 듣고는 이분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정으로 신앙생활 하시는 분을 만나기는 좀처럼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는 열심히 하지만, 또 어느 정도가 되면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저의 딜레마는 저를 포함해서 어떻게 열심한 사람들을 더 열심히 하게 만들지였습니다.

저는 경쟁을 싫어하기에 상을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꾸르실료를 할 때도

울뜨레야를 잘한 본당은 일 년에 한 번씩 상을 주었는데 받지 못한 본당들이 움츠러들까 봐

오히려 마음으로는 그러한 정책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또한 그러지 않고는

열심한 분들을 더 열심히 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열정을 꺾지 않으십니다.

요한은 자신을 나타낼 때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 옆자리에서 첫째였습니다. 예수님 가슴에 머리를 기댈 정도였습니다.

상을 주어서 열정을 더 끌어올리는 것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시험에 떨어진 것은 운전면허시험이었습니다. 대학생 때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 시간 공부하고 붙었다고 하기에 저도 그 정도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사흘은 공부했던 것 같습니다. 

막상 시험장에 들어가 답안지를 받으니 너무 쉬웠습니다.

그때 제가 제일 먼저 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중에 점수를 확인하는데, 제가 97번이었는데

76점으로 나온 것입니다. 1종 보통이었기 때문에 80점이어야 합격이었습니다.

저는 크게 실의에 빠져서 그날 학교도 가지 않았습니다. 

 

다음 달에는 잘 보겠다는 마음으로 한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시험장에서 제일 마지막에 나올 정도로 끝까지 풀었습니다. 저는 만점 받았는지 알았습니다.

82점인가 84점으로 간신히 통과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00점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저는 80점 통과를 목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80점이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100점을 목표로 삼고 공부하였습니다.

누가 붙을 가능성이 크겠습니까? 목표를 100점에 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6-27)

 

저도 목표를 크게 잡습니다. 우리 목표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도 높고 낮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첫째가 되려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더 겸손한 사람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를 더 높게 가집시다. 성인이 되는 것을 넘어서서 성모님 옆자리를 노립시다.

목표가 생기면 삶이 바뀝니다. 어떤 분들은 하늘에도 높고 낮음,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 처음 듣는다고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도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에 간다고 해서

내가 성모님과 동급의 취급을 받지 않습니다. 한 만큼 받는 것이 정의입니다. 

 

이 사실이 잊힐 때는 대부분 신앙인이 자신이 느끼기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으면

거기서 노력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도 첫째가 있고 그 방법은

가장 겸손해지는 것이라고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 하지 말고 위대한 성인이 되기 위해 신앙생활 합시다.

그러면 적어도 천국엔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724. 연중 제16주일 월요일.

 

“보라, 요나보다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41.42)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시자,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며,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여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개탄하시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 구나!”(마태 12,39)

“악한 세대”라는 말은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까지 치달은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곧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모함할 구실을 찾기 위한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세대”라는 말은 이백주년 성경에는 “간음하는 세대”라고 번역하였듯이, 마치 부부의 신의와 같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대해 불충하고, 신의를 지키지 않는 절개 없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들은 표징을 요구하지만, 표징을 본다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표징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표징을 보았다고 해서 모두가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죽은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아직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죽은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들에게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루카 16,30)라고 간청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이 표징을 알아볼 것입니다. 믿음으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 11,1-3)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요나보다도, 솔로몬보다도 더 큰 분이심을 계시하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41.42)
 
그러나 요나의 설교만 들고도 회개한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평판으로만 듣고도 찾아온 이방인 세바의 여왕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건만, 이스라엘 백성인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표징을 보고서도 태도를 고치기는커녕 그분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굳이 표징을 보여주지 않아도 믿는 이들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실은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표징들 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마태 12,39)
 
주님!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놀라게 하시려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시려 오셨습니다.
주님, 오늘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으시고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당신의 자비를 보겠습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30724, 연중 제16주일 월요일.

 

더불어(together) 믿음의 여정

-회개와 겸손한 믿음-

  

저에게 단 하나의 강론을 뽑으라면 저는 지체없이 31년전인 1992년 1월 15일 왜관수도원에서의 대축일 종신서원 미사시 강론을 뽑겠습니다. 31년전이니 그동안 참 많은 수도형제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를 주제로 한 강론이었고 셋째 대목을 나눕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새롭게 들립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 좋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인 패거리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이 불러 주셔서 모인 은총의 공동체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좋아서 살기로하면 벌써 공동체는 붕괴되었을 것입니다.

착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착해서 구원받기로 한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머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막같은 그 어둡고 단조로운 회색빛 세월을 얄팍한 재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달콤한 인간관계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한계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근원적인 고독에 부닥쳤을 때 속수무책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외모를, 마음을, 재주를, 자리를, 업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만이 영원하기에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으로보면 우리의 삶은 어둔밤 물위를 걷던 베드로와 흡사하다 하겠습니다. 도대체 믿음이 없이는 온갖 유혹의 바다, 쾌락과 탐욕의 바다, 환상의 바다를 건너 주님께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성 쁠라치도를 구해 낸 것은 성 마오로의 지극한 순종의 믿음이었습니다. 불신과 불안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 베드로를 질책하신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믿음을 견고히 해야 하겠습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젊음이 순수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연륜이, 있는 자리가 성숙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믿음의 여정에서 누구나 초보자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초발심의 자세가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라는 대목에 대한 나열이었습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반드시 앞에 붙어야할 말마디는 더불어요, 더불어 믿음의 여정이어야합니다. 내달 8월1일부터 6일까지 포르투칼 수도 리스본에서는 세계 젊은이들의 날 행사가 있고 교황님은 물론 전세계에서 60만명의 젊은 순례자들이 모일 거라 합니다. 

 

교황님의 비디오 메시지 제목이 “타인들과 함께 기쁘게 걸어라” 였고 그 뒤에 “결코 혼자(never alone)’가 아닌 말마디가 붙어 있습니다. 도반 형제들과 더불어 믿음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이 참 많이 강조하는 말마디가 더불어(together)입니다. 어제 조부모와 노인의 날, 교황님의 강론중 한마디가 마음에 꽂쳤습니다. 

 

“더불어 자라는 밀과 가라지들(Wheat and weeds growing together)”

 

최후 심판의 날까지 가라지와 더불어의 삶,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요 삶의 신비입니다. 제가 꼭 강조했어야 했는데 못했습니다. 역설적으로 밀의 성장에 함께하는 가라지도 필수입니다. 가라지없는 밀만의 세상, 환상이요 결코 영적진보도 없습니다. 가라지와의 영적전쟁중 영적진보입니다.

 

더불어 믿음의 여정,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더불어 여정중 고군분투하는 믿음의 전사, 모세요 예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대가, 믿음의 달인인 두분 모세와 예수님입니다. 모세와 함께 하는 믿음이 부족한 더불어 여정중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대로 우리 믿음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추격하는 파라오의 군대와 과거를 그리워하며 불평을 쏟아놓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처지에 있는 모세입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놔두시오.’하면서 이미 이집트에서 말하지 않았소.”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도자의 리더십은 얼마나 결정적인지 배웁니다. 리더십(leadership)은 펠로우십(fellowship)인데 공동체가 잘 따라주지 않으니 모세의 리더십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을 격려하는 모세에 이어 즉시 하느님께서 모세를 격려하시며 인도하십니다. 모세와 늘 함께 하는 더불어의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이집트의 파라오 군대도 하느님 수중에 있음을 보여주는 두 대목, “주님께서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므로”, “나는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라는 구절입니다.

 

어쨌든 이런 믿음의 여정을 통해 모세도 함께하던 백성도 회개와 더불어 믿음도 새로이 배웠을 것입니다. 새삼 믿음도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날마다의 공동전례기도수행이 참 좋은 믿음의 훈련이 되고 이와 더불어 알게 모르게 성장하는 은총의 믿음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로 두분의 대조가 우리에겐 위로와 힘이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불신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믿음이 없는,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합니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예수님의 전생애가, 특히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 빛나는 표징인데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이미 요나의 표징은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비로소 완성됨을 봅니다. 이어 예수님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온 남방 여왕의 예를 들면서 거듭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이 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요, 회개와 더불어 겸손한 믿음이자 참나의 발견입니다. 평생 회개와 더불어 믿음의 여정에 충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믿음의 모범인 예수님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다음 두 말마디가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런 주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그러니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빛나는 하늘 나라의 표징은 없습니다. 자랑스럽게도 주님을 모시는 우리 역시 빛나는 하늘 나라의 표징이 됩니다. 우리의 회개와 더불어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7/25(화)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되새김 구절]

 

1.왼손에는 겸손을 들고, 오른손에는 담대함을 들고 우리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마태 12,39)
 
주님!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놀라게 하시려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시려 오셨습니다.
주님, 오늘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으시고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당신의 자비를 보겠습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반드시 앞에 붙어야할 말마디는 더불어요, 더불어 믿음의 여정이어야합니다. 

 

교황님의 비디오 메시지 제목이 “타인들과 함께 기쁘게 걸어라” 였고 그 뒤에 “결코 혼자(never alone)’가 아닌 말마디가 붙어 있습니다. 도반 형제들과 더불어 믿음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이 참 많이 강조하는 말마디가 더불어(together)입니다. 어제 조부모와 노인의 날, 교황님의 강론중 한마디가 마음에 꽂쳤습니다. 

“더불어 자라는 밀과 가라지들(Wheat and weeds growing together)”(이수철 신부)

 

[7/25(화)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제 213일 기도]

나와 동행하는 임마누엘 하느님!

나의 길을 매사 준비하시는 야훼이레 하느님!

전지전능한 사랑과 은총의 하느님!

 

믿음으로...겸손으로...담대하게 살게 하소서.

밀과 가라지와 함께 더불어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7월25일(화) 2시10분...수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