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11월 12일 주일[(녹)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32주일이며 평신도 주일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이들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잔칫상에 앉는 합당한 준비로, 등잔에 기름을 채워야 합니다. 기다림에 지치지 않고, 주님께서 오실 때에 서둘러 마중하여 혼인 잔치에 함께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입당송
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대영광송>
본기도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6,12-16
12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3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14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15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
지혜를 얻으려고 깨어 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진다.
16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
○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고, 성소에서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당신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
○ 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높이 올리오리다. 제 영혼이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러, 제 입술이 환호하며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
○ 잠자리에 들어서도 당신을 생각하고, 온밤 지새우며 당신을 묵상하나이다. 정녕 당신은 저를 도우셨으니, 당신 날개 그늘에서 환호하나이다.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4,13-18
13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15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16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17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
4,13-14
13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목자이신 주님, 주님의 백성인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을 주님의 진리로 이끌어 주시고, 특히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보편 사제직을 수행하는 평신도들이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교회와 사회 복음화에 힘쓰게 하소서.
2.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주님, 남북 분단의 세월 동안 단절되고 대립하며 지내 온 이 겨레에 은총을 주시어,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며 대화의 길을 만들어 갈 수 있게 하소서.
3. 수험생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지혜의 샘이신 주님,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을 보살펴 주시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이제까지 애써 준비한 것들을 아쉬움 없이 잘 펼쳐 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비하신 주님, 저희 가정 공동체를 주님의 은총으로 이끌어 주시어,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며 참행복과 생명의 가치를 실천하는 본보기가 되게 하소서.
예물기도
이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성자의 수난을 기념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그 신비를 따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주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오니
이 세상에서 날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있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성령의 첫 열매를 지닌 저희에게도
파스카 신비가 영원히 이어지리라 희망하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또는>
루카 24,35 참조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주 예수님을 알아보았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성체로 힘을 얻고 감사하며 자비를 바라오니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성령의 힘으로 저희 삶을 변화시켜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2주일(평신도주일)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습니다. 짧은 말이지만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분수를 알라.’는 뜻입니다. 성서를 보면 분수를 모르고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시작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낙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만했던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은 후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많은 능력으로 업적을 쌓은 사람도 인생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모세는 그 또한 하느님의 뜻임을 알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일은 ‘여호수아’의 몫임을 알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였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광야에서 길을 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기꺼이 예수님께 자리를 양보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씨를 뿌리고, 아폴로는 거름을 주지만 키우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나 자신을 아는 첫 번째 길은 ‘겸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와 겸손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으면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시작은 ‘겸손’입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은 만물에 생기를 주는 자양분입니다. 순리대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막히면 돌아가고, 기꺼이 낮은 곳에 머물기 마련입니다.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납니다. 다투지 않고,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습니다. 그 유연성이 만물에 덕이 된다고 합니다.
성서를 보면 분수를 모르고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그 시작은 ‘카인’입니다. 카인이 하느님과 멀어진 이유는 ‘분노’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생 아벨의 제물을 받아 주셨지만, 카인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카인인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자기 제물을 받아 주실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카인이 자신의 분수를 알고, 하느님께 더 합당한 제물을 준비했다면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물을 받아 주셨을 것입니다. 동방박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지 않고 다른 길로 갔을 때입니다. 분노한 헤로데는 예루살렘 인근에서 태어난 2살 이하의 어린이를 모두 죽여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동생을 죽인 카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있는 병중에 ‘화병(火病)’이 있습니다. 분노를 삭이지 못해서 생기는 병입니다. 화풀이를 잘못해서 패가망신하는 예도 많습니다. 화를 참지 못해서 애꿎은 그릇을 깨는 일도 있습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도 대부분 ‘화’를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이 잘못하면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나 자신을 아는 두 번째 길은 ‘용서’입니다. 묶인 것을 풀고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므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통해서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했을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는 아들을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에는 두 가지의 모습이 있습니다. 용서를 청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자비’입니다. 회개와 자비가 만날 때 참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등잔에 채워야 할 기름은 ‘겸손과 용서’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용서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된 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바라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32주일(평신도주일)
- 『더 높은 기도』: 나는 기도가 기대되는가?
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여분을 가지고 있었고 미련한 처녀들은 챙겨 놓지 못했던 ‘기름’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입니다. 신학에서 “성령과 기름 부음은 동의어로 쓰일 정도”(『가톨릭교회교리서』 695)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붙은 등잔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령의 열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참 포도나무에 접목 시켜 주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736) 주십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본다면, 미련한 처녀들은 사랑, 기쁨, 평화와 같은 감정들이 사그라졌을 때 성령을 받겠다고 기도하러 가는 사람을 의미하고,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감정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는 신앙인을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기도와 영성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규칙적으로 하느냐’, ‘필요할 때만 하느냐’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막 달리기 경주할 때 선수들은 일정 걸음을 내디딘 후에는 반드시 물을 마신다고 합니다. 사막에서는 땀이 바로 증발해버리기 때문에 목마를 때만 물을 마신다면 탈수증으로 쓰러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탈수증에 쓰러진 선수들을 보면 물통에 물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마셔야 내 것이 됩니다. 만약 수험생 자녀를 위해 어떤 엄마가 100일 기도를 했다면 그 엄마는 영성이 높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녀의 시험과 상관없이 매일 그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그제야 ‘기름’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환경은 이렇게 기도의 수준이 높아지는 데 큰 방해를 주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만약 미사를 몇 번 했는지, 묵주기도를 몇 번 했는지 보고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이는 묵주기도에 천천히 젖어 드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복음 나누기 7단계’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3분 묵상하고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적어도 30분은 집중해서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묵상은 3분만 해도 된다고 여기게 만듭니다. 그리고 더욱 안 좋은 것은 기도가 ‘부담’이 되게 합니다. 묵주기도를 더 많이 바치기 위해 빨리 바쳐야 하고 묵상 나누기를 위해 묵상한 것도 아닌 자기 생각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면 레지오도 힘들어지고 소공동체 모임도 부담스러워 나가지 않게 됩니다.
만약 기도가 행복한 것이라면 남이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꾸준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 큰 형은 한때 매일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가위에 눌렸고 심지어 악마에게 공격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신 잡는 해병대, 그리고도 수색대 조교였던 형은 자존심상 주님께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느 날은 성호를 긋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날은 오랜만에 편히 잠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다음 날도 성호를 긋고 잤습니다. 그런 습관이 수십 년이 지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은 이제 성호경을 제대로 긋는 기도의 수준에 오른 것입니다. 이렇게 영성을 높여갈 수 있습니다.
가끔 자기를 키우던 가족이 먼저 죽자 반려견이 매일 무덤에 와서 슬퍼하다가 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반려견이 주인을 사랑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한 번 왔다가 다시는 안 온다면 이는 그저 자기 위로일 뿐입니다. 그러나 매일 같은 시간에 온다면 정말 그분과 그분한테서 나오는 사랑이 그리워 오는 것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살기가 싫다는 한 자매에게 저는 매일 한 시간씩 성체조배를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20~30%만 꾸준히 실천합니다. 그 자매는 매일 성체조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꾸준히 그렇게 한 이유를 물었더니, 남편이 아닌 자신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남편이 밉지 않고 며칠 만에 집에 돌아와도 밥을 차려주고 이부자리를 마련해준다고 합니다. 미워할 때보다 기도할 때 행복하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자매는 성체조배 한 시간 할 정도로 영성이 높아진 것이고 그렇게 현명한 처녀로 인정받게 됩니다.
사실 기도는 힘이 드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봉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좋은 열매가 맺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벽 만나를 거두러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오늘날에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교육을 비롯하여 삶의 온 국면이 시장화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시장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돈’이 종교화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돈’이 우상화 되고 신격화 된 것입니다. 이를 교종 프란치스코의 문헌 <복음의 기쁨>에서는 이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고대의 금송아지에 대한 숭배가 돈에 대한 물신주의라는,
그리고 참다운 인간적 목적이 없는 비인간적인 경제 독재라는 새롭고도 무자비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55항)
그래서 교종께서는 현대 자본주의의 물신숭배 풍토를 강도 높게 질책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으로 모는, 소위 말하는 “돈의 제국”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돈은 악마의 배설물이다.”(바실리오)라고 말씀하시고, “돈을 신처럼 숭상하는 경제제도는 극도로 높은 소비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고 또 착취하려 한다.”(국제 민중운동 회의, 2014.10.28)고 지적하시며, “사람이 돈을 숭배하면 결국 돈의 노예가 될 것”(이탈리아 협동조합연합 회의)이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의 체계화가 단지 나쁜 것을 넘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교묘한 독재”(볼리비아 방문)라고 질타하시고, “인간의 생명을 돈과 이윤의 제단에 갖다 바치는 정책을 철폐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인간 얼굴을 한 새로운 경제 모델을 추구하라.”(파라과이 방문에서 세계지도자들에게)고 주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그런데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루카 16,14). 혹 우리의 속마음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돈에 지배당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사실, 돈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돈을 추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진 꼴이 됩니다. 사실, 재물을 섬기는 자들은 재물의 노예로 자신을 스스로 옭아맬 뿐입니다. 결국, “주님을 섬길 것인지, 우상을 섬길 것인지”는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하느님과 재물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는 이유는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돈에 매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매여 있는 존재이며,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입니다. 곧 우리 자신을 관리할 뿐 소유할 수 없듯이, 재물도 관리할 뿐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재물도 모두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주님!
당신보다, 제 자신과 재물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보다, 당신의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재물도 자신도 관리할 뿐, 결코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3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경건하고 모없이 슬기로워서
겸손으로 티없이 보낸생애여
주께받은 생명을 꽃피웠으니
그향기를 만세에 남기었도다."
마르티노 성인을 기리는 아름다운 찬미가 한연입니다. 오늘 11월11일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축일입니다. 정말 다양한 가톨릭 성인들의 축일입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없듯이 똑같은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꽃마다 크기와 모양, 색깔과 향기가 다 다르듯이 성인들도 그러합니다. 어제는 위대한 대 레오 교황의 축일이었고 오늘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축일입니다. 교회는 기념일로 지내지만 수도 주교 성인이었던 성 마르티노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승들과는 각별한 인연이기에 축일로 지냅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지닌 마르티노 성인이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이전 처음으로 서방에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여준 수도 성인으로 프랑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대레오 교황이 61세를 사신 반면 마르티노 성인은 81세로 그 당시로는 장수를 누린 성인이기도 합니다. 성인 축일을 지낼 때 마다 반드시 생몰生歿연대를 확인하며 제 나이와 비교해 보곤 합니다. 새삼 죽음과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도 머지 않았음을 봅니다.
마르티노 주교 성인의 인생 여정도 참 각별합니다. 고대 동방 수도생활에는 사막교부 “안토니오의 생애”란 책이 있듯이 경쟁하듯 서방에는 “마르티노의 생애”란 책이 있고 여기 소개된 성인에 대한 무수한 기적과 일화들입니다. 성인은 316년 헝가리 판노비아에서 태어나 당시 로마제국의 장교였던 아버지의 임지인 이탈리아 북부의 파비아에서 소년 시절을 지냈고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투르의 주교후 물러나 수도생활에 전념하다 선종하신 분입니다. 오늘날 중국이 하나이듯이 당시 유럽은 한 나라의 로마제국이었습니다.
성인은 가톨릭 교회에서 순교자가 아니면서 성인이 된 최초의 분이었고,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병사입니다. 따라서 저는 싸울수가 없습니다.” 전장에서 싸움을 거부한 성인은 투옥되었다 풀려나 수도여정의 길에 오르게 됩니다. 성인의 그리스도교의 개종에는 유명한 전설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군복무중 자기가 지닌 것은 외투와 칼뿐이었던 성인은 낮에 추위에 떨고 있던 걸인에게 지체없이 칼로 외투의 절반을 잘라 입혀 주었고, 바로 그날 밤 꿈에 자기 반쪽 외투를 걸친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옷을 입혀준 걸인이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마르티노는 아직 예비신자이지만 나에게 이옷을 입혀주었다.”
그날 밤, 주위의 천사들에게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꿈속에 들었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잘라졌던 외투는 완전히 새로 복구되었음을 목격했다는 일화입니다. 이런 일화가 그의 수도성소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18세에 세례를 받게 되고 군문을 떠나게 됩니다.
성인은 수도 주교가 된 이후로도 불굴의 열정으로 수도생활과 더불어 열렬한 사목활동을 전개했으며 이미 생존시 많은 기적이 있었다 합니다. 성인의 죽음도 순전히 과로로 인한 병사입니다. 주님의 병사(兵士)로서 병사(病死)한 것입니다. 그의 선종시 전해지는 기도에 관한 일화입니다.
“주님, 아직 당신 백성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 일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지소서.”
기도후 만류하는 신자들에게 “그냥 두시오. 땅보다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에 이 내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남기고 397년 1월8일 선종하셨다는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걸인에게 그의 외투를 잘라 나눴다는 전설같은 일화요 여기 근거한 오늘 복음 말씀의 선정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예수님께 관한 예언이면서 파견받은 우리 신자들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풀린 넋대신 축제의 옷을 입혀주게 하셨다.”
고해인생을 기쁨과 자유의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라 파견되신 예수님처럼 우리 모두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날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 하느님의 영을 우리 위에 내려 주시고, 당신 복음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충격적입니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을 서술하는 참 엄중한 서술입니다.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하느님을 대신한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며 심판의 잣대는 구체적 다음 여섯의 자비행입니다. 한 번 자신을 넣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죽어서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오른쪽에 구원받은 이들에게 선언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이어 구체적 사례를 열거하십니다. 모두가 추상적 사랑이 아닌 몸과 관련된 구체적 자비행을 지칭합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의 외투에 관한 일화는 4항에 해당됩니다.
1.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3.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고,
4.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5.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6.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오른쪽에 구원받은 이들은 언제 주님께 그렇게 해드렸느냐 묻고 이에 대한 답이 오늘 복음의 결론이요 우리에게는 영원한 울림을 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종파의 유무에 관계 없이 모든 인류중 곤궁중에 있는 가장 작은 이들 하나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주님입니다. 온 인류가 예외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한 가족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최후의 심판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거룩한 전례도, 기도도, 온갖 수행이 심판의 잣대가 아니라 주변에서 곤궁중에 있는 이들을 살피고 돕는 자비행이 심판의 잣대라 합니다. 새삼 정신 번쩍 들게 하며 우리 자신의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나태를 부끄럽게 합니다. 참으로 이런 구체적 자비행에 충실한 사람이 참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도 이런 자비행의 실천에 소홀함이 없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의인들은 빨마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체드루스처럼 자라나리니
주님 집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시편92,13-14). 아멘.
11/12(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되새김 구절
1. 용서에는 두 가지의 모습이 있습니다. 용서를 청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자비’입니다. 회개와 자비가 만날 때 참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등잔에 채워야 할 기름은 ‘겸손과 용서’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용서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된 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바라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조재형 신부)
2. 사실 기도는 힘이 드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봉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좋은 열매가 맺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벽 만나를 거두러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주님!
당신보다, 제 자신과 재물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보다, 당신의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재물도 자신도 관리할 뿐, 결코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종파의 유무에 관계 없이 모든 인류중 곤궁중에 있는 가장 작은 이들 하나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주님입니다. 온 인류가 예외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한 가족임을 깨닫습니다.(이수철 신부)
11/12(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제323일 기도
복음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오늘 내가 등잔에 채워야 할 기름은 ‘성령과 기도’입니다.
내 안에 성령을 모시고 기도하는 사람은 신랑을 맞으러 나갈 신부입니다. .
슬기로운 처녀처럼 ‘성령과 기도'로 참된 지혜를 알게 하소서.
- 2023년 11월12일(일) 3시30분...수산나 -
랑을 맞
으러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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