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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감사일기

[매묵]2024년 2월 2일 금요일[(백)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신부님 강론 5개

[매묵]2024년 2월 2일 금요일[(백)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신부님 강론 5개

오늘 전례

교회는 성탄 다음 사십 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한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이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맞이하는 이 축성 생활의 날에 수도 성소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축성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한편 한국 교회는 ‘Vita Consecrata’를 ‘축성 생활’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봉헌 생활의 날’ 을 ‘축성 생활의 날’로 바꾸었다(주교회의 상임위원회 2019년 12월 2일 회의).

초 축복과 행렬
제1양식: 행렬

1. 정해진 시간에 신자들은 행렬하여 들어갈 성당 바깥의 적당한 장소나 소성당에 모인다. 신자들은 불을 켜지 않은 초를 손에 들고 있는다.

2. 사제는 미사 때처럼 흰색 제의를 입고 봉사자들과 함께 나온다. 사제는 제의 대신에 플루비알레를 입을 수 있다. 플루비알레는 행렬이 끝나면 벗는다.

3. 신자들은 초에 불을 켜고 그동안 아래의 따름 노래를 부른다.
◎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 알렐루야.
<또는 다른 알맞은 노래를 부른다.>

4. 노래가 끝나면 사제는 교우들을 바라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고 말한다. 이어서 사제는 보통 때와 같이 교우들에게 인사하고, 아래의 말이나 비슷한 말로 오늘 예식의 뜻을 새기며 적극 참여하도록 권고한다.

+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사십 일 전에 우리는 주님의 성탄 축제를 기쁘게 지냈습니다.
오늘은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한 거룩한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식으로 율법의 규정을 지키시고
당신을 믿는 백성을 만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한나와 시메온 두 노인은 성전에 나와서
성령의 비추심으로 주님을 알아보고 기쁨에 넘쳐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 자리에 모여 왔으니
그리스도를 맞이하러 하느님의 집으로 나아갑시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오실 때까지는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며 빵을 나눌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나고 알아 뵈올 것입니다.

5. 이 권고 다음에 사제는 팔을 벌리고 아래의 기도를 바치며 초를 축복한다.
+ 기도합시다.
모든 빛의 샘이며 근원이신 하느님,
오늘 모든 민족들을 비추시는 계시의 빛을
의로운 시메온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어
이 초에 + 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이 초를 손에 들고 하느님의 이름을 찬미하는 백성의 정성을 굽어보시어
현세에서 덕을 닦아 마침내 영원한 빛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또는>
참빛이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빛을 창조하시고 온 누리를 비추시니
신자들의 마음을 밝혀 주시고
성전에서 저희가 바치는 이 초의 광채로
마침내 모든 이가 하느님의 영원한 빛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사제는 말없이 초에 성수를 뿌린다. 그리고 행렬을 하기 전에 향로에 향을 넣는다.>

6. 그다음에 사제는 부제나 봉사자에게서 준비된 촛불을 받아 들고 행렬을 시작한다. 부제는(부제가 없으면 사제가) 다음과 같이 외친다.
+ 평화의 행렬로 주님을 맞이하러 갑시다.
<또는>
+ 평화의 행렬을 합시다.
<경우에 따라 모두 응답한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7. 모두 촛불을 들고, 행렬을 하는 동안 아래의 후렴 “다른 민족들에게는”을 찬가(루카 2,29-32)와 함께 부르거나, 따름 노래 “시온아, 너의 신방을” 또는 다른 알맞은 노래를 부른다.
◎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옵니다.
○ 주님, 당신 말씀대로 이제는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하소서. ◎
○ 제 눈으로 당신 구원을 보았나이다. ◎
○ 당신이 모든 민족들 앞에 마련하신 구원이니 ◎
<또는>
◎ 시온아, 너의 신방을 꾸미고 임금님 그리스도를 모셔라.
하늘의 문이신 마리아를 맞이하여라.
마리아가 새로운 빛, 영광의 임금님을 데려오셨네.
샛별이 뜨기 전에 동정녀가 아드님을 품에 안고 오셨네.
시메온은 아드님을 두 팔로 받아들고 백성에게 외쳤네.
이 아기는 삶과 죽음의 주님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시다.

8. 행렬이 성당으로 들어갈 때에 미사의 입당송을 노래한다. 사제는 제대 앞에 이르러 경의를 표시하고, 경우에 따라 분향한다. 그다음에 자리로 가서, 행렬 때 플루비알레를 사용했으면 그것을 벗고 제의로 갈아입는다. 대영광송을 노래한 다음에 관례대로 본기도를 바친다. 그리고 보통 때와 같이 미사를 계속한다.

제2양식: 성대한 입당

9. 행렬할 수 없는 곳에서는, 신자들은 손에 초를 들고 성당 안에 모인다. 사제는 흰색 제의를 입고 봉사자들과 몇몇 신자들과 함께 문간이나 신자들이 예식에 잘 참여할 수 있는 알맞은 자리로 나온다.

10. 사제가 초 축복을 위하여 정해 놓은 자리에 도착하면, 신자들은 초에 불을 켜고 그동안 따름노래 “보라, 우리 주님이(3항)”나 다른 알맞은 노래를 부른다.

11. 이어서 사제는 인사, 권고, 초 축복을 앞의 4-5항과 같이 한다. 그다음에 노래를 부르며 제대를 향하여 행렬을 한다(6-7항). 미사에 대해서는 8항의 규정을 지킨다.

입당송

시편 48(47),10-11
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대영광송>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느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비오니
사람이 되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셨듯이
저희도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저희 자신을 봉헌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2,14-18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4(23),7.8.9.10(◎ 10ㄴㄷ)
◎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
○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 싸움에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
○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
○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

복음 환호송

루카 2,32 참조
◎ 알렐루야.
○ 그리스도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시네.
◎ 알렐루야.

복음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32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세상을 구하시려고 흠 없는 어린양으로 자신을 봉헌하신
외아드님의 제사를 받아들이셨으니
교회가 기쁨에 넘쳐 봉헌하는 이 예물도 기꺼이 받아들이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감사송

<주님의 축일과 신비 감사송 7 : 주님 봉헌의 신비(2월 2일)>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하신 성자께서는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시어
성령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영광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밝혀지셨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를 기쁘게 맞이하며
천사들과 성인들과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2,30-31 참조
제 눈으로 주님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모든 민족들 앞에 마련하신 구원을 보았나이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시메온의 기다림을 채워 주셨으니
이 성체를 모신 저희가 주님의 은총을 풍부히 받고
시메온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품에 안는 기쁨을 누렸듯이
저희도 기쁘게 주님을 맞이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주님 봉헌.

오늘의 묵상

1. 2024년 02월 02일 금요일

[주님 봉헌 축일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주님 봉헌 축일인 오늘 교회는 성전에 봉헌되신 예수님을 기념하고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축성 생활을 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더불어 세례와 함께 주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 또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여야 함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봉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봉헌은 단순히 어떤 결심이나 서원과는 다른 더 근본적인 행위입니다

결심은 어떤 일을 하겠다고 앞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향하려는 결심도 있지만결심이라는 행위 자체는 결심한 것을 향하여 를 잘 가다듬고결심한 바를 실천으로 옮길 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 자신에게 집중합니다

그러나 봉헌은 에게서 벗어나, ‘봉헌받는 분에 집중하는 것이고마음이 에게서 떠나 다른 분에게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서원은 자신에게 엄격한 의무를 부과하면서하느님께 특정한 일을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물론 그 약속의 궁극적 목적이 자신을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는 봉헌이 될 수는 있겠지만서원 자체는 어떤 객관적인 일을 하는 의무를 받는 것입니다

봉헌은 결심이나 서원처럼 사랑이 자라나고 확인할 수 있는 어떤 일을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봉헌은 직접 마음에서 마음으로인격에서 인격으로 사랑 자체가 자유롭게 흐르는 것입니다

봉헌은 아주 순수하고아주 명료하며아주 진지하게 나를 다른 이에게 주는 사랑의 행위입니다(칼 라너기도의 절실함과 그 축복에 대하여』 참조).

주님께 나 자신을 봉헌한다고 하면서도 봉헌받는 분이 아니라 봉헌하는 ’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지또는 봉헌의 행위보다 봉헌을 위한 개별적인 수단이나 에 더 마음을 많이 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주님 봉헌 축일

복음루카 2,22-40

 

오늘 우리는 존재 자체로 주변의 어둠을 밝히고 있습니까?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성전으로 모시고 가서

하느님께 봉헌함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성전에 봉헌되신 아기 예수님처럼 주님께 봉헌되고 선물이 되기를 청하는 마음으로

초를 봉헌합니다.

 

봉헌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묵상해봅니다. 봉헌한다는 것은 드린다는 것, 바친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를 하느님께 바칠까요? 하느님은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먼지요 티끌이요,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이 세상에 불러주신 분이십니다.

 

그분 섭리의 손길 아래 우리 인생은 활기를 띠며 가치와 의미를 지닙니다.

그분의 크신 자비가 아니라면 우리는 잠시도 제힘으로 서있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우리는 좋은 것이 생겼다면, 감사할 일이 생겼다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상의 선물로 주신 우리 인생이기에, 우리 자신을 수시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역동적인 것이며, 상호적인 것이며, 오고가는 것입니다.

맨날 받기만 하고 드리는 것이 없다면, 그 관계는 절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살아있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주고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 보면 그저 하느님께 청하기만 합니다.

하느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난감하고 어색할 것입니다.

자녀로서 아버지께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나는 과연 주님께 무엇을 드려왔나?

무엇을 봉헌하고 있나?

무엇을 선물할 것인가?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제대에 봉헌할 초를 깎으며 초가 지닌 상징성을 생각합니다.

초는 언제나 자신을 녹여가며, 자신을 소멸시켜가며 주변의 어둠을 밝힙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주변을 화사하고 훈훈하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는 존재 자체로 주변의 어둠을 밝히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과 세상을 위해 자신을 조금씩 소멸시켜 가고 있습니까?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신부님들과 함께 과달루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루르드와 파티마는 지명입니다. 그런데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지명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발현하시면서 디에고 성인에게 나는 과달루페의 성모라고 하셨습니다. 과달루페라는 말은 원주민의 말인데 뱀을 물리친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뱀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동물입니다.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우리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루르드와 파티마의 성모님과 달리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디에고 성인의 틸마(원주민이 입던 망토) 성화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모님의 성화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먼저 성모님의 피부는 원주민의 피부와 같습니다. 성모님의 망토에는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데 1531년 당시의 별자리와 같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드레스는 스페인의 여인들이 입던 드레스라고 합니다. 성모님의 발아래에 천사가 성모님의 망토와 드레스를 잡고 있습니다. 이는 원주민과 스페인 정복자의 화합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필마의 수명은 대게는 40년 이내인데 성화가 새겨진 필마는 7년 후면 500년이 되지만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눈을 컴퓨터로 확대해 보면 성모님의 눈에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합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풀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성모님은 디에고 성인에게 성당을 지어 봉헌하라고 하였습니다. 디에고 성인은 주교님께 성모님의 이야기를 전했지만 주교님은 원주민인 디에고 성인의 말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성모님은 12월에 장미가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고, 디에고 성인은 그 장미를 틸마에 담아 주교님께 드렸습니다. 주교님은 12월에 그것도 멕시코에서는 볼 수 없는 유럽의 장미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디에고 성인이 그 필마를 펼쳐서 장미를 주교님께 드리는 순간 틸마에는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가 새겨졌다고 합니다. 이후로 과달루페에는 성전이 봉헌되었고, 멕시코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 이후로 800만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칼과 총으로 선교하려고 했을 때는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는데 성모님의 발현 이후로 많은 원주민들이 스스로 세례를 받으려고 성당을 찾았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스페인의 정복자들에게 발현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주교님이나 사제에게 발현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신앙이 깊었던 원주민 디에고 성인에게 발현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직책이나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과 뜨거운 신앙입니다.

 

오늘 서울대교구에서는 사제서품식이 있습니다. 16명의 부제가 사제서품을 받습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던 것처럼, 새 사제들의 부모님도 사랑하는 자녀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고, 봉헌하였습니다. 새 사제들은 신학교에서 3가지 덕목을 배웠습니다. 첫째는 성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복음을 선포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새 사제들이 기도를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둔다면 앞으로의 사목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지덕입니다. 사제는 개인의 영성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전해주는 영성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개인의 말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성경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셋째는 체덕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였습니다. 감기에 걸려서 심한 기침을 하는 사람이 감기약을 팔면 사람들은 사지 않습니다. 사제는 늘 자신의 건강을 잘 챙겨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을 해야 합니다.

 

주님! 오늘 사제서품을 받는 16명의 새 사제들을 축복해 주시고, 주님께 받은 모든 사랑을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눌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4.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주님 봉헌 축일 (축성 생활의 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부모는 아이를 성전에 있는 나이 많은 랍비에게 데려가 복을 빌어주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고 나자 즈카르야가 노래를 불렀듯이, 예수님이 할례를 받은 후에 시메온이 찬미합니다(라틴어 성경 첫 단어를 따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 부른다). 

 

“이제는 떠나가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사야서(40,5;42,6;46,13;49,6;52,9-10)를 반영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성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 불리기도 하고, 주로 동방교회에서는 저녁기도 때, 서방교회에서는 끝기도 때 바쳐집니다.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29-32)

“이제야”라는 말은 ‘현재’가 ‘구원이 성취된 시대’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이사야서(40,5)의 “모든 육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말을 반영해줍니다.

 

이 말을 들은 아기 예수님의 부모는 '놀라워하는데',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루카 2,34-35)

이는 더러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대부분은 배척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임을 밝혀줍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겪게 될 마리아의 고통을 암시해줍니다. 

사실 성모님은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도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문제 가정이었을 것입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 했고,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 했으며,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남편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셨다는 것,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과 구원의 길에 참여했음을 말해줍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사셨던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를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봉헌의 삶’, ‘축복의 삶’은 어려움과 시련이 없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축복하시는 그분의 뜻에 봉헌하고 사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반대를 받는 표징”

(루카 2,34)

 

주님!

반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비난 받고 모욕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미움 받을 용기를 주소서.

욕먹지 않으려 불의에 타협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 때문에 기꺼이 반대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나쁜 사람으로 취급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반대와 고통 속에서도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5.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2.1.연중 제4주간 목요일                                                           

                                                                                                                         1열왕2,1-4.10-12 마르6,7-13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

                                       “소유가 아닌 존재론적(存在論的), 시적(詩的)인 

                                                               복음 선포의 삶“

 

 

"날마다 새기는 다산 인생 문장 365일, 다산 어른의 하루"란 2월 주제와 2월1일 말씀입니다.

형창설안(螢窓雪案: 반딧불로, 눈빛으로 글을 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 공부란 환경에

굴하지 않는 꾸준함이다)이 2월 주제 말씀이고, “시는 시대의 진실한 울음이다.

 

우리는 시를 닮기 위해 시를 읽는다”와 <시경>의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삼백편의 시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생각에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2월1일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한결같은 공부의 자세와 시적인 삶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예전에 써놨던, 언젠가 인용했던 ‘시처럼 살고 싶다’란 글도 떠올랐습니다.

 

“시처럼 살고 싶다.

 하얀 여백의 종이위에 시처럼

 침묵의 여백의 시공안에 시처럼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

 여백을 가득 채운 수필이나 소설이 아닌

 시처럼 살고 싶다.”-1998.1.24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누구나의 갈망이요 소원이 “하느님의 시詩처럼 사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실 사람 내면을 잘 들여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시인詩人임을 발견합니다.

새벽 휴게실에 들렸다가 피정 마치고 떠난 이들의 남긴 글 세편도 시처럼 마음에 와 닿습니다.

 

“늘 하느님을 만나고 대화하고 위로와 힘을 얻고 갑니다.

새해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수도원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요셉수도원의 수사님들을 뵈면서 많은 사랑과 위안을 체험했음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곁에서 잘 머무르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아, 수도원은 하느님의 시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위로와 위안,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존재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수도원 곳곳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풍경 모두가 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은 2월 첫날, 2월4일은 입춘立春이네요. 봄이 성큼 가까웠음을 느낍니다.

아직은 겨울이지만 봄꿈을 꾸는 겨울나무들처럼 보입니다.

며칠전 인용했던, 한동안 행복해 했던 “봄길”이란 시를 봄길 사진과 더불어 어제도 두분과 나눴습니다.

 

“한겨울 봄꿈을 꾸고나니

 봄길이 열렸어요.

 봄향기 맡으며

 봄님 에수님과 함께

 봄빛을 받으며

 봄길을 하늘길을 걷습니다”-2024.1.27.

 

이에 대한 두편의 답글도 시적詩的입니다.

 

“예, 저도 봄꿈을 꾸고 봄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런 간절한 희망을 갖습니다. 아름다운 시, 감사합니다.”

“이 시를 읽으며 위로를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같은, 시같은 예수님입니다.

봄꿈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의 꿈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꿈이자 실현입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바라보며 참으로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실현했습니다.

하느님의 무인武人이자 동시에 시인詩人이며 예인藝人이었던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죽음에 앞서 남긴 유언도 아름답기가 시적詩的입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성에 묻히니 죽음도 시적詩的이고, 솔로몬이 뒤를 이어

왕권이 튼튼해지니 끝까지 보속을 다하고 거룩한 시적詩的인 죽음을 맞이한 다윗을 통한 축복이

계속됨을 봅니다.

 

꿈중의 꿈이 하느님의 나라 꿈이고, 희망중의 희망이 하느님 나라의 희망입니다.

살아있다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꿈과 희망이, 하느님 나라의 꿈과 희망이 생생할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생생히 꿈꾸며 복음 선포를 통해

그 꿈과 희망을 실현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런면에서 예수님의 삶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꿈도 희망도 보고 배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꿈과 희망을 보고 배웠을 것이며,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인

예수님만으로 행복했을 것입니다.

 

이런 주님과 함께 했기에 자발적 가난의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삶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무소유의 단순한 모습으로 파견되는 다음 장면의 묘사가 참 아름답고 완벽하고 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예수님의 신뢰와 희망과 사랑을 가득 담고 파견되는 제자들은 부족한 것 같으나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텅 빈 충만의 느낌입니다.

소유로부터 완전 자유로워진 존재의 삶이요 본질적 가난의 삶입니다.

 

이런 무소유의 삶을 가능케 한 것은 곳곳에 자리잡은 착한 신자들의 환대 덕분이요

이런 환대 역시 참으로 아름다운 시적 자세에 속합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복음 선포의 자세도 거칠 것이 없고 홀가분하고 창공을 나는 새처럼

참으로 눈부시고 자유롭고 힘차보이니 그대로 하느님의 시같은 삶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오늘 복음과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와 더불어

우리를 치유해주시고 당신의 권능으로 충만케 하시어 우리 모두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2/2(금)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되새김 구절

 

1. 봉헌은 직접 마음에서 마음으로인격에서 인격으로 사랑 자체가 자유롭게 흐르는 것입니다

봉헌은 아주 순수하고아주 명료하며아주 진지하게 나를 다른 이에게 주는 사랑의 행위입니다(칼 라너기도의 절실함과 그 축복에 대하여』 참조).(최정훈 신부)

 

2. 오늘도 제대에 봉헌할 초를 깎으며 초가 지닌 상징성을 생각합니다.

초는 언제나 자신을 녹여가며, 자신을 소멸시켜가며 주변의 어둠을 밝힙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주변을 화사하고 훈훈하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는 존재 자체로 주변의 어둠을 밝히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과 세상을 위해 자신을 조금씩 소멸시켜 가고 있습니까?(양승국 신부)

 

3. 새 사제들은 신학교에서 3가지 덕목을 배웠습니다. 첫째는 성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복음을 선포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새 사제들이 기도를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둔다면 앞으로의 사목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지덕입니다. 사제는 개인의 영성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전해주는 영성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개인의 말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성경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셋째는 체덕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였습니다. 감기에 걸려서 심한 기침을 하는 사람이 감기약을 팔면 사람들은 사지 않습니다. 사제는 늘 자신의 건강을 잘 챙겨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을 해야 합니다.(반영억 신부)

 

4. <오늘의 말·샘 기도>

 

“반대를 받는 표징”

(루카 2,34)

 

주님!

반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비난 받고 모욕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미움 받을 용기를 주소서.

욕먹지 않으려 불의에 타협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 때문에 기꺼이 반대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나쁜 사람으로 취급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반대와 고통 속에서도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5.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2/2(금)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405(제35)일 기도

 

복음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

(루카 2,34)

 

주님!

반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비난 받고 모욕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미움 받을 용기를 주소서.

욕먹지 않으려 불의에 타협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 때문에 기꺼이 반대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나쁜 사람으로 취급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반대와 고통 속에서도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2월2일(금) 6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