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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7월 26일 수요일[(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7월 26일 수요일[(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요아킴 성인과 안나 성녀는 유다 지파의 다윗 가문 출신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 성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나, 요아킴 성인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뒤 하느님의 섭리로 마리아가 탄생하였다고 한다. 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6세기부터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어 10세기에는 서방 교회에도 널리 퍼졌다. 요아킴 성인에 대한 공경은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입당송

집회 44,1.22 참조
마리아를 낳은 요아킴과 안나를 칭송하여라. 주님은 만민에게 내리신 복을 그들 위에 베푸셨다.

본기도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복된 요아킴과 안나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시어
성자의 어머니를 그들에게서 태어나게 하셨으니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저희도 주님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리라.>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16,1-5.9-15
1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는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나이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다.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둘째 달 보름이 되는 날이었다.
2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3 이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말하였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
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나는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겠다.
5 엿샛날에는, 그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
9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주님께서 너희의 불평을 들으셨으니,
그분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하고 말하십시오.”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말하고 있을 때,
그들이 광야 쪽을 바라보니, 주님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났다.
1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12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3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다.
14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15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78(77),18-19.23-24.25-26.27-28(◎ 24ㄴ 참조)
◎ 주님은 하늘의 양식을 주셨네.
○ 그들은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시험하며, 욕심대로 먹을 것을 달라 하였네. 하느님을 거슬러 그들은 말하였네. “하느님이신들 광야에다, 상을 차리실 수 있으랴?” ◎
○ 그분은 높은 구름에 명하시고, 하늘의 문을 열어 주시어, 만나를 비처럼 내려 그들에게 먹이시고, 하늘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네. ◎
○ 천사들의 빵을 사람이 먹었네. 주님이 양식을 넉넉히 보내셨네. 하늘에서 샛바람 일으키시고, 당신 힘으로 마파람 몰아오셨네. ◎
○ 그들 위에 먼지처럼 고기를, 바다의 모래처럼 날짐승을 내리셨네. 그들 진영 한가운데에, 천막 둘레에 떨어뜨리셨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 알렐루야.

복음

<열매는 백 배가 되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9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집회 44,1.10-15)와 복음(마태 13,16-17)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의 정성 어린 예물을 받으시고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하신 복을
저희도 나누어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4(23),5 참조
그들은 주님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느님께 자비를 얻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놀라운 신비로 저희를 새로 나게 하시려고
성자를 사람에게서 태어나게 하셨으니
이 천상 양식을 배불리 먹은 자녀들의 효성을 보시어
크신 자비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8월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신부님과 크루즈 여행을 함께 했습니다. 크루즈 여행은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많이 간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주로 왔고, 젊은 분들도 많았습니다. 첫날 저녁 ‘COOL’이라는 공연을 보았습니다. 70년대 80년대에 유행했던 팝송을 주제로 한 공연이었습니다. 그때는 고고에서 디스코로 넘어가던 시대였습니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는 청계천에 가서 레코드 판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귀에 익은 흥겨운 음악을 들으니 제가 8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매일 저녁 공연을 보는 즐거움이 있고, 짐을 다시 꾸리지 않는 것이 크루즈 여행의 장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굳이 고민하지 않고 정해진 식당을 골라서 먹는 재미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80년대는 풍요와 번영의 시대였습니다. 국민소득 천불과 수출 백억 불의 시대였습니다. 자가용이 보편화 되던 시대였습니다. 86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의 시대였습니다. 교회에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고, 103위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예비자들이 교회를 찾았고, 본당을 새로 늘리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를 넘어 저는 1991년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서양의 팝송과 생맥주 그리고 프로야구와 영화에 젖어 있을 때 또 다른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사물놀이와 민중가요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등장했습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 적인 것이다.’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근로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노동운동에 헌신하는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농활을 통해서 우리 농촌의 현실을 제대로 알아가는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서양의 철학과 서양의 신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철학과 우리의 신학을 연구하며 신학의 토착화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80년대는 공존의 그늘에서 힘들어 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대였습니다. 저도 돈 보스코 센터에서 1년 정도 봉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직업을 배우는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함께 갔습니다. 야학을 하는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신학교에서는 해방신학, 아시아신학, 민중신학을 토론하였습니다.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한 젊은이는 북한으로 가서 남한의 이야기를 전하였습니다. 한 사제는 그 젊은이를 데리고 군사분계선을 넘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의 무서움도 젊은이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BTS의 음악이 팝송의 본 고장에서 1위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시대를 그리워합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지만 굶주림 앞에서 자유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굶주린 소크라테스가 되고자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 달라고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라는 현실 앞에서 이집트의 풍요를 그리워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그러나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망을 다 채울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깨닫지 않는다면, 스스로 일어서지 않는다면 만나는 결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만나는 씨를 뿌려야 얻을 수 있습니다. 씨를 뿌려서 거두는 만나를 먹어야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씨를 뿌리고, 아폴로는 거름을 주었지만 결실을 맺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뿌리는 씨가 길가에 떨어지고, 자갈밭에 떨어지고, 가시덤불에 떨어질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2023년이라는 밭에 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가 뿌리는 씨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고, 병자를 고쳐주는 것입니다. 나는 씨는 뿌리지 않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성 요아킴이여, 기뻐할지어다!

 

성직자 수도자 부모로 산다는 것 때로 큰 기쁨이요 보람이지만, 반대로 그들의 부모라는 신분, 그 자체로 엄청난 부담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님들 역시 한 본당이나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들 신부나 수도자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언행에 있어서 신중 또 신중해집니다. 너무 나서서도 절대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뒤로 물러나 있어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적절하고 균형 잡힌 처신을 하느라 죽을 고생을 하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하느님께서 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축복의 통로가 되신 나자렛의 마리아, 그녀의 부모셨던 요아킴과 안나의 삶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 마리아가 부여받은 엄청난 사명이 자신들로 인해 어긋나면 안 된다는 마음에 요아킴과 안나는 늘 조심조심, 조마조마, 기도 속에 살아가셨을 것입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일생에 대한 저작이나 문헌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 가운데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사제가 저술한 책에 의하면, 안나 성녀의 생애는 구약시대의 유명한 예언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비슷했다고 합니다. 늙도록 자녀를 얻지 못했던 요아킴과 안나는 눈물의 기도 끝에 기적처럼 아이를 갖고 출산하였는데, 그녀가 마리아였답니다.

 

안나의 자비심은 각별했답니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행하던 일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을 열고, 구차한 사람들에게 손을 폈던 것입니다. 또한 그녀는 천상적 지혜로 충만했다고 합니다. 그녀에게 특별한 성덕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요아킴은 유다 가문들 가운데 가장 정통적인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는 나자렛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엄수했고, 평온한 청년 시절을 지냈습니다. 혼기가 차자 레위족 가문의 소녀 안나와 혼인하였습니다. 두 분은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충만한 신앙생활을 통한 완덕의 길을 추구함으로써, 마리아의 사명을 준비하였습니다.

 

“성 요아킴이여, 기뻐할지어다. 무릇 세상의 구세주 예수님을 나으신 어머님이 곧 당신의 따님이기 때문입니다.”(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7)
 

오늘은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질그릇에 담긴 보물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곧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인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복음의 능력으로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고 영광을 입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온갖 환란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8-10)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했습니다. 곧 높은 자리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와 아들들의 열망을 나무라시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청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곧 진정 청해야 할 바가 무엇이고, 진정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이며, 무엇을 먼저 행해야 하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이는 우리에게 높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이요, 으뜸인 사람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는 진정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고자 하면,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왕이 되고 싶다면 내 아내를 왕비로 대하고, 내가 왕비처럼 살고 싶다면 내 남편을 임금으로 받들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성인이 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여기고, 내가 예수님이 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예수님으로 바라볼 일입니다. 남을 무시하면 자신도 그렇게 무시당하게 되고, 남을 정당하게 대우하면 정당하게 대우받게 되고, 남을 존중하면 그만큼 존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곧 남을 불신하고 신뢰하지 못하면 자신들의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고 불신 받을 것이요, 남에게 자비로우면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면, 필시 그도 나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뻔하고 당연한 이치를 알면서도 살지를 못합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를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으며,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가 버릴 그 제자들을 섬기셨기에 섬김 받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닙니다. 혹은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낮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곧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는 ‘들어 올림’이 없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높이는 데 그 본질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곧 하느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학원”(<규칙서> 머리말 45)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학교에서 ‘주님 섬기기’와 ‘형제 섬기기’를 배우는 학생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섬기면서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청하게 하시고,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3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섬김의 여정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리라.”(시편126,5)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이 참 좋은 위로가 됩니다. 우리 말이 참 좋습니다. 번역하면 이 어감을 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라 사람입니다. 사랑, 사람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또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은 ‘섬기다’의 섬김, ‘배우다’의 배움입니다. 봉사와 공부보다 정겹고 그윽한 어감의 섬김과 배움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복음의 사람입니다.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 정의합니다. 마산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녀원 정문에 붙어있는 명칭이 더 좋습니다. 학원이 아닌 배움터라는 표현이 정답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

 

평생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에서 주님을 섬기고 형제를 섬기는 일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평생 섬김의 배움터에서 평생 섬김의 학인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수도형제들 하나하나의 삶이 섬김으로 요약될 정도로 각자 소임을 통해 섬김의 삶을 실천하는 섬김의 여정을 살아가는 섬김의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수도형제들에게 감동하고 배우는 것도 각자 일터에서 섬김의 책무에 지극히 충실한 점일 것입니다. 역시 섬김의 여정에서도 우리는 기도와 사랑에서처럼 여전히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섬김이야말로 영성의 잣대입니다.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 섬김의 환대, 섬김의 축복, 섬김의 기쁨, 섬김의 찬미, 섬김의 감사,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리더십등 참 기분 좋은 섬김이란 말마디입니다. 궁극의 섬김의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주님 사랑의 표현이 섬김이요 주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깁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파스카 영성뿐이요 파스카 영성이 그대로 표현되는 종과 섬김의 영성, 하나뿐일 것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어원도 같습니다. 제가 수도사제로 강론 하면서 역시 참 많이 사용했던 주제중 하나가 섬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결론처럼 당신의 제자 공동체를 섬김의 공동체로 정의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자기 두 아들을 주님의 양편에 있게 해 달라는 요청에 공동체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주님은 그 어머니의 청을 지혜롭게 말끔히 정리해 주신후 공동체 분위기를 일신시킵니다. 결코 세속의 사람들처럼 군림하거나 지배하고 통치하며 세도를 부려서는 안되고 오로지 섬김의 삶에만 전념하라는 명쾌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는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며 온전히 섬김과 비움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섬김의 공동체 중심에는 늘 섬김의 주님이 살아 계십니다. 정말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라면 주님을 닮아 섬김의 삶에 전념할 수 뿐이 없을 것입니다. 

 

샘솟는 섬김의 에너지야말로 질그릇 속에 담겨 있는 보물입니다. 누구나 지닌 질그릇 속의 보물인 섬김의 에너지는 그대로 예수님의 생명력이요 백절불굴 삶의 원천이 됩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우리에게는 큰 격려와 힘이 되고 용기백배, 신바람나게 하니 참 고맙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바오로 일행의 삶인지요! 섬김의 일꾼으로 한결같이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지만 언제나 드러나는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그리거 이 질그릇 속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생명이란 보물이 우리 삶의 백절불굴의 원천이 되고 섬김의 직무, 섬김의 여정에 항구하게 합니다. 

 

바로 섬김의 종의 모범이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말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그 명칭도 참 아름답고 거룩한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입니다. 이 말은 590년 교황으로 뽑힌 대 그레고리오 성인이 최초로 사용했습니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한결같이 미소띤 얼굴로 하루하루 날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섬김으로 환대하는지,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사람 많이 만나는 분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미소띤 인자한 얼굴이니 질그릇 같은 존재지만 예수님 생명이란 보물로 가득한 초인적인 교황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총애를 받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중 첫째인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베드로는 흡사 예수님의 삼총사같습니다. 사도들중 첫째로 순교한 분이 야고보 사도요 이분하면 2014년 안식년에 가졌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생각납니다. 성 야고보의 스페인어가 산티아고입니다. 다음 야고보 사도에 대한 전승이 신비롭고 은혜롭습니다. 

 

“야고보의 제자들은 그의 유해를 갈리시아 지방으로 옮겼 모셨으나, 711년 에스파냐와 이베리아반도 전역이 이슬람교를 믿는 무어족의 침략을 받고 나서 그 유해 또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중 813년 해당 지방에서 살던 한 은수자가 별빛에 이끌려 기적적으로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하면서 그 위에 성당이 건립되었다. 이는 ‘별들의 들판’이라는 뜻에서 ‘콤포스텔라’라불렀고, 이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는 자연스럽게 야고보의 이름을 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되었다.” 

 

이어 전 유럽을 가로질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여러 순례길이 생겨났고 이곳은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어 3대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죽으셨지만 여전히 살아계셔서 세세대대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이들의 영적 섬김의 수호성인이 된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지금도 에스파냐와 포르투칼의 수호성인이자 순례자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그러니 사후에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순례자들에게 영원한 섬김의 수호성인이된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후 9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산티아고 순례여정중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사실 죽을 때까지 섬김의 순례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는 섬김의 순례자들이기도 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섬김의 순례 여정중 종과 섬김의 영성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순례자들의 수호성인인 성 야고보 사도요, 섬김의 순례자들인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