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2월 22일 토요일[(백)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대영광송>
본기도
베드로 사도의 신앙 고백을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셨으니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교회가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5,1-4
사랑하는 여러분,
1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원로들에게 같은 원로로서,
또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며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2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3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4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교회가 바치는 기도와 제물을 받아들이시어
목자인 베드로 사도의 인도로
저희가 신앙을 온전히 보존하고 영원한 상속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르셨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복된 베드로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셨으니
이 구원의 잔치가 저희에게 일치와 평화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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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아침 산책길에 가끔 코요테와 같은 동물을 만납니다. 보통은 서로 갈 길을 가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저를 보더니 멈추어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저도 순간 당황해서 멈추었습니다. 옆을 보니 나뭇가지가 있어서 손에 잡았습니다. 그러자 코요테는 가던 길을 갔고, 저도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저의 길을 갔습니다.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를 향해 다가오는 유혹의 코요테가 많았습니다. 시기, 질투, 욕심, 게으름, 분노, 이기심의 코요테입니다. 저는 아무런 준비 없이 그런 유혹의 코요테를 만났고, 쉽게 넘어졌습니다. 유혹의 코요테를 몰아낼 영적인 나뭇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나뭇가지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나눔이 있습니다. 기도, 말씀, 나눔의 나뭇가지가 있다면 아무리 강력한 유혹의 코요테가 저에게 다가와도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유혹의 코요테가 우리를 보고 무서워서 자기 갈 길을 가도록 영적인 나뭇가지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푸른 녹지와 사막이 있습니다. 녹지는 좋고, 사막은 나쁜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사막은 필요하고도, 소중한 존재라고 합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 덕분에 지구의 대기는 흐를 수 있다고 합니다. 사막의 먼지는 바람을 타고 멀리 아마존까지 도달한다고 합니다. 사막의 먼지에 있는 미네랄 성분이 아마존 나무들을 울창하게 한다고 합니다. 사막에는 많은 지하자원이 있어서 우리의 삶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지구에 사막이 없고 모두 울창한 녹지가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지구에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지금 대기 중의 산소는 20%인데 만약 사막이 모두 녹지가 되면 산소의 농도가 40%까지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에는 엄청난 재앙이 초래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구에 그런 환경이 한 번 있었는데 그때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석탄, 석유는 모두 그때 화재로 인해서 생겼다고 합니다. 좋은지, 나쁜지 결정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자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생전에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자리를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동생 안드레아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을 만난 뒤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교회는 사도들의 으뜸이라고 생각하였고, 기꺼이 베드로에게 사도좌의 권위를 내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죽기까지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3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 사도를 계승하는 교황은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지금 이곳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나누는 이곳이 이미 천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신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조건으로 용서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주장하고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권위는 유리와 같아서 쉽게 깨지고,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아낌없이 내어주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권위는 불의와 폭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으며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기 마련입니다.
나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나의 권위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권위가 아닙니다. 나의 체면과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권위일 뿐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참된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 나눔과 희생으로 사라지지 않는 우리들의 자리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그 자리가 푸른 녹지라면 열매를 맺으면 좋습니다. 그 자리가 뜨거운 사막이라면 정화와 단련의 기회로 만들면 좋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복음: 마태 16,13-19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반석!
오늘도 예수님의 복음 선포 여정은 계속됩니다.
벳사이다를 떠나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생각만 해도 마음 든든한 수제자,
언제나 듬직한 반석 같고 큰 바위 같은 제자 베드로를 축복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7-18)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막중한 임무, 엄청난 역할을 수여하십니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정말이지 엄청난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은, 세상 전부를 쥐고 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는 존재 자체로 우리 후배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선물로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손에 쥔 분으로, 그 어떤 시련과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눈 한번 까딱하지 않았던 분,
넓직한 반석같이 든든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에게도 한때 치명적인 과오, 치욕적인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 만남과 더불어 참 제자가 되기 전, 그는 여러 측면에서 미성숙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베도로 사도의 성격은 과격했고 불같았으며, 마치 럭비공 같아 어디로 튈줄 몰랐습니다.
때로 조용히 있었으면 50점이라도 딸텐데, 괜히 먼저 나서다가 스승님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수난의 시기, 그는 스승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며 배반하는, 결정적 과오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재 양성의 귀재이신 예수님의 탁월하고 예술적이며 인내로운 단련에 힘입어,
베드로 사도는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 제자로 거듭납니다.
작은 바람에도 쉼없이 흔들리던 나약한 갈대 같았던 베드로는 그 어떤 시련과 고초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큰 바위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베드로 사도는 매일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수제자 배반 사건’을 떠올리며
크게 울었답니다.
낮 동안에도 틈만 나면 송구한 마음에 울고 다녔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눈자위 주변은 늘 붉게 물들어있었으며, 짓물러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반석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왕이면 작은 모난 돌맹이가 아니라, 크고 든든한 반석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고 흡족해하실 반석, 세파에 지친 사람들이 편히 앉아 쉬고 갈 수 있는
그런 반석이 되기 위해, 뾰쪽하고 모난 부분들을 갈고 또 갈아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베드로 1서 5,1-4 마태오 16,13-19
“너는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너도 할 수 있느냐?”와 같다
1968년 10월, 유명한 재클린 케네디와 그리스의 억만장자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가
‘혼전계약’을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부부의 침실은 각자 독립적이고, 한쪽의 허가 없이는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다.
1년에 3개월은 동거 생활을 하되, 9개월은 제각기 따로 생활할 수 있다.”
이혼에 관한 내용도 있습니다.
“남편이 이혼을 요구할 경우 1년에 10만 달러로 쳐서 결혼기간에 상당한 위자료를
지불하고 만 5년 이상일 경우 종신 연금 1백만 달러를 준다.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을 경우에도 일시불로 2천만 달러와
그 이후 10년간 18만 달러의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이 외에도 이 혼인계약서에는 의상비, 미용비, 용돈 등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 부부 각자가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세요?”라고 하면,
“당신은 돈입니다.”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혼인은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인데 그것보다는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도 시시각각이었습니다.
가장 나쁘게 본 이들은 예수님을 마귀 우두머리라고 보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의인으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이 왜 중요할까요?
결국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체성혈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룹니다.
마치 혼인하는 것처럼 그분이 나의 머리가 되고 나는 그분의 몸이 됩니다.
그러니 그분을 볼 수 있는 눈이 내가 누구와 하나가 되었는지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예언자셨다고 믿는다면 그 성체를 영한 사람은 예언자처럼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오늘 베드로 사도처럼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한다면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처럼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라 믿으면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라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니
자신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함을 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전 세계에서 이혼률이 가장 낮은 나라는 브라질이라고 합니다.
브라질에는 ‘결혼자격시험’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결혼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정부기구의 전문교육기관에서 하루 6~7시간씩 10일 동안 합숙하며
결혼생활과 부부관계, 일반위생과 자녀교육을 등등을 배우고
마지막 날에 시험을 봐서 통과하면 ‘결혼자격증명서’를 준다고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철저히 점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도 그리스도와 혼인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이 성체를 영할 때입니다.
성체자격시험을 한 번 쳐보시겠습니까? 먼저 “성체는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성체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신 대로
“그러면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라고 물어야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요, 하느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면 성체를 영한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때 “저는 그리스도와 한 몸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당신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야합니다.
만약 “예!”하면 성체를 영할 자격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은 했지만
자신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말했다면 그 믿음에 일관성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을 하느님이라 믿으면 나도 하느님이 하는 모든 일은 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합니다. 이 믿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오늘 베드로 사도가 받은
하늘 나라의 열쇠입니다.
이 열쇠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은 우리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21.연중 제6주간 금요일 창세11.1-9 마르8,34-9,1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주님 중심의 참된 제자의 삶”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 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시편33,12-13)
예나 이제나 인간의 관심사는 동일합니다.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참된 삶을 추구합니다.
부단히 희망을 길을 찾습니다.
희망을, 길을 잃었을 때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여기서 저절로 나오는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지금도 여기 수도원 피정집 마다 제가 쓴 3권의 책들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10년이 훨씬 지난 이미 품절된지 오래된 책들입니다.
“둥근 마음, 둥근 삶”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책 제목들이 삶의 길을, 삶을 방향을 제시합니다.
또 한권의 책을 낸다면 책 제목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로 하고 싶습니다.
이 세권의 책들중 우선 찾아 보는 것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 합니다.
마음 깊이에서는 누구나 잘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물음은 더 구체화되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바뀝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제자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인류 모두가 따라야 할 길이신 예수님이심이 드러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외없이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참 삶의 길이자 참된 제자의 길입니다.
여기가 루카는 “날마다” 말마디를 추가합니다.
참 삶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구원의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새삼 하느님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이자 화신인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가 됨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예수님 대신에 누구를, 무엇을 이 삶의 중심 자리에 놓을 수 있겠는지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을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느냐?”
참으로 유일무이한 목숨을 구하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따르는 길뿐임이 강조됩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히 고백하며 당신을 따르라 하시며 용기백배 힘을 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절개없고 죄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나 이제나 절개없고 죄많은 세대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혼탁한 와중에서 참된 삶의 길은,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 까지, 주님을 고백하고 증언하면서 초지일관, 시종여일 주님을 따르는,
홀로와 더불어의 평생 여정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중심한 삶에 주님을 날로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할수록 자발적 기쁨으로 자기를 버리고 제 운명의,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제 십자가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아모로 파티, 운명애가 됩니다.
자기 버림, 제 십자가를 짐, 모두가 주님 사랑의 표현이요 주님 사랑의 힘이 샘솟는 힘의 원천이, 원동력이 되어
항구히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바벨탑”이야기는 상징하는 바 참 깊습니다.
참된 제자의 삶에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바벨탑을 세우는 사람들! 삶의 중심인 하느님이 없습니다.
이들을 깊이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뭔지 모를 두려움과 외로움이, 불안이, 깊은 내적 공허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헛된 바벨탑 쌓기에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지요?
지위, 명예, 권력, 재물등 탐욕이 끝없이 추구하는바 내외적 바벨탑 쌓기요, 탐욕과 교만의 근원에는 두려움이,
두려움의 악마가 똬리를 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곳곳에 치솟는 고층 건물 아파트들을 볼 때마다 또 하나의 바벨탑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도 듭니다.
참으로 주님을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로 확실히 자리 매김할 때 마음의 헛된
내외적 바벨탑 쌓기는 끝날 것입니다.
그러니 거창한 바벨탑은 두려움의 표현이자 내적공허의 표현인 것입니다.
말그대로 참으로 위태한 사상누각에 하느님 중심 없는 획일화된 집단 삶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생명의 길이 아닌 죽음의 길을 가는 이 집단을 살리기 위한 비상조치로
이들을 뿔뿔히 흩으십니다.
새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셔야 함을 배웁니다.
인간의 원초적 내적 두려움과 외로움, 공허감을 해소시켜 주실 유일한 분은 하느님이신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생명이자 사랑이자 빛이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새롭게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거짓 안전의 내외적 바벨탑 쌓기를 중단시키고, 두려움과 외로움,
불안과 내적공허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다시 한 번 되뇌어 보는 제 좌우명 기도 고백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2/22(토) [(백)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베드로 사도는 참된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2.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베드로 사도는 매일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수제자 배반 사건’을 떠올리며
크게 울었답니다. 낮 동안에도 틈만 나면 송구한 마음에 울고 다녔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눈자위 주변은 늘 붉게 물들어있었으며, 짓물러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반석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왕이면 작은 모난 돌맹이가 아니라, 크고 든든한 반석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고 흡족해하실 반석, 세파에 지친 사람들이 편히 앉아 쉬고 갈 수 있는
그런 반석이 되기 위해, 뾰쪽하고 모난 부분들을 갈고 또 갈아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그분을 하느님이라 믿으면 나도 하느님이 하는 모든 일은 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합니다. 이 믿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오늘 베드로 사도가 받은
하늘 나라의 열쇠입니다.
이 열쇠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은 우리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전삼용 신부)
4. 오늘 창세기 “바벨탑”이야기는 상징하는 바 참 깊습니다.
지위, 명예, 권력, 재물등 탐욕이 끝없이 추구하는바 내외적 바벨탑 쌓기요, 탐욕과 교만의 근원에는 두려움이,
두려움의 악마가 똬리를 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로 확실히 자리 매김할 때 마음의 헛된
내외적 바벨탑 쌓기는 끝날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2/22(토) [(백)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오늘의 기도
복음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참된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작금의 사회현상을 정화시키는...
참된 권위의 그리스도인을 보게 하소서.
참된 권위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2월22일(토) 4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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