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10월 20일 금요일[(녹) 연중 제28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본기도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4,1-8
형제 여러분, 1 혈육으로 우리 선조인 아브라함이 찾아 얻은 것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2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3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
4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이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보수로 여겨집니다.
5 그러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받습니다.
6 그래서 다윗도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7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8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당신은 저의 피신처. 구원의 환호로 저를 감싸시나이다.
○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 ◎
○ 제 잘못을 당신께 아뢰며, 제 허물을 감추지 않았나이다. “주님께 저의 죄를 고백하나이다.” 당신은 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셨나이다. ◎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마음 바른 이들아, 모두 환호하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7
그때에 1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2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3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4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5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7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와 예물을 받아들이시고
이 정성된 제사로 저희가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또는>
1요한 3,2 참조
주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 중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약하냐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반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두려움이 큰 사람은 믿음이 약하고, 믿음이 강한 사람은 두려움이 적습니다. 복음서에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장면들이 몇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와 어부들입니다. 밤을 새워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어부들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이때의 두려움은 강한 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마치 고양이 앞에 있는 쥐와 같습니다. 두 번째는 풍랑을 마주한 제자들입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은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배가 뒤집힐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때의 두려움은 시련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듯이, 우리의 삶에는 시련과 고난의 파도가 몰아치기 마련입니다.
세 번째는 물위를 걷던 베드로입니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라.”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 자신의 발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때의 두려움은 ‘근심과 걱정’입니다. ‘미득선수실(未得先愁失) 당환이작비(當歡已作悲)’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 근심이 오지도 않았는데 기쁨이 먼저 떠나간다는 뜻입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네 번째는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입니다. 이때의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허망하게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느꼈던 두려움은 4가지입니다. 강력한 힘에 대한 두려움, 시련과 고난에 따른 두려움, 근심과 걱정에 따른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이 있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지셨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죄가 커서 시련과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짐은 가볍고, 나의 멍에는 편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겨감이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세 번이나 넘어지셨고, 창에 찔리시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육신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여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두려움 없이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제도를 통해서 2000년을 이어온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없이 믿음의 길을 걸었던 분들을 통해서 2000년을 이어온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내 죄악 내 머리칼보다도 많사오며...
저희 피정 센터를 찾는 형제자매님들 중에, 가끔 레지오나 반모임, 꾸르실료 등 본당 활동 중에 만난 형제자매들이 열두 서너 명 소규모로 피정을 오십니다. 얼마나 분위기가 좋은지 모릅니다. 깨가 쏟아지고 이박삼일이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신앙 안에서 만나니 그렇게 우애가 깊은 듯합니다. 친형제 자매 ‘저리 가라.’ 입니다. 세월이 삼십 년 사십 년 흘러도 그 우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래서 신앙이 좋은 것이로구나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저희 수도 공동체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만에 만나면 나이 불문하고 시간이 ‘순삭’입니다. 그동안 겪었던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들, 그간 갈고 닦은 아재 개그들을 나누다 보면 금방 시계 바늘이 자정을 넘깁니다.
나름 수도 생활 연식이 오래된 형제들끼리 만나면 더 재미있습니다.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꽃미남 젊은 시절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제는 영락없는 영감님들입니다.
아랫배도 불룩 튀어나오고, 머리도 희끗희끗, 무엇보다도 제일 큰 관심사요 대화 주제는 현저하게 줄어든 머리카락입니다. 그나마 아슬아슬 남아 있는 서로의 머리숱을 바라보며, ‘관리 좀 하지 어쩌다 이렇게 됐냐?’ ‘이 샴푸를 써보라.’ ‘저 피부과로 가보라.’ 의견이 분분합니다.
현저하게 머리숱이 결핍된 형제 중에 한 분은 대뜸 성경 구절을 들이대며 깔깔 웃습니다. “내 죄악 내 머리칼보다도 많사오며.” 자신은 머리숱이 적으니 그만큼 죄가 적다며, 위안을 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머리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새롭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그대의 삶은 분명 가치가 있습니다. 그대의 인생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대는 있는 그대로,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그대는 존귀합니다. 그대는 일어서야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많은 분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골목에 주저앉아 울고 있습니다. 울며 애통해하는데 그 누구 하나 위로하는 사람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 그분의 사상, 가치관, 행동방식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손을 내밀어야겠습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019.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습니다.”(루카 11,53)
앞부분에 이어,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에 대한 <두 번째>와 <세 번째> 경고 말씀과 그에 대한 그들의 반응입니다.
<두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루카 11,47)
이는 율법 교사들이 진리를 핍박하고 있음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이 죽은 예언자들은 기념하면서도 살아있는 예언자를 죽이는 모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여전히 지금도 지혜이신 예수님을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자기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지식의 열쇠”란 율법을 해석하고 여는 열쇠로, 곧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묵시 3,7)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그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성경에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또 “너희가 모세를 믿었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요한 5,4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 오심에 관한 지식을 숨겼습니다. 곧 율법의 “열쇠”인 그리스도를 숨기고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그들이 오히려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마치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선조들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거역하고 죽였듯이, 그들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 사회에 횡행했던 도둑이나 살인이나 간음보다 종교지도자들의 형식주의와 거짓과 위선을 더 많이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마치 전염병처럼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경고를 받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반응을 전해줍니다. “그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몰아대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습니다.”(루카 11,53)
우리는 어떨까요? 혹 우리가 질책당할 때, 어떻게 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질책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회개하는지, 아니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광분하여 화를 내며 앙갚음하려고 기회를 노리는지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불행하여라.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주님!
말씀을 치워버리는 일이 없게 하시고,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행하지는 않은 까닭에
자신만이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아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말씀의 실행이 당신의 나라를 여는 열쇠이오니,
선포한 바를 실천하게 하소서!
오, 주님! 제게는 당신의 말씀이 있으니,
바로 이 이유로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예수님만이 참행복이시다-
오늘 루카복음은 여섯의 불행선언중 마지막 두 개입니다. “불행하여라”를 읽는 순간, “회개하여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원하셨고 하신 것은 불행선언이 아니라 “행복하여라”로 시작되는 행복선언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는 진복팔단으로 시작됩니다.
행복이냐 불행이냐? 행복도 불행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나 원하는바 행복이요 불행을 택할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는바 참행복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선택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선택-훈련-습관의 영적 도식입니다.
“무기들이 침묵하게 하소서. 가자지구에서의 상황이 절망적입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읽은 대문자 말마디가 절박한 상황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이요 불행한, 참혹한 현실입니다. 예루살렘 성지의 평화를 위해 10월27일 모든 신자들에게 기도와 단식을 호소한 교황님입니다. 참으로 인간 무지로 인한 전쟁이요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마태복음의 참행복이란 주제하에 전개되는 진복팔단의 내용들은 늘 들어도 정신이 새로워집니다. 가짜 행복이 아닌 진짜 행복이라 하여 참행복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영성가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참행복을 나눕니다. 정말 오늘날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 목마르게 와닿는 이런 참행복입니다.
1.“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참행복 선언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는 결론같은 말씀도 참 고무적입니다. 아니 하늘에서 상을 받기 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참행복입니다. 바로 참행복의 근거는 하느님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제 읽은 두 말마디와 황옥연의 “사랑”이란 시도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의미 없이 보낸 날은 웃지 않고 보낸 날이다.”-
-“고마움을 모르는 자의 희망은 겨울의 서리처럼 녹아버리고, 허비된 물과 같이 흘러가 버릴 것이다.”-
-“바닷가에 서면
조가비만한 나
치악산에 가면
여치만큼 작은 나
그런데 하느님은
나를 산보다 바다보다
더 크대요
더 크대요”-
하느님 사랑은 이처럼 감동적입니다. 교황님의 사도적 열정이란 주제로 나눈 어제 수요일(10,18) 주중 알현시간 강의는 사하라 사막의 성자 샤를로 후꼬의 일화입니다. 성인은 모든 이들에게 '온유함의 사도'로 보편적 형제가 되기를 갈망하면서 하루중 12시간을 감실앞에 머물러 기도했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침묵중에 활동케 하시도록 하라”란 주제로, ‘침묵중에 복음 선포’, ‘온유함의 사도직’ ‘애덕의 기쁨’이란 내용으로 성인의 삶을 압축했습니다. 마지막 결론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줬습니다.
“미소로, 그분의 단순함으로 샤를로 형제는 복음을 증거했다. 결코 개종이 아니다. 결코 개종이 아니라 증거다. 복음화는 결코 개종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증거(witness)를 통해, 매력(attraction)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참사랑의 참행복만이 복음화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와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깊이 젖어 살았던 성 샤를로 후꼬 성인의 영성이 그리워지는 참 시끄럽고 혼란한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지탄이 대상이 된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선택된 엘리트 집단이요 유식한 집단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식(無識)하지 않았으나 무지(無智)했습니다. 참된 회개가 사랑과 지혜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공부많이 해도 하느님 사랑 공부 안하면 무지의 사람들일뿐입니다. 진정 하느님으로부터 떠난 자들입니다.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무덤을 만들고 기념하면서 역설적으로 현재까지 여전히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해 악행을 반복하는, 폭력의 악순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작금의 우리의 현실에서도 여실히 증명됩니다.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저야할 것이다.”
인류사는 전쟁사이자 폭력과 보복의 역사입니다.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오늘 이 세대에게 주는, 참으로 전격적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의 예언자적인 말씀입니다. 여기서 단호히 단(斷)!, 끊어버려야 할 무지의 악과 죄입니다. 바리사이들에 이어지는 율법학자들에 대한 질책이자 하느님을 잊은 오만한 오늘의 식자들을 향한 질책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너무 왜곡 부패 변질된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회개도 때가 있는 법, 너무 부패 변질되기전 회개해야 함을 배웁니다. 무지의 어리석음이 병이요 죄이며 악입니다. 이들의 행태가 점입가경 구제불능입니다. 마치 발악(發惡)하는 악마같습니다. 하느님을 떠났을 때, 이성을 잃었을 때, 상식과 양식을, 공정과 정의를 잃었을 때, 얼마나 사람이 악해질수 있는지, 잔인할 수 있는지, 망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실례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흡사 악의 연대처럼 느껴집니다. 회개는커녕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예수님을 몰아대며 그분을 옭아매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면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겪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 모두는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더욱 회개를 통한 참나를, 참행복을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가 제1독서에서 답을 줍니다.
회개와 더불어 겸손과 믿음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믿음의 빛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의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로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의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도 믿음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져 의롭게 됩니다.”
내 중심의 삶에서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의 부단한 전환이 회개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회복합니다.
참행복에 대한 궁극의 답도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선택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선택입니다.
무지의 어둔 사람이 불행을, 지옥을 선택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참행복이자 천국이신 예수님을 선택합니다.
신망애의 주님, 진선미의 주님입니다.
이래서 회개의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요 동시에 예닮의 여정임을 부단히 강조합니다.
참으로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을 선택하여 참삶을, 참행복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10/20(금)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일
1.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느꼈던 두려움은 4가지입니다. 강력한 힘에 대한 두려움, 시련과 고난에 따른 두려움, 근심과 걱정에 따른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이 있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지셨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조재형 신부)
2.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머리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불행하여라.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주님!
말씀을 치워버리는 일이 없게 하시고,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행하지는 않은 까닭에
자신만이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아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말씀의 실행이 당신의 나라를 여는 열쇠이오니,
선포한 바를 실천하게 하소서!
오, 주님! 제게는 당신의 말씀이 있으니,
바로 이 이유로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신부)
4.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져 의롭게 됩니다.”(이수철 신부)
10/20(금)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제 300일 기도
복음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강력한 힘에 대한 두려움,
시련과 고난에 따른 두려움,
근심과 걱정에 따른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이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소서.
- 2023년 10월20일(금) 6시5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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