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1월 30일 목요일[(홍)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1월 30일 목요일[(홍)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베드로 사도의 동생이다. 갈릴래아의 벳사이다에서 태어난 그는 형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였다(마태 4,18 참조). 또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며 자신의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이끌었다(요한 1,40-42 참조). 그는 그리스 북부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전해지며, 십자가 위에서 순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입당송

마태 4,18-19 참조
주님이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를 보시고 부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리라.
<대영광송>

본기도

주님,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간절히 비오니
일찍이 복된 안드레아 사도가 주님의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렸듯이
이제는 주님 곁에서 저희를 위하여 영원한 전구자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10,9-18
형제 여러분,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9(18),2-3.4-5ㄱㄴ(◎ 5ㄱ)
◎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복음 환호송

마태 4,19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리라.
◎ 알렐루야.

복음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안드레아 축일에 바치는 이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어
저희가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도 감사송 1 : 하느님 백성의 목자인 사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또는>
<사도 감사송 2 : 교회의 기초이며 증거자인 사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도들을 기초로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어
지상에서 주님의 거룩하고 영원한 표지가 되게 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와 영원히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41-42 참조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는 그리스도라 불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그를 예수님께 데려갔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성사로 저희에게 힘을 주시어
저희가 복된 안드레아 사도를 본받아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살다가
그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사진설명: 성 안드레아 사도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우리말의 어원을 배우는 것은 유익하고 재미있습니다. ‘문지방에 앉지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어려서 어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유는 몰랐지만 어른들이 그렇게 말하니 따랐습니다. 며칠 전에 그 의미를 들었습니다. 문지방은 경계선이라고 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선과 악의 경계, 빛과 어둠의 경계, 적과 친구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경계는 금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낙원을 주셨습니다. 그 낙원에는 하나의 금기가 있었습니다. ‘선악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것들은 다 가져도 되지만 선악과는 만지거나,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는 롯에게도 를 돌아보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면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신학생들은 방학이 되기 전에 9일 동안 오 예수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라틴어로 된 노래입니다. 가사의 일부 중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신학생들은 혼돈의 경계에 있어서는 안 되고 질서의 경계 안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신학생들은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생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오 예수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 예수님, 내 사랑이신 예수님/ 나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오니/ 당신에서나 이 신학교에서나 떠나있지 않으렵니다./ 가장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를 지키고 보살펴 주십시오./ 신학교 밖에서 세속, 마귀, 육신이 흉악한 괴물처럼/ 우리를 공격하며 거룩한 이곳에서 끌어내리려 합니다./ 가장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살펴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대의 것들을 더욱 사랑한다면/ 그대는 나에게 합당하지 않고 내 제자가 아니리라./ 가장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를 지키고 보살펴 주십시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진실히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무도 하늘나라의 사람이 아니니라./ 가장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를 지키고 보살펴 주십시오./ 또한 그대들은 불리움과 뽑히움을 확실하게 하도록 힘쓸 것이며/ 죄에서 떠나 있으라.” 사실 신학생 때는 이 노래의 가사를 깊이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이 노래가 끝나면 신나는 방학이 기다리고 있다는 설렘과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주님의 품에 확실하게 있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정하신 을 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전임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셨던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추기경님과 8년 동안 교구청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은 소탈하시고, 검소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사제들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높은 산과 같았다면, 정진석 추기경님이 자상한 어머니 같았다면 염수정 추기경님은 언제나 푹 쉴 수 있는 동네의 느티나무 같았습니다. 추기경님과 많은 일화가 있지만 기억나는 것 하나만 나누고 싶습니다. 7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관리국장 신부님은 그 건물을 은퇴사제 숙소로 사용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청소년 국장 신부님은 청년사목 사제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성소국장이었던 저는 예비 신학생들 위한 기숙사로 사용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추기경님과 산보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추기경님! 그 건물을 과거의 사목을 위해 투자하실 건지요? 추기경님! 그 건물을 현재를 위한 사목에 투자하실 건지요? 추기경님! 그 건물을 미래를 위한 사목에 투자하시겠습니까?” 추기경님께서는 저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셨고, 그 건물은 예비 신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되었습니다. 그 건물은 예비 신학생들을 위한 못자리가 되었고, 그 학생들이 교구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혼돈의 선에서 질서의 선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가족들도 뒤로한 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혼돈의 선을 넘어 주님의 품으로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갰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가해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마태오 4,18-22

 

사람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죽을 때 밝혀진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성 안드레아는 서기 60년경 그리스 파트라스에서

엑스(X) 십자가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힐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통적인 십자가 대신에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이 십자가는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 기록에 따르면 그는 못 박히지 않고 십자가에 묶여 며칠 동안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 그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파했습니다. 그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그가 인내하고 계속해서 전파한 것은 그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헌신의 증거로 여겨집니다. 

 

성 안드레아는 마치 다리와 같은 중간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사도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하실 때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자신 깊숙이 있는 하느님의 존재를 꺼내 보여 주어 그도 그분과 친교를 맺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꺼내주는 방식은 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의

죽음으로 아버지를 우리에게 소개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 ‘히치’(2005)에서 윌 스미스는 뉴욕시의 전문 데이트 컨설턴트인 알렉스 히치의 역을

맡았습니다. 히치는 남성이 관심 있는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돕는 전문가입니다. 

 

그의 최근 고객은 앨버트로 유명인 알레그라에 반했습니다. 앨버트를 돕는 동안 히치는 가십

칼럼니스트 사라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알렉스는 전문가답게 사라를 꼬시고

사라는 쉽게 넘어옵니다. 그런데 사라는 자신의 칼럼에 쓰기 위해 신비한 데이트

컨설턴트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앨버트는 히치의 조언으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알레그라와 데이트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자신이 사귀게 된 히치가 여자 꼬시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인 것을 알고는

크게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알레그라의 귀에도 들어가 알렉스가 그 사람의 코치를 받고

자기에게 접근한 것을 알게 됩니다.

졸지에 알렉스와 앨버트는 여자들에게 차입니다. 

 

앨버트는 이제 다음 단계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렉스에게 묻습니다.

자신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는 사라에게 화가 잔뜩 난 알렉스는 이제 끝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에 진심이었던 앨버트는 알렉스에게 결국엔 기술만 가르쳤지

진짜 사랑을 모르는 겁쟁이라고 말하고 알레그라를 찾아갑니다.

 

앨버트의 진심에 감동한 알렉스도 사라를 찾아가 용서를 청하고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두 여자는 두 남자의 진심을 받아주어 두 커플이 동시에 결혼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알렉스는 사랑을 이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리가 되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어야 할 때 그에게서는 자존심이 나왔지, 사랑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 죽어갈 때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마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기술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간직한 보석입니다. 

 

보석함이 썩거나 불에 타면 무엇이 나올까요? 보석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죽을 때에도 주님을 보여 주고 전할 수 있다면 그분이 나의 보석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러니 성 안드레아처럼 죽을 때에도 주님을 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평생 무엇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살아왔는지가 증명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담화, 곧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으켜줍니다. 먼저 박해와 박해 가운데에 있게 될 증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 그러나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

(루카 21,12-15)

박해가 오히려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깨우치십니다.

 곧 박해를 당하게 되면,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눌변인 모세의 입과 함께 계셨듯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탈출 4,11-12.15-16).

 

그러니 박해를 통하여 오히려 우리는 신앙이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기의 순간은 가장 좋은 기회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7-18)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보호해주고 지켜주실 것이니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움 받거나 배척받게 되면 힘들어 합니다.

고난과 시련, 어려움이나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힘든 것은 피하고, 편하고 좋고 즐거운 것, 듣기 좋은 말에 더 맞들이고 쉽게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19)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성 베네딕도 역시, ‘인내’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수도규칙 머리말 50)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입니다.”

(필립 3,10; 로마 8,1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루카 21,17)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도 배척도 당신과 함께 받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

 

“All time is in God’s hand”

(모든 시간이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

 

어제 읽은 영어 글귀가 내내 생각납니다. 이런 하느님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연중 마지막 주간은 해마다 갖는 요셉 수도원 연피정 기간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집중하고 쉴 수 있어 좋습니다. 피정강의로 수고중인 강사 신부님과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강의하시노라 수고 많습니다!”

“수사님들 다 아시는 내용인데요.”

힘없이 말하는 강사 신부님께 즉시 드린 답입니다.

“늘 들어도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

 

순간 환해지는 느낌의 신부님 얼굴이었습니다. “늘 들어도 새롭다”, 정말 잘 대답한 것 같으니 그대로 성령님 덕분입니다. 깨어 있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나날이 있을 뿐입니다. 똑같은 날은 하나도 없고 늘 새롭고 좋고 거룩한, 날로 깊어지는 반복이 날이 있을 뿐입니다. 구원의 진리는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가 구원의 진리가 계시되는 꽃자리입니다. 어제 요한 카시아누스의 담화집을 읽는중 마음에 와닿은 대목입니다. 

 

-사도의 말씀에 따라 사람은 “영과 정신이 새로워져”(에페4,23) 날마다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필리3,13) 전진해야 한다. 그것을 소홀히 한다면 사람이 곧 뒷걸음치고 나빠지게 된다. 우리가 올라가지 못했던 날에는 우리가 뒤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을 얻지 못하면 무엇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덕행을 닦는 노력과 열성을 중단해서는 안되며 꾸준히 그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진전이 중단되면 아래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적 삶의 지혜입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주제는 “재난의 시작”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삶은 늘 재난의 시작처럼 생각됩니다. 물론 복음은 구체적 박해의 재난을 뜻하지만 우리의 작금의 사회현실을 봐도 삶은 언제나 늘 재난의 시작처럼 위기입니다. 그러나 궁극의 승리는 하느님께 있고 이런 하느님을 믿는 자들은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예수님 역시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이런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너희는 명심하여 미리부터 변론한 말을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겠다.”

 

추호도 박해나 재난의 상황에 당황하거나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언변과 지혜를 주실 것이니 온갖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주눅들지 말고 평온한 마음을 지니며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결정적 구원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

 

주님 이름 때문에 비록 우리가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하느님의 보호하에 있기에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에 믿음과 희망을 둘 때 항구한 인내요, 인내로서 생명을 얻는 구원의 삶,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 주님 말씀이 이런 우리를 격려합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묵시2,10)

 

죽을 때까지 인내하며 순교적 삶에 충실할 때 주님께 생명의 화관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 이전에 이미 제1독서의 주인공 다니엘을 통해 이런 순교적 삶의 모범을 봅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무장한 다니엘은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에서 침착하고 지혜롭게 왕궁 벽의 글자를 풀이해 줍니다. 벨사차르 임금의 온갖 선물과 상도 겸손히 사양하고 임금의 잘못된 처신을 충고합니다. 목숨을 건 용기요 이런 대담함은 그대로 하느님을 배경했기에 가능합니다. 참으로 멋지고 매력적인, 기품이 넘치는 욕심이 전무한 하느님의 사람, 다니엘입니다.

 

“임금님의 선물을 거두시고 임금님의 상도 다른 이에게나 내리십시오. 임금님께서는 주님을 거슬러 자신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는 신들을 찬양하셨습니다. 임금님의 목숨을 손에 잡고 계시며 임금님의 모든 길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찬송하지 않으셨습니다.”

 

벨사차르 임금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주는 질책 말씀입니다. 모든 시간이, 우리의 목숨과 길 모두가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는 진리를 결코 잊어선 안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왕궁벽의 “므네 므네 트켈 파르신” 글자 풀이도 의미심장합니다.

 

-1.‘므네’는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을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2.‘트켈’은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3.‘프레스(파르신의 단수)’는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여 벨사차르 임금은 물론 모두가 하느님 손 안에 있다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결코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을 떠난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고유한 사명을 지닌 섭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잊었던 벨사차르 임금이요 이 임금처럼 저울에 달아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의 “트겔”에 해당되지는 않는지 우리 존재의 무게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지 않지만 곧 이어지는 말씀이 섬뜻한 느낌입니다.

 

“벨사차르는 분부를 내려,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 목걸이를 목에 걸어 주고, 그가 나라에서 셋째가는 통치자가 된다고 선포하게 하였다. 바로 그날 밤에 칼데아 임금 벨사차르는 살해되었다.”(다니5,29-30)

 

곧장 이어진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입니다. 다니엘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벨사차르 임금의 비참한 최후입니다. 하느님이 내린 심판이라기 보다는, 하느님을 무시한, 망각한 삶이었기에 스스로 자초한 심판에 비참한 최후의 죽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시종여일 한결같이 충실한 자들은 복음 말씀처럼 하느님의 보호하에 있기에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시간이, 모든 삶이 하느님의 손안에 있으며 궁극의 승리 역시 하느님께 있습니다. 매일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는 깨달음입니다. 궁극의 승리자는 인내하는 자요 그에게 선사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한결같이 충실한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루카21,18-19). 아멘.


[11/30(목)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혼돈의 선에서 질서의 선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가족들도 뒤로한 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혼돈의 선을 넘어 주님의 품으로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갰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조재형 신부)

 

2. 성 안드레아는 마치 다리와 같은 중간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사도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하실 때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자신 깊숙이 있는 하느님의 존재를 꺼내 보여 주어 그도 그분과 친교를 맺게

만드는 일입니다. (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루카 21,17)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도 배척도 당신과 함께 받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

 

주님 이름 때문에 비록 우리가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하느님의 보호하에 있기에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에 믿음과 희망을 둘 때 항구한 인내요, 인내로서 생명을 얻는 구원의 삶,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이수철 신부)

 

[11/30(목)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 341일 기도]

 

복음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혼돈의 선에서 질서의 선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들 또한 혼돈의 선을 넘어 주님의 품으로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갰습니다.

 

- 2023년 11월30일(목) 7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