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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5월 26일 주일[(백)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5월 26일 주일[(백)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을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초기 교회 때부터 이어져 왔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보편 전례력에 들어온 것은 14세기, 요한 22세 교황 때이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이는 미사를 시작할 때 사제가 삼위의 이름으로 교우들과 나누는 인사입니다. 은총과 사랑과 친교의 원천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미사에 참여합시다.

입당송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찬미받으소서.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아버지,
진리의 말씀이신 성자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세상에 보내시어
하느님의 놀라우신 신비를 인간에게 밝혀 주셨으니
저희가 참신앙으로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을 알고
오직 한 분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을 흠숭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다. 다른 하느님은 없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4,32-34.39-4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2 “이제,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날들에게 물어보아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물어보아라.
과연 이처럼 큰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이와 같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33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도
너희처럼 살아남은 백성이 있느냐?
34 아니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가 보는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적, 전쟁과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쓴 신이 있느냐?
39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40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3(32),4-5.6과 9.18-19.20과 22(◎ 12ㄴ 참조)
◎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을 여시고, 당신 입김으로 천상 만군 만드셨네. 그분이 말씀하시자 이루어지고, 그분이 명령하시자 생겨났네. ◎
○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

제2독서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8,14-17
형제 여러분,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묵시 1,8 참조
◎ 알렐루야.
○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은 영광받으소서.
◎ 알렐루야.

복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삼위일체이신 주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를 기리는 교회를 굽어살피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를 온 세상에 담대히 선포하게 하소서.

2.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참스승이신 주님, 정치인들에게 통찰의 은총을 주시어,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며, 가난한 이들과 배려가 필요한 이들 그리고 새 세대에게 맞갖은 정책을 마련하고 실행하게 하소서.

3. 청소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진리의 빛이신 주님, 몸과 마음이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돌보아 주시어, 저마다 삶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서 씩씩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소서.

4. 지역 사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지혜이신 주님, 지역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이들을 도와주시어, 제도와 규범이 언제나 사람을 위한 것임을 생각하게 하시고, 주민들을 위하여 현명한 결정들을 내리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 하느님,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드리는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께 저희 자신을 영원한 제물로 바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주님의 축일과 신비 감사송 1 :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신비(삼위일체 대축일)>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주님의 계시로 저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은아드님께도 성령께도 다름이 없나이다.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영원하신 참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그러므로 모든 천사와 대천사와 케루빔과 세라핌도주님을 끊임없이 찬송하며 소리 맞춰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갈라 4,6 참조
너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의 영을 너희 마음에 보내셨다. 그 영이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신다.

영성체 후 묵상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시고, 언제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고 계심을 삶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이란 결국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도록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가는 여정임을 다시 한번 생각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 하느님,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며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저희 몸과 마음을 구원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삼위일체 하느님.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2024년 5월 26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사제는 매일 미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성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강력한 하느님 체험은 모세와 함께한 ‘출애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하느님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을 했어도 뉘우치면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갈 때면 예언자를 보내 주시어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성자이신 하느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기쁜소식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들이 머무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쁜소식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병자들은 치유되었고,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하느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은 성령의 하느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진리의 협조자 성령의 하느님입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이제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것에 맛 들일 수 있는 슬기로움을 주는 은사, 교리의 어려운 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은사, 어떤 일이 옳고 그른 일인지 더욱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은사, 하느님을 열렬히 섬기게 하며, 죄악과 악마를 거슬러 용감히 싸울 수 있는 능력이며 순교까지 하면서 신앙을 증거 할 수 있는 은사,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 될 것을 분별케 하는 은사,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자녀다운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사람을 예수님 안에서 형제자매로 사랑하게 해 주는 은사.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섬기게 하며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하며, 죄를 피하게 하며 영생에 대한 희망을 주는 은사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체험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친교, 나눔, 사랑’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사랑과 은총 그리고 친교로 일체를 이루신다면 본당에서 성직자와 수도자와 신자들도 사랑과 은총 그리고 친교로 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성직자가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어 준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 준 것이다. 모범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수도자가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것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수도자에게서는 ‘청빈, 정결, 순명’의 향기가 넘쳐납니다. 신자들이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면서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자캐오는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었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과 가정은 구원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직자의 겸손, 수도자의 기도, 신자의 회개가 삼위일체를 이루면 본당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넘쳐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삼위일체 대축일: 나해

복음: 마태 28,16-20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합시다!

 

강론하기 참으로 힘든 주일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돌아올 때마다 지난 시절, 생뚱맞고 엉뚱한 이단 교리를 선포한 것이 떠올라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입니다.

하느님께도 크게 송구스럽고, 적절치 않은 예로 인해 고개를 갸웃거리셨을 교우들에게도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둘러싸인 하느님, 오묘하신 하느님을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언어로 설명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대축일이 다가올 때 마다, 제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틈만나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고백하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호경을 통해서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며 성호경을 긋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성삼위로 존재하고 계심을 믿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미사 시작 때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이렇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은연중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관련된 지식에 있어서 둘째 가면 서러워할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 찬가’를 부를 때

아주 겸손한 신앙 고백으로 시작했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로마서 11장 33~34절)

 

결국 하느님은 파악이나 결론을 내릴 대상이 아니라 신비와 신앙의 대상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방식, 접근 방식 역시 더없이 신비스럽고 심오하며 불가사의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양식과는 완전 다른 초월적·신비적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역시 이런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은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훨씬 초월적이고, 훨씬 풍요롭고, 훨씬 조화롭고, 더없이 뜨겁고 극진한 사랑인데,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성삼위께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상호 일치 안에서 통합된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보내시는데,

곧 성삼위의 사랑입니다.

 

우리네 인간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강한 정복 욕구입니다.

적정선에서 물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끝끝내 파헤쳐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 어떤 오지이든 탐험하고 깃발을 꽂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마저도 인간의 머리로 딱 떨어지는 공식이나 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연구의 대상도 아닙니다.

신비 그 자체입니다.

알량한 인간의 머리로 파헤쳐지고 결론이 딱 떨어지는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실체가 명확하게 설명되고 낱낱이 밝혀진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신비하며 불가해한 하느님의 영역은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게 현명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앞에 우리는 더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 자체이신 성삼위 존재 앞에 더 뜨겁게 그분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더 깊이 동료 인간들을 사랑할 때, 삼위일체의 신비는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교리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34항)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인간에게 당신에 관한 가장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인

삼위일체를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3. 이영근 신부 강론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신비입니다.

알아듣기에는 어려워도 참으로 벅찬 사랑의 신비입니다.

너무 깊어 헤아려지지 않아도, 오히려 다 헤아려지지 않기에 더 깊이 매료당하는 신비입니다. 

흔히들 '삼위일체'를 알아듣기 힘든 신비라고들 여깁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신비'의 내용을 알아듣는 데는 한계와 어려움이 있다손 치더라도,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라는 이 사실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그 신학적 의미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선 하느님께서 '삼위로서 일체이신 분'이시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신비입니다.

곧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축복의 신비’요,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가운데 나타났는지를 말해주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곧 이 신비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심과 그 사랑으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축복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참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참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 생명의 진리가 나타나게 하시고, 당신의 숨결인 성령께서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음과 실천으로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살아계시고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지금 바로 이 자리에 현존하신다'는 사실,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함께 한다'는 '함께 친교 안에 머문다'는 의미를 품고 있으며, ‘함께 일하신다(활동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사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있음'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삼위로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 이름마저도 ‘항상 함께 계시는 분’, ‘임마누엘’이시듯이,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참사랑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함께 있음', 그 자체가 이미 사랑입니다.

함께 있는 것, 그것은 유대와 연대의 관계 맺음이요, 관계 맺는 것, 그것은 함께 만나고 사귀고 친교를 나누는 일입니다.

곧 벗이 되는 일이요, 우정을 나누는 일이요,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의 동행자로 삼으시고, 벗이 되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함께 있음’, ‘사랑으로 서로 속해 있음’, ‘사랑으로 서로의 것이 됨’, 이는 참으로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오늘 이처럼 우리가 '함께 있음'도 사랑입니다.

이 '함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은총인지! 참으로 큰 행복인지!

 

그러나 우리는 함께 있지 못하게 될 때라야 이를 더 잘 알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있음'에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함께' 여기에서 만나 ‘한 분이신 주님을 찬미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함께' 있을 뿐 아니라 '안에' 함께 계시며 ‘상호내주’(perichoresis)하시며, 사랑으로 서로 '속해' 계십니다.
서로에게 자신을 바치고 비우시면서, 섞이되 혼동되지 않으시며, ‘하나’를 이루시며, 자신을 통해 자신 안에 계신 타자를 드러내십니다.

 

곧 성부께서는 자신을 말씀으로 내보내시니 성자요, 숨으로 내보내시니 성령이십니다.

성자께서는 성부를 드러내는 성령을 내보내십니다.

성령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성부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구원경륜을 이루십니다.

이로써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 계시는지를 밝혀줍니다.

하느님과 우리는 결코 분리될 수가 없는, 깊이 관계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친교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심을 드러내줍니다.

곧 ‘동행’하시는 하느님임을 말해줍니다.

 

‘동행’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심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사랑의 생명을 꽃피워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을 실현하는 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은 이토록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토록 거룩한 일입니다. 

참으로 축복입니다. 

'함께 있음',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삼위일체시요 사랑이신 하느님!

늘 함께 하시는 당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늘 곁에 머물러, 당신 눈길 속에 저를 담고 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품으시고, 숨(영)과 말씀의 양손으로 쓰담쓰담 어르시고 달래십니다.

오늘 전부를 비우시고 건너오시어 제 안에서 사랑으로 사라지시는 당신은 저의 생명으로 차오르십니다.

그 사랑 안에, 제가 녹고 사라져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하소서.

오, 경탄하오는 사랑이시여!

저를 차지하소서.

저를 비우소서.

오롯한 당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5.25.토요일 성 베다 베네라빌리스 사제 학자(672/673-735) 기념일 

                                                                                                           야고5,13-20 마르10,13-16

                                                         어린이와 같이 되라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

 

오늘 복음의 소제목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구보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이라 생각합니다.

 

어린이는 순수한 인간 원형을 상징합니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나이에 관계 없이 어린이가 살고 있습니다.

어제 저는 두분에게서 이런 어린이를 발견하고 기뻤습니다.

주고 받은 댓글의 일부,소개합니다.

 

“이 거룩한 요셉수도원에 와서

 집을 짓는 일

 미사드리는 은총

 어린이같이 순수하신 수사님들 뵈면

 매일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저에겐 싯귀처럼 예쁜 마음이 반짝였고, 저는 장미꽃 사진과 함께 다음 댓글을 보냈습니다. 

“자매님 글이 시같이 아름답습니다. 축하드리며 장미꽃 사진 선물합니다.”

순수한 마음은 나이에 관계없이 소녀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살아있는 자연의 반응이 신비롭고 고맙습니다.

수도원 뜨락에 벌써 앵두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고 몇 개 따먹던중 이 장면을 포착한 수사님이 사진에 담았고

<앵두와 노수도승> 이란 시도 적어 보내줬고 어린이같은 순수한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노수도승이란 말을 읽으며 노수도승답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도 새로이 했습니다.

 

“오늘은 한 개

 내일은 두 개

 모레는 세 개 먹어야지

 앵두와 함께 익어가는 수도승의 삶”

 

빙그레 미소짓게 하는 어린이같은 마음이 반짝이는 시입니다.

하느님 눈에는 누구나 사랑스런 어린이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13세였던 아이들이 지금은 60세인데 이번에도 수도원을 찾아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줄 때의 모습은 그대로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이었습니다.

 

올해 5월은 피정집 공사라 피정손님들을 받지 못했지만 예전 5월 소규모 인원의 피정때는

꼭 어린이날 노래, 동요를 불렀습니다.

노년에 속한 피정자들이 흥겹게 부를때는 그대로 어린이들같았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동심의 회복을 위해 동요부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날라라 새들아 푸른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벌판을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오늘 복음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수도형제 모두가 흥겹게 부르는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저녁성무일도

세 번째 후렴과 시편 131장 후반부 내용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라. 그렇지 않고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

 

오늘 복음은 한폭의 살아있는 그림같습니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특징도 잘 드러납니다.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청하는 사람들 역시

순수한 아이같은 어른들입니다.

 

쓰다듬어 주는 사랑의 텃치, 스킨쉽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어렸을 때 어머니의 사랑의 스킨쉽이 결핍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공허한 마음에

영혼의 몸살을 앓습니다.

저는 동생이 생기기전 6살까지 어머니 젖을 먹으며 컸습니다. 

 

애정이 넘치고 치유하는 스킨쉽의 텃치는 아이들, 병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안아주라 있는 가슴이요 악수도 하고 등을 두드려 격려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라고 있는

또 만세를 부르라 있는 두 손입니다.

두발에 두손의 직립인간에 주어진 축복의 두 손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반응이 완고하기가 아주 권위적입니다.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은 바로 우리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일수 있습니다.

섬기는 일이 아닌 통제와 조종에 그 권위를 사용합니다.

순간 예수님의 개입이 기민합니다.

오늘 우리의 경각심을, 우리의 동심을 일깨우는 평생 교훈으로 삼아야 할 복음입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 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예수님은

얼마나 멋진 어른인지요.

매주 수요일 삼종기도후 강론전 베드로 광장에 어린이들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행렬하는 도중

아이들을 받아 쓰다듬으며 축복하시는 교황님의 모습도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큰아이 교황님처럼 보였습니다.

 

어린이다운 특징은 무엇입니까?

개방적인 열린 마음, 순수한 의탁, 편견없는 정신, 단순성이요 예수님은 물론 성인들이나

우리 주위에서도 우리는 이런 천진무구한 어른들을 간혹 만나기도 합니다.

칼릴 지브란의 “아이들에 대하여” 라는 잠언도 우리의 무지를 깨우칩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이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는 말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는 말라

 큰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오늘 우리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7-8세기에 걸쳐 살았던 영국 출신의 베네딕도회 수도승인

성 베다 학자의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성인은 7세때 수도원에 보내져서 원장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지도를 받으며 19세에 부제품,

30세에 사제품을 받았고 평생 어린이다운 순수성을 잃지 않고 베네딕도회 본연의 수도승생활에

충실했던 분입니다. 

 

성 베다는 당대 가장 박학한 사람으로 존경받았고, 몇 차례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는

일생동안 늘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노동하며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한 수도승이었으며,

학문적 업적으로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지혜와 학문을 높이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존자(Venerable)”란 칭호를 받은 성인은 뛰어난 학자이면서

지극히 겸손했으며, “영국 역사의 아버지”라고도 불립니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가 교회학자로 선언하였고, 성 보니파시우는 성 베다를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 “우리 스승이신 베다 존자”라 불렀으며, 시성 단테의 신곡 천국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영국인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마지막 임종시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나는 오래 살았고 자비로우신 심판관께서는 내 일생을 당신 섭리로써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다가왔으니 내 육신이 모두 사라져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갈망합니다.

내 영혼은 내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갈망합니다.

손으로 내 머리를 받쳐주시오.

내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도록, 내가 즐겨 기도했던 성당을 향해 기대어 앉고 싶습니다.” 

 

성인은 방바닥에 누워 영광송을 외우기 시작했고, “성령께”하고 말하는 순간 숨을 거두었다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야고보 사도 역시 동심의 성인이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야고보서 마지막으로 사도가 강조하는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역시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밖에 길이 없습니다.

기도가 어린이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니게 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우리가 평생 날마다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어린이와같은 삶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전존재를 “사랑의 텃치”로 치유해 주시고 동심을 회복시켜 주시어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5/26(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되새김 구절

 

1.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은 성령의 하느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진리의 협조자 성령의 하느님입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이제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반영억 신부)

 

2. 우리네 인간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강한 정복 욕구입니다.

적정선에서 물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끝끝내 파헤쳐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 어떤 오지이든 탐험하고 깃발을 꽂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마저도 인간의 머리로 딱 떨어지는 공식이나 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연구의 대상도 아닙니다.

신비 그 자체입니다.

알량한 인간의 머리로 파헤쳐지고 결론이 딱 떨어지는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실체가 명확하게 설명되고 낱낱이 밝혀진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신비하며 불가해한 하느님의 영역은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게 현명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앞에 우리는 더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 자체이신 성삼위 존재 앞에 더 뜨겁게 그분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더 깊이 동료 인간들을 사랑할 때, 삼위일체의 신비는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삼위일체시요 사랑이신 하느님!

늘 함께 하시는 당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늘 곁에 머물러, 당신 눈길 속에 저를 담고 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품으시고, 숨(영)과 말씀의 양손으로 쓰담쓰담 어르시고 달래십니다.

오늘 전부를 비우시고 건너오시어 제 안에서 사랑으로 사라지시는 당신은 저의 생명으로 차오르십니다.

그 사랑 안에, 제가 녹고 사라져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하소서.

오, 경탄하오는 사랑이시여!

저를 차지하소서.

저를 비우소서.

오롯한 당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 제1독서의 야고보 사도 역시 동심의 성인이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야고보서 마지막으로 사도가 강조하는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역시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밖에 길이 없습니다.

기도가 어린이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니게 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이수철 신부)

 

 

5/26(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519(149)일 기도

 

복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오늘의 말·샘 기도>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삼위일체시요 사랑이신 하느님!

늘 함께 하시는 당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늘 곁에 머물러, 당신 눈길 속에 저를 담고 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품으시고, 숨(영)과 말씀의 양손으로 쓰담쓰담 어르시고 달래십니다.

오늘 전부를 비우시고 건너오시어 제 안에서 사랑으로 사라지시는 당신은 저의 생명으로 차오르십니다.

그 사랑 안에, 제가 녹고 사라져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하소서.

오, 경탄하오는 사랑이시여!

저를 차지하소서.

저를 비우소서.

오롯한 당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5월26일(일) 10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