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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2월 21일 금요일[(녹) 연중 제6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성 베드로 다미아니 주교 학자

입당송

시편 31(30),3-4 참조
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우리가 내려가서 사람의 말을 뒤섞어 놓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1,1-9
1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시고 6 말씀하셨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8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3(32),10-11.12-13.14-15(◎ 12ㄴ 참조)
◎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 주님은 민족들의 의지를 꺾으시고, 백성들의 계획을 흩으신다. 주님의 뜻은 영원히 이어지고, 그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 ◎
○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 ◎
○ 당신 머무시는 곳에서, 땅에 사는 모든 이를 지켜보신다. 그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빚으시고, 그들의 행위를 속속들이 헤아리신다. ◎

복음 환호송

요한 15,15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 알렐루야.

복음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34-9.1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하고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78(77),29-30 참조
그들은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또는>
요한 3,16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진화의 메커니즘은 돌연변이에 있다고 합니다. 돌연변이는 환경의 변화와 위기의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도 합니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가 팬데믹 위기를 가져왔을 때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면역체계를 가졌다면 인류는 더 큰 재앙에 빠졌을 겁니다. 그러나 인류는 저마다 다른 면역체계가 있어서 코로나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면서 더 많은 지지를 받은 정당이 국가를 운영하는 제도입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갈등과 분열이 생기지만 그보다 더 좋은 제도를 찾지 못하였기에 대부분의 나라는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파시즘, 봉건제도, 제국주의가 하나로 힘을 모아서 좋을 것 같지만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인류는 그런 제도로 인해서 많은 전쟁과 폭력을 경험했습니다. 아직도 형식은 왕을 인정하는 국가가 있지만 정치의 형태는 대부분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벨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단순히 하느님께 반역한 인간이 벌을 받은 사건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의 자리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게 합니다. 최근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창조 질서를 스스로 결정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DNA 돌연변이를 연구하고 유전자 편집을 시도하는 이 시대는, 어쩌면 또 다른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해 왔습니다. DNA 돌연변이는 인간의 생존과 적응을 가능하게 하였고, 여러 환경 속에서 다양한 인류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다양성은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볼 때, 이는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하나의 틀에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각자가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지혜를 맹신할 때 발생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유전자를 조작하고 인간을 통일된 존재로 만들려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바벨탑을 쌓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을 보면, 인간들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며 "하늘에 닿는 탑을 쌓자"라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 없이도 스스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교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인간의 통일과 협력을 방해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나의 방식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참된 조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다양한 민족과 문화, 언어가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분열"이라고 하지만,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는 "조화로운 다양성"입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하고, 하나의 문화만을 강요하며, 한 가지 방식으로만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바벨탑의 혼란은 신약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치유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 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성령께서 임하자, 사도들은 여러 언어로 복음을 전했고,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그 말씀을 이해하였습니다. 바벨탑에서는 인간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려 했고, 그로 인해 하느님께서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하지만 성령 강림 사건에서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성령 안에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참된 뜻입니다. 인간이 강제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각자의 고유한 모습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없이 자신을 통일하려 하면, 그것은 오히려 파괴와 혼란을 초래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일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서가는 사람을 끌어 내리는 탑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밀쳐내는 탑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동료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가지 않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는 샘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만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마르코 8,34―9.1

 

십자가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꼭 끌어안으십시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 복음 8장 34절)는

예수님의 강력한 권고 말씀이 오늘따라 유난히 제 가슴을 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뒤를 따르는 사람’ 즉 당신의 제자(弟子)가 되기 위한다면,

세 가지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십니다.

 

① 자신을 버리고. 40년 가까이 버리고 또 버린다고 발버둥 쳐왔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이 산더미 같습니다.

징글징글한 악습, 수시로 솟구치는 분노,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무력감과 우울감,

끝까지 남아 괴롭히는 깊은 상처,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자만심...

 

버리는 일, 말은 쉽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버리고 또 버리고, 나 자신조차 버리고,

버렸다는 생각조차 버린 어느 날, 그토록 염원했던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리라 확신합니다.

그때 우리는 보다 기꺼이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토록 염원했던 주님의 현존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② 제 십자가를 지고. 오늘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어떤 것들인가? 생각해봅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지니게 되는 노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참 큰 십자가입니다.

내가 점점 작아지고 약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현실 또한 만만치 않은 십자가입니다.

매일 백번 천번도 더 탈출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고달픈 삶의 현실 역시 큰 십자가입니다.

매일 마주해야만 하는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그는 십자가 중의 왕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들을 외면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 십자가들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보다는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 십자가들을 짊어지라 하십니다.

주어진 십자가들을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라 하십니다. 꼭 끌어안고 가라 하십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십자가는 점차 괴로움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성장과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선물 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③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매일 새롭게 떠난다는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한 고을에 오래 머무시지 않고 지속적으로 옮겨 다니셨습니다.

지리적, 공간적인 이동도 이동이지만, 영적인 이동 역시 거듭되었습니다.

나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또다시 삶으로. 높음에서 낮음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 길지도 않은 이 한 세상, 어찌 그리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인지 모릅니다.

다들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자면 대하소설 10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후회스런 순간들, 되돌이키고 싶지 않은 비참했던 순간들, 죽고 싶었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 깊은 상처, 쥐구멍으로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부끄러움,

큼지막한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싶은 흑역사들에 연연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매일 되살아나는 아픈 기억들, 부단히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야겠습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어제의 나를 딛고 기쁘게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자신을 버리는 일’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마르코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본다면, 어제 복음까지는 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오늘 복음에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 곧 제자 되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르 8,34)

이 말씀은 “나를 따르려면”에서,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지’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는 깨달음, 곧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이 참된 것인지,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진정으로 원하는지를 깨닫는 일을 바탕으로 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려고 하는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두 가지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우선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는 집과 가족 곧 소유와 사람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지금 ‘자신으로부터 이미 떠났는지’, 적어도 지금 ‘자신을 버리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을 비웠는지보다 무엇을 채웠는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릇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곧 보석을 채우고 있으면 보석그릇이 되는 것이요, 쓰레기를 채우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듯이, 자신을 버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나는 진정 예수님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비울 수가 없으며, 이미 자신을 비우신 그분에 의해서 비워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의탁하여 그 길을 갑니다. 

만약 자신이 스스로를 비운다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신을 실현하는 꼴이 되겠지만, 그분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는 신앙의 행위로 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신앙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짊어질 때 비로소 구원의 십자가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마르 8,3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그것을 통해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20.연중 제6주간 목요일                                                                창세9,1-13 마르8,27-33

 

                                            영원히 빛나는 계약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

                                                     “주님의 무지개, 주님의 십자가”

 

어제 강론 주제는 ‘개안의 여정’이었고, 오늘 복음은 흡사 예수님이 제자들의 영적 시력을

테스트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제자들 역시 예외 없이 눈멀고 귀먹었음에 개탄한 예수님이셨는데 오늘은 친히 제자들의

영적 시력을 점검하십니다.

동시에 우리의 영적 시력도 점검 받는 느낌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은 누구인가? 사람들의 동향을 묻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을 들은후 제자들에게 직설적으로 묻습니다.

도피할 수 없는 물음이자 우리 모두를 향한 평생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대표하여 정확히 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영적 시력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음을 봅니다.

베드로와 더불어 제자들 역시 순조로운 개안의 여정중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아 이들의 수준이 미흡하기에 침묵을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당신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후 성령의 깨우침이 있어야 비로소 주님 파스카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저 같으면 지체없이 고백했을 것입니다.

 

“주 그리스도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늘 고백해도 늘 새롭고 좋은 고백으로 얼마나 많이 강론에 인용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꽃같은 하루 꽃같이, 주님 파스카의 꽃같이”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절정은 다음 장면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으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심으로 진짜 제자들의 영적 시력을 확인하십니다.

그렇게 멋진 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며 나섭니다. 

 

절대로 우리가 기대하고 꿈꿔온 메시아는 그런 고난과 죽음의 메시아는 아니라는 것이며

결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배척과 고난, 죽음은 물론 부활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체없는 질책이 베드로에게 쏟아집니다.

베드로의 환상을 깨는 충격요법적 표현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졸지에 수제자 베드로가 사탄이 되는 순간입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믿는 이들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베드로는 물론 십자가를 부인하는 어느 제자든 사탄곁에 있는, 사탄이라는

것입니다(Any disciple, even Peter, who denis the cross stands on the side of Satan). 

 

베드로에겐 평생 잊지 못할 충격적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의 영적 시력은 전화위복! 이런 체험의 결정적 계기로 더 한층 좋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시에 세 차례나 주님을 모른다 부인했던 베드로 수제자였음을 잊어선 안되겠습니다. 

 

참으로 영적 시력의 절정은 주님의 십자가를,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주님의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받아들이고 살 때 이뤄집니다.

영원히 빛나는 새계약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인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성전 지붕 하늘 높이 한눈에 보이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신약의 주님의 십자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오늘 창세기에서 누구나에게 볼 수 있는 비온 후 하늘 한복판의

주님의 무지개입니다.

영원히 빛나는 계약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인 주님의 십자가요, 이어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향한

주 하느님의 창세기 말씀입니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로 드러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과 땅 위에 사는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겠다.”

 

스스로 당신을 견제할 제어 장치가 될, 하늘의 무지개를 영원히 빛나는 계약의 표징으로,

구원의 표징으로 삼겠다는 약속이요 또한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자비의 표현입니다.

비온후 하늘 한복판에 “주님의 십자가를 안고 있는 하늘길 같은 주님의 무지개”를 상상하면

얼마나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겠는지요! 

 

혹시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 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 마다

하늘의 무지개를 연상하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엄 워드워즈의 <무지개>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도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나이가 들어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으로 거둬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경건함으로 매어지고자”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자연 또한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경입니다.

자연의 경건함도 좋지만 대신 “하느님 경외함으로 매어지고자”로 대체해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무지개뿐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마다 감동으로 설레는 마음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빛나는 표징이 바로 파스카 예수님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무지개만으로는 미흡합니다.

무지개를 완전 보완하여 무지개와 더불어 영원히 빛나는 새 계약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이

주님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옛 현자의 조언도 주님과 나를 알아가는 평생공부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목적없이 공부하면 지식을 많이 쌓는다 해도 신기루처럼 사라질 뿐이다.”<다산>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펼칠 수 없고, 뜻이 없으면 학문을 성취할 수 없다.”<무후전서>

 

공부중의 평생공부가, 학문중의 평생 학문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공부요 학문입니다.

영원히 빛나는 새 계약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인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 공부요 학문입니다.

평생공부, 평생교육에 매일 미사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해 주시며

영적 시력도 날로 좋아지게 하십니다. 아멘.


2/21(금) [(녹)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바벨탑 사건을 보면, 인간들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며 "하늘에 닿는 탑을 쌓자"라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 없이도 스스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교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인간의 통일과 협력을 방해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나의 방식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참된 조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다양한 민족과 문화, 언어가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분열"이라고 하지만,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는 "조화로운 다양성"입니다.(조재형 신부)

 

2.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매일 새롭게 떠난다는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한 고을에 오래 머무시지 않고 지속적으로 옮겨 다니셨습니다.

지리적, 공간적인 이동도 이동이지만, 영적인 이동 역시 거듭되었습니다.

나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또다시 삶으로. 높음에서 낮음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 길지도 않은 이 한 세상, 어찌 그리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인지 모릅니다.

다들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자면 대하소설 10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후회스런 순간들, 되돌이키고 싶지 않은 비참했던 순간들, 죽고 싶었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 깊은 상처, 쥐구멍으로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부끄러움,

큼지막한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싶은 흑역사들에 연연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매일 되살아나는 아픈 기억들, 부단히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야겠습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어제의 나를 딛고 기쁘게 일어서야 하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마르 8,3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그것을 통해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졸지에 수제자 베드로가 사탄이 되는 순간입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믿는 이들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베드로는 물론 십자가를 부인하는 어느 제자든 사탄곁에 있는, 사탄이라는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2/21(금) [(녹)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마르 8,3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그것을 통해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2월21일(금) 7시20분 -