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9월 30일 토요일[(백)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때에 열매를 맺으리라.
본기도
복된 예로니모 사제에게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맛들이게 하셨으니
저희도 하느님 말씀에서 생명의 샘을 찾고 구원의 양식을 얻어
더욱 풍요로이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2,5-9.14-15ㄷ
5 내가 눈을 들어 보니, 손에 측량줄을 쥔 사람이 하나 있었다.
6 내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 그가 나에게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러 간다.” 하고 대답하였다.
7 그때에 나와 이야기하던 천사가 앞으로 나가자,
다른 천사가 그에게 마주 나와 8 말하였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일러 주어라.
‘사람들과 짐승들이 많아 예루살렘은 성벽 없이 넓게 자리 잡으리라.
9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 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먼 바닷가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이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지켜 주시리라.” ◎
○ 정녕 주님은 야곱을 구하셨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네.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산에 올라와, 주님의 선물을 받고 웃으리라. ◎
○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43ㄴ-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2티모 3,14-17)와 복음(마태 13,47-52)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저희가 복된 예로니모를 본받아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구원의 제물을 바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 하느님, 당신 말씀을 찾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복된 예로니모를 기리며 성체를 받아 모시고 기뻐하오니
주님을 믿는 저희의 마음을 북돋아 주시어
거룩한 가르침을 깨닫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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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함 승수 신부님 rkdfhs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 루카 9,43ㄴ-45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대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스님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습니다. 절망에 빠진 스님이 스승님을 찾아가 하소연하자, 스승님은 그에게 이런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빨리 가느냐 좀 늦게 가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말고 남은 시간을 후회없이 사는데에만 집중하거라.” 이 말에 용기를 얻은 스님은 자신이 ‘시한부 환자’라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고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열정적으로 살고 계신다고 합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사는게 중요할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앞으로 겪으시게 될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겁니다.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자기들이 그분께 걸었던 모든 희망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인데, 당신이 고통을 겪고 죽임을 당하신다고 하시니 자기들을 저버리는 것 같은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무책임하게 느껴져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저버리고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시려는게 아닙니다. 그들이 지향해야 할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려는 겁니다. 죽음을 ‘실패’나 ‘절망’으로 여기고 그저 피하려고만 들어서는 삶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제대로 누리기 어렵지요. 편안하고 안전한 지금이 언제까지나 이어지기를 바라는 헛된 꿈을 품기보다, 죽음이 언제 덮쳐오든 후회가 남지 않도록 ‘지금’을 주님 뜻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 ‘구원의 진리’는 머리로 이해하기도, 마음으로 납득하기도 어렵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머리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묻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머리로 제대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완전히 납득한 뒤에야 따르려고 드는건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지요. 주님 말씀과 신앙의 진리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속한 것이니, 어차피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자세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 말씀을 먼저 실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분이 품고 계시는 뜻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말씀 자체가 아니라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일단 그분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삶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걸어야 할 길이지요. 나를 이끄시는 주님을 믿고 우직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보면 주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사랑의 섭리 속을 거닐게 될 겁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정민 교수님의 "조선 초기 교회의 신앙 활동과 교회조직"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국 천주교 교회사가 시작 될 수 있었던 것은 2개의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입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성장 그리고 순교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프랑스 파리의 외방 전교회로 보냈습니다. 다른 하나는 다블뤼 주교님의 ‘비망기’를 토대로 기록한 달레 신부님의 ‘한국천주교회사’입니다. 달레 신부님은 한국에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다블뤼 주교님의 생생한 기록을 토대로 방대한 ‘한국천주교회사’를 기록했습니다. 교회의 시작 당시 조선의 정치, 문화, 사회에 대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선교사 없이 시작된 교회의 시작과 성장을 기록이 있었습니다. 혹독한 박해와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기록하였습니다. 다블뤼 주교님과 달레 신부님의 기록이 있었기에 ‘한국천주교회’는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기록의 있었기에 우리는 103위의 성인과 124위의 복자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다블뤼 주교님과 달레 신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진리를 향한 신앙의 등불을 밝혔던 선조들을 따라 우리들 역시 신앙의 등불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강의 후에 ‘질의응답’시간이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한국보다 천주교가 먼저 들어왔지만 지금 중국과 일본의 교회는 한국보다 신자도 적고, 활동이 미약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교수님은 한국인의 독특한 ‘심성’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불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입니다. 신라와 고려는 불교를 ‘호국불교’로 여겼습니다. 국가의 어려움을 불교의 힘으로 이겨내려고 했습니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를 중심으로 한 주변 9개 국가를 제압한다는 의미에서 건립되었습니다. 신라는 이런 불교의 힘을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힘으로 원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려고 하였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인류의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유교의 ‘성리학’도 비슷합니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은 성리학의 자리를 ‘양명학’이 대신하였지만 조선은 성리학의 가르침을 고수하였습니다. 그런 성리학은 새로운 사상인 ‘서학’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천주교회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의 지식인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서학 곧 천주교회 역시 오랜 박해를 견디면서 성장하였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순교의 역사를 지닌 역동적인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한국인이 가진 독특한 ‘심성’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독특한 한국인의 심성이 21세기 산업화를 빠르게 이룩한 ‘동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병중에 있는 가족, 믿었던 친구의 배신, 자녀의 방황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받아들이되, 하느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의 길입니다. 절망 중에서도 꽃이 피는 희망의 길입니다. 배반한 사람을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는 믿음의 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 옳은 일에 주리고 굶주린 사람이 행복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주고,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는 속옷까지도 내어주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씨앗 하나가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겠지만 썩어서 싹이 나면 수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박해를 받기도 하겠지만 끝가지 믿고 참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했던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를 받아들였고,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아래 조용히 뿌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그 피는 열매를 맺었고, 교회가 되었습니다. 순교자 성월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이 오늘 나의 삶으로 되살아 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929. 한가위.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휘영청 밝고 아름다운, 축복 가득 찬 한가위 되셰요.
오늘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입당송>에서는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라고 노래합니다.
<본기도>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또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고 노래하고, <제2독서>에서는 때가 될 때, 구름 위에 앉아계시는 분이 땅 위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들려주며, <복음 환호송>에서는 “뿌릴 씨 울며 들고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것, 곧 생명이 재물에 달려 있거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인류역사는 베풂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창조와 축복과 선사로 시작된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베풀어졌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외아드님을 건네주심으로 구원을 베풀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은총에 은총을 덧입은 이들입니다. 또한, 지금도 우리가 만난 모든 것들 안에서 저희와 동행하시며 승리로 이끄시는 당신의 사랑을 베푸십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부자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비유 안의 이 “어리석은 자”(αφρων: 정신없는 자, 무분별한 자)인 부자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마치 자기 손에 있는 것인 양 “여러 해”를 계획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는 것을 통해, ‘탐욕과 집착’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이는 ‘재물’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와 의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재물에 집착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자신만의 것인 양 여기고 이웃들에게는 무관심하고, 마치 자신이 자기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인 양 착각하고 오만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
곧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루카 12,21)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재물임을 깨닫고 되고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하늘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사람”(루카 12,33) 입니다. 묘하게도,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유당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게 되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게 되어 ‘전부’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성모 마리아께서 주님의 소유가 되면서 주님을 소유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가지게 되면 ‘전부’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입니다.”(안토니오 더블유). 그러니 자신의 ‘재물’보다 ‘자신의 영혼’을 관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재물을 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의 재물인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소유당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꽉 찬 보름달처럼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꽉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내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놀라우신 일을 하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이기도 합니다. 천사들이 늘 우리를 돌보며 동행하심에 감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바로 내 곁에, 내 동료로 , 내 가족이 나의 천사들임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천사로 와 있는 라파엘 수사님께도 감사와 축하를 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주님!
탐욕의 온상지인 제 자신을 경계하게 하소서.
제 곳간이 아니라, 당신 곳간에 희망을 두게 하소서!
제 곳간이 비워지고 , 당신 곳간이 채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비워지고, 당신 뜻의 거룩함을 이루소서.
주님, 당신 안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부유하고 자유로운, 지혜로운 삶-
"한가위를 맞이하여 오곡백과를 지어내신
주님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우리 요셉 수도원 수도자들은 새벽기도시 초대송 후렴을 힘차게 노래함으로 "한가위"를 활짝 열었습니다. 추석을 앞둔 어제 우리 수도형제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 주님곁에 간 세 수도형제들, 김 마인라도 수사, 이 바오로 수사, 정 요한 세례자 수사를 위해 연도를 바쳤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 가을부터는 수확의 계절이자 기도의 계절입니다. 오늘은 4천만이 움직인다는 한국인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 추석이자 축일미사는 봉헌하지 않지만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세 분 천사들 축일이니 참 경사스런 날입니다. 오늘도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성호경과 주모경을 바친후 만세육창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힘이 샘솟습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여러분은 6째 항목에 “우리가정 만세!”를 넣어 바쳐도 좋겠습니다. 양손을 번쩍 치켜올려 만세육창하며 기도하면 영육의 건강에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8월 중순부터 9월 순교자 성월은 하루하루 만세육창으로 시작했습니다.면담성사차 집무실을 찾는 분들은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을 받았고, 이어 하느님 사랑하는, 나라 사랑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애국가 1절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참으로 기도로 시작하는 하루,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소통의 관계를 깊이하는데 기도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기도는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기도해야 인간 본연의 존엄한 품위를 지닌 참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전쟁 치열한 광야인생여정중 누구나 악마나 괴물, 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태고적 예전부터 하늘님을 믿었고 평화를 사랑한 백의민족(白衣民族)이었고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숭고한 하늘나라 이상을 실현해온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문화 민족이었습니다. 오늘 한가위 미사전례중 입당송과 본기도가 참 좋습니다.
*입당송: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하느님,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
*본기도: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조상을 공경하며 가족과 이웃과 화목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참으로 추석에 우리의 모든 소원이 가득 담긴 참 아름다운 기도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참 좋은 응답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얼마전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기억할 것입니다. 주위 여건이나 환경에 일희일비함이 없이 한결같이 “땅에서 씨뿌리는 삶”이 참으로 멋진 참삶입니다. 여기에 하나 추가 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날마다 한결같이 땅에서 씨뿌리는 삶에 충실하고, 날마다 한결같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충실하다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날마다 한결같이
“땅에 씨뿌리는 사람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
바로 이런 이들이 궁극의 희망을 하늘의 하느님께 둔 가난하고 겸손한, 진실하고 순수한 무욕의 영혼들입니다. 말그대로 진선미의, 신망애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참삶을 살라고 하느님께 선물로 주어진 참 소중한 인생들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문득 떠오른, 참 은혜로운 강론 제목은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였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하느님을 온맘으로 온몸으로, 온힘으로 온정신으로 사랑할 때 저절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감사하기 마련입니다. 바로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돈이 없어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하늘에 보물을 쌓을 기회는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런 이들이 정말 행복하고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제1독서 요엘 예언자가 말하는 영적 시온의 자손들입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준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이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과 감사의 삶을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할 때 저절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샘솟는 기쁨과 즐거움이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의 실현입니다. 눈들면 어디나 하늘이듯 하늘을 바라볼 때 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150장 마지막 구절이 더욱 하느님 찬양의 삶에 충실할 것을 부추깁니다.
“숨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라.
할렐루야!”(시편150.6)
둘째, 나눔과 섬김의 삶입니다.
나눔과 섬김은 이웃 사랑의 표현입니다. 마음만 있다면 무궁무진한 나눔과 섬김의 기회입니다. 나눔과 섬김의 사랑 역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이래야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의 실천입니다. 이런 나눔과 섬김의 사람들이 정말 자유롭고 존엄한 품위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이 우리 모두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탐욕으로 얻은 것은 재물이요 돈인데, 잃은 것은 건강이요 삶이요 생명이라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지요! 생명을, 건강을, 사랑을, 삶을 잃었는데 그까짓 재물이, 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지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잃어버린 생명을, 사랑을 찾을 수는 없으니 얼마나 어리석고 후회스럽겠는지요!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바로 하늘이 아닌, 땅에 보물을 쌓은 탐욕의 결과요 자업자득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우리에게는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하느님도 이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땅에 보물을 쌓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고립단절의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의 삶입니다. 아, 천국인 듯하나 지옥입니다. 땅에 보물 쌓기에 여념이 없는 삶의 자리,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에 이어, 어김없이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의 말씀이 뒤따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땅에 보물을 쌓는 삶, 부자같으나 하느님 앞에서는 참 가난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삶입니다. 나눔과 섬김의 활동에 재물을 사용함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었다면 가난한 듯하나 실상 하느님 앞에 참으로 부유하고 행복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이 비유 또한 땅에 보물을 쌓으려는 탐욕의 본능을 지닌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문득 영국의 19세기 작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소설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구두쇠 스쿠르지 할아버지 일화가 생각납니다. 성탄전 하루밤 꿈중에 죽은 영혼들을 만나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을 보면서 개과천선해 착한 스쿠리지가 됐다는, 이제부터 땅에 보물을 쌓는 삶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일화가 생각납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일화가 어리석은 부자의 하루밤 꿈이 아니었겠나, 꿈에서 깨어난 어리석은 부자는 전격적 회개를 통해 이웃과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전환이 이뤄지지 않았겠나 하는 유쾌한 상상을 해봅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삶, 참으로 탐욕으로 인해 잘못 선택된 자기 중심의 참 어리석은 삶입니다. 반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 참 잘 선택한 하느님 중심의 지혜로운 삶입니다. 참으로 자유롭고 부유한, 아름답고 거룩한 행복한 삶이요, 이미 오늘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천국의 삶이니 심판은 추호도 걱정 안해도 됩니다. 이런 이들은 제2독서 묵시록의 성령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았던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된 천국의 지름길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눈만 열리면 하늘에 보물을 쌓을 선택의 기회는 무궁무진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찬미와 감사의 미사전례 시간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복된 시간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항구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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