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11월 20일 월요일[(녹) 연중 제3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본기도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10-15.41-43.54-57.62-64
그 무렵 10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
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년에 임금이 되었다.
11 그 무렵에 이스라엘에서 변절자들이 생겨 많은 이들을 이러한 말로 꾀었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
그들을 멀리하고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재난만 숱하게 당했을 뿐이오.”
12 이 말이 마음에 들어, 13 백성 가운데 몇 사람이 임금에게 기꺼이 나아가자,
그는 그들에게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라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14 그리하여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15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41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42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
이민족들은 모두 임금의 말을 받아들였다.
43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이들이 임금의 종교를 좋아하여,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안식일을 더럽혔다.
54 백사십오년 키슬레우 달 열닷샛날,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55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56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57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62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63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64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저를 살려 주소서. 당신 법을 지키리이다.
○ 악인들 때문에 분노가 치미나이다. 그들은 당신 가르침을 저버렸나이다. ◎
○ 죄인들의 올가미가 저를 휘감아도, 저는 당신 가르침을 잊지 않았나이다. ◎
○ 사람들의 억압에서 저를 구하소서. 저는 당신 규정을 지키리이다. ◎
○ 당신 가르침을 멀리하는 저들, 사악한 박해자들이 다가왔나이다. ◎
○ 악인들은 당신 법령을 따르지 않았기에, 저들에게는 구원이 멀리 있나이다. ◎
○ 당신 말씀을 지키지 않는 저들, 그 배신자들 보며 저는 역겨워하나이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바치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어
저희가 오롯이 주님을 사랑하며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
<또는>
마르 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루카 18,35-43
믿음은 하느님의 좋으심을 묵상함으로써 커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여기저기 버려진 시체들이 있었습니다.
한 들판에 유난히 코스모스가 응집되어 피어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가보니 코스모스들은 어떤 병사의 몸에서 피어난 것들이었습니다.
군번줄로 신원을 확인해보니, 그 병사는 전쟁터에서 아무도 묻어줄 수 없는 병사들을 위해
아름다운 꽃의 향기가 휘날렸으면 하는 생각으로 자신의 몸에
한 움큼의 코스모스 씨를 안고 전쟁에 출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되어 썩어진 몸에서 코스모스가 피어
바람에 향기를 휘날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묵상해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썩은 시체처럼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랑 가득한 사람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도 이러한 자세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한다는 분들에게 아담과 하와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느냐고 물으면
많은 경우에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랬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자녀가 여러분 가방에서 돈을 훔쳤다고 호적에서 파버릴 것이냐고 물으면 웃습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자비로우면서도 하느님은 과일 몇 개 먹었다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모진 분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자비를 더 잘 알기 위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것은 선악과를 먹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해서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옷을 만들어 입고 숨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신 모든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악과를 바치라고 한 것
하나에만 집중하며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판단해버렸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하느님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몹쓸 종이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셔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마태 25,24-25)
성경공부를 하더라도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여긴다면
공부만 한 것이지 기도를 한 것은 아닙니다.
말씀은 묵상하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믿음을 줍니다.
저의 어머니도 저에게 매우 모질게 대하신 적이 있습니다.
혼낼 필요가 없는 것도 혼내시고 학용품 살 돈도 안 주셔서 울려서 보내셨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붙잡고 부모는 자녀를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 엄한 훈육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집중하면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분과 사는 것은 고통 자체가 됩니다.
저는 어머니가 저의 어머니인 것을 믿기 위해 어머니의 손과 발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굳은살이 박이고 관절이 휘어져 있었습니다.
생선의 어느 부위를 드시는가도 살폈습니다. 언제나 머리 부분만을 드셨습니다.
몸통을 드시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맛있는 것을 나에게 먼저 주시는가도 살폈습니다.
새참으로 받으신 우유와 빵을 당신은 안 드시고 저녁 때 저에게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렇게 어머니께서 좋으신 분임을 묵상할 때
어머니가 나의 참 어머니가 맞는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성장시키지 않는 성경공부는 무익함을 넘어서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소경이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는 데도 큰 소리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십니다.
그는 비록 소경이었지만 하느님께서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기에
자신에게 좋은 것만을 주실 것임을 오랜 시간 묵상해온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묵상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 믿음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기도가 끝나건, 성경 읽기가 끝나건 항상 하느님의 자비를 찬미하며 끝나야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증가한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이 증가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라는 믿음을
증가시키는 데 쓰이도록 합시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루카 18,35-43
저 역시 산산조각난 인생일 뿐입니다!
언젠가 시각 장애인 야외 행사 때 한 형제님의 도우미 역할을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전혀 앞이 안 보이는 분들도 계셨지만, 어느 정도 윤곽이 보이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왕초보인 저에게는 그나마 봉사하기 쉬운 시각 장애인 형제님이 배당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입장에서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세상 모든 대상들이 극복해야 할 장애물들이었습니다.
언제 어디를 가든 그저 조심 또 조심, 몸을 사려야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배려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당시 시각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혹독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의료 수준으로 회복이나 치유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사회 분위기상 시각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나 복지 혜택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가족들도 나 몰라라, 공동체도 그들을 소외시켰습니다.
더 억울한 일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시각 장애를 죄에 따른 벌로 여겼습니다.
앞을 못 보는 불편함에 죄인 취급까지 받으니 그 삶이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한 마디로 두 사람의 삶은 산산조각 난 것입니다.
산산조각 났으니, 더 이상 내려설 곳도 없었습니다.
부끄러워 하거나 체면 차릴 여유도 없었습니다.
치유자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은 두 예리코의 눈먼 사람은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동원해서 크게 외쳤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복음 18장 38절)
이윽고 자비하신 예수님께서 산산조각 난 그의 인생을 측은지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든 예수님께서 산산조각난 눈먼 이의 인생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워모으셨습니다.
마침내 산산조각난 인생을 당신 뜨거운 사랑의 용광로 속에 넣으셔서, 찬란한 명품으로 재탄생시키셨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 역시 산산조각난 인생일 뿐입니다.
주님 크신 은총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제발로 서있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저 주님 자비만 바랄 뿐입니다.
주님 뜨거운 사랑만 기대할 뿐입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세계 가난한 이를 위한 날>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2016년에 선포하신 '세계 가난한 이를 위한 날'입니다.
교종께서는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시면서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가난한 이들, 약한 이들,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힌 이들에게 손을 내밀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밝히시면서, 이 날의 제정을 강력히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연중 제33주일을 '가난한 이를 위한 날'로 정하시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합시다'라는 제목으로 담화문을 발표하셨습니다.
이 담화문에서 교종께서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라는 “요한 사도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책무”임을 밝히고, “모든 이는 연대와 형제애의 구체적 징표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나눔을 실천하도록 초대”받았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이 ‘우리의 책무’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제1독서는 잠언의 마지막 부분으로, 주인을 위해 헌시하며,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훌륭한 아내의 모습을 통해 지혜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제2독서는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덮치지 않도록 빛의 자녀로서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도록 촉구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먼 길을 떠나면서 자신의 종들에게 어마어마한 돈(1 탈렌트는 6천 데나리온이고, 1 데나리온은 하루 일당. 오늘날 하루 일당을 10 만원으로 잡으면 약 6 억원)을 맡기고 떠납니다.
이는 종들에 대한 주인의 ‘믿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믿음의 표시인 이 탈렌트는 주인의 ‘선물’임과 동시에 그에 따른 ‘과업’(소명)이기도 합니다.
선물은 잘 보관하라고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하고 베풀라고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장하고 꽃피워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과업)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십자가가 질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주어지듯이, 탈렌트(선물)도 열매 맺기에 충분하게 '능력에 따라'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와서 셈을 할 때는 그 선물을 잘 활용한 첫째와 둘째 종을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 탈렌트를 땅에 묻어두었던 셋째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착하다는 것, 악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여기서 ‘착하다’는 것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에게서 알 수 있듯이, 주인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요, ‘악하다’는 것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주인의 선물을 땅에 묻어버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신뢰냐?’ 아니면 ‘선물을 받은 자신의 신변 안전이냐?’ 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러니 ‘착하다’는 것은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이요 희망이요 사랑일 뿐 아니라, 자신을 ‘먼저’ 믿어주신 분께 대한 감사요 봉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성스런 태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악하다’는 것은 주인을 불신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주인은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도 않는 데서 모으는 무서운 분, 곧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가는 착취자로 여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게으른 태도’를 가지게 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성실한 종과 게으른 종의 차이는 그 재산을 얼마나 불렸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주었던 신뢰와 사랑을 그들이 얼마나 큰 신뢰와 성실함으로 보답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물에 대한 태도는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태도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주인은 첫째와 둘째 종에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1.23)
반면에 셋째 종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 25,26-28)
그야말로 믿음은 믿음을 낳고, 불신은 불신을 낳게 됩니다.
사실 은총의 선물은 능력에 따라 항상 충만히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은총을 주는 대로 다 받지 못하고 비워진 만큼, 곧 나누어 비워진 만큼 받게 됩니다.
반면에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쥔 것마저도 잃게 됩니다.
사실 그 선물은 애시 당초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선물을 받은 이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믿으셨고, 믿으셨기에 능력에 따라 충분한 선물(은총)을 주셨고, 그 선물을 통해 하늘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 선물은 주신 분의 뜻에 따라 사용될 때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는 하늘나라를 차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첫째는 ‘은총’ 곧 하느님의 사랑, 먼저 주신 사랑이요, 둘째는 은총에 따른 ‘소명에 충실함’, 곧 은총을 열매 맺기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은총의 열매를 맺을 힘도, 십자가를 질 힘도 함께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둘은 이미 하느님의 은총이요, 우리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기 위한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마태 25,15)
주님!
당신은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제게 탈렌트를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진정, 그 크신 당신의 사랑을 제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선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3.11.19.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잠언31,1-13.19-20,30-31 테살5,1-6 마태25,14-30
참 행복한 삶
-사랑하라, 깨어 있어라, 책임을 다하라-
화답송 후렴이 정신을 맑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128,1ㄱㄴ)
오늘은 제7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주님의 산상설교중 맨처음 참행복선언이 생각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6,20)
참행복은 온전히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토빗4,7)
세계 가난한 이의 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 성서 말씀을 주제로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이어 “우리는 허울뿐인 안녕을 지키려는 무관심과 뻐한 핑계를 떨쳐버리고 모든 가난한 이와
모든 형태의 가난을 알아보라는 부름을 받는다”며 가난한 이들과 연대를 요청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선에 직접 참여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참 행복한 삶!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참행복 역시 선택입니다.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 때, 참행복입니다.
오늘 연중 제33주일, 주님을 선택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참행복한 사람들입니다.
1.길은 어디에?
많은 이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2.빛은 어디에?
많은 이들이 빛을 잃고 어둠속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3.진리는 어디에?
많은 이들이 진리를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4.희망은, 꿈은 어디에?
많은 이들이 희망을, 꿈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길을 잃을 때, 빛을 잃을 때, 진리를 잃을 때, 희망을, 꿈을 잃을 때,
어둠속에 빠져들고 죄를 짓기 마련이며,
사회든 사람이든 병들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궁극의 길이자 빛이자 진리이자 희망이신, 꿈이신 주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참행복한 삶입니다.
오늘은 “참 행복한 삶”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라!
한결같이, 끊임없이, 열렬히, 항구히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행복의 우선적 조건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정체성 또렷한 삶이요, 주님 안에 날로 깊어지는 믿음의 뿌리와 더불어
늘 푸르른 희망입니다.
주님을 진정 사랑할 때 이웃들,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잠언이 칭송하는 훌륭한 아내가 이런 주님 사랑의 모범입니다.
“훌륭한 아내를 누가 얻으리오?
그 가치는 산호보다 높다. 남편은 그를 마음으로 신뢰하고, 소득이 모자라지 않는다.
그 아내는 한평생 남편에게, 해 끼치는 일 없이 잘해 준다. 한 손으로는 물레질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잣는다.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준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얻는다.”
이런 아내들로, 어머니들로, 여인들로 가득한 사회라면 얼마나 맑고 밝고 생기차고 향기롭겠는지요!
참으로 주님을 경외하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상징하는, 참행복한 훌륭한 여인들입니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함은 영원하다”는 말씀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둘째, 깨어 있어라!
막연히 깨어 있을 때 오래 못갑니다.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는 주님을 기다릴 때 저절로 깨어 있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기다릴 때, 주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깨어 있게 됩니다.
사랑할 때 잠들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깨어 있어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죄도 짓지 않습니다.
깨어 있을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에 이어지는 깨달음의 은총들입니다.
주님의 날이 밤도둑처럼 올 때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이는 깨어 있다 주님을 맞이합니다.
우리를 격려하시는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용기백배하게 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참으로 주님을, 이웃을, 나를 사랑할 때 깨어 있게 되고 빛의 자녀로, 낮의 자녀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의 훈련과 습관, 그리고 깨어 있음의 훈련과 습관과 더불어 주님의 참 행복한 삶의 선물입니다.
셋째, 책임을 다하라!
주님께 주어진, 맡겨진 책임을, 본분을 다할 때 비로소 참행복의 구원의 삶입니다.
책임과 본분을 다하는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깨어 있는 이들이 바로 이런 책임을,
본분을 다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살 때 주님과의 축복된 만남입니다.
오늘 비유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언젠가의 하늘 나라가 아니라 주어진 능력에 따라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늘 나라의 꿈입니다.
바로 오늘 능력에 따라 최선을 다함으로 좋은 성과를 올린 다섯 탈렌트, 두 탈랜트 받은 이들이 그 모범입니다.
그러니 이웃과 비교할 것도, 경쟁할 것도, 이웃을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맡겨진 그 이상, 그 이하도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습니다.
받은 능력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러니 경쟁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입니다. 부단히 자기를 일깨워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아초월의 삶이 절실합니다.
이래야 공동체 형제들간 상호 평화로운 공존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다섯 탈렌트 받아 다섯 탈렌드 남긴 이나, 두 탈렌트 받아 두 탈렌트 받아 두 탈렌트 남긴 이나
주인은 똑같이 기뻐하시며 칭찬하십니다.
주인이 상징하는 바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바 삶의 “업적의 양”이 아니라 “삶의 충실도”, “삶의 순도(純度)”입니다.
5/5나 2/2나 삶의 충실도는 똑같이 1입니다.
이 둘은 주님을 사랑했기에 주님을 알았고 자기를 알았던 겸손하고 지혜로웠으며
깨어 자기의 책임을 다했지만, 한 탈렌트 받은 이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주님을 너무나 몰라 오해했고
무책임하고 태만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깨어 살지도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저자에게서 그 한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스스로의 무지의 태만으로 자초한, 스스로 선택한 화요 재앙이요 심판이니 누구를 탓합니까!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라는, 깨어 살라는, 제 책임을 다하라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하늘나라 비유입니다.
삶은, 행복은 선택입니다.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이요, 깨어 사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이요,
자기 책임을 다하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입니다.
이렇게 선택하고 노력하여 습관화할 때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늘 나라의 참 행복이요 축제인생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1.주님을 사랑하며, 2.깨어 각자 주어진 삶의 제자리,
꽃자리에서, 3.제 책임을 다하며 하늘 나라의 참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11/20(월)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한 소경이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는 데도 큰 소리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십니다.
그는 비록 소경이었지만 하느님께서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기에
자신에게 좋은 것만을 주실 것임을 오랜 시간 묵상해온 사람이었던 것입니다.(전삼용 신부)
2.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 역시 산산조각난 인생일 뿐입니다.
주님 크신 은총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제발로 서있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저 주님 자비만 바랄 뿐입니다.
주님 뜨거운 사랑만 기대할 뿐입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마태 25,15)
주님!
당신은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제게 탈렌트를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진정, 그 크신 당신의 사랑을 제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선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삶은, 행복은 선택입니다.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이요, 깨어 사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이요,
자기 책임을 다하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입니다.
이렇게 선택하고 노력하여 습관화할 때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늘 나라의 참 행복이요 축제인생입니다.
(이수철 신부)
11/20(월)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331일 기도
복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소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볼 수 있게 하소서.
하느님의 전지전능한 은총을 만나게 하소서.
- 2023년 11월20일(월) 6시4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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