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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9월 24일 주일[(녹) 연중 제25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9월 24일 주일[(녹) 연중 제25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5주일입니다. 의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맨 나중에 온 일꾼에게도 맨 먼저 온 일꾼과 똑같은 품삯을 주십니다. 아버지의 길은 우리의 길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에 스며 있는 지혜에 마음을 열게 하시어,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의 포도밭에서 일한 수고가 헤아릴 수 없는 영예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시다.

입당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5,6-9
6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7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9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5(144),2-3.8-9.17-18(◎ 18 참조)
◎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 나날이 당신을 찬미하고,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 그분의 위대하심 헤아릴 길 없어라. ◎
○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
○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

제2독서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1,20ㄷ-24.27ㄱ
형제 여러분,
나는 20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21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2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24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27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사도 16,14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 알렐루야.

복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구원자이신 주님, 주님의 포도밭인 교회를 굽어보시어, 모든 이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시는 주님처럼, 누구에게나 주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2. 공직자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의로우신 주님, 국가의 일꾼인 공직자들을 살펴 주시어, 법과 제도에 담긴 뜻을 올바로 새기며, 말과 행동을 삼가고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3. 세계 이주민과 난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보호자이신 주님, 수많은 이주민과 난민들을 굽어살피시어, 그들이 자신의 나라에 남아서 공동선에 함께할 가능성,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권리, 지속 가능한 발전을 영위할 권리를 잃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4. 본당 사도직 단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은총의 샘이신 주님, 본당 사도직 단체에 강복하시고 이끌어 주시어, 언제나 굳건한 믿음으로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며 이웃과 사회의 복음화를 위하여 힘쓰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저희가 경건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천상 성사로 깨닫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7 : 그리스도의 순종과 우리의 구원>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더없이 사랑하시어
그리스도를 저희에게 구세주로 보내 주시고
죄 말고는 저희와 똑같은 처지에서 살게 하셨나이다.
그리하여 성자를 사랑하셨듯이 저희를 사랑하시고
저희가 순종하지 않아 죄를 지어 깨뜨린 계약을
성자의 순종으로써 다시 맺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119(118),4-5 참조
주님은 규정을 내리시어 어김없이 지키라 하셨나이다. 당신 법령을 지키도록 저의 길을 굳건하게 하소서.
<또는>
요한 10,1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영성체 후 묵상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주님께서는 오후 다섯 시가 될 때까지 아무도 사 가는 사람이 없어 장터에 서 있는 일꾼을 불러 포도밭에서 일하게 하시고, 품삯을 후하게 주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는 일꾼이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성체로 저희에게 힘을 주시니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삶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포도밭 일꾼들의 비유(렘브란트)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25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 다 갚을 수도 없고, 갚았다고 믿어서도 안 되는 한 데나리온의 가치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그 비결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비유 말씀은 포도 밭 일꾼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주인은 한 데나리온으로 약속하고 아침 아홉 시, 열 두 시, 오후 세 시, 다섯 시에도 일꾼들을 불러 모읍니다. 다섯 시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는 하루 종일 일한 일꾼들이 자신들은 더 많이 받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 밖에 받지 못하자 투덜댑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는 가장 낮은 종이 되어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오늘 하루 종일 일한 종들처럼 자신들이 주인에게 더 해 주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 데나리온’의 가치입니다. 우리가 받는 한 데나리온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이르게 만드는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일만 탈렌트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일만 탈렌트로 죄가 용서 받았습니다. 일만 탈렌트의 가치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가죽 옷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자신을 그리스도라 할 수 없고 그러면 주님 앞에 나설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많은 것을 드린다고 착각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체 성혈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양이 우리에게 주는 빛에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처지가 연꽃의 씨에 불과함을 알면 됩니다. 연꽃 씨는 물 밑 진흙 속에 묻혀있습니다. 그것이 스스로 자신을 깨고 나올 힘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태양의 따사로움이 그 씨앗에 전달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안다면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 때 연꽃이 어떻게 태양에게 더 많은 것을 준다고 착각할 수 있을까요? 

 

    MBC의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 배우 박철민 씨가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 한없이 오열 하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왜 슬플까요? 더는 어머니가 자신이 보답해드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어 안타까운 것이 아닐까요? JTBC의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그는 요리사가 재현해낸 어머니의 음식을 맛보고도 눈물을 흘립니다. 이미 저세상에 계신 어머니의 은혜에 더는 보답해드릴 수 없다는 것이 슬픈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교만한 일꾼들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한 데나리온보다 더 일을 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한 데나리온의 값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 없는 가치입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라 믿게 해 준 하느님 피의 값입니다.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 데나리온이 없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될 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지옥에 다녀오게 된 것이 자신을 가장 많이 변화 시켰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마땅히 가야 할 지옥에서 건져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다만 한 명이라도 지옥에 가지 않게 하도록 수천 번 죽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하루 종일 일해도 언제나 그 한 데나리온에 보답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것을 겸손함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다 갚을 수도 없지만, 이미 다 갚았다고 믿으면 더 큰 일입니다. 

제가 신학교 때 들은 말 중에 “사제가 되려고 하지 마라!”였습니다. 사제가 되고 나면 더는 할 게 없어서 이제 누리려고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술이나, 여자, 돈이나 비싼 차, 돈 많이 드는 운동이나 여행 등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내심 ‘내가 사제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제로 불러주신 분께 감사하기 위해 사제가 아닌 성인 사제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돈키호테를 쫓아다니는 산초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아무 이익도 없지만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알돈자가 그에게 왜 얻는 것도 없는데 그런 이상한 노인을 쫓아 다니느냐고 할 때 산초는 노래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받은 한 데나리온 때문에, 곧 우리가 받은 정체성 때문에 그 피에 대해 한없이 기뻐하며 영원히 찬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좋으니까~그냥 좋으니까~. 나의 털을 몽땅 뽑는데도 괜찮아~. 오 묻지 마요, 이유가 뭔지~. 그런 건 눈을 씻고 잘 봐도 없다오~. 발가락을 썰어서 꼬치구이를 한대도, 꼬집고 할퀴고 물리고 뜯겨도 하늘에 외치리. 나는 주인님이 그냥~좋~~아! ~~~ ”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5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교황청 성직자 성 장관인 유흥식 추기경님의 소개로 삼성전자는 바티칸 광장에 전광판을 세우기로 했다고 합니다. 20년 전에 일본의 파나소닉에서 전광판을 설치했는데 많이 낡았습니다. 유흥식 추기경님은 삼성전자의 이재용 회장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전광판 이야기를 하였고, 삼성전자는 기꺼이 바티칸 광장에 전광판을 설치하고, 음향 시설도 설치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전광판 설치가 끝나면 삼성전자의 임원들이 교황님을 알현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전광판과 음향 시설 설치는 많은 비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삼성전자가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광고효과가 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매년 바티칸에는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합니다. 교황청에서 주관하는 행사가 전 세계에 중계 될 때도 삼성전자의 전광판은 자연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바티칸 광장에 전광판을 세우려는 회사는 많을 것입니다. 그만큼 광고효과가 크기 때문입니다. 바티칸에 설치되는 전광판은 교황청에게 도움이 되지만 삼성전자에게도 영광이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물은 정화와 회개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군중은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물었을 때 세례자 요한은 가진 것을 나눠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세리들은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물었을 때 세례자 요한은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군인들은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물었을 때 세례자 요한은 아무에게도 강탈하거나 갈취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찾아서 요르단 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청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정화와 회계의 상징이었던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죄의 사함을 받는 성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이 거룩해 졌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정한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이주민과 난민은 정든 고향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꿈과 희망을 찾아 떠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이주민과 난민을 차별하지 않고 가족처럼 맞이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주민과 난민을 박해하지 말고 환대하여라. 너희도 한 때는 이집트에서 이주민과 난민으로 살지 않았느냐?” 제가 살고 있는 미국은 이주민과 난민이 세운 나라입니다. 가뭄과 굶주림을 피해 유럽에서 사람들이 이주민으로 왔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마음에 담고 아프리카에서 노예가 들어왔습니다.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아시아에서 사람들이 이주민으로 왔습니다. 저 역시도 교구의 명을 받들어 이주민으로 왔습니다. 이주민과 난민은 거추장스러운 짐이 아닙니다. 이주민과 난민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교황이 된 후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람페투사입니다. 람페투사는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유럽으로 들어오는 관문입니다. 교황님의 방문이 있은 후에 유럽은 난민들에게 더 많은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재능이 아닙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학벌과 혈연이 아닙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재산과 업적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그것만으로도 대접을 받고, 풍족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과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자캐오의 나눔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셈법은 우리의 셈법과 다릅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강하다는 사람은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루카 8,5)

 
오늘 우리가 들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그 해설까지도 직접 해주셨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씨”와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시며,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씨 뿌리는 사람은 그 길바닥이나 바위나 가시덤불이나 좋은 땅이거나 땅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느 곳에나 씨앗을 뿌립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씨앗도 그 영혼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느 누구에게나 뿌려집니다. 마치 “아버지께서는 악한 이에게나 선한 이에게나 똑같이 햇살을 비추시고 옳은 이에게나 옳지 못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듯이”(마태 5,45)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같은 씨앗’이 뿌려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이요, 그 씨앗은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요, 그리고 그것은 선사된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동시에 우리에게 씨앗을 틔워 결실을 맺어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는 말씀을 실현해야 할 소명, 곧 사랑을 실현해야 할 과업을 짊어진 존재들임을 말해줍니다.
 
<둘째>는 “땅” 혹은 “밭”에 대한 것입니다. 좋은 씨가 좋은 열매를 맺듯, 열매는 씨앗에 따라 수확량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어느 밭에나 동일한 ‘같은 씨’가 뿌려졌습니다. 그러니 수확량은 ‘씨앗’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땅의 차이에서 오게 됩니다.
 
이는 씨앗이 싹을 잘 틔우도록 ‘땅을 일구는 일’과 잎이 잘 자라고 꽃이 잘 피어나고 열매가 잘 맺도록 ‘나무 자체를 잘 돌보는 일’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귀 기울임과 응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죽어야 맺는 과정이요, 자신이 죽어서 타인을 먹여 살리는 열매가 되는 과정입니다.
 
<셋째>는 “결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실은 자신을 떠나 타인을 위할 때만 타인 속으로 들어가 썩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곧 자신을 내어주어야 그 열매를 맺는 이 과정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더불어 바로 이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 구원의 협조자요 도우미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로의 구원에 공동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동반자요, 동행자들 입니다. 결국, 말씀의 씨앗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 가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이 됩니다. 말씀이 열매 맺어가는 자리요 거처가 됩니다. 따라서 내 형제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내 가정, 내 공동체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할 인인지요!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루카 8,5)

주님!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뿌리신 말씀의 씨앗을 일구게 하소서.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하소서.
형제들 가운데 당신 사랑 번져가고, 세상이 거룩해지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

 

 

"너희 안에 새 마음을 넣어주고,

 너희 가운데 새 얼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리라."(에제36,26)

 

오늘은 오상의 비오라 불리는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입니다. 이탈리아의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사제로 평생 병고중에도 만81세까지 장수한 성인입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1997년 비오 신부를 가경자로, 1999년에는 복자로 선언하고, 이어 2002년 6월16일에 성인으로 시성합니다. 마지막 감동적인 임종 장면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1968년 9월23일 이른 아침에 비오 신부는 마지막 고해성사를 보고 서약갱신을 하였다. 비록 더는 기도문을 암송할 기력이 없었지만,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묵주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비오 신부는 “예수, 마리아”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말하였다. 새벽 2시30분경 비오 신부는 “나는 두분의 어머니를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말한 두 어머니란 그의 생모와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새벽 2시 30분 비오 신부는 침상에 누운채 “성모님!”하고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선종하였다.’

 

마지막 임종어가 “성모님!” 이었으니 말그대로 기도의 사람, 성 비오 사제였으며 이 임종어 안에 성인의 전 생애가 압축되어 있음을 봅니다. 오상의 비오 대신 고통의 비오 성인으로 불려도 좋을 만큼 성인의 어록에도 유난히 눈에 띄는 말마디가 고통입니다. 성인에게는 고통이 일상이었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과 역경은 그대를 십자가 밑에 있게 하고 천국의 문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거기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그대를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지만 고통을 슬기롭게 당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고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천사가 우리에게 부러워하는 것은 딱 한가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고통만이 한 영혼에게 이렇게 말할 자격을 줍니다. ‘나의 하느님, 보십시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아픔과 불편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완전하고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을 사랑할수록 그대는 희생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준비해야 합니다.”

“위대한 영혼들에게 아픔은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흡사 고통 예찬처럼 들립니다. 그대로 평생 파스카의 삶에 충실했던 고통의 성인 비오 사제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보물이 바로 무수한 성인들입니다. 기억하고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각자 고유의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참으로 우리 ‘성화聖化의 여정’중에 끊임없는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우리 삶의 좌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여정에 희망과 용기, 힘을 주는 성인들입니다.

 

삶은 ‘노화老化의 여정’이 아니라 ‘성화聖化의 여정’이요, 저물어가는 여정이 아니라 여물어가는 여정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한결같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진인사대천명의 삶으로 요약되는 진선미眞善美, 신망애信望愛의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설명이 이런 성화의 여정에 참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복음 중간에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고 외치시며 참으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깊이 경청할 것을 촉구합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문득 떠오른 두 말마디입니다.

 

“절망은 없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말이 절망입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즐겨 썼던 말마디입니다. 또 하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보면 떠오르는 것이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가 지은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작은 소설입니다. 

 

씨뿌리는 사람, 나무를 심은 사람, 한결같이, 끊임없이 자기 삶에 충실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상황이나 환경에 일희일비, 경거망동하지 않고 한결같이 제 삶의 자리에 죽기까지 충실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주변을 잘 살펴보면 이런 평범한 일상의 성인들은 곳곳에서 빛처럼 세상을 밝히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씨뿌리는 사람,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결코 주변 상황에 좌절하거나 절망함이 없이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순탄대로 마냥 좋은 땅만의 삶일 수는 없고, 때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상황이나 환경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은 지속적 고통의 삶, 간헐적 기쁨의 삶, 바로 이것이 현실입니다. 노년을 보면 거의 병마와의 싸움, 말그대로 고해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살아내는 것이 씨뿌리는 사람의 삶입니다. 바로 예수님, 성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매사 하느님 중심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주님과의 관계는 날로 깊어질 것이요 어디선가 좋은 땅에서는 무럭무럭 신망애 삶의 열매들이 익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입니다. 배밭 둥글둥글 환하게 익어가는 배열매들처럼 우리 신망애의 열매도 잘 익어가고 있는 지요?

 

진인사대천명,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매순간 깨어 오늘 지금 여기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바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 부족을 탓하듯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이도 하느님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 부족을 탓합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해설이 이런 진리를 입증합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문제가 아니라 씨가 뿌려지는 토양이, 바로 내 마음 밭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앗이 좋아도 내 마음 밭이 길바닥 같거나, 바위와 같거나, 가시덤불 같으면 도저히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바라는 바 다음과 같은 결과일 것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래서 좋은 땅의 마음밭은 만들기 위한 부단한 영성훈련을 통한 습관화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말씀을 맛들이고 체화시키는 렉시오디비나 성독의 영적훈련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은총은 물론 한결같은 수행 덕목들의 훈련과 습관화가 우리 마음 밭을 옥토의 좋은 땅으로 바꿉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박토도 좋은 땅으로 바뀝니다. 

 

영구불변의 좋은 땅도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방치하면 곧 잡초밭이 될 것입니다. 정말 요즘 사람들은 마음 관리를 너무 소홀히 합니다. 보이는 몸 건강 관리, 얼굴 관리, 몸매 관리, 피부관리, 재물관리 등 외적 관리에 몰두할 뿐 보이지 않는 마음 관리에는 너무 소홀하니 생화가 아니라 향기없는 조화같습니다. 얼굴은 천사인데 마음은 괴물인 경우도 꽤 많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사랑과 정의의 실천을 통한 내적 마음 관리, 영성 관리가 정말 필요한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세속주의 시대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씨뿌리는 삶에 충실할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좋은 땅 마련에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씨뿌리는 신망애信望愛의 삶에, 성화聖化의 여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은총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이뤄주십니다.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 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1티모6,14-16). 아멘.


9/24(일) 연중 제25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되새김 구절

 

9/24(일) 연중 제25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제274일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