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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0월 19일 목요일[(녹) 연중 제28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0월 19일 목요일[(녹) 연중 제28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홍]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 성 이사악 조그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또는
[백] 십자가의 성 바오로 사제

입당송

시편 130(129),3-4 참조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본기도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3,21-30ㄱ
형제 여러분, 21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27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28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29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십니까?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30 정녕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30(129),1-2.3-4.5(◎ 7ㄴㄷ)
◎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주님,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애원하는 제 소리에, 당신 귀를 기울이소서. ◎
○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
○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

복음 환호송

요한 14,6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알렐루야.

복음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47-54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와 예물을 받아들이시고
이 정성된 제사로 저희가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4(33),11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또는>
1요한 3,2 참조
주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2023년 10월 19일 목요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사제 정진만 안젤로)

 

오늘 복음은 율법 교사를 향한 불행 선언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시는 불행 선언을 듣고 있던 율법 교사는 그분께 불만을 품고 반문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함께 율법 교사를 향하여 위선적 행위를 지적하시며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를 향하여 불행을 선언하시는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던 조상들의 행위를 증언하면서 동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준수에 관심을 기울이는 율법 교사들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들을 배척하고 있음을 비판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언자들이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였듯이 예수님께서도 같은 운명에 놓이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불행 선언의 두 번째 이유는 율법 교사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에는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지식의 열쇠가 주어졌습니다.

율법 교사들은 그 열쇠를 가지고 지혜가 세운 집에(잠언 9,1 참조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문자적 이해와 형식적 준수에만 관심을 가졌고,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풀어내고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율법 교사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겨누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서 예수님을 비판하던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미주 지역은 사는 곳이 넓고, 시차도 있기에 한곳에 모여서 강의를 듣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면서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줌으로 하는 신앙강좌 기획팀을 발족하였고,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면서 강좌를 기획하고 준비하였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좋은 강의를 준비해 주시는 강사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영적인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줌으로 하는 신앙강좌에 함께 해 주시는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열정과 헌신으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는 기획팀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난 9월에는 정민 교수님의 조선 초기 교회의 신앙 활동과 교회 조직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교수님은 구체적인 사료와 자료를 바탕으로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에서 작성한 사학징의(邪學懲義)와 형추문목(刑推問目)’에는 천주교인들의 현황과 활동을 알 수 있는 상세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초대 한국 천주교회의 뜨거운 신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에서 압수한 물품에는 다양한 성물과 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책은 한문과 한글로 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책은 한글로 번역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교우들은 책을 통해서 교리를 배웠고, 신앙생활의 규범을 배웠습니다. 교우들은 성물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미 순교한 신앙인들의 머리카락과 그들의 피가 묻은 나무 조각을 소중하게 간직하였으며 순교자들의 신앙을 따를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교회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여성과 양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은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여 교회를 발전시켰습니다. 명도회는 오늘날 사목회와 비슷한 조직인데 명도회의 목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는 천주의 영광을 밝게 드러냄(明顯天主光榮), 둘째는 성모의 공덕을 찬송함(頌揚聖母功德), 셋째는 어리석은 이를 가르침(訓誨愚蒙), 넷째는 냉담자를 일깨움(提醒冷淡), 다섯째는 곧 죽을 어린이에게 대세를 줌(洗將死之孩), 여섯째는 임종의 어려움을 도와줌(助臨終之險), 일곱째는 이단의 주장을 물리침(闢除異說), 여덟째는 미혹한 길을 열어 인도함(開導迷途)이다.”

 

선교사 없이 시작된 조선교회가 100년간의 박해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10,000명이 넘는 순교자가 신앙을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으로 옮겨감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깊은 산골의 교우촌에서도, 감옥에서도, 죽음을 앞둔 형장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주교님께 보낸 편지에서 교우들의 뜨거운 신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이렇게 보고 하였습니다. “교우들은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서 23일을 걸어왔습니다. 고백성사를 마치면 다시 23일을 걸어갑니다. 고백성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교우들의 모습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신앙이 있었기에 박해의 모진 바람을 이겨내고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모시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200년이 지난 오늘날의 교회를 성찰해 봅니다. 박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주일미사 참례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80%가 넘는 교우들이 주일미사 참례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각 본당마다 예비자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박해의 광풍이 불 때도 선교했는데 선교의 의지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사제성소가 줄고 있습니다. 박해의 시간에도 신학생을 선발하였고, 멀리 마카오까지 보냈던 교회입니다. 환영의 꽃다발이 아닌 포도청의 몽둥이가 기다릴지라도 굳센 믿음으로 사제가 되었던 교회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시대에 교회의 활력이 약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불행한 사람들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부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배우지 못해서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욕심, 원망, 불평, 교만한 사람들이 불행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오늘은 성 루카의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사가만이 전하는 부분으로,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이 말씀은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곧 복음 선포의 시급성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먼저 필요한 것이 ‘기도’임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추수는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종말론적인 추수꾼은 천사를 표상하는데 여기서는 복음전파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고 기도하기를 명하십니다. 그러니 첫 번째로 맨 먼저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이리 떼 가운데 양처럼” 보내신 것은 종말에 늑대와 새기 양이 평화롭게 뒹굴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닐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이사 11,6;65,25 참조)을 이루는 것을 보여줍니다. 곧 하늘나라의 때가 왔음을 선언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여기서도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곧 평화를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사실, 루카복음에서는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15)
 
천사들의 이 노래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이는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단순한 인사나 ‘평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의 노래가 아닌, ‘지금’ 그리고 ‘여기’에 성취된 실재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늘에는 영광’이, ‘땅에는 평화’가 성취됩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구원을 일구어내시고 평화를 가져오심으로써 스스로 당신 이름을 영광되게 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평화를 빌어 줄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건네 준 그 평화를 형제들 안에 심고 가꾸고 일구며 건네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주님!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소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보다,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일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먼저 인사하고 먼저 다가가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신뢰를 두고, 먼저 평화를 빌게 하소서.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주님의 제자이자 복음 선포의 사도로-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시편145,17).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은 하나입니다. 교회에 속한 믿는 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교회의 사람,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으로,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이자 밖으로는 복음 선포의 사도인 선교사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성 루카 복음 사가 축일에 은혜로이 확인하는, 주님께 불림받은 자, 파견된 자로서의 우리의 복된 신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 역시 선택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원을 자각하여 하루하루 날마다 선택하여 살 때 아름답고 자유롭고 풍요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기념하는 성 루카 복음 사가요, 제1독서 ‘티모데오에게 보낸 둘 째 편지’의 주인공 성 바오로요, 여기 독서에서 언급되는 오늘 기념하는 성 루카 복음 사가입니다. 

 

그리고 10월 ‘묵주기도 성월’ 첫날, 10월1일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1873-1897)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예전에는 포교사업의 수호자 성녀 대축일로 지냈습니다. 성녀 탄생 150주년을 맞이한 올해 교황님의 53개 항목들로 이뤄진 “사도적 권고”중 감동적인 대목과 마지막 기도문도 나눕니다. 교황님이 얼마나 성녀를 귀히 여기며 사랑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오, 예수님, 나의 사랑, 나의 성소, 마침내 나는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나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내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나에게 이 자리를 주신 분은 오 나의 하느님 당신이십니다. 나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안에서 나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꿈은 실현될 것입니다.”(제39항 후반부)

 

그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도 참 좋을 성녀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열렬하고 한결같은 사랑이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인 우리의 우선적 자질이자 조건입니다. 이어 마지막으로 바치는 교황님의 아름다운 고백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 데레사여!

 교회는 복음의 빛을, 

 복음의 향기를, 복음의 기쁨을 반사할 것을 필요로합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장미꽃들을 보내주소서.

 당신처럼 되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안에 머물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날마다 

 당신의 거룩함의 ‘작은 길(little way)’을 닮게 하소서. 아멘”(제53항)

 

오늘 기념하는 성 루카 복음 사가와 제1독서의 성 바오로 사도의 탁월한 주님 사랑 역시 참 놀랍습니다. 늘 주님과 함께 사셨던 성인들이요, 언제 어디서나 이들의 영원한 정주처는 주님이였습니다. 제1독서에 소개되는 바오로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주님과 깊이 결속된 친밀한 우정관계인지 깨닫습니다. 모두 다 떠난 뒤에도 끝까지 바오로와 함께 하신 주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늘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짧게 언급되는 구절에서 정말 성 바오로에게 루카는 얼마나 ‘의리의 협조자이자 동역자’인지 깨닫게 됩니다. 다시 안티오키아의 그리스인 의사였던 루카의 자랑스런 행적을 소개합니다. 말 그대로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복음 선포의 일꾼이었습니다. 

 

성인은 51년에 있었던 사도 바오로의 제2차 선교여행을 수행하며 힘껏 도왔고, 57년까지 필리피에 머물면서 공동체를 지도한후 성 바오로의 제3차 선교여행때도 동반합니다. 성 바오로가 카이사리아의 감옥에 갇혔을 때도, 로마로 호송되어 감옥에 갇히고 재차 갇혔을 때도 늘 곁에 있었던 의리의 협조자 루카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인은 성모님을 만나 뵈었고 맨처음 성모님의 초상화도 그렸다 합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서에서 성모님을 실감나게 묘사하는가 봅니다.

 

성인은 루카복음서에 이어 사도행전을 썼으며, 여기서 전반부는 성 베드로에 집중했고 후반부는 성 바오로에 집중하지만, 놀랍게도 정작 자신에 관한 구절은 하나도 찾을 수 없을만큼 겸손함을 견지한 성인이었습니다. 성인은 성 바오로의 순교이후 온갖 고난을 참아내며 주님을 섬기다가 84세를 일기로 순교로 마감했다는 전승입니다. 사실 성인들은 순교와 상관없이 한결같이 고난으로 점철된 순교적 삶에 항구했기에 모두 순교자로 인정해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성 루카는 복음서에서 자비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으며 의사와 화가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네 생물에서 유래한 상징에 의하면 성 루카는 황소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성인의 침착하고 강인한 성격과 주님과 사도 성 바오로를 위한 희생과 충직함을 상징합니다.

 

언젠가 평신도 신학자인 김근수 요셉 형제님의 “신부님의 강론 스타일은 루카와 같습니다.”라는 극찬에 고무된 적이 있는데, “소(牛)띠”인 저이기에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흡족해 한 기억이 선명합니다. 우보천리牛步千里, 호시우행虎視牛行은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소와 소나무이고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제가 소씨라면 성명은 무조건 소나무로 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신학자 형제님이 주신 제 강론에 대한 평, 넷은 제가 늘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1.쉽다.

2,깊다.

3.아름답다.

4.울림을 준다.

 

역시 19년전 2004년 전반기 로마에서 3개월 동안의 양성장 연수에서 10편의 제 영문 강론에 대한 미국의 트라피스트 수도승과 오스트레일리아의 베네딕도회 수녀의 종합평 역시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1.Simple(단순하다)

2.Practical(실천적이다)

3.Collorfull(다채롭다)

4.Good messages(좋은 가르침을 준다)

 

강론도 삶도 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믿는 이들이라면 자주 확인하여 신원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수도자로 하면 안으로는 제자, 밖으로는 사도,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입니다. 분리된 것이 아니라 관상과 활동처럼 한 실재의 양면을 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불림받아 주님곁에 제자로 머물던 일흔 두제자들이 세상에 파견됩니다.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수확할 밭은, 복음선포의 장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입니다. 수확할 밭의 일꾼을 청하기에 앞서 내 친히 주님의 일꾼이 되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살 때 주님은 선물처럼 당신 일꾼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이리떼 세상 가운데 양들 같은 순수와 열정의 주님의 일꾼들이자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주님의 일꾼이자 주님의 전사인 사도요 선교사는 하느님의 섭리와 이웃들의 환대에 의존한 ‘무소유의 전사’, 또 주님의 평화를 선사하는 ‘평화의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사도이자 선교사이며 주님의 전사인 우리들은 하느님 나라의 꿈을, 비전을 지닌 사랑의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말고, 어느 곳에 머물든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그대로 이는 하느님 나라의 꿈이 실현된 제자들인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죄도많고 병도 많고 이리떼 괴물들도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 앞서 주님의 힘으로, 성령으로 완전무장하여 내 친히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가 되어 살면서 주님의 평화와 주님의 치유를 선물하는 것입니다. 

 

주님 친히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된 우리를 통해 세상에 평화를, 치유를 선물하십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치유의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 모두 힐링하시어 세상에 당신 평화의 전사로 파견하십니다. 미사야 말로 주님의 참 좋은 힐링센타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8). 아멘.


10/19(목)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율법 교사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겨누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서 예수님을 비판하던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정진만 신부)

 

2.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시대에 교회의 활력이 약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주님!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소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보다,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일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먼저 인사하고 먼저 다가가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신뢰를 두고, 먼저 평화를 빌게 하소서.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루카  성인은 루카복음서에 이어 사도행전을 썼으며, 여기서 전반부는 성 베드로에 집중했고 후반부는 성 바오로에 집중하지만, 놀랍게도 정작 자신에 관한 구절은 하나도 찾을 수 없을만큼 겸손함을 견지한 성인이었습니다. 성인은 성 바오로의 순교이후 온갖 고난을 참아내며 주님을 섬기다가 84세를 일기로 순교로 마감했다는 전승입니다. 사실 성인들은 순교와 상관없이 한결같이 고난으로 점철된 순교적 삶에 항구했기에 모두 순교자로 인정해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성 루카는 복음서에서 자비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으며 의사와 화가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네 생물에서 유래한 상징에 의하면 성 루카는 황소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성인의 침착하고 강인한 성격과 주님과 사도 성 바오로를 위한 희생과 충직함을 상징합니다.

 

10/19(목)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제299일 기도   

 

복음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겸손하게 하소서.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되지않게 하소서.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나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다른 이를 막아버리지 않게 하소서.

 

- 2023년 10월19일(목) 7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