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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9월 23일 토요일[(백)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9월 23일 토요일[(백)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알려진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풀리아의 산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에서 사목적 열정으로 봉사 직무에 헌신하면서, 신자들의 영성을 지도하고 참회자를 화해시켰으며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보살피고 기도와 겸손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섬겼다. 그는 1918년부터 196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상처를 온전히 몸에 지니고 고통을 느꼈다.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입당송

시편 132(131),9 참조
주님, 당신의 사제들이 의로움의 옷을 입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환호하게 하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특별한 은총으로
거룩한 비오 사제를 성자의 십자가에 참여하게 하시고
그의 사제 직무를 통하여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새롭게 베푸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를 그리스도의 수난에 결합시키시어
빛나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6,13-16
사랑하는 그대여, 13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대에게 지시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15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16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0(99),1-2.3.4.5(◎ 2ㄴ 참조)
◎ 환호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라.
○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 ◎
○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
○ 감사하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하며 그분 앞뜰로 들어가라.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 찬미하여라. ◎
○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그분 자애는 영원하시며, 그분 진실은 대대에 이르신다. ◎

복음 환호송

루카 8,15 참조
◎ 알렐루야.
○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4-15
그때에 4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5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6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9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1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1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12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3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14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갈라 2,19-20)와 복음(마태 16,24-27)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거룩한 신비로 복된 비오를 영광스럽게 하셨으니
그를 기억하여 주님의 제대에 바치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고
저희에게 용서와 평화를 베풀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마태 24,46-47 참조
행복하여라, 주님이 돌아와 보실 때에 깨어 있는 종! 주님은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기시리라.
<또는>
루카 12,42 참조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비오를 기리며 받아 모신 천상 음식으로 저희가 힘을 얻어
믿음을 온전히 간직하며 구원의 길을 충실히 걷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저는 사제가 된 후에 몇 가지를 배웠습니다. 스키, 스킨 스쿠버, 피아노입니다. 모두 정식으로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깨 너머로 배우고, 혼자서 배우고, 시간나면 배우고 그랬습니다. 그래서인지 시간은 오래 되었지만 모두가 발전이 없었습니다. 스키는 91년에 배웠으니 32년이 되었습니다. 스킨 스쿠버는 95년에 배웠으니 28년이 되었습니다. 피아노도 2009년에 배웠으니 14년이 되었습니다. 스키는 아직도 겨우 내려오는 수준입니다. 스킨 스쿠버는 기록이 중요한데 기록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피아노는 겨우 건반을 만지는 수준입니다. 제가 이렇게 시작은 했지만 결실을 제대로 맺지 못하는 것은 기초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의욕은 있지만 제대로 연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창 중에는 시작하면 끝을 보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스키를 배우면 강사 자격증을 딸 때까지 배웁니다. 기타를 배울 때도 노래만 들으면 반주할 수 있을 만큼 배웁니다. 스킨 스쿠버도 강사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저와 같이 시작했지만 동창 신부님이 다른 것은 기초부터 배우는 것이고, 아낌없이 비용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았지만 몇 번 주일미사에 참례하다가 그만 포기합니다.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의지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기 위해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수영을 하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듯이, 세례를 받아 신앙생활을 하려면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면 포기합니다. 본당 신부님의 사목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단체에서 친하게 지내던 이웃과 의견 충돌이 생긴 뒤로 포기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했는데 시련과 고난이 사라지지 않아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결실을 맺기도 합니다. 사람을 믿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믿습니다. 본당의 피정과 교육은 빠짐없이 참석합니다. 어떤 단체든지 가입하면 단체를 발전시킵니다. 교리신학원에 등록해서 교리교사 자격증도 얻습니다. 같은 날 세례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생활의 모습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결실을 맺는 방법을 이야기 합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는 사람,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마저 대주는 사람,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 주는 사람, 조롱하고 멸시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들이 좋은 결실을 맺는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미친 짓일 수 있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가는 부활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고 합니다. 공동체에는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봉사의 씨를, 어떤 분은 나눔의 씨를, 어떤 분은 희생의 씨를, 어떤 분은 사랑의 씨를 뿌렸습니다. 공동체에는 그 씨들을 키우고 관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목회, 구역장, 반장, 레지오 단원, 각 단체의 봉사자들입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랑의 정원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거름을 줄 때, 우리가 나눔의 물을 줄 때, 공동체는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시련의 바람이 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비가 내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갈등과 아픔의 시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가장 큰 계명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9월 23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열정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불순물들을 태워버리는 불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인이 되기 위해 강한 자기 통제력은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도한 열정이 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정 역시 성덕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열정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전환된 것이어야 합니다.

영적 열정 안에는 성덕으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영적 열정 안에는 악습과 편견을 물리치기 위한 강력한 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정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불순물들을 태워버리는 불꽃이기도 합니다.

성인들은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열정,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욕구들과 에너지들을 더 가치 있는 곳에

사용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아주 특별한 성인이 한분 계십니다.

피에트릴치나(Pietrelcina: Pietra-돌-이란 단어의 애칭, '작은 돌'이란 의미)의 비오 신부님입니다.

사람들은 이분을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말마디 그대로 쓸모없는 돌밭 투성이뿐인 가난하고 척박한 농촌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1903년 카푸친 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로 서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추종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깜짝 놀랄 일이 그에게 발생했습니다.

 

1918년에 그는 예수님처럼 오상을 받게 됩니다. 놀랍게도 상흔은 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오상으로 인해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으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자 교회당국에서는 그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1923년부터 그는 공적 성무 활동이 정지되어 작은 수도원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오상을 받으신 후 매일 흘렸던 혈액의 양은 대략 찻잔으로 하나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질문했습니다. “신부님, 얼마나 아프세요?”

“보십시오. 굵고 네모 난 못을 손에 대고 망치로 힘껏 때려 박은 다음에 그 못을 뺑 돌려보십시오.

꼭 그만큼 아파요.”

 

그는 오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한 그 50년 동안 골고타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을 똑같이 느꼈습니다.

오상으로 인한 영광과 기쁨도 컸겠지만 오상으로 인해 그분이 매일 받았던 고통은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오상을 통해 매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생생하게 묵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성화의 길로 이끌고자 했던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비오 신부님은 종종 사람들에게

큰 영적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해자 각자를 다르게 다루었습니다.

 

때로 고백성사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 그저 호기심에 한번 찾아온 사람들,

중요한 죄를 고의적으로 빠트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거칠고 엄한 어조로 꾸짖으셨습니다.

때로 고백소에서 내쫒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뉘우치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다정하게 팔을 펼쳐 사랑스런 아들을 맞이하듯이 인사했습니다.

고해가 끝난 후에도 이런 말로 작별인사를 건넸습니다.

“잘 가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대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922.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시중드는 여인들 이었습니다”(루카 8,3).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쁜 소식”이요, “하늘나라”의 선포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여러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십니다.”(루가 8,1).
 
그런데 이러한 일에 홀려 숙식을 같이 하며, 온갖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따라다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열 두 제자과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시중드는 여인들 이었습니다”(루카 8,3).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되고 싶어 하를 선망하고 따라 다닙니다. 정치가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정치꾼들을 따라다니고,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이는 장사꾼들을 따라 다니며, 주먹 잡이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싸움꾼들을 따라 다닙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이는 구원자를 따라다니었으니,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은 다양한 직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모두가 구원과 구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믿을 뿐만 아니라, 믿는 바를 위해 투신하고 헌신한 이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들이 믿는 것에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앙드레 루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그분께 바침으로써, 그분의 부르심에 전 인격으로 따르고 온 마음으로 섬기며 시중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단지 고향이나 집 혹은 부모형제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마저도 버렸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바쳤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몸과 소유물 혹은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재능과 자신의 뜻마저도 바쳤다는 것이요, ‘온 마음을 다해 따르고 시중들었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만으로 따르는 것을 너머서 자신의 정신과 뜻을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여섯 개의 동사로 표현해줍니다. 곧 우리에게 ‘제자 되는 길’을 여섯 개의 동사를 통해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함께 있다”, “함께 다니다.” “따르다”, “선포하다”, “전하다”, “시중들다.” 라는 동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첫째>로 ‘주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기도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둘째>로그들은 그저 함께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다녔습니다.” 어디를 가든 주님과 함께 다니는 이들이요, 주님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이들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그토록 그분을 ‘주님’으로 추종하며, 실행으로 “따랐고”, <넷째>로 그분을 따라 그분께서 선포하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였고”, <다섯째>로 복음을 “전했으며”, <여섯째>로 주님께서 하신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주님께 봉사하고 “시중들었습니다.” 자신의 정신과 힘을 다해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하여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시중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이 여섯 가지의 ‘제자 됨’의 특성이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 들여다봅니다. 특별히, 순교의 달을 보내면서, 먼저 예수님을 전 인격으로 따를 수 있는 은총, 곧 “예수님께 사로잡힌 자”임을 증거하고 순교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해야 할 일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은 이것을 할 수 있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니, 주님께서 당신 은총으로써 우리를 도와주시도록 간구하자.”(규칙서 머리말 4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루카 8,1)
 
주님!
제가 믿기에, 늘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이미 저를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로 당신을 따를 것이며,
사랑으로 시중들고 당신이 하신 일을 할 것이며,
당신께 사로잡혀 당신이 원하신 바를 행할 것입니다.
늘 저와 함께 계시는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며,

마땅히 당신이 사랑하시는 작은이들을 당신과 함께 사랑할 것입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중심, 비전, 치유, 섬김-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51,12)

 

"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리 없으리라."(시편55,23)

 

오늘 루카복음은 3절까지로 짧고 참 특이합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도우며 그 일행을 따라 다닙니다. 당시 여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바로 곁에서 추종하는 일은 팔레스티나에서 매우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크게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만 그런게 아니라 오늘날도 이런 남자들과 여자들이 혼성된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주위의 시선들을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통해 공동체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을 “선교 여정중인 교회 공동체 삶의 기본 원리들”로 했고, 그 원리들은 “비전, 중심, 치유, 섬김”으로 나눠봤습니다. 연상되어 떠오른 것이 9년전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었습니다. 순례 여정중 저절로 남성과 여성들의 혼성 공동체가 이뤄졌고 숙소에서도 함께 했었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비전과 목표가 뚜렷했기에 국적, 인종, 언어, 성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순수했고 일치된 모습이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산티아고 순례”라는 목표로  순수한 마음이 하나로 통하니 저절로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의 공동체요, 서로 마음이 통하니 시종일관 따뜻하고 부드럽고 평화로운, 서로 돕는 우호적인 분위기였습니다.

 

함께 모였다고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가 바라보는 비전과 중심이 선명하고 새로울 때 비로소 참된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공동체나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 역시 그 비전과 중심은 한결같이 똑같습니다. 바로 다음 복음의 첫절에서 중심과 비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바로 공동체의 중심은 “예수님”이요 비전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예수님 중심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그 공동체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이런 중심과 비전이 뚜렷했기에 복음 선포의 선교 공동체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음을 봅니다. 이미 선교는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순례 여정중의 남성과 여성의 혼성 선교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모두가 바라보는 일치의 중심인 예수님의 뚜렷한 존재와 하느님 나라의 생생한 비전이 공동체 삶의 핵심적 요소가 됨을 봅니다. 이는 우리 수도공동체는 물론 미사봉헌하는 교회공동체를 통해서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우리는 일치의 중심인 파스카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현실화합니다. 

 

말그대로 미사전례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요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됩니다. 새삼 우리 역시 순례 여정중인 선교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열두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뒤따른 치유의 은총입니다. 이런면에서 미사전례보다 우리의 치유에 도움에 되는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힐링의 가톨릭 교회요 힐링의 가톨릭 교회 전례라는 것입니다. 정말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하느님 나라의 체험과 더불어 영육의 치유, 힐링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중심”과 하느님 나라의 “비전”의 실현과 더불어 “치유”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치유에 이은 “섬김”입니다. 치유를 완벽하게 보완하는 섬김의 활동입니다. 메타노니아 회개에 이은 코이노니아 친교, 그리고 마지막 정점을 이루는 것이 디아코니아 섬김입니다.  예수님과 열두제자의 선교활동이 원활할 수 있음은 치유받은 부인들의 한결같은 충실한 섬김 때문임을 다음 복음 마지막 대목이 입증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이에 대한 주석을 소개합니다. 때로 수도원 주방 봉사하는 자매들을 연상하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시중들었다는 것은 주로 음식을 대접했다는 뜻이다. 부인들이 예수님 일행을 따라다닌 것은 당대 관습을 고려할 때 파격적이다. 사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서는 남녀가 공공연히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들을 스스럼없이 대하셨다.’ 

 

일체의 스캔들 없이 참으로 남녀 모든 제자들 공동체의 일치의 중심이었던, 예나 이제나 일치의 중심을 이루시는 파스카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로 이런 일치의 중심이신 주님의 은총이 공동체 성장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티모데오 1서는 건강한 교회공동체 형성에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되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해져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시기와 분쟁, 중상과 못된 의심과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갑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체험이지만 주님의 진리를 벗어나 이단에 빠질 때 겪는 어려움이요 역시 초대교회 바오로 사도의 체험을 반영합니다. 

 

둘째, 자족할줄 아는 신심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바오로 일행의 세상사에 초연한 참 자유로운 이탈의 모습들입니다. 예수님 중심과 하느님 나라의 비전에 충실할 때 저절로 무욕의 초연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음이요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거의 해당되지 않지만 세상에서 살아가는 교회공동체 형제자매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충격적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이며, 돈을 따라 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며 많은 아픔을 겪습니다. 예나 이제나 돈 욕심을 자제함이 참으로 영적 건강에 절대적임을 봅니다.

 

넷째 충고가 최종적이요 결정적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 칭하며 바른 삶을 권하는 내용이 좋아 그대로 인용합니다. 바로 비오로 사도가 티모테오는 물론 교회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유익한 가르침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역시 우리 신자들의 신원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용사(勇士)들”임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고, 그 대신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하게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1티모6,11-12ㄱ). 아멘.


9/23(토)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되새김 구절

 

1.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가장 큰 계명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영적 열정 안에는 성덕으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영적 열정 안에는 악습과 편견을 물리치기 위한 강력한 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루카 8,1)
 
주님!
제가 믿기에, 늘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이미 저를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로 당신을 따를 것이며,
사랑으로 시중들고 당신이 하신 일을 할 것이며,
당신께 사로잡혀 당신이 원하신 바를 행할 것입니다.
늘 저와 함께 계시는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며,

마땅히 당신이 사랑하시는 작은이들을 당신과 함께 사랑할 것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우리 신자들의 신원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용사(勇士)들”임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고, 그 대신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하게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1티모6,11-12ㄱ). 아멘.(이수철 신부)

 

 

9/23(토)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제273일 기도

 

복음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고,

그 대신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하게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아멘.

 

2023년 9월24일(일) 4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