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7월 27일 목요일[(녹) 연중 제16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본기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19,1-2.9-11.16-20ㄴ
1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바로 그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2 그들은 르피딤을 떠나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진을 쳤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그곳 산 앞에 진을 쳤다.
9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너에게 다가가겠다.
그러면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이 듣고 너를 언제까지나 믿게 될 것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주님께 그대로 전해 드리자,
10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에게 가거라.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아 11 셋째 날을 준비하게 하여라.
바로 이 셋째 날에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이 시나이 산에 내릴 것이다.”
16 셋째 날 아침,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뿔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진영에 있던 백성이 모두 떨었다.
17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모세가 백성을 진영에서 데리고 나오자
그들은 산기슭에 섰다.
18 그때 시나이 산은 온통 연기가 자욱하였다.
주님께서 불 속에서 그 위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마치 가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연기가 솟아오르며 산 전체가 심하게 뒤흔들렸다.
19 뿔 나팔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모세가 말씀을 아뢰자,
하느님께서 우렛소리로 대답하셨다.
20 주님께서는 시나이 산 위로, 그 산봉우리로 내려오셨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모세를 그 산봉우리로 부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 주님,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
○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당신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
○ 거룩한 영광의 성전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거룩한 어좌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커룹 위에 앉으시어 깊은 곳을 살피시는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하늘의 궁창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0-17
그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의 종들이 정성껏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아벨의 제물처럼 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존엄하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이 제사가
인류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 당신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신다.
<또는>
묵시 3,2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3년 07월 27일 목요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오늘의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복음서는 예수님의 업적을 예언자들의 말씀과 함께 풀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업적이 예언의 성취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하느님의 계획으로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이사야서 6장 9절을 인용하신 이 말씀은 마치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깨닫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것도 하나의 비유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들어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마음이 무디어진 백성을 향한 경고입니다.
예언자들의 말씀과 행동은 하느님의 뜻을 표현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 백성의 잘못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들은 귀가 있지만 제대로 듣지 못하고 눈이 있지만 감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마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비록 단순한 비유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제대로 보고 있는지, 우리의 귀가 제대로 듣고 있는지,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께 열려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크루즈 여행 중에 ‘One Day More’라는 쇼를 보았습니다. 유명한 뮤지컬의 절정 부분을 모아서 공연하였습니다. “레미제라블, 팬텀오페라, 시카고, 미스사이공, 위키드‘와 같은 뮤지컬의 귀에 익숙한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화려한 무대와 멋진 의상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저도 오페라는 볼 기회가 없었는데 뮤지컬은 관심이 있어서 몇 번 보았습니다.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시카고, 미스사이공, 아이다, 팬텀오페라, 위키드, 라만차의 사나이, 알라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명성왕후, 몽유도원도, 광화문연가’와 같은 뮤지컬을 보았습니다. 뮤지컬의 본고장인 뉴욕에 살기 때문에 손님들이 오면 가끔 브로드웨이로 가서 뮤지컬을 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의 삶에 보는 것이 무척 많습니다. ‘영화, 연극, 뮤지컬, 오페라, 음악회’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여행을 가는 것도, 순례를 가는 것도 대부분 보는 것입니다.
저의 32년 사제생활을 뮤지컬로 만든다면 어느 부분을 만들까 생각해 봅니다. 8년간의 보좌신부 시절은 ‘질풍노도’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젊음의 패기와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기도와 성찰보다는 무모한 도전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8년간의 본당신부 시절은 ‘안정과 성숙’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결과를 볼 수 있었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저를 도와 주셨습니다. 8년간의 교구청 시절은 ‘연대와 화합’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성가에 나오는 것처럼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은 기쁨입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처럼 동료 사제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8년간의 외국생활은 ‘다름’을 받아들이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지내면서 고정된 관념과 틀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One Day More’라는 말처럼 하루하루가 모여서 32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인터넷의 시대가 열리면서 저는 매일의 묵상을 통해 저 자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의 묵상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그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사건은 창조의 시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는 시간이 있습니다.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시간이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모습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입니다. 우리가 십계명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면 하느님과 함께 지낼 수 있고,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보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당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으로 당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당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가장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이고, 가장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고, 가장 아픈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영어로 본다는 단어는 ‘See, Look, Watch’가 있습니다. 보인다고 할 때는 See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수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검토하다, 살펴본다고 할 때는 Look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주의 깊게 한참을 본다고 할 때는 Watch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저는 본다는 것에도 3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목안(目眼)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은 심안(心眼)입니다. 신앙으로 보는 것은 신안(信眼)입니다. 눈으로 보아서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참된 진리를 얻기 어렵습니다. 마음으로 보아서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십자가와 부활을 볼 수 없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믿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726.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마태오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대한 일곱 가지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그 첫 번째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요, <둘째>는 뿌려진 씨에 대한 이야기, 곧 열매인 결실에 대한 이야기요, <셋째>로는 씨가 뿌려진 땅에 대한 이야기, 곧 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우선 이 이야기는 <첫째>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서 밭을 구별하지 않고 씨를 뿌리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해주며, <둘째>로는 그 씨앗은 열매를 맺고 실현되고 성취된다는 사실을 밝혀주며(이사 55,11), <셋째>로는 씨가 뿌려진 밭을 잘 가꾸어야 할 하느님 자녀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서, 결론처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8)
그렇다면, 분명 나에게도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을 터인데, 지금 나에는 몇 배의 열매가 맺혀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내가 좋은 땅인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씨앗이 떨어질 때 그 땅이 ‘좋은 땅’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따라 열매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좋은 땅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땅’은 ‘씨앗’과 함께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이 뿌려지기 전의 땅의 상태가 좋은 땅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진 후에 땅을 갈고 가꾸는 것에 의해 그 땅의 성질이 결정지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의 씨를 가꾸는 농사법’은 먼저 밭을 잘 쟁기질 한 다음에 씨가 뿌려진 것이 아니라, 어느 땅이든 상관없이 먼저 씨가 뿌려진 다음에 그 밭이 쟁기질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땅은 씨앗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할지라도 쓸모없는 땅인 것입니다. 황무지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밭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씨앗이 거룩하고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거룩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밭에 씨앗이 선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씨앗의 존재를, 그 가치를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베풀어진 씨앗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그러니 씨앗이 내 안에 뿌려진 채 여전히 묻혀 있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를르의 체사리오는 말한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이 구더기가 끓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땅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뿌려진 씨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밭에서 일할 줄 알며 땅의 노래를 하늘과 함께 부르는 사람이요, 하늘의 노래를 땅과 함께 부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땅을 매만지며 피땀 흘려 자신의 지문을 새기며 사랑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요, 그 열매로 자신의 배를 채우기보다 타인에게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저희가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4)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을 품고 살게 하소서!
씨앗을 모시고 살며, 씨앗을 기르며 살게 하소서.
오늘 제가 당신 말씀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시고
당신 말씀으로 제가 거룩해 지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30726.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성화聖化의 여정
-한결같은 신망애信望愛의 삶-
"주님은 죽음에서 네 생명 구하여 내시고
은총과 자비의 관을 씌워 주시는 분,
한평생을 복으로 채워주시니,
네 청춘 독수리마냥 새로와지도다."(시편103,4-5)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이 또한 하늘 나라의 비유에 속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절망은 없다”일 것입니다. 한결같이 씨뿌리는 사람,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
흡사 농부 하느님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농부 예수님처럼 생각되는 씨뿌리는 사람, 바로 예수님입니다. 얼마전 수도형제로부터 배웠던 참 좋은 인사말, “성화되십시오”란 말이 참 좋습니다.
어제 강론 제목은 “섬김의 여정-섬김의 순례자”였는데, 오늘 강론 제목은 “성화의 여정-한결같은 신망애의 삶”입니다.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강론중 참 많이 사용하는 말마디가 여정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삶은 노화老化의 여정이 아니라 성화聖化의 여정, 성숙成熟의 여정이라함이 맞을 것입니다. 바로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에 충실한 이들의 삶의 여정이 그러합니다.
요즘 성경을 읽듯이 계속 즐겨 읽는 책들은 위인의 평전들입니다. 어제부터는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평전을 구입해 읽기 시작했습니다. 700쪽 이상의 두꺼운 평전을 보는 순간, “아 이렇게 가득한 삶을 살았구나!” 하는 감탄이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평생동지이자 아내였던 이희호가 없었다면 김대중도 없었을 것입니다. 똑같은 생애를 선물로 받아 씨뿌리는 삶에 참으로 충실했던 분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내 평전이 있다면 어떻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 오랜만에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들의 미사를 집전하면서 받은 감동도 잊지 못합니다. 자매회의 역사가 18년쯤되니 당시는 젊었던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할머니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늙었다기 보다는 깊어지고 거룩해진, 순수하고 맑은 모습들이었습니다.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에 충실하면서 성화의 여정을 살아 온 모습들이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담쟁이란 시입니다. 요즘 한창 담벼락을 타오르는 담쟁이들이요, 25년전 써놨던 시이지만 참으로 많이 인용했던, 그러나 아무리 반복해도 늘 새로운 제 대표적 자작시입니다. 그대로 씨뿌리는 사람의 삶의 모습도 이러하리라 생각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하늘 향해 힘차게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하늘 나라의 실현이다”-1998.7.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하늘 나라의 비유라 했습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씨뿌리는 과정에 충실한 정주의 삶이 바로 하늘 나라의 삶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진인사대천명, 과정에 충실하고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람은 결과를 보지만 하느님은 삶전체의 과정을 보십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이처럼 믿음의 사람이자 희망의 사람입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에 개의치 않고,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에 충실할 수 있음은 궁극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이요 절망이 바로 대죄입니다. 정말 믿음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라면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하루하루 과정에 충실한 하늘 나라의 삶을 삽니다.
사람은 사랑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바로 한결같은 갈망의 사람, 열정의 사람, 사랑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이웃 형제들을, 삶을 한결같이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렇게 평범한 일상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수도자만 아니라 열정과 순수는 기본적 인간 자질입니다. 사랑의 열정이요 사랑의 순수입니다.
바로 이런 한결같은 신망애의 삶을 살아갈 때 척박한 땅은 좋은 땅의 옥토로 바뀔 것입니다. 실패인 듯 해도 결과는 성공의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변화하는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충실했다면 어디선가 좋은 땅에서는 무럭무럭 잘 익어가는 신망애 삶의 열매들일 것입니다. 다음 대목이 궁극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바로 경청과 겸손, 관상의 자세로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해 보라는 권고입니다. 내 삶이 척박한 돌밭이나 가시덤불같은 밭은 아닌지 혹은 말씀의 씨앗들이 잘 자라나고 있는 옥토의 마음밭인지 잘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밭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참 많이 강조하는 신망애 삶의 선택과 훈련, 습관입니다. 자나깨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좋은 덕목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입니다.
탈출기의 주인공 모세와 복음의 예수님의 대조가 은혜롭습니다. 예수님의 예표와도 같은 모세의 삶도 참 한결같습니다. 불평하는 철부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절망하기로 하면 끝이 없을 것이나 하느님께 깊은 신뢰와 사랑, 희망을 두고 있기에 참 지도자 모세는 지극한 인내의 사랑으로 이들을 다 감당하시며 이들을 주님의 만나로 배불리십니다. 화답송 시편의 고백입니다.
“그분은 하늘의 문을 열어 주시어, 만나를 비처럼 내려 먹이시고, 하늘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네.”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에, 평범한 일상에 충실함이 제일입니다.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역시 그 모범입니다.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170-180년 경에 쓰여진 위경 야고보 원복음서를 보면 이들 부부가 얼마나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주님을 섬기며 아기 갖기를 기도했는지 잘 드러납니다. 이들 두분을 기념하는 전례는 6세기 동방교회를 거쳐 8세기 이후에 로마로 도입되었고, 14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그 결과 1584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7월 26일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기념 축일로 지정했습니다.
하느님은 이들 부부의 간절하고 항구한 소원을 들어 주시어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보고 배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부모의 거룩하고 충실한 삶을 그대로 보고 배웠을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성화의 여정을 잘 살도록, 끊임없이 씨뿌리는 신망애의 삶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아멘.
[7/26(목)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하늘나라의 신비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마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비록 단순한 비유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제대로 보고 있는지, 우리의 귀가 제대로 듣고 있는지,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께 열려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허규 신부)
2. 오늘 하루 믿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4)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을 품고 살게 하소서!
씨앗을 모시고 살며, 씨앗을 기르며 살게 하소서.
오늘 제가 당신 말씀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시고
당신 말씀으로 제가 거룩해 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부모의 거룩하고 충실한 삶을 그대로 보고 배웠을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성화의 여정을 잘 살도록, 끊임없이 씨뿌리는 신망애의 삶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아멘.(이수철 신부)
[7/26(목)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제 215일 기도]
임마누엘 하느님!, 야훼이레 하느님!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하소서.
지복의 신비로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7월27일(목) 9시4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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