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9월 22일 금요일[(녹) 연중 제24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본기도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6,2ㄹ-12
사랑하는 그대여, 2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3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되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4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5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 갑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6 물론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7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9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10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11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그 대신에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12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뒤쫓는 자들이 악행으로 나를 에워쌀 때, 그 불행한 날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그들은 자기 재산만 믿고, 재물이 많다고 자랑한다. ◎
○ 사람이 사람을 어찌 구원하랴? 하느님께 제 몸값을 치를 수도 없거늘. 그 영혼의 값 너무 비싸, 언제나 모자란다, 그가 영원히 살기에는, 구렁을 아니 보기에는. ◎
○ 누군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부러워하지 마라.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으며,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
○ “네가 잘한다고 사람들이 칭찬한다.” 사는 동안 스스로에게 말할지라도, 조상들이 모인 데로 내려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제물을 너그러이 받으시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가 드리는 이 제사가
모든 이의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하느님, 당신 자애가 얼마나 존귀하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당신 날개 그늘에 피신하나이다.
<또는>
1코린 10,16 참조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며, 우리가 나누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먹는 것이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천상 은총으로 저희 몸과 마음을 이끄시어
저희가 제 생각대로 살지 않고
그 은총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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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참을 인(忍)이 셋이면 살인을 면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왜 참아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천자가 참으면 나라에 해가 없고, 관리가 참으면 그 지위가 올라가고, 형제가 참으면 집안이 부귀해지고, 부부가 참으면 일생을 해로할 수 있고, 친구 간에 참으면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자신이 참으면 재앙이 없을 것이다.” 참을 인(忍)의 반대말은 화낼 노(怒)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화를 내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본당 사제가 화를 내면 공동체가 큰 상처를 받습니다. 형제가 화를 내면 부모의 가슴에 멍이 듭니다. 부부가 화를 내면 자녀들이 불안합니다. 내가 화를 내면 곧 후회하게 됩니다. 참을 인(忍)도, 화낼 노(怒)도 모두 마음의 문제입니다. 평소에는 참을 인으로 지내는데 욱하는 성격에 가끔 화를 내곤 합니다. 돌아보면 별 것 아닌데 화를 내고 후회 할 때가 많습니다.
며칠 전에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평화신문의 지면이 ‘좌파성향’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일본의 오염수 방출을 반대하였고, 그것이 지면에 보도되었는데 그런 기사는 좌파성향의 기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고 예수님파라고 말하였습니다. 일본의 주교회의도, 한국의 주교회의도, 아시아 주교회의도, 교황님도 일본의 오염수 방출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좌파와 우파의 이념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좌파에게도, 우파에게도 필요한 소중한 자원입니다. 모든 생명의 시작은 바다입니다. 바다는 생명의 터전입니다. 교회가 오염수 방출을 우려하고 반대하는 것은 ‘환경’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오염수를 바다에 방출하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의 문제입니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비용이 더 들더라도 다른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지만 자본주의는 우리 삶의 터전인 바다와 땅 그리고 공기와 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익의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임계점에 다다르면 자연은 자본주의가 쌓아놓은 바벨탑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뭄, 폭염, 화재’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풍요해진 세상에 살지만 인류는 터무니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였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함께 살아야하는 다른 생명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을 파괴하였고, 이는 기상이변과 코로나와 같은 자연 재해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릇된 종교적인 신념으로 다른 문화와 종교를 배척하고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이념과 욕망의 늪에 빠져서 땅을 빼앗고,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뼈저리게 체험하였습니다. 지금도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강대국의 욕심 때문에 국지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난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과 자본을 얻기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양심과 사랑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루카 8,1-3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기쁘게 봉사하는 여성들의 존재!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12 사도 만의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일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공동체의 이런저런 필요를 채워주던 협조자, 후원자들도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 완전매료되어,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뒤 따라다니던 추종자들까지 합하면
엄청난 사람이 무리를 지어 다녔습니다.
그 모습이 정말이지 엄청난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알량한 권력이지만 쥐고 있었던 헤로데를 비롯한 권세가들의 우려도 컸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설교하는 회당은 파리만 날리고 있는데, 엄청난 수효의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기 질투는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특별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여성들이었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복음 8장 2~3절)
참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개방적인 예수님을 태도를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여성들이 당하던 차별대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냥 평범한 여성들이 아니라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치유받은 여성들,
그 어디에서도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여성들까지도 당신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허용하셨습니다.
피정집을 운영하면서 새삼 느끼는 바가 큽니다.
피정이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양질의 프로그램도 중요합니다.
시의적절한 명강의도 필요합니다.
쾌적한 환경과 숙소도 요구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더군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맛갈진 식사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 식사 준비는 남자인 제가 아무리 백방으로 노력해도 충족시킬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머니의 정성스런 손맛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하던 복음 선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
뒷전에서 묵묵히 봉사하고 헌신하던 여성들의 손길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 여성들이 자신들의 재산마저 팔아가며 공동체를 뒷바라지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큰 매력과 사랑을 지니고 있었음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세상과 이웃을 위해 얼마나 활짝 열려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누구라도 와서 기쁘게 헌신하고 봉사하고픈 마음을 갖게 하는 매력을 갖춘 우리 공동체인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든든한 기초요 기반으로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기쁘게 봉사하는 여성들의 존재에 깊이 감사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고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태 9,9)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우리의 잘난 모습이나 능력, 혹은 우리의 선함이나 봉사정신, 아니면 당신께 대한 충성이나 믿음 등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시어 구해내셨다.”(신명 7,7-8)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호의”를 입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과 호의를 입은 이들이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르심 받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애를 입은 이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받은 죄인’이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2)
사실, 예수님께서 죄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타협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두둔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크신 자비요, 신의요, 호의였습니다. 용서요, 사랑이요, 곧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바로 이토록, 너희도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 받은 그 사랑과 호의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오늘,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긴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인 그분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죄인이라면, 먼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기에 앞서, 일흔 번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마태 9,12)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시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희생제물이 아니라, 제 행실을 바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되,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
-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홀로와 더불어, 따름의 여정-
모든 종교에 기도가 필수이지만 가톨릭 교회야 말로 기도의 보고寶庫입니다. “가톨릭 기도서”에 순서대로의 네 기도문이 기도의 기초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호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입니다. 집무실에 들어와 “만세육창” 기도를 바치기전 우선 순서대로 바치는 네 기도문입니다. 사실 가톨릭교회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견고히 하는데 십자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보다 더 짧고 좋은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새벽 휴게실에 들렸다 신간서적의 표지 그림과 글자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땅이 주는 치유의 선물, 맨발로 걸어라, 돈이 안 들고 부작용이 없는 최고의 자연치유요법, 일상의 감기부터 암, 심혈관, 뇌질환, 고혈압, 당뇨, 아토피, 치매, 코로나19 등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지금 당장 맨발걷기를 시작하라!”
정말 바람직한 맨발걷기 운동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반드시 하나 추가하고 싶습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라 맨발로 걸어라.” 이렇게 의식하면서 걷든다면 걷기는 그대로 기도가 되고 최고의 의사이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치유해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성 마태오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부르는 과정이 극적입니다. 마태오에게는 주님과의 극적인 만남이자 은총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길이신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마태오의 간절한 눈빛을 보셨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앞서 마태오의 주님을 찾는 갈망이 우선했음을 봅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없으면 주님 찾아오시지도 않고 찾아 오셔도 모릅니다. 마태오의 갈망의 눈빛을 일별하자마자 즉시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마태오는 즉시 일어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 말씀하시지 않고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던 주님이시겠는지요!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약 마태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또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그 삶은 어떠했을런지요? 그러니 주님의 부르심은 크나큰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길을, 빛을, 희망을 찾는 갈망이 있습니다. 살아있다하여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참길이자 참빛이자 참희망인 주님을 만나 따를 때 참으로 살아 있다 할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이 아니곤 누구를 따르겠는지요?
“나를 따라라.”
주님은 누구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시며 있는 그대로의 갈망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참으로 무시받고 사람 대접 못받던 마태오에 대한 일체의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그의 갈망을 보고 부르십니다. 평생 날마다 주님을 따라 나서는, “따름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각자 홀로 또 더불어의 따름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따라 나선 마태오를 당신 제자 공동체에 합류시키는 주님이십니다. 이제 홀로와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오른 마태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어울린 제자공동체를 보자 바리사이들은 즉시 제자들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인 밥을 함께 나누는 식탁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명쾌하여 복음적 제자 공동체, 교회 공동체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그대로 하느님 마음이, 하느님 사랑이 반영된 제자공동체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나 이제나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 가정공동체는 엘리트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들의 공동체, 병자들의 공동체, 참으로 주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부족한 이들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회개한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 병이 없어서 부름받기로 한다면 세상에 부름 받을 사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세상에 죄없는 사람, 병없는 사람 어디있겠는지요? 죄를 용서받고 병을 치유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사실 길이자 빛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잃으면, 잊으면 누구나에게 뒤따르는 죄요 병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는 제자들의 교회공동체의 특징과 삶의 원리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우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 말씀하시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기본적 덕목 지침을 명시합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정말 필요한 덕목이 겸손, 온유, 인내심, 평화, 일치요 이 또한 성령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하나 중심의 공동체의 특성을 밝힙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요,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한 분 하느님 아버지를 일치의 중심에 두고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순례 여정중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공동체 성원의 내적성장에 관한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공동체 형제들이라면 누구나 깨닫는 진리입니다. 저마다 받은 고유의 은총들이 상호보완되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의 성장이요 각자의 성장임을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하는 바오로입니다.
“성도들인 공동체의 형제들은 각자 직무를 수행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니 날로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에 충실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우리 공동체의 궁극의 목표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와 성숙, 충만한 경지에 이르는데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9/22(금) 연중 제24주간 금요일...되새김 구절
1. 임계점에 다다르면 자연은 자본주의가 쌓아놓은 바벨탑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뭄, 폭염, 화재’로 경험하고 있습니다....눈에 보이는 물질과 자본을 얻기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양심과 사랑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조재형 신부)
2. 오늘 우리 공동체는 세상과 이웃을 위해 얼마나 활짝 열려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누구라도 와서 기쁘게 헌신하고 봉사하고픈 마음을 갖게 하는 매력을 갖춘 우리 공동체인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든든한 기초요 기반으로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기쁘게 봉사하는 여성들의 존재에 깊이 감사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마태 9,12)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시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희생제물이 아니라, 제 행실을 바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되,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인 밥을 함께 나누는 식탁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명쾌하여 복음적 제자 공동체, 교회 공동체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그대로 하느님 마음이, 하느님 사랑이 반영된 제자공동체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이수철 신부)
9/22(금) 연중 제24주간 금요일...제272일 기도
복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매사 모든 것을 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9월22일(금) 4시2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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